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대기업 사외이사의 독립성이 무너지고 있다. 회사 또는 경영진과 사외이사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서다. 당연히 회사를 감시해야 할 사외이사는 ‘보험용’내지 ‘로비용’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를 여실히 드러낸 한 조사 결과를 통해 사외이사 제도의 맹점과 허점을 도려내봤다.
10명 중 3명 이해관계자 “독립성 확보에 영향”
매년 줄다 지난해 갑자기 늘어…제도 부실 반증
사외이사는 회사의 경영을 직접 담당하는 이사진 외에 외부 전문가들을 이사회 구성원으로 선임하는 제도다. 경영진에 속하지 않지만 이사회에 참여해 회사 업무 집행에 관한 의사 결정과 대표이사 선출, 업무 집행 등에 관여한다. 그만큼 막강한 파워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다. 자산 총액 2조원 이상의 상장사는 총 이사 수의 과반수를 사외이사로 선임해야 한다. 1000억원 미만인 기업은 사외이사를 선임하지 않아도 된다.
‘38%→35%→32%
→29%→32%’
우리나라는 1998년 사외이사를 처음 도입, 의무화하고 있다. 초창기만 해도 주로 학계, 시민단체 등의 인사가 사외이사로 선임됐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거의 자취를 감춘 상태. 주로 정·관계, 법조계 출신들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관료 출신 인사들은 대기업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외이사 후보군으로 꼽힌다. 사외이사가 ‘보험용’내지 ‘로비용’이란 오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이유다.
최근 이런 문제를 여실히 드러낸 한 조사 결과가 나와 관심을 끌고 있다. 바로 경제개혁연구소가 지난달 20일 내놓은 ‘사외이사의 실질적 독립성 분석’보고서다.
국내 67개 대규모 기업 집단에 소속된 278개 상장회사 854명의 사외이사를 분석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독립성 확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해 관계가 있는 사외이사 비중은 32.2%(275명)로 나타났다. 이는 2009년보다 3.25%p 증가한 것이다.
2006년 37.5%, 2007년 35.4%, 2008년 32.09%, 2009년 28.95% 등으로 감소하다 지난해 반등했다. 이해 관계 사외이사가 급증한 것은 계열사 임직원 출신이 전년 62명에서 75명으로 늘어나고, 소송대리·법률자문 등이 14명에서 24명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사외이사 제도가 도입된 지 10년을 훌쩍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 관계 사외이사의 비중이 줄지 않는 것은 사외이사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반증한다는 게 연구소 측의 지적이다.
직접적 이해 관계가 있는 사외이사는 16.86%(144명)로 드러났다. 계열사 출신(75명), 소송대리 또는 법률자문 회사 소속(24명), 정부 또는 채권단 출신(21명), 전략적 제휴 또는 거래처 출신(14명) 등이었다. 학연 관계가 있는 사외이사는 15.34%(131명)로 집계됐다. 직접 이해 관계 사외이사의 비중은 2009년 14.41%에서 2010년 16.86%로 2.45%p 증가했으나 2008년(17.38%)에는 못 미친다.
전략적 제휴 등을 제외하고 계열사 출신, 소송대리·법률자문, 정부·채권단 등은 모두 2009년에 비해 비중이 늘었다. 학연 관계 사외이사 역시 2009년 14.54%에서 2010년 15.34%로 0.8%p 증가했으며, 2008년(14.71%) 보다 높아졌다. 연구소는 “보고서의 분석은 공개된 정보에만 근거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공개되지 않은 이해 관계는 파악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며 “따라서 보고서에서 분석한 이해관계 사외이사의 비중은 최소치로 실제론 이보다 더 높다”고 밝혔다.
기업 집단 가운데 이해 관계 사외이사 수가 가장 많은 곳은 두산그룹이다. 두산그룹은 전체 33명의 사외이사 중 20명이 회사 또는 경영진과 얽혀있다. 직접적 이해 관계는 9명, 학연 관계는 11명이다. 두산그룹은 2006년 최초 보고서 발간 이후 5년 연속 이해 관계 사외이사를 가장 많이 선임한 기업집단 1위로 집계됐다.
이어 ▲LS그룹(18명 중 12명) ▲한화그룹(25명 중 12명) ▲삼성그룹(63명 중 12명)이 12명, ▲동양그룹(21명 중 10명) ▲한진그룹(16명 중 10명) ▲SK그룹(55명 중 10명)이 10명 순이었다. 이외에 이해 관계 사외이사가 1명 이상인 기업 집단은 55개로 조사됐다. 1명도 없는 곳은 농심그룹, 대우조선해양, 애경그룹, 이랜드그룹, 태평양그룹, 한솔그룹 등 12개다.
직접 이해 관계 17%
삼성, 관료·법조↑
비중으로 따지면 현대건설이 1위다. 사외이사 4명 모두 이해 관계가 있다. 100%인 셈이다. 이어 ▲한국타이어그룹(6명 중 5명·83.33%) ▲한라그룹(4명 중 3명·75%) ▲KCC그룹(8명 중 6명·75%) ▲하이트그룹(10명 중 7명·70%) ▲쌍용양회그룹(10명 중 7명·70%) ▲교보생명보험(3명 중 2명·66.67%) ▲대우자동차판매(3명 중 2명·66.67%) ▲LS그룹(18명 중 12명·66.67%) ▲영풍그룹(12명 중 8명·66.67%) ▲효성그룹(11명 중 7명·63.64%) 등의 순이었다.
직접 이해 관계 사외이사를 가장 많이 선임한 기업 집단은 한화그룹이었다. 무려 11명이나 됐다. 두산그룹은 9명, LS그룹은 8명, 삼성그룹과 쌍용양회그룹은 각각 7명, SK그룹은 6명이다. 비중을 보면 현대건설(100%), 쌍용양회그룹(70%), 에스오일(6명 중 3명·50%), 한라그룹(4명 중 2명·50%), LS그룹(44.44%), 한화그룹(44%) 등이 높았다.
사외이사의 직업군은 재계(254명·29.74%) > 학계(244명·28.57%) > 관료(179명·20.96%) > 법조계(110명, 약13%)순이다. 2009년의 경우 학계 출신이 재계 출신을 앞섰으나 지난해 순위가 바뀌었다. 재계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기업은 SK그룹(15명), 금호아시아나그룹(12명), LS그룹·GS그룹·LG그룹(각 11명) 등이다.
그 비중이 100%인 곳은 한라그룹과 애경그룹. 다음으로 하이트그룹(90%), 쌍용양회그룹(80%), 현대건설(75%), 한솔그룹·대우자동차판매(66.67%) 등이 재계 출신 비중이 높다. 신세계그룹, 삼양그룹, OCI그룹 등은 재계 출신 사외이사가 모두 계열사 출신인 것으로 나왔다. 계열사 출신은 직접 이해관계 사외이사에 속한다. 관료층은 해마다 비중이 늘어나다 2009년 감소세를 보였으나, 지난해 다시 급증해 분석 기간 5년 중 최고치(20.96%)를 기록했다.
관 료 출신 사외이사 중엔 기획재정부, 국세청, 금융감독원 등 경제·금융·조세 관료가 107명이다. 이는 전체 관료출신 사외이사의 59.78%에 해당한다. 관료 사외이사가 많은 기업은 삼성그룹(16명), CJ그룹(13명), 동부그룹(12명), 두산그룹·SK그룹·한화그룹(8명), 금호아시아나그룹·동양그룹·롯데그룹·신세계그룹(7명) 등이다. 이 중 삼성그룹은 관료 사외이사 16명 중 11명이, CJ그룹은 13명 중 10명이, 동부그룹은 12명 중 7명이 경제·금융·조세 관료 출신이다. 관료 사외이사 비중이 높은 곳은 신세계그룹(70%), 동부그룹(54.55%), 농협·세아그룹·이랜드그룹·한국타이어그룹(50%) 등이다.
법조계 출신 중에선 판·검사 출신(73명)이 일반 변호사(37명)의 2배가량 많다. 기업들이 일반 변호사에 비해 보다 영향력 있는 판·검사 출신들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법조계 출신 사외이사가 많은 기업은 삼성그룹(13명), 두산그룹(12명), 현대차그룹·SK그룹(6명), 태영그룹(5명) 등이다. 이들은 과거 지배주주 일가가 민·형사 소송을 경험한 공통점이 있다.
법조 사외이사 비중이 높은 곳은 오리온그룹(60%), 대한해운(50%), 태영그룹(45.45%), 동국제강그룹·두산그룹(36.37%), 현대중공업그룹(33.33%) 등이다. 오너와 학연 관계인 사외이사도 있다. 두산그룹(11명), 동양그룹(10명), 한진그룹(7명), 효성그룹·영풍그룹(6명) 등이다. 두산그룹은 박용만 회장(11명 중 6명)과, 동양그룹은 모두 현재현 회장과 선후배 사이다.
눈에 띄는 점은 학연 관계 중엔 경기고 동문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고교평준화 이전 시절의 경기고 출신들은 한국 사회 대표적인 엘리트 인맥으로서 사회 각 분야에서 상당한 지위에 올라있고,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갖춘 이들이 사외이사로 많이 선임되기 때문에 경기고 인맥이 많을 수밖에 없다는 게 연구소 측의 분석이다. 교보생명보험은 학연 관계 사외이사 3명 중 2명이 신창재 회장과, 한국타이어그룹은 6명 중 4명이 조양래 회장과, 효성그룹은 6명 중 5명이 조석래 회장과 경기고 동문이다.
연구소는 “현행 상법과 업종별 법규는 사외이사 제도가 본연의 취지에 맞게 운영되도록 독립성, 전문성 등 사외이사의 자격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은 단순 거수기 역할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는 등 무용론까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사외이사의 독립성을 강화하기 위한 제도 개선과 기업의 인식 변화가 요구된다”며 “독립성 확보를 위해 자격 기준 강화 등의 법적 기준을 보다 더 엄격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