 
이재명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9일, 관세 협상을 체결했다. 이재명정부가 냉철하게 협상에 임하면서 이뤄낸 결과로 긍정적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특히 자동차·반도체 부문에서 한국 기업의 리스크가 해소된 점은 더 높이 평가할 만하다.
한·미는 상호 관세와 자동차 및 자동차 부품 품목 관세를 각각 15%로 낮추기로 최종 합의했다. 품목 관세 중 의약품 목재 등은 최혜국 대우를 약속받고, 반도체의 경우 대만 등 경쟁국 대비 불리하지 않은 수준으로 적용받기로 하는 등 선방했다.
하지만 우려도 만만치 않다는 평가다. 한국 정부가 미국에 연간 200억달러의 현금 투자를 하기로 하면서 “외환시장이 출렁일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 개발을 승인해주면서 한반도 평화에 부정적 영향이 생길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는 상황이다.
그렇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실용주의 철학이 분명하게 나타났다. 이정부의 실용 외교 행보를 짚어보자.
이 대통령이 대선이 공식 시작되기 전인 지난 1월23일, 더불어민주당 대표 자격으로 국회에서 한 신년 기자회견 발언을 종합하면 그는 “이념과 진영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 “검든 희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 아니냐?”고 발언했다. 그는 “탈이념, 탈진영의 현실적 실용주의가 위기 극복과 성장 발전의 동력”이라고도 했다.
그가 언급한 ‘흑묘백묘론’은 중국의 개혁개방 설계사 덩샤오핑이 1979년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뒤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흑묘백묘론은 후에 실용주의적 개혁개방정책으로 이어져 중국 경제의 폭발적 성장을 만들어냈다. 이 대통령은 대선 기간에도 그의 실용주의적 외교관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지난 5월에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트럼프 대통령의 가랑이 밑으로라도 기어갈 수 있다. 다만 내가 그렇게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3월에는 “왜 중국에 집적거리나. 그냥 ‘셰셰’ 대만에도 ‘셰셰’하면 돼”라는 발언으로 비판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발언들은 유연한 실용 철학의 연장선에서 나온, 같은 맥락의 말들이었다. 정치적 구호보다는 재정 건전성, 서민 체감 효과, 실익 중심 정책을 강조한 것이다. 이런 정책 방향이 외교에서도 실용의 철학으로 이어졌다.
이 대통령은 지난 6월4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외교 분야와 관련해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는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통해 세계 경제 안보 환경 대전환의 위기를 국익 극대화의 기회로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면서 “굳건한 한미동맹을 토대로 한·미·일 협력을 다지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국익과 실용의 관점에서 접근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다.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공식 천명한 것은, 전임이었던 윤석열정부가 내세운 가치 외교에 대한 반작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윤정부는 출범 초기부터 ‘자유, 인권, 법치 등 보편적 가치에 기초한 외교’를 핵심 기조로 제시했다. 그리고 ‘자유, 평화, 번영에 이바지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가 외교부의 구호였다.
문제는 미국 등 서방 세계가 주도하던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진작부터 흔들리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는 민주주의, 인권, 법치, 시장경제, 자유무역 등과 같은 자유주의 가치를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시스템이다. 다보스 어젠다로 불리던 이런 국제질서는 이미 10여년 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현상은 미국 제일주의(MAGA)를 내세운 트럼프 행정부의 출범으로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그런 국제질서의 근본적 변화 속에서 윤정부는 불행하게도 미국 일국에 편중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북한 핵에 대한 억지력 확보가 가장 중요한 어젠다였다. 그러나 미국에 올인한 외교정책은 기회비용이 클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한국의 중국, 러시아, 북한과의 관계는 최저점을 지나가고 있었다. 새로 출범한 이정부가 ‘국익 중심의 실용 외교’를 천명하고 나온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다. 이정부의 실용주의 외교는 이 대통령의 일본 방문(8월23~24일), 미국 방문(8월24~26일) 을 통해 구체적 모습들이 드러났다.
우선 이 대통령은 그간의 관례를 깨고 미국보다 일본을 먼저 방문했다. 그는 일본 방문 전 보수 성향 매체 <요미우리신문>과 인터뷰를 가졌는데 매체 선정도 실용주의적 접근이라는 분석이 있다. 한국 내 진보 대통령 시절에는 상대적으로 진보성향이 강하고 한국에도 친숙한 아사히신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 대통령은 일본 내에서 한일 관계 개선에 비판적인 보수층과 자민당 지지층이 주 독자층인 <요미우리신문>을 택해 비판적인 일본 내 보수 여론에 대한 직접 설득을 시도했다.
일본, 미국 방문 통해 나타난 실용 외교 실천의 인터뷰 내용도 실용적인 색채가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과거 한·일간 위안부 합의, 징용 배상 문제에 대해 “국가로서 약속이므로 뒤집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이를 유지하겠고 분명히 밝혔다. 평소 과거사 문제에 대해 강경 입장을 견지해 왔던 역대 진보적 정권의 처지를 생각하면 이념과 진영에 얽매이지 않겠다는 그의 실용 외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대통령의 워싱턴 방문과 관련한 의전 절차에도 이런 실용주의 기조가 드러났다. 이 대통령은 ‘공식 실무 방문’ 형식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홀대 논란이 있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간 협의 등 실질에 집중한 이 대통령 외교의 대범성이 오히려 돋보였다.
이 대통령은 연설에서 동맹의 현대화와 상호성을 언급하며 한미동맹을 ‘서로 주고받는 구조로 손질하겠다’고 했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도 동맹의 상호성 미래 지향성에 합의했다는 점을 공개했는데 이는 동맹의 역할, 비용, 보상을 현실적으로 재설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정부의 실용 외교의 앞날은 격랑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 9월3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중국 전승절 80주년 행사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천안문 망루에 반미, 반트럼프로 상징되는 중국의 시진핑 주석, 러시아의 푸틴, 북한의 김정일이 나란히 중앙에 자리 잡았다.
미국 본토를 대륙간탄도탄으로 공격할 능력을 갖춘 핵보유국 세 나라 정상의 모습이었다.
여기에서 앞으로 한국 외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 즉 이재명의 실용 외교가 이 험난한 국제질서 속에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하는 과제가 나온다.
이제 한국 외교는 어느 일방에 집중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념이 아니라 국익이라는 핵심 목표를 앞에 두고 유연한 실행 전략을 가지고 대응해나갈 수밖에 없다. 한·미·일 협력 이외에 북·중·러와의 관계 문제가 여기서 나온다. 인도 등 과의 관계 강화도 소홀히 할 수 없다.
때로는 어느 쪽이라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이상 한국은 변방의 힘없는 국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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