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초대석>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허은도 감독

2022.06.13 09:11:35 호수 1379호

“인권영화도 재밌어야죠”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다들 미쳤다고 했지.” 영화제의 유일한 프로그래머이자 총기획을 담당한 1명의 ‘미친 짓’은 대박으로 마무리됐다.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 영화제를 성공적으로 마친 수석프로그래머의 눈은 벌써 다음 기획으로 향해 있었다. <일요시사>가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수석프로그래머 허은도 감독을 만났다.



지난달 24일 개막한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이하 락스퍼영화제)가 6일간의 대장정을 마치고 막을 내렸다. 개막작 <시대혁명>, 폐막작 <잠입> 등 영화제의 꽃으로 불리는 개·폐막작을 모두 문제작으로 배치해 영화 관계자는 물론 씨네필의 관심을 끌었다. 서울시청 광장에서 상영한 <닥터 지바고> <사운드 오브 뮤직>도 큰 호응을 얻었다. 

서울 넘어

“<닥터 지바고>를 상영한 날, 일몰 시간을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관객을 많이 기다리게 했거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추웠고. 그런데도 관객들이 자리를 안 뜨는 거야. 주최 측에서 빌려준 돗자리를 뒤집어쓰고 영화를 보더라고. 밤 11시까지 영화가 상영됐는데 끝까지 보고 가는 관객을 보면서 정말 감동했지.”

지난 2일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락스퍼영화제 사무국에서 수석프로그래머 허은도 감독을 만났다. 푹 눌러쓴 모자에 티셔츠, 청바지 차림은 락스퍼영화제를 종횡무진 뛰어다녔던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허 감독은 “내가 늘 모자를 쓰고 다녀서 몇몇 사람은 내가 대머리인 줄 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지난해 ‘서울락스퍼인권영화제’라는 이름으로 1회를 진행한 락스퍼영화제는 올해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로 2회를 맞았다. 규모와 프로그램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특히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진행한 개막식이 주목을 받았다. 3000석 대극장의 1층이라도 제대로 채울 수 있겠느냐는 우려는 개막식 이후 깔끔하게 사라졌다.


“영화제는 전환점이 있어야 돼. 영화제는 개·폐막작이 성패를 가른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야. 그중에서도 개막작. 그리고 개막식을 어디서 하는지도 중요한 부분이고. 지난해에는 내 극장(명보 아트씨네마)에서 개·폐막식을 다 진행했는데, 이번에 외형을 크게 키워야겠다는 생각에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대관했지. 다들 미쳤다고 했어.”

자유·정의·인권을 주제로 한 락스퍼영화제는 개막작으로 홍콩 민주화운동을 다룬 주관위 감독의 <시대혁명>을 소개했다. 칸 영화제에서 깜짝 상영으로 공개된 <시대혁명>은 전 세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홍콩 정부의 범죄인 인도법안(송환법) 추진에 반대하는 홍콩 시민의 저항을 생생하게 담아냈다.

작년보다 규모 키운 2회
세종문화회관서 개막식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 자리한 관객들은 2시간30분의 러닝타임에도 대부분 자리를 뜨지 않고 끝까지 영화를 관람했다. 오케스트라 공연과 함께 영화가 마무리되자 객석 곳곳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몇몇 관객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지난해 7월 영화를 직접 본 허 감독은 <시대혁명>을 볼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고 했다. 

락스퍼영화제는 작명부터 결산까지 허 감독의 손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단편영화제 시상식에서 수여한 트로피 제작도 그의 몫이었다. 개막식 사회를 맡은 이익선 앵커에게 수여된 특별상도 그의 의견이 반영됐다. 허 감독은 “이익선 앵커는 우리 영화제를 위해 헌신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특별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24일 개막식에서도, 29일 폐막식에서도 허 감독은 영화 상영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 번도 자리에 앉지 못한 채 곳곳을 누볐다. 개막식 날 김문수 이사장, 이장호 집행위원장 등과 함께 레드카펫 단상 위에 올라가 잠시 주목을 받은 게 전부였다.

“낯가림이 심하다”며 인터뷰를 여러 차례 거절했던 허 감독은 막상 질문이 시작되자 거침없는 답변을 쏟아냈다.

“자유와 정의, 인권이라는 주제는 굉장히 보편적인 가치야. 그런데 몇몇 국내 영화제는 이런 가치를 정치 이념에 따라 분류해버려. 좌우를 가리지 말고 모두가 보고 다뤄야 할 가치를 진영에 따라 소비하는 상황이라고. 또 인권 영화제라고 하면 성소수자, 장애인 등 한정된 주제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내가 한 번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허 감독은 인터뷰 내내 ‘재미있는 영화’를 강조했다. 관객이 찾지 않는 영화, 영화제는 정신승리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영화인이 아니라 인권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영화제를 진행하다보니 ‘프로그래밍’이 되지 않는 부분이 안타깝다고도 덧붙였다.

<시대혁명> <잠입> 문제작 상영
군인에 대한 존경심 고취 목표


그는 “영화제의 외연 확장을 위해 대중이 소비할 수 있는 영화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닥터 지바고>나 <사운드 오브 뮤직> 등 많은 사람이 고전 명작이라고 부르는 영화에는 재미와 함께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강조했다. 자유와 정의, 인권을 맨 앞에 내세우지 않고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또 영화제에 그런 영화를 상영해 대중에게 보편적인 가치가 스며들도록 하는 게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관객을 가르치려 들면 그 순간 망하는 거라고 생각해. 관객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그들을 동화시켜야지, 선생님처럼 가르쳐서 데려오려고 하면 반발심이 생기게 마련이거든. 특정 인물에 대한 영화를 만들 때도 인물 위주가 아니라 일화 중심의 영화를 만들어야 돼. 그래야 그 안에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지.”

그러면서 6·25전쟁 과정에서 터키 군인과 전쟁 고아의 이야기를 다룬 <아일라>, 이라크 전쟁에서 사망한 챈스 필립스 일병의 유해를 미국으로 송환하는 과정을 그린 <챈스 일병의 귀환>, 아돌프 히틀러와의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택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의 고뇌를 담은 <다키스트 아워> 등의 영화를 소개했다. 

락스퍼영화제를 마친 허 감독의 눈은 ‘락스퍼영화제의 전국화’로 향해 있었다. 자유와 정의, 인권 등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는 만큼 1회성 행사가 아니라 상황에 맞게 영화제를 다양하게 변주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미 다음 달 부산 광안리, 다대포 등지에서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인 부산’이 진행될 예정이다. 

그에 앞서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서울락스퍼국제영화제 앵콜’도 진행한다. 연평해전 20주년을 맞아 서울시청 광장에서 대규모 영화제를 진행,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군인에 대한 존경심을 고취시키자는 취지다. 허 감독은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제복 입은 분들에 대한 존경심이 너무 없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영웅”이라고 강조했다. 

전국으로

락스퍼영화제 폐막식을 진행한 사회자는 “오늘은 2회 락스퍼영화제가 끝나는 날임과 동시에 3회 락스퍼영화제가 시작되는 날”이라고 말했다. 허 감독은 “내가 할 수 없을 때까지 영화제를 꾸려 가고 싶다”는 소박한(?) 바람을 전했다. 그러면서 “전국적으로 사랑받는 영화제를 만들고 싶다”고 환히 웃었다.


<jsjang@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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