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인 하나로’ 전세 사기범 된 사연

2023.11.13 13:07:24 호수 1453호

대포폰·대포차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김민주 기자 = 결국 돈 때문이다.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4000만원을 주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믿어 버렸다. 그 당시 학비와 보증금이 필요해 아르바이트하면서 부족한 돈을 채우고 있었다. 4000만원만 있으면 졸업할 때까지 학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A씨는 전세 사기 가담자가 됐다.



지난 6월8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범정부 전세 사기 특별단속서 확인된 피해자가 총 2996명, 피해 금액은 4599억원에 달했다고 밝혔다. 경찰은 지난해 7월25일부터 지난 5월28일까지 10개월간 전세 사기 특별단속을 벌였다. 전세 사기 피해는 사회 초년생이라고 할 수 있는 20·30대 청년 서민층에 집중된 것으로 파악됐다.

제대하고…

30대가 1065명(35.6%)으로 가장 많았으며 20대가 563명(18.8%)으로 뒤를 이었다. 전세 사기 피해자 10명 중 5명 이상이 20?30대 청년이었던 셈이다. 피해 주택 유형별로는 다세대주택이 1715명(57.2%)으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고 오피스텔 784명(26.2%), 아파트 444명(14.8%), 단독주택 53명(1.8%) 순이었다.

피해 금액은 1억원 이상 2억원 미만이 1008명(33.7%)이었고 5000만원 이상 1억원 미만도 999명(33.3%)에 달했다. 이어 2억~3억원 422명(14.1%), 5000만원 이하 395명(13.2%), 3억원 이상 172명(5.7%)이었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는 특별단속서 총 2895명을 검거하고 이 가운데 288명을 구속했다고 밝혔다. 앞서 1월24일까지 6개월간 실시된 1차 특별단속에선 1941명을 검거해 168명을 구속한 바 있다.


1차 단속 때와 마찬가지로 2차 단속에서는 불법 중개·감정 행위자들이 대거 검거됐다. 대부분 공인중개사나 부동산 감정사였다. 1차 특별단속에서는 불법 중개 혐의로 250명이 적발됐고 2차 단속에서는 같은 혐의로 236명, 불법 감정 혐의로 45명이 검거됐다.

모두 합하면 전체 검거자의 18%인 총 531명이다. 이들은 임대인이 보증금을 돌려줄 수 없다는 사정을 알고도 중개했거나 전세 사기 대상 부동산 감정평가액을 고의로 부풀린 혐의를 받는다. 이번 전세 사기 검거엔 주로 조직폭력 범죄를 처분할 때 쓰이는 ‘범죄집단조직’ 혐의가 적용됐다.

그만큼 전세 사기 범죄가 개인적 사기 범죄의 차원에 그치지 않고 조직적으로 기획되고 피해가 광범위하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믿고 맡겨라’ 4000만원 투자
알고 보니 전세 사기에 사용

경찰은 주택 1만300여채를 보유한 ‘무자본 갭투자’ 10개 조직과 허위 계약서로 전세자금 대출금 총 788억원을 가로챈 ‘전세자금 대출사기’ 21개 조직 전원을 검거했다. 특히 적발된 31개 조직 중 6개 조직에 최초로 형법상 범죄집단조직죄를 적용했다.

인천서 임차인 533명을 대상으로 총 430억원의 전세보증금 사기를 치다 검거된 건축주와 공인중개사 등 51명에게 범죄집단조직 혐의를 적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범죄집단조직 혐의가 적용되면 단순 가담자에게도 전세 사기 주범과 같은 처벌이 이뤄진다.

문제는 전세 사기 가담자로 체포돼 교도소에 있지만, 가해자에게 사기를 당한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교도소에 있는 A씨의 경우가 그렇다.

A씨는 24세로 지난해 봄에 전역했다. 당장 급한 것이 복학해야 하는 대학교 학비와 보증금이었다다. 집은 경남 창원이고 대학교는 서울이었던 A씨는 복학 후 기숙사에 들어가도 생활비 등이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가정형편상 부모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바랄 수 없었다. A씨가 군대에 있을 때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큰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병간호를 하면서 짧은 시간 아르바이트만 할 수 있었다. 복학해도 아르바이트나 과외를 해서 집에 돈을 보태줘야 했다.

그렇다고 휴학을 하자니 1년만 학교를 더 다니면 졸업이었다.


사회에 나오고 바로 시작한 것은 택배 아르바이트였다. 바쁘게 일하던 사이에 학교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연락해온 선배가 반가워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그는 서울서 살 집 보증금과 학비를 벌고 있다고 했다.

주범에 당한 가담자도
범죄집단조직죄 처벌

학교 선배는 “4000만원을 바로 줄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 네가 지금 집안사정이 힘드니 소개해주겠다. 서울로 올라와라. 이 돈을 받고 공부해서 취직 준비하는 게 이득”이라고 조언했다. 단, 본인이 직접 도와줄 수 있는 일은 아니라며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A씨는 바로 선배와 약속을 잡았는데, 소개받은 B씨가 서울역까지 왔다.

B씨는 “A씨가 서류에 사인만 하면 4000만원을 바로 준다.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건 하나도 없다. 투자하는 데 필요한 서류인데, 직원으로 등록됐다는 서류가 필요한 것”이라고 설득했다. A씨는 이 말을 믿었다. 당장 아르바이트만 하지 않으면 취직 준비에 매진할 수 있다는 생각에 바로 서류에 사인했다.

사인을 하자 B씨는 A씨에게 ‘서류를 직접 은행에 제출해달라’며 A씨 통장에 바로 4000만원을 입금해줬다. A씨는 4000만원을 받고 은행에 서류를 제출하고 밥을 먹은 뒤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A씨는 걱정 없이 취업 준비를 할 생각에 마음이 편했다. 그리고 사건은 보름 뒤에 바로 터졌다.

경찰이 A씨를 “전세 사기 가담자”라고 지목한 것이다. 알고 봤더니 A씨가 사인한 서류는 은행 대출 서류로, B씨는 A씨 이름으로 1억원을 대출한 뒤 그 돈으로 빌라를 구매했고 그 빌라는 깡통 빌라로 곧바로 전세 사기가 터진 것이다.

A씨는 경찰에 출석해 “서류에 사인하면 돈을 준다고 해서 한 것”이라고 해명하면서 B씨의 핸드폰 번호를 경찰에 넘겼지만 대포폰이었다. CCTV를 확인해 B씨가 타고 온 차량 번호를 확인했지만, 이 역시 대포차였다. 급한 마음에 선배에게 연락했지만, 선배는 서류에 사인하면 4000만원을 준다고 들어서 소개했을 뿐 B씨와 연관이 없었다.


“나도 피해자”

현재 A씨는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A씨 부모는 “집안형편이 안 좋아서 아들이 판단을 잘못했다. 다른 사람들이라도 이런 식으로 전세 사기 가담자가 될 수 있는 것을 알리고 싶다. 아들은 엄연히 사기를 당한 것”이라며 “지금도 대출받은 1억원은 아들 이름으로 이자가 나오고 있다. 사기당했다는 자료가 하나도 남지 않아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alswn@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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