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래의 머니톡스> 스테이블 코인과 미국의 자기모순

  • 조용래 작가
2025.08.04 13:26:06 호수 1543호

1990년, 미국은 저금리 기반 성장의 정점에 섰다. 중국이 외상으로 공급하는 소비재는 미국을 소비 낙원으로 이끌었다. 이름 모를 마을 주유소 화장실에도 비누와 휴지가 쌓여있고 누구나 질 좋은 고기와 맥주를 넉넉히 즐겼다. 깨끗한 거리, 여유로운 사람들의 표정, 두터운 중산층의 타운하우스와 웨건형 차량은 성공한 ‘아메리칸드림’을 입증했다.



냉전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의 경쟁국은 없었다. 경제, 군사, 문화 최강 미국의 유일 패권 체제를 의심하게 되는 날이 올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2025년의 미국은 낯설다 못해 충격적이다. 국가 부채는 40조달러에 육박하고, 가계 부채는 20조달러를 넘본다. 과거의 풍요는 온데간데없고, 깨진 도로와 마약에 찌든 거리, 실업과 불안이 일상이다. 스스로 만든 금융 질서에 갇힌 미국이 출구로 찾은 게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다. 겉으론 블록체인 기반의 금융 혁신이지만 속살은 미국 국채를 담보한 전통 금융의 디지털식 연장책이다. 신박한 아이디어처럼 보이지만 미국 채권이 담보로서의 가치를 얼마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빼고 보더라도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이자조차 못 내는 한계기업이 마구 찍어 내는 채권을 사 줄 나라는 없다. 채권을 계속 발행해야 하는 건 마치 움직이고 있는 자전거를 버티는 바퀴와 비슷하다. 멈추면 죽는다. 잘살기 위해서 빚을 내고 죽지 않기 위해서 더 큰 빚을 내야 하는 역설을 자초한 게 미국 스스로란 얘기다. 갚을 길 없는 빚을 더 큰 빚으로 덮으려는 미국은 확실히 정상 경로를 이탈했고 기축통화 달러는 신뢰를 잃고 있다.

‘마린 보고서(Marin Report)’는 미국의 쌍둥이 적자, 재정과 무역이 미국채에 대한 외국인의 신뢰를 갉아먹는다고 경고한다. 감세와 지출 확대는 국채 발행을 부르고, 관세는 인플레이션을 유도하며 금리를 인상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미국은 금리를 낮추고 싶어도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오히려 올려야 하는 역설에 빠졌다.

이 논란의 시작점은 국제 금융의 ‘트릴레마(Trilemma)’다. 미국은 자본 이동의 자유, 통화정책의 자율성, 그리고 환율 안정이라는 세 가지 목표를 동시에 이루려 했다. 그러나 이는 이론적으로, 역사적으로 불가능한 조합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관세 장벽과 금리 인하를 동시에 추진하며 이 불가능한 조합에 도전했다. 그 결과 공급망 붕괴, 인플레이션, 외국 자본 이탈이라는 역풍은 필연이 됐다. 달러를 계속 공급해야 하는 기축통화국의 운명까지 포함해서 본다면 더 비관적이다.

부채가 성장을 보장하는 시대는 이제 끝이 보인다. 급격한 양적 완화 시기엔 100원의 부채가 1000원 또는 2000원의 경제 효과를 내기도 했다. 오래 이어진 부채 경제 시대를 지나면서 “돈이 돈을 번다” “부는 자산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란 신념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지금은 급격히 늘어난 부채가 성장을 멈추게 하고, 금융 신뢰를 증발시킨다. 스테이블 코인의 등장은 ‘기축통화 권력’이 국가에서 기술로, 제도에서 알고리즘으로 옮겨가는 ‘화폐 전환기’의 징후다. 이것이 새로운 시대의 시작이라기보다는 기득권이 꾀하는 마지막 ‘승부차기’일지도 모른다. 디지털로 포장된 미국 국채 시스템은 실질적인 대안이 아닌 구조적 위기의 시작일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로마 제국 몰락은 금화의 화폐 희석(Debasement)으로 시작됐다. 미국은 물타기조차 하지 않는다. 기축통화 달러에서 금을 빼내고 석유로 대체한 뒤엔 급기야 디지털 암호로 바꾸려 한다. 달러는 여전히 세계의 중심 통화이지만 그 기반이 흔들리는 이유다. BRICS 국가들의 결제 네트워크 실험, 디지털 위안화의 확장, 탈달러화를 향한 중동과 동남아시아의 움직임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란 얘기다. 미국이 이 흐름을 막기 위해 꺼낸 카드가 바로 스테이블 코인이라는 점에서, 이 화폐 전환 실험 성공은 장담하기 어렵다.

유동성을 통제할 수 없는 달러의 그림자, 기축통화의 디지털 도플갱어, 달러화가 디지털 파생을 시작한다. 파생으로 이어가는 새로운 화폐 생태계는 금융 시장의 변동성 확대를 의미한다. 미국 국채의 담보 가치가 흔들리면 세계 자본 금융 시장은 시스템 차원에서 충격을 받게 된다. ‘안전자산의 정의’ 자체가 무너진 세계의 앞날은 어떻게 될까?

“바보야 문제는 변동성이야(Stupid, It’s the Volatility)” 거대한 ‘화폐 전환기’, 미국의 ‘디지털 국채’ 시장화 시도를 보며 떠올린 문장이다. 장기적으로 보면 인류 문명사는 앞으로도 수백 년간 더 쓰여지겠지만, 단기적으로 보면 인간은 그 전에 모두 죽는다. 우리의 자산이 보관되고 거래되는 시장에 극심한 변화가 온다면 언젠가 새로운 화폐 질서가 등장할지라도 그 전에 우리 삶의 균형은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돈이라 믿고 있는가?” 그리고 그 돈은, 과연 내일도 신뢰받을 수 있을까? 그 답은 각자, 신중히 판단해 볼 일이다.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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