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요시사 취재2팀] 김준혁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의 “바이든이 날리면” 발언으로 외교부와 MBC 간 정정보도 소송 항소심이 진행 중인 가운데, 외교부가 고개를 숙였다. 지난 윤석열정부에서 MBC를 상대로 소송에 나섰던 외교부가 정권교체 이후 돌연 입장을 바꾼 셈이다.
지난 21일, 조현 외교부 장관은 외교부 청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우리가 MBC를 제소한 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며 “외교부를 대표해 MBC에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조 장관은 “외교 사안이 국내 정치에 이용됐고 실용과 국익이 주도해야 할 외교 영역에 이분법적 접근도 많았다”며 “외국에 대한 부적절한 언급도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현재 항소심 중인 일명 “바이든이 날리면” 소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앞서 지난 2022년 9월, MBC는 윤 전 대통령이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을 만난 직후 발언한 내용을 “(미국)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라는 자막과 함께 보도했다.
당시 외교부(장관 조태열)는 “(윤 전 대통령은)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이라고 말했다”면서 MBC가 한미동맹을 위협했다는 이유로 같은 해 12월 정정보도 소송을 제기했다.
조 장관은 “대전환을 겪고 있는 국제적 질서 속에서 우리 외교 안보 환경이 더욱 엉뚱해지는 시기에 외교부 장관직을 맡게 돼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며 “우리는 국익을 중심에 두고 합리성 중도와 효율을 바탕으로 전략적이고 실용적인 외교를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정부에 대해선 “(한국에서)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주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직 대통령이 민주주의의 전복을 시도하기까지 했다”며 “불가피하게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던 직원들에게는 미안하고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외교적 뒷수습을 하느라 애썼다”고 유감을 표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조직 문화와 업무 관행을 확실히 바꿔 나가겠다”며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교훈을 찾되 앞으로 지난 정부 탓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정가에선 MBC 보도가 실제로 한미 외교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만큼, 외교부의 공식적인 문제 제기가 정권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달라지는 건 법원의 객관적인 검증 결과를 무시한 처사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실제로 1심 재판부는 객관적인 검증을 거쳐 개별적 연관성 쟁점, 보도의 진실성 쟁점 모두 외교부의 손을 들어줬다.
앞서 지난해 1월, 1심 재판부는 “피고(MBC)는 ‘윤 전 대통령이 부적절한 발언을 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외교부가 대통령의 외교 활동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해 한미정상회담이 불발됐고, 그 결과 발언 논란까지 초래했다는 취지로 보도했다”고 판단했다.
사건 당시엔 대통령실이 아닌 외교부가 직접 나선 점에 대해 ‘대통령 지시에 의한 대리 소송이 아니냐’는 논란도 제기됐으나 재판부는 발언 직전 진행된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가 외교부의 소관 업무라는 점에서 원고 자격을 인정했다.
논란이 불거지자 미국 백악관에선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여전히 탄탄하다”며 논란을 잠재우려 했다. 다만 외신들은 “대한민국 대통령이 미국 의회를 ‘멍청이들(idiots)’이라고 언급했다”는 보도가 나가는 등, 외교적인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게 정가의 대체적 해석이다.
보도의 진실성 측면에서도 재판부는 외부 전문가가 ‘판독 불가’라고 평가한 음성 감정 결과 및 전후 맥락을 근거로 MBC의 보도 내용이 허위라고 규정하며 외교부의 손을 들었다.
전후 맥락에선 사건 직전 진행된 회의에서 윤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은 앞으로 3년 동안 총 1억달러를 기여할 것”이라는 발언이 근거로 채택됐다.
재판부는 “만약 야당이 1억달러 기여에 대한 동의를 해주지 않을 경우, 국제사회에서 대한민국의 신뢰가 하락할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우려할 수 있다. 따라서 윤 전 대통령이 위와 같은 취지에서 대한민국 국회를 상대로 이 사건 발언을 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판시했다.
음성 감정에 대해선 “기술적 분석을 통해서도 특정 단어가 언급됐는지 여부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는 경우, 언론사로선 합리적인 근거 없이 단정적인 보도를 해서는 안 된다”며 “MBC는 공란 처리 등 시청자가 발언 내용을 각자 판단하도록 할 수 있었지만 진위 여부가 불분명한 ‘바이든은’ 부분을 자막에 추가함으로써 시청자에게 정보를 전달하는데 왜곡이 생기게 했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1심에서 증명 과정을 통해 MBC 측의 잘못도 분명히 드러났음에도, 조 장관이 ‘외교부의 잘못’이라고 단정지어버린 공식 사과는, 객관적인 사실을 외면하고 지난 정부의 과실만을 부각해 상대적 우월함을 드러내려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다만 또 다른 일각에선 조 장관의 공식 사과에 대해 필요한 조치였다는 해석도 제기된다. 정부 부처에서 소송을 수단으로 언론을 탄압한 점 등 외교부 측의 과실을 먼저 인정하는 과정에서 언론계와의 불신이 해소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언론 단체들은 22일 공동성명을 내고 “소송을 직접 제기한 외교부가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조치가 부당했음을 인정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들은 “동시에 우리는 MBC에 집중된 탄압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음을 지적한다”며 “이 사건의 핵심은 단지 비속어 논란이 아니라, 그 이후 벌어진 ‘진실 은폐’의 흐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특히 김은혜 당시 홍보수석이 ‘날리면’ 해명을 내놓기까지 16시간 동안 대통령실 내부에서 어떤 논의와 결정이 오갔는지, 그 진상이 여전히 불분명하다”며 “MBC를 포함한 사실상 전 언론의 보도가 잘못됐다고 주장한 근거는 무엇인지, 대통령실이 실시했다고 밝힌 음성 분석 결과는 왜 공개되지 않았는지도 이제는 분명히 밝혀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한편 이날 예정된 항소심 조정에서 양측은 입장 차를 좁힐 것으로 전망되며, 소송을 취하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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