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참사’를 말하다…법치의학자 윤창륙 조선대 명예교수

2022.12.19 10:40:44 호수 1406호

“망자를 가족의 품으로”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택시기사는 몇 번이나 주소가 맞는지 물었다. 광주에서 20년 넘게 택시 운전을 했지만 이 길은 처음이라고 했다. ‘차를 돌릴 수 있을까’ 걱정이 나올 때쯤 3층집이 보였다. 벨을 누르자 개 짖는 소리가 온 산을 울렸다. 추사재, 생각을 따라가는 집에 도착했다. 



“무등이 앉아, 손. 그다음에 간식을 줘야 돼요.” 추사재를 찾은 취재진은 나란히 서서 ‘무등이 아빠’의 지시에 따랐다. 온 집안이 떠나가라 짖던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의 무등이는 한 사람, 한 사람과 나름의 의식을 치른 후 얌전해졌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탁탁’ 바닥에 꼬리치는 소리만 가끔 날뿐 조용히 기다렸다. 

책과 술

1.5층 높이의 서재는 2만5000권 분량의 책으로 가득했다. 3층집 곳곳 어딜 가도 책이 놓여있었다. 책뿐이랴. 추사재에는 술도 그득했다. 지난 15년 동안 윤창륙 조선대학교 치과대학 법의치과학교실 명예교수가 마개를 딴 와인만 4500여병에 이른다. 단순히 계산해도 1년에 300여병 수준이다. 

지난 8월5일 작열하는 태양 아래 책 향기와 술 향기가 공존하는 곳, 추사재에서 윤 교수를 만났다. 윤 교수는 “추사재는 생각을 따라가는 집, 지나온 생을 반추해 미래를 지향하는 집”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책상을 가득 채우고 있는 책 중 이기백 작가의 <근대한국사논선>을 꺼내 들며 “가장 많이 읽은 책”이라고 소개했다. 

1989년 조선대 치과대에 부임한 윤 교수는 지난해 2월 은퇴했다. 전공은 법의치과학으로 법의학의 한 분야다. 일반적으로 법의학자가 죽음의 원인, 죽음의 발생 기전 등을 살핀다면 법치의학자는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 찾아낸다. 사건·사고 현장에서 발견된 사체나 그 사체로부터 분리된 조각이 누구 것인지를 찾아내는 ‘개인 식별’ 작업이다.


현재 활동 중인 국내 법치의학자는 윤 교수를 비롯해 7명에 불과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과 부산대, 가톨릭대 등에서 근무한다. 윤 교수는 이 일을 40년 가까이 하고 있지만 처음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치대 공부를 ‘너무 하기 싫어’ 도망 다니던 학생이었다고 고백했다. 본인하고 전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윤 교수 인생의 수레바퀴가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가기 시작한 건 본과 3학년 때 김종열 연세대 교수의 법의학 강의를 듣고 나서부터였다. 윤 교수는 ‘모골이 송연해졌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후 그는 ‘사부’ 김 교수를 찾아가 법의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소위 말하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일어났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전국 7명뿐인 법치의학자
사체 신원 찾는 ‘개인 식별’

“제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 딱 두 분입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와 김종열 사부님. 한 분은 개인적인 삶에 영향을 줬고 한 분은 내 전공에 영향을 주셨습니다. 젊었을 때뿐만 아니라 은퇴한 이후에도 계속 저한테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싫어하면서도 좋아하고, 미워하면서도 존경하는 그런 복합적인 감정을 갖고 있죠.”

법치의학자로서 윤 교수의 삶은 ‘참사’와 닿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3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형 참사가 발생한 곳으로 향하면서 전 세계를 누볐다. KAL기 폭파사건, 중국 민항기 추락사건,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성수대교 붕괴사건, 대구지하철 화재사건, 세월호 사건, 남아시아 대지진(쓰나미) 때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윤 교수가 있었다.

특히 윤 교수는 2003년 대구지하철 사건과 2014년 세월호 사건이 자신의 인생을 바꿨다고 말했다. 그는 “대구 중앙역에 갔는데 현장이 시커멓게 다 재로 변해 있었다. 같이 간 정낙은 선생에게 ‘욕심내지 말자. (사망자의)30%만 찾아서 유족에게 돌려 드리면 신도 우리가 정말 잘했다 하실 거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현장 상황이 참담했다”고 회상했다.

실제 대구지하철 사건에서 사망자의 90% 이상 개인 식별이 이뤄졌다. 사후 자료는 존재하지만 생존 자료가 없어 비교를 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망자를 밝혀낸 셈이다.

윤 교수는 “그때 정말 많이 울었다. 왜 이 사람들이 죽어야 했는지 많이 생각했다. 70일 정도 현장에 있었는데 사람이 각자의 영역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을 때, 작은 태만과 이기심이 얼마나 큰 사고로 돌아올 수 있는지 뼈저리게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세월호 사건 때는 큰 충격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트라우마로 술도 마시지 못했다. 아이들이 왜 차디찬 바다에서 죽어야 했는지 하염없이 되묻는 시간이었다. 윤 교수는 “현장에서 ‘우리 어른의 잘못으로 너희들이 이렇게 죽어 갔구나. 이 잘못된 세상, 우리가 바꿔주마. 미안하다. 잘못했다’고 말하곤 했다”고 읊조렸다.

지문과 치아, 유전자 중 하나만 일치하면 개인 식별이 이뤄진다. 지문은 종생불변 만인부동(모든 사람이 다르고 평생 변하지 않음)이기 때문에 확인만 된다면 빠른 속도로 개인 식별을 마칠 수 있다. 하지만 불에 탄 사체는 지문이 없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때 치아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대구지하철·세월호 사건 현장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치아는 모든 장기 중에 가장 단단하기 때문에 현장에 가장 오래 남아 있습니다. 치아 하나만 있으면 성별과 연령을 파악할 수 있고요. 치아를 자르면 그 안에 분포돼있는 신경과 혈관 등을 통해 DNA를 채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치아는 일단 손상되면 절대 재생이 안 되기 때문에 충치치료를 한 흔적 등으로 생전 자료를 찾아낼 수 있어요.”

윤 교수가 대학을 졸업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8년. 그중 6년을 치대 공부와 전혀 관계없이, 말 그대로 ‘놀러 다녔다’고 했다. 하지만 김종열 교수의 강의를 듣고 ‘각성’한 뒤 2년 동안 다시 말해 자신의 적성을 찾은 순간부터 그는 치대 공부에 재미를 붙이고 몰두했다. 그 결과 7000여명(국과수 기록)의 누군가를 찾아 가족의 품으로 돌려줬다.

윤 교수는 법치의학자로서의 삶을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말했다.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서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정조 때 문장가인 유한준이 김광국의 화첩 <석농화원>에 부친 발문에서 나온 표현을 유 교수가 약간 수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전 제가 이 일을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법의학에 종사하면서 사체를 부검하고 사건·사고를 접하는 과정에서 망자의 억울함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렇게 한 분, 두 분 살피는 과정에서 사명감이 생긴 거죠. 사명감이 생기면 내 학문을 사랑하게 되고 법의학을 사랑하게 되고요. 연역법이 아니라 귀납법으로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마 다들 그럴 겁니다.”

생각을 따르다

윤 교수는 전 세계 도처에 희생된 이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망자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했다. 평생에 걸쳐 현장에서 배운 경험으로 망자의 안식을 돕겠다는 취지다. 그는 “마지막으로 사체라도 따뜻한 곳에 묻을 수 있고 그 나라의 장례 풍습에 따라 영원한 안식을 비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게 내가 해왔고 해야 할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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