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기지 않으면 잊힌다.” 요즘 온라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진실이다. 사람들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의 ‘밈(meme)’을 찾고, 나도 모르게 웃는다. 어제의 분노는 웃음으로 희석되고, 오늘의 고통은 유머로 휘발된다. 웃음이 무기가 된 사회에서 공감이 아닌 알고리즘이 웃음을 지배한다.
밈은 이제 감정을 저장하는 창고가 아니라, 감정을 소비하는 시장이 됐고 공감과 연대가 갈수록 희미해진다. 밈의 진화는 생존전략이 됐지만, 그 방향은 감정 노동의 끝단을 향한다.
밈은 정보가 아니라 상품이다. 플랫폼은 ‘웃긴 것’을 우선 배치하고, 사람들이 얼마나 “공유하고 퍼가는가”에 따라 그 가치를 매긴다.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블로그까지. 감정은 알고리즘에 의해 정렬되고, 웃긴다는 반응은 곧 클릭과 조회 수, 광고 수익으로 연결된다.
이 세계에서 웃음은 자본이다. 감정은 수익을 위한 소재고, 공감은 데이터에 불과하다. 풍자나 해학은 시간이 걸리고 맥락을 필요로 하지만, 밈은 단숨에 웃기고 바로 소멸된다. 해학은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는 공동체의 자산이었지만, 웃음을 팔고 사는 시대에 밈은 자본이 되고 시장에 진열돼있다.
웃음이 냉소와 조롱으로 전환되면 공동체는 해체된다.
해학 없는 풍자, 소통 없는 유머의 시대다. 과거의 해학은 누군가를 비웃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공통의 고통을 함께 풀어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밈은 이제 “누군가를 놀려야 웃긴” 구조로 굳어졌다. 누가 더 자극적으로, 더 비꼬고, 더 가볍게 표현하는가가 경쟁의 기준이 됐다.
풍자는 공감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밈은 ‘내가 얼마나 덜 공감하는가’를 과시하는 메커니즘이다. 이는 조롱으로, 그리고 냉소로 이어진다. 냉소가 지배하는 사회는 더 이상 연결되지 않는다. 감정은 공유되지만, 고통은 외면된다. 느리지만 깊은 풍자의 시대가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2025년, 이재명 대통령의 당선은 사회적 변화를 갈망하는 시민들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었다고 현실이 쉽게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비정상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정치도, 경제도 웃음으로 덮이는 현실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을까.
오히려 심화되는 소비침체, 역성장, 청년 실업, 고물가와 고금리 상황은 국민들의 감정 에너지를 갉아먹고 있다. 지금의 대중문화는 진지한 분석보다 ‘웃긴 정치 짤’을 원한다. 고통을 직면하기보다 풍자 밈을 소비하며 넘긴다. 우리는 권력을 비웃지만, 비판은 점점 사라진다. 정치적 감시 대신 감정적 해소가 지배한다. 결국 공론장은 ‘분노’가 아닌 ‘웃김’의 경쟁장이 됐다.
밈은 시대의 증상이자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우울한 뉴스, 무기력한 사회, 무너진 기대 속에서 웃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들이 만든 언어다. 하지만 그 언어가 어느 순간부터 체제에 흡수되고, 상품으로 포장되고, 감정 노동을 유도하는 구조가 됐다면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웃는 이유는, 더 이상 즐겁기 때문이 아니다. 웃음은 방어기제다. 그것은 울지 않기 위한 선택이며,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상황에 맞서는 마지막 수단이다. 밈은 이 시대의 자조적 언어고, 동시에 이 세계가 얼마나 감정과 공감을 상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다.
밈은 이 시대의 언어지만 시대의 절망일지도 모른다. 가장 많이 절망하는 세대가 청년이다. 돈이 돈을 벌고 집으로 돈 버는 시대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박탈감 때문에 밈에 진심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단지 웃으며 살아남으려 할 뿐이다. 하지만 그렇게 웃고 있는 사이, 우리는 감정의 깊이, 관계의 밀도, 공동체의 온기를 잃어가고 있다.
우리가 지금 잃고 있는 것이 우리의 미래가 아닐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자극적이고 빠른 밈이 아니라, 더 천천히, 더 깊게 웃을 수 있는 해학이다. 밈이 아닌 목소리로 말하고, 조롱이 아닌 연대로 감정을 풀어내야 할 때다. 새 대통령에게라면 따뜻한 웃음을, 어쩌면 공감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조용래는?]
▲전 홍콩 CFSG 파생상품 운용역
▲<또 하나의 가족>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