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묻지마 범죄’ 실태

2008.12.16 09:19:02 호수 0호

목적도, 타깃도, 일말의 동정심도 “모두 필요없어”

“목적도 타깃도 없다. 피해자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없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범죄를 되풀이한다.” 이른바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의 공통점이다. 이 같은 범죄는 올해 초 ‘숭례문 방화’를 시작으로 끊이지 않고 벌어져 뉴스화면을 달궜다. 양구 여고생 살해사건, 동해시청 묻지마 살인사건, 논현동 고시원사건 등 잊을 만하면 대형사건들이 벌어진 것. 한 해를 정리하는 연말에도 예외는 아니다. 30여 차례에 걸쳐 방화를 저질러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준 20대가 중형을 선고받는가 하면, 평범한 40대 주부가 흉기로 이유 없이 사람을 찌르는 묻지마 범죄를 저질러 경찰에 덜미를 잡히기도 했다. 누구라도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묻지마 범죄. 그 위험성을 재조명했다.

고시원 방화·살인사건의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 상습적으로 묻지마 방화를 저지른 20대가 법의 심판을 받았다. 어떤 이유도 없이 수시로 불을 질러 3명의 목숨을 앗아가고 20억원대의 재산피해를 낸 장본인은 전모(28)씨.
그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건물과 자동차 등에 수십 차례에 걸쳐 불을 지르는 ‘마구잡이 방화’를 일삼았다.

30번의 이유 없는 불 지르기
막대한 인적, 물적 피해 낳아



자신의 범행이 ‘충동조절 장애’로 인한 병적 행동이었다는 그의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법원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서울고법 형사9부(고의영 부장판사)는 고의로 불을 질러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낸 혐의(현주건조물방화치상 등)로 기소된 전씨에 대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고 지난 8일 밝혔다.
전씨가 방화범이 된 것은 지난 2006년 8월경이다. 이때부터 올해 8월 말까지 2년4개월에 걸쳐 무려 31차례나 방화를 저질렀다.

그의 이유 없는 방화는 급기야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했다. 지난해 4월23일 오전 3시10분경 전씨는 서울 중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 들어가 복도에 놓인 이불에 불을 붙였고 불길이 4층 건물을 모두 휘감아 이곳에 사는 이모(49)씨가 질식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 결국 이 방화로 전씨는 구속기소됐다.
수십 차례의 범행은 그를 더욱 악랄하게 만들었다. 범행수법이 더욱 교묘해지고 잔인해진 것. 불을 지르는 것이 미숙했던 범행 초기에는 가벼운 치료가 필요한 부상자만 발생시키는 어설픈 방화를 저질렀던 전씨.

특정대상도, 이유도 없는 막무가내 범죄 연말에도 끊이지 않아
지나가는 사람 흉기로 찌른 40대 여성…흉흉한 괴담까지 생성
숭례문방화사건으로 시작, 연초부터 끊임없는 충격적 사건들
사회 안전망 확충 통해 소외계층 줄이는 것이 근본적 해결책

그러나 몇 번의 방화로 요령을 터득한 그는 점차 많은 재산피해와 인명피해를 낳을 수 있는 발전된 수법으로 범죄를 저질렀다. 건물 입구를 막대기 등으로 막거나 불길이 잘 퍼질 수 있도록 여러 곳에 불을 놓는 등 날로 잔혹한 수법을 익힌 것. 경찰조사에서도 차츰차츰 대범해졌다. 목격자를 자처하며 진술하는 등 알리바이를 대는 기술도 늘어갔다.

이런 방식으로 보다 전문화된 그의 방화는 결국 3명을 숨지게 하고 6명에게 부상을 안겼으며 20억원 이상의 재산피해를 낳았다.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된 전씨. 그러나 법정에서도 그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기는 커녕 변명을 늘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피해자 중 대부분이 화재보험에 가입하지 않아 큰 재산피해와 신체 피해를 당했는데도 전씨는 “충동조절 장애 등의 정신질환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에서 저지른 범행이다”라고 변명하며 자신의 죄를 합리화시킨 것.
그러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정신감정 결과 특별한 이유 없이 반복적으로 불을 지른 후 흥분을 느끼는 병적 방화 증세가 있고 충동을 조절하기 어려운 상태로 추정된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범행 과정과 전후 행동을 종합해보면 성격적 결함으로 사물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거나 의사 결정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또 “참혹한 결과가 예상됨에도 아무런 망설임 없이 새벽 시간대 주택이나 상가밀집 건물에 불을 지르는 등 인명을 가볍게 여기는 정도가 심각하다”며 “전씨의 성격이나 행동, 범행 동기, 수법 등을 살펴볼 때 재범의 위험성도 매우 높아 보여 사회와 무기한 격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덧붙였다.
자신의 욕구를 거스르지 못해 타인의 재산과 목숨까지 앗아간 묻지마 방화범은 결국 감방신세로 세상과 등을 지게 됐다.
전씨가 뒤늦게나마 사회와 격리되어 숭례문 방화와 같은 더 큰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차단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것이다. 아무 이유 없이 국보 1호가 눈앞에서 불 타 쓰러지는 것을 본 우리 국민이라면 한 번 더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진해에 떠돈 흉흉한 괴담
40대 여성이 범죄의 주인공

그런가하면 최근에는 경남 진해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흉흉한 괴담까지 나돌게 만든 묻지마 범죄의 범인이 덜미를 잡혔다.
아무 이유 없이 지나는 이들을 흉기로 찌르는 등 무시무시한 범행을 저지른 이는 뜻밖에도 40대 중년여성이었다. 46세의 고모씨가 괴담의 주인공이었던 것. 고씨가 잡힌 것은 진해가 아닌 부산이었다. 그는 부산에까지 건너가 유사한 범죄를 저지르다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경남 진해경찰서는 지난 7일 부녀자들에게 흉기로 상해를 가한 혐의(살인 미수)를 받아오던 고씨가 부산 사하경찰서에 현행범으로 체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고씨는 지난 6일 오후 8시경 부산시 하단동 모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구입하던 중 신발 끈을 묶어주던 여주인의 머리를 미리 소지한 흉기로 내리친 뒤 달아나다 고함소리를 듣고 뒤쫓은 인근 주민들에게 현장에서 붙잡혔다.

진해경찰은 고씨의 범행이 최근 진해지역에서 발생한 묻지마식 범행수법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채고 부산 사하경찰서로 출동했다.
고씨를 잡은 후에도 그의 조사에는 어려움이 뒤따랐다. 조사를 받기 위해 형사과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고씨가 수갑을 빼내고 달아난 것. 경찰은 시내 전역에 비상을 걸고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고씨의 연고지 등에 형사대를 급파한 끝에 다섯 시간여 만에 경남 진해시의 한 오피스텔에서 고씨를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두 번에 걸쳐 고씨를 잡은 경찰은 최근 진해지역에서 발생한 범죄가 그녀의 소행이었음을 확인했다.

고씨는 지난 8월29일 오후 9시20분경 진해시 이동 앞 도로에서 쓰레기를 버리고 있던 송모(50·여)씨에게 접근해 “오늘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냐”고 물은 뒤 송씨가 투덜댄다는 이유로 미리 소지하고 있던 흉기로 송씨의 우측 옆구리를 찔러 4주간의 상해를 입혔다.
지난 9월3일 오후 10시30분경에는 진해시 석동의 골목길에서 귀가하던 권모(18)양에게 접근해 “롯데마트 가는 길이 어디냐”고 물으며 권양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대답하려는 권양의 좌측 옆구리를 가지고 있던 흉기로 찔러 상해를 입힌 혐의도 받고 있다.

경찰은 이 같은 흉기범행이 발생했다는 제보를 받은 후 피해자들을 상대로 몽타주를 제작해 탐문수사를 벌였다. 또 시내 통·반장 등과 긴급간담회 등을 갖기도 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했고 범행이 일어난 지역에서는 피해자가 죽었다는 등의 흉흉한 괴담까지 확산되어 시민들이 불안에 떨기도 했다.
이처럼 연이어 어이없는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피해망상증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경찰조사결과 고씨는 1999년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살아오다 돈을 빌려준 이들에게 돈을 받지 못하며 피해망상증에 사로잡히는 등 정신질환을 가진 것으로 드러났다. 이 때문에 여성에 대한 증오심을 갖게 됐고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범행을 저지른 것.

이처럼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각종 묻지마 범죄는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고 오직 사회에 대한 불만 또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비관 등을 이유로 일어난다는 점에서 더 많은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다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소외계층에 대한 관리로
범죄 사전에 예방해야

지난 2003년 무려 192명의 희생자를 만든 대구 지하철 참사 역시 묻지마 범죄의 전형을 보여준다. 당시 범인 김모씨는 일자리를 잃은 뒤 세상을 비관하다 앙심을 품고 지하철 내에 불을 질렀다. 범죄를 저지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도, 복수를 할 뚜렷한 대상도 없이 저지른 범행이 크나큰 참극을 낳은 것이다.
또 불과 11개월 동안 21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유영철의 범행 역시 묻지마 범죄다. 당시 유영철은 부자와 여성에 대한 막연한 복수심으로 희대의 연쇄살인마가 됐다.

지난 2006년에는 부유층과 사회에 대한 증오로 인해 봉천동 세 자매 등 5명을 잔인하게 죽인 사건도 발생했다. 범인 정남규는 경찰에서 “내가 가난해서 늘 손해만 봤고, 부자만 보면 죽이고 싶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고 나만 세상에서 버림받았다”고 말하며 목적 없는 범죄를 합리화한 바 있다.
특히 경찰 조사 과정에서 정씨는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뒤 만족감을 느꼈다고 진술해 많은 이를 경악케 했다. 당시 정씨의 손에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당한 사람들은 대부분 여고생과 주부 등 약한 여성들이었다. 피해자들은 단지 정씨의 화풀이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또 지난 2월 온 국민을 슬픔에 잠기게 한 숭례문방화사건도 토지보상금에 불만을 품고 저지른 묻지마 범죄의 하나였다. 70대 노인은 자신의 불만을 표출하기 위해 애꿎은 문화재에 화풀이를 했고 돌이킬 수 없는 방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처럼 이유도 목적도 없는 묻지마 범죄에 많은 국민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자신도 범행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묻지마 범죄는 반복되거나 대참사로 이어지기 쉽다는 점에서 더 큰 심각성이 있다.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가 증가하는 원인에 대해 자신의 처지나 상황에 대한 불만, 상대적 소외감과 박탈감, 익명성 증가 등을 꼽는다. 또 사회적 양극화로 인해 소외계층이 늘어나는 것 또한 묻지마 범죄 발생의 요인 중 하나라고 말한다. 대부분의 묻지마 범죄가 특정계층에 대한 증오심이나 적개심으로 인해 벌어지고 있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지난 10년 동안 묻지마 범죄로 골머리를 앓아 온 일본의 경우 노동자 등 상대적으로 빈곤한 이들이 언제든 자신의 고충을 상담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묻지마 범죄가 일어날 수 있는 원인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식으로 범죄를 방지한다는 것.

전문가들도 묻지마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통합노력과 사회 안전망 확충을 통해 소외계층을 줄이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말한다. 또 소외계층의 얘기를 들어 주고 그들의 분노를 다독여줄 시스템 마련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저작권자 ©일요시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Copyright ©일요시사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