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연재> 선감도 (55)지하 감옥 어둠서 내적 변화

  • 김영권 작가
2025.06.09 05:00:00 호수 1535호

“정치가 자기들만의 장난은 아니어야지.” 김영권의 <선감도>를 꿰뚫는 말이다. 박정희 군사정권 시절 청춘을 빼앗긴 한 노인을 다뤘다. 군사정권에서 사회의 독초와 잡초를 뽑아낸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한 노역에 관한 이야기다. 작가는 청춘을 뺏겨 늙지 못하는 ‘청춘노인’의 모습을 그려냈다.



“그럼 반지 찾으러 천천히 서로 나오세요.”

경찰서로 오는 도중 경찰이 용운의 뒤통수를 툭 치면서 말했다.

“꼬마 너 운 좋았다. 만약 금반지 주인이 도난당했다고 한마디만 했더라면 넌 감옥 가는 거야, 임마.”

경찰의 복수

용운은 눈을 똑바로 뜨고 말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아무리 힘겨워도 남의 것을 훔치는 짓은 하지 말자고 삶의 좌우명으로 여기며 사는데 도둑이라니!


이제 점점 넝마주이에 요령도 생겨서 앞날에 대한 소박한 희망도 지닐 수가 있었는데…… 모든 게 서글퍼졌다.

경찰서에 도착해서 피의자 조서를 받았다. 하지만 용운의 대답에 구체성이 별로 없을 뿐더러 그런 사소한 일로 소년원으로 보내기는 아무래도 어려웠던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그 경찰은 허탕친 노릇이 좀 분했던지 ‘부랑아 일제 단속기간’이란 점을 내세워 용운을 선감도 감화원으로 보내 버렸던 것이다.

지하감방의 어둠 속에서 용운은 원통한 마음을 못 이긴 나머지 거푸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퍼뜩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나는 혹시 전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착한 자인가? 사회가 아무리 잘못됐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나는 뭔가를 위반하지 않았을까? 내가 사소하게 생각한 것도 남에겐 귀중한, 큰 일이었을 수도 있다……. 차라리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겠다. 지렁이를 밟아 죽인 죄…… 나뭇가지를 꺾은 죄…… 바람이 불 때 침을 뱉은 죄…… 내가 모르지만 아마 내가 지은 죄가 있을 거야. 죄가 있기에 여기서 이런 고생을 겪고 있지 않을까?…… 또한 아버지의 죄도 영광도 자식인 내게 지워진 게 아닐까?’

그는 표정을 잔뜩 찡그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그러더니 또다시 깊은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머릿속을 메아리처럼 맴도는 시구였다.

만일 사람들이 제정신을 잃고 네 탓이라 비난해도 냉정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의심해도 자신을 믿고 그 의심마저 감싸 안을 수 있다면,
거짓에 속더라도 미움을 받더라도 되갚지 않는다면,
악한 자들이 왜곡해도 있는 그대로의 너를 받아들인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네 것이 되고 그때 너는 비로소 하나의 어른이 되리라…….

용운은 뒤척이다가 저도 모르는 새 잠이 들고 말았다.

그는 꿈을 꾸었다. 어슴푸레한 새벽 들판에 박꽃 누나가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용운이 큰 소리로 부르자 천천히 뒤돌아보았는데, 누나의 흰 얼굴엔 눈이 없었다.

용운의 가슴속엔 한없는 비애감이 일었다. 큰 소리로 부르며 뛰어갔지만 누나는 기다려 주지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문득 그 뒷모습에서 정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건 엄마의 목소리처럼도 느껴졌다. 용운이 아무리 소리치며 달려가도 아득히 멀어져 갈 뿐 뒤돌아보지 않았다.

누나가 걷는 속도보다 용운의 뜀박질이 훨씬 빠를 텐데도 이상스럽게 간격은 조금도 좁혀질 줄 몰랐다.

앞에 낭떠러지가 불쑥 나타난 건 그때였다.

용운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다. 걸어보려 했지만 웬일인지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데 괴이하게도 박꽃 누나는 돌멩이를 하나씩 주워 주머니 속에 가득 채웠다.

그러더니 낭떠러지 앞의 허공을 그대로 걸어 물속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누나는 물거품만 남긴 채 다시는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돌멩이의 무게 때문이었으리라. 용운은 그 자리에 선 채 울고 또 울었다.


꿈의 장면이 바뀌더니 황량한 사막 위로 라디오가 불쑥 튀어나왔다. 라디오는 피에로의 얼굴로 변하더니 괴이한 목청을 우렁우렁 울렸다.

원통한 마음 못 이긴 한숨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

“19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한 장발장을 아느냐? 그는 어린 조카들의 배고픔을 달래려다가 빵 한 조각을 훔쳐 20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억울한 처벌을 받은 존재가 아님을 속으로 인정했다.

도형장의 몽둥이질 아래서, 쇠사슬에 묶인 채, 지하감방에서, 도형수의 초라한 침대 위에서, 그는 웅크린 채 깊이 생각했다.

치사한 짓을 저질렀음을 자신에게 고백했다. 배고파 훔친 빵……

만약 그가 간절히 부탁했다면 그 빵을 거절당했을까? 곧 죽을 만큼 배가 고프다는 건 변명일 뿐이다. 차라리 괴로운 노동을 택해야 했다.

비참하고 불쌍한 사람일지언정 사회도덕의 멱살을 마구 움켜쥐면서 도둑질로써 고통을 벗어나려 한 건 미친 짓이 아니었을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그는 또 하늘을 향해 물었다.

‘저를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동댕이친 그 사건에서 과연 저만 잘못을 범했을까요? 우선 일자리가 없었고, 가끔 변변찮은 일을 해도 제 입 하나만 해결하면 되는 게 아니었지요. 참새새끼 같은 조카들이 있었죠.

그리고 제가 빵을 훔쳤긴 해도,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쳤는데, 형벌이 너무 무거워 억울했습니다.

그 억움함을 못 견뎌 탈옥을 하긴 했지만요. 하지만 빵 하나 때문에 20년은 너무 무자비하잖아요.

우리 사회가 의식주를 분배함에 공정하지 않고, 가진 자는 더 많이 차지하고 가난한 자는 더욱 빈궁해져 결국 자살에 내몰려야 하는 악폐는 갈아엎어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죠?’

그는 세상의 불의와 부정에 분노했다. 어떤 분노는 광적이고 부조리할 수 있다. 그리하여 누구든 미친 듯 화를 터트리기도 한다.

그런데 분개한다는 건 내심 어딘가에 옳은 측면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장발장은 스스로 분개하고 있음을 느꼈다. 사회는 자신에게 피해를 주기만 하고 뺏아가기만 했다.

그는 인간사회로부터 한 마디의 다정한 말도 듣지 못했고, 결국엔 처절한 생존경쟁에서 패배했다고 절감했다.

그는 자신에게 불행을 안겨 준 사회를 단죄하고 증오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핍박당하고 고통당한 영혼은 시계추처럼 선과 악 쪽으로 번갈아 흔들렸다.

영혼 한쪽으로는 빛이 들어갔고 다른 한쪽으로는 어둠이 지배해 갔다.

그는 원래 천성이 악한 사람은 아니었다. 도형장에 처음 들어갔을 때만 해도 그는 선량한 마음을 속에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온갖 괴로움을 당하면서 서서히 냉혹해져 갔던 것이다.

추악해진 인간

과연 인간은 선에서 악 쪽으로 극단적인 변모를 할 수 있는가? 착한 영혼이 주변 환경에 의해 악인으로 변형되기도 할까? 인간은 몹쓸 운명의 장난으로 인하여 추악해져야만 하는가?

지독한 압력에 눌리고 찌그러져 기형으로 변하고 결국 불구의 짐승이 되어야만 하는가?

인간 영혼 속에, 이 세상의 악에 부패하지 않고 영원한 빛처럼 반짝이며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 악을 향해 잔잔이 미소지을 수 있는 신성한 요소는 없는 것일까?”


<다음 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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