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바꿀 수 있는 ‘까칠한’ 유권자의 힘

2024.02.02 09:19:26 호수 0호

둘로 쫙 쪼개져 ‘죽기 살기’

선거와 정치는 ‘총성 없는 전쟁’이라는 비유가 있지만 총칼을 들지 않는다고 걱정이 없을까? 작금의 한국 정치는 정확하게 둘로 나누어져 죽기 살기로 정쟁을 이어가는 형국이다. 두 진영으로 나뉜 정당과 정치인은 ‘잘하기 경쟁’이 아닌, 상대가 못 하도록 하는 싸움을 하고 있다. 목표는 오로지 상대를 쓰러뜨리는 것이다. 모든 일의 시작은 상대편 헐뜯기고 끝도 상대편 망가뜨리기다.



악마화
흑백논리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라는 여의도식 정치 문법이 존재할 정도로, 증오와 배제의 정치가 일상화돼있다. 경쟁 상대를 악마화하고 흑백논리로 자신은 천사로 분장한다. 정치란 갈등을 해결해야 하는데 거꾸로 정치가 갈등과 분열을 생산한다.

서로 다른 이해를 대변하면서 그것을 조정해 공동선을 형성하는 게 정치의 본령인데 여의도에서는 그런 기본조차 사라진 지 오래다.

민주주의, 의회주의가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군부 권위주의를 타파하고 한국 민주주의는 억압의 이완(Decompression), 자유화(Liberalization), 민주화(Democratization)를 거쳐 민주주의의 공고화(Consolidation)로 접어들었다고 하는데 지금 한국 정치는 깊은 늪 속에 빠진 형국이다.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어 극한 대결을 펼치는 이 상황은 우리나라 대의민주주의의 중대한 결손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가 정기적으로 치러지고 있고 이를 통해 대의기구가 구성되고 있으나 현재 우리의 민주적 대의 체제는 명백한 결함을 갖고 있다.


지금 우리 정치는 다양한 국민의 이익과 요구, 가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 두 진영을 대표하는 거대 양당에선 기회만 있으면 ‘협력과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한다. 지난 대통령선거서도 이구동성으로 국민통합을 외쳤다.

두 개의 진영, 대의민주주의의 결손
상대편 헐뜯기에 증오·배제 일상화

그러나 현실은 매번 배제, 증오, 대결이었다. 협력, 상생, 통합의 가치는 연목구어(‘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한다’는 뜻으로, 도저히 안 되는 일을 고집스럽게 하려는 것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다. 이 같은 현상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각 정치 세력, 혹은 정치인의 교양과 자질의 문제라고 지적하는 분석도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진짜 원인은 행위자의 품격과 교양의 문제기보다는 본질적으로는 역사 구조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상생과 협력의 정치가 잘 안 되는 이유를 개별 정치인의 인성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문제 해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구조가 변하지 않는 한 누구를 그 자리에 앉히더라도 정치인의 말과 행동은 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정치의 역사적 기원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에 친일 부역과 반일 독립, 해방 후 분단과 전쟁 시기에 용공과 반공, 지역주의 분열의 시기에 영·호남의 대결은 한결같은 흑백 갈등을 낳은 역사 구조적 요인이었다.

여기에 결정적 요인이 하나 더 있었다. 소선거구제라는 구조적 요인이다. 단순히 다수의 승자가 결과를 독식하는 소선거구 선거제도는 앞서 지적한 역사 구조적 요인을 증폭시키면서 두 개의 진영 정치를 강화하고 있다.

끝나지 않는
영호남 대결

이런 두 개의 진영 정치는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큰 걸림돌이다. 이 장애물을 넘지 못하면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후퇴할 수도 있다. 구조적으로 두 개의 진영 정치에서는 정당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정당은 남을 헐뜯기에 몰두할 뿐 국민의 생활에는 오불관언(어떤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다는 고사성어)이다. 이런 상황서 정책이 개발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내부 민주주의도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두 개의 진영 정치는 기후위기, 불평등, 세대균열, 저출생, 성평등 등 우리가 지금 직면하고 있는 대전환 시대의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데 취약하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면 진영을 넘어 ‘숙의’와 ‘사려’가 필요하지만 다양하고 복잡한 구조로 돼있는 과제는 두 개의 진영 정치가 개입하는 순간, 진영 사이의 노선투쟁으로 변하게 된다. 이렇듯 두 개의 진영 정치가 우리의 미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다행스러운 것은 언제부턴가 국민의 가치와 선호가 다양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에는 두 개의 진영에 따라 국민도 두 개로 묶여있었는데 점차 다양성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각 진영을 지지하는 국민은 자신이 속한 진영의 모든 걸 일관성 있게 지지하고, 충성했다.

민주주의
큰 걸림돌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각 진영의 모두를 지지하지 않고, 좋은 점만 골라 지지 의사를 표명하는 국민이 늘어났다.

예를 들면 안보정책은 A당의 정책을 지지하고 경제정책은 B당의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투표도 어떤 때는 A당을 찍었다가 다음번에는 B당을 찍는 사람들이 제법 있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스윙보터’라고도 한다.

이들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세상의 시사평론가들과 전략가들에게는 기회주의자로 여겨지는 분위기였다. 정치에 대한 소신도 없고 정보도 없으며 판단 능력도 없이 선동에 따라 이리저리 지지를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며 정당에 동원되는 존재라고 평가됐다.

그러나 지금은 이들에 관한 평가가 바뀌었다. 기회주의자가 아니라 ‘까다로운’ 유권자다. 이들은 정치에 분명한 소신이 있고 정보도 많으며 나름 분석과 판단의 능력이 있어 자기 주도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정치도 정당도 이들의 지지를 받으려면 유권자들을 몰아가는 선동이 아니라 사안별로 차근차근 설득하고 진영논리에 갇히지 않는 설명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민주화 이후 한 세대가 지나면서 탈냉전, 탈물질주의, 다원주의적 경향이 정치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분법 시대 이제 끝내야”
국민들의 가치·선호 다양화


이렇듯 국민의 가치와 선호는 다양화하고 있다. 두 개의 진영이 담아낼 수 없는 변화하는 국민의 생각을 확인해 주고 있다. 진보-보수 이분법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진영 정치를 이끄는 거대 양당도 이 같은 변화에 부응해 다양한 국민의 가치와 선호, 요구를 담아내겠다는 각오를 밝힌 지는 오래됐다.

정당들은 지난 대통령선거 때도 진영을 넘어, 혐오와 배제, 증오와 대결 정치를 넘어서겠다는 약속을 수도 없이 했다. 또 매번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하겠다고 했다. 대통령선거 막판에 ‘윤석열-안철수 합의’와 ‘이재명-김동연 합의’ 성명서에는 진영을 넘어서는 상생, 협력의 정치가 핵심에 놓였었다.

그러나 전부 공수표가 돼버렸고, 선거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작금의 한국 정치는 더욱 노골적인 진영 대결로 이어지고 있다. 상대를 저주하는 각 진영의 말과 행동은 더 거칠어지고 더 독해지고 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두 진영이 해결할 의사도, 능력조차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기댈 곳은 두 가지다. 하나는 제도의 힘으로 다양성, 비례성, 대표성이 실현될 수 있는 선거제도를 통해 진영 정치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지금 선거제도의 불투명한 방향을 뛰어넘는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가 작동하면 진영을 넘어 다양한 국민의 가치, 선호, 요구를 담아내는 정치가 가능할 것이다.

항상 말로만
상생과 협력

나머지 하나는 깨어있는 시민의 행동이다.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는 선거제도를 지키는 일도 깨어있는 시민의 몫이고, 혐오와 배제의 정치를 넘어 상생과 협력의 정치를 실현하는 궁극적 힘도 깨어있는 시민의 몫이다. 특히 다가오는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깨어있는 시민의 힘을 펼치고 확인하는 대국민적 축제다. 저주와 음해, 그리고 폭력까지 난무하는 이 황폐한 정치의 장을 바꾸고 가꿀 힘은 오롯이 시민의 신중한 선택에 있다.

김명삼 대기자
<hntn11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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