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 신동빈호’가 힘찬 닻을 올렸다. 21년의 길고긴 경영수업 끝에 2세 경영체제가 출범한 것. 그간의 성과를 아버지 신격호 창업주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특히 신 회장은 M&A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여 왔다. 지난해에만 굵직한 M&A 10여 건을 성사시켰다. 괄목할만한 성과였다. 하지만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경영 능력을 검증받는 게 바로 그것이다.
롯데그룹 발을 들인 지 21년 만에 회장 전격 승진
지난해에만 굵직한 M&A 10여건 성사…4조원 쏟아
지난 10일 신동빈 롯데그룹 부회장이 회장으로 전격 승진했다. 신 회장이 롯데그룹에 발을 들인 지 21년만의 일이다. 롯데의 2세 경영체제 전환은 주요 그룹 가운데 가장 늦었다. 신격호 롯데그룹 창업주가 89세의 고령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셔틀경영’으로 1세 경영을 유지해온 때문이다. 이번 인사에서도 신 창업주는 ‘명예회장’이라는 직함 대신 ‘총괄회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그룹 경영에서 손을 떼지 않을 뜻을 분명히 했다.
신격호 창업주
총괄회장 직책 맡아
신 회장은 일찌감치 신 총괄회장의 후계자로 낙점됐다. ‘장남 승계’라는 우리 재계의 관행을 깨고 차남인 신 회장이 왕좌를 차지한 것이다. 장남인 신동주 부회장은 일본 롯데를 맡고 있다. 신동주 부회장은 ‘학자’ 스타일로 온화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인 반면, 신 회장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스타일인 것으로 알려졌다.
1955년, 신 총괄회장의 두 번째 부인인 일본인 시게미쓰 하츠코 여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신 회장은 일본 아오야마가쿠인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20대 초반까지 일본에서 생활했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콜롬비아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81년 일본 노무라증권에 입사, 1982년부터 1988년까지 6년간 영국 런던지점에서 근무하며 글로벌 감각을 키웠다.
신 회장이 처음 롯데에 발을 들인 것은 1988년 일본 롯데상사에 입사하면서다. 하지만 불과 2년 뒤인 1990년 한국 롯데로 거취를 옮겼다. 이곳에서 신 회장이 가장 처음 받은 보직은 호남석유화학 상무였다.
이후 1995년 롯데그룹 기획조정실 부사장을 거쳐 1997년 롯데그룹 부회장으로 임명되면서 롯데그룹의 후계자로 사실상 자리를 굳혔다. 이어 2004년에는 정책본부 본부장을 맡아 ‘헤드쿼터’의 실질적 사령탑으로 그룹 경영을 진두지휘했다.
신 회장은 90년대 중반부터 롯데그룹의 신규 사업들을 주도해 왔다. 1994년 코리아세븐을 인수해 편의점 사업을 시작했고 물류사업을 위해 롯데로지스틱스를 설립했다. 1997년에는 롯데정보통신을 설립했고 2000년엔 롯데닷컴과 무선 인터넷 콘텐츠업체 모비도비를 창립해 대표로 취임했다. 특히 신 회장은 노무라증권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거침없는 M&A 행보를 보였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평가다.
롯데그룹은 2007년 ▲대한화재 3526억원 ▲중국 대형마트 마크로 1615억원 ▲호남지역 빅마트 1000억원 등을 잇달아 사들인 데 이어 2008년 ▲네덜란드 초콜릿 회사 길리안 1700억원 ▲인도네시아 유통업체 마크로 3900억원 ▲코스모투자자문 629억원 등을 손에 넣었다.
또 지난 2009년엔 ▲두산주류BG 5030억원 ▲중국 유통업체 타임스 7327억원 ▲교통카드 회사 마이비 603억원 ▲쌀 가공 식품업체 기린 799억원 등을 거머쥐었다. 또 AK면세점을 운영하고 있는 ▲AK글로벌 2800억원 ▲룩셈부르크 부동산투자사 코랄리스 697억원 ▲경북 성주 골프장 헤븐랜드CC 751억원 ▲해태음료 안성공장 306억원 ▲롯데오더리음료유한공사 135억원 등도 인수했다. 그리고 지난해 롯데그룹은 편의점 바이더웨이를 2740억원에, M&A 시장에서 대어급으로 분류된 GS마트(14개점)와 GS백화점(3개점)을 1조3400억원에 각각 품에 안았다. 한 달 사이 유통업계에 나온 대형 매물 2건을 모두 가져간 것이다.
이밖에도 롯데그룹은 ▲이비카드 1500억원 ▲말레이시아 타이탄 1조5000억원 ▲중국 럭키파이 1500억원 ▲데크항공 미공개 ▲롯데칠성음료 1180억원 ▲파스퇴르유업 600억원 ▲파키스탄 콜손 200억원 등 끊임없이 몸집을 불려나갔다. 이렇게 롯데그룹이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성사시킨 주요 M&A는 24건, 총 금액은 6조5000억원을 상회한다. 지난해에만 4조원이 넘는 돈을 쏟아 부었다.
이는 모두 신 회장이 지난 2009년 수립한 ‘2018 아시아 TOP10 글로벌 그룹’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신 회장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삼성 같은 회사가 해외에서 인정받는 브랜드가 됐듯이 우리도 밖에 나가 브랜드를 키우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18년까지 핵심 사업을 강화하고 해외 사업 비중을 높여 매출 200조원의 거대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계획이다.
해외시장 공략
핵심성장 과제
실제로 해외 시장 공략은 롯데그룹의 핵심 성장 과제다. 전형적인 내수 기업인 롯데그룹이 총매출 200조원을 달성하기 위해선 해외 진출이 불가피한 때문이다. 이를 위해 롯데그룹은 2018년까지 국외 사업 비중을 20~30%선으로 높인다는 방침이다.
롯데그룹의 해외 핵심 전략지역은 VRICs(베트남, 러시아, 인도, 중국)다. 세계 최대 신흥시장으로 통하는 기존 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에서 브라질을 빼고 베트남을 넣었다. ‘롯데판 브릭스’의 작명은 신 부회장이 직접 한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그룹은 올해 비전 달성을 위해 글로벌 사업에 총력을 기울일 계획이다.
롯데백화점과 롯데마트는 공격적인 해외 출점을 이어갈 예정이다. 러시아 모스크바와 중국 베이징에 각각 해외 1호점과 2호점을 운영 중인 롯데백화점은 오는 4월 중국 톈진시에 중국 내 첫 단독 진출 매장인 ‘톈진 1호점’을 연다. 또 2012년에 톈진 2호점,2013년에 선양점을 오픈하는 등 2018년까지 중국에서 20개 매장을 순차적으로 열 계획이다. 롯데마트는 올해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에 30여 개 점포를 새로 열 계획이다.
롯데제과는 지난해 베트남과 인도, 러시아에서 2년간 진행된 현지공장 건설 프로젝트를 마무리 지었다. 올해는 현지 생산 시스템을 정비하고 해외 마케팅 전략을 적극적으로 펼친다는 방침이다. 롯데칠성음료도 해외 사업 안정화를 위한 시스템 구축에 초점을 맞출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이달 중에 글로벌 ERP를 가동해 국내와 해외 자회사의 업무 통합에 박차를 가할 계획이다.
호남석유화학은 지난해 말레이시아 타이탄을 인수해 글로벌 석유화학 기업으로 도약했다. 지난해 연결 기준 매출액은 14조원에 이른다. 호남석유화학은 올해 해외 사업 강화를 통해 원료 생산지와 제품 시장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중동과 신흥 경제권 대형 업체와의 원가 경쟁에 대비하는 데 주력할 예정이다.
한편, 신 회장이 풀어야 할 숙제도 있다. 경영 능력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키는 게 바로 그것이다. 한때 신 회장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가 그룹 안팎에서 나돌았다. 신 부회장이 주도한 롯데닷컴, 롯데홈쇼핑 등의 초기 실적이 지지부진했으며 T.G.I 프라이데이스, 크리스피크림도넛 등 외식사업도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2007년 국내 백화점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롯데백화점 모스크바점은 현지 시장조사와 적응에 실패해 개점 초기 “파리만 날린다”는 소리를 들었다.
“2018년까지 매출 200조원 거대기업으로 도약할 것”
경영 능력에 대한 의혹을 해소시키는 것이 선결과제
2006년 대표이사로 취임하며 경영에 참여한 롯데쇼핑은 그해 유통 라이벌 신세계에 업계 1위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러자 신 총괄회장은 2008년 신 회장의 취임과 동시에 등기이사 명단에서 빠지며 경영에서 물러난 장녀 신영자 사장을 복귀시켰다.
롯데쇼핑은 그해 다시 신세계를 앞지르며 업계 1위에 올라섰다. 이 일로 신 회장은 경영 능력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됐다. 뿐만 아니라 지난해 3분기 ‘유통의 꽃’이라 불리는 백화점 사업에서 신세계백화점에 자리를 내줬다. 줄곧 1위를 지켜온 롯데백화점으로서는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백화점사업의 부진은 그나마 양반이다. 유통 계열사인 롯데마트, 롯데닷컴, 롯데홈쇼핑은 나란히 업계 하위권을 밑돌고 있다. 대형 유통 마트 부문의 롯데마트는 업계 3위에 그쳤다. 국내 대형마트 시장이 3개사가 각축을 벌이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3위는 사실상 꼴찌를 의미한다.
신세계 이마트가 전국 129개 점포를 운영하면서 독주하는 가운데, 홈플러스가 118개 매장을 운영하며 2위를 이어가고 있다. 롯데마트는 86개 매장을 운영하고 있어 1, 2위와의 격차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고 있다.
온라인 쇼핑몰 시장에서도 롯데닷컴은 옥션, G마켓, 11번가에 밀려 바닥을 면치 못하고 있다. TV홈쇼핑 시장도 마찬가지다. 롯데홈쇼핑은 경쟁 브랜드에 훨씬 뒤쳐진 상태다. 해외 시장 진출 실패 경험 역시 아킬레스 건이 될 수 있다. 롯데그룹은 인도에 현지법인을 설립해 백화점과 대형마트 등을 모색했지만 규제 장벽에 가로막히면서 결국 짐을 꾸려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2010년 3월 인도 현지법인인 ‘롯데쇼핑 인디아’ 사무소 인력을 전원 철수시키고 사무소까지 폐쇄해 사실상 진출 계획이 잠정 중단됐다. 롯데쇼핑이 인도에 진출하기 위해 2006년 11월 뉴델리에 주재인력을 파견한 지 3년여만의 일이었다. 지난 2008년 1월에는 현지법인을 설립하며 인도 공략이 가시화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종합 소매업에 외국 기업의 직접 투자를 금하는 인도의 정책이 문제였다. 쇼핑몰 개발도 타진했지만 뭄바이, 뉴델리 등의 비싼 땅값이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롯데그룹는 현지법인을 유지해 향후 진출을 위한 여지를 남겨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어렵던 사업 성장
긍정적 신호도
하지만 한편에선 긍정적인 신호도 들려온다. 신 회장이 직접 주도한 백화점의 해외진출, 롯데닷컴과 롯데홈쇼핑, T.G.I 프라이데이스, 크리스피크림도넛 등의 사업 등이 초기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점차 성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많은 임원들의 반대에도 신 부회장이 밀어붙인 슈퍼 부문이 단기간에 업계 1위로 올랐고 해외 시장에서 어려움을 겪던 롯데백화점의 실적이 서서히 개선되고 있다. 우려됐던 두산주류 인수도 최근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