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농민들의 피맺힌 절규

2008.10.22 18:48:09 호수 0호

최근 10월 추수철이 다가오면서 농가의 표정은 밝아져야 하지만 오히려 속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다. 매해 시간이 흘러가면 갈수록 생활이 더욱 궁핍해지는 것을 피부로 느끼기 때문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부는 농업 발전을 위해 노력 한다고는 하지만 딱히 제대로 된 대책이 세워지지는 않고 있다. 이미 ‘나라’에서 헤아려주기를 기다리는 것은 ‘포기했다’고 말하는 농민들 역시 적지 않다. 추수를 맞이하는 농민들의 착잡한 심정을 경기도 몇몇 지역의 현지 농민들에게 직접 들어봤다.

“우리에게 쌀은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다”

추석이 지난 경기도 인근 들녘은 이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정겨운 자녀들의 얼굴도 대했고 이제 추수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농민들이 힘이 나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경기도 이천 지역의 한 농민의 말은 우리 농촌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가슴 답답해,
굶어죽지도 못해”
사는 재미가 어떻냐는 질문에 박지무(66)씨는 “가슴이 답답해서 터질 것 같다.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이다. 일을 하면 수익이 생겨야 되는데 지금은 일을 할수록 적자가 나니 일을 할 마음이 생기겠느냐”며 말문을 열었다.
박씨는 이어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안하면 달리 할 것도 없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안할 수도 없다. 쌀이 생명이라고 하지만 지금 우리한테는 쌀이 죽음이다. 농민들이 자살하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마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실제 그의 말대로 올해만 해도 7명의 농민들이 자살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하지만 언론과 국민들에게 이 소식은 어느 한 농민의 ‘자살’ 소식이지 ‘농민’의 자살 소식이 아니었다. 그만큼 농촌 문제에 둔감해져 있다는 얘기다.
이런 농민들의 마음에 더욱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겨준 것은 농협의 부정부패 소식이었다. 수십억원 비자금을 조성한 것은 물론이고 예산으로 해외 명품을 구입하거나 사료 구매 단가를 조작하는 등 농협의 도덕적 해이가 드러났다. 김양수(47)씨는 이를 ‘절망’이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기름 값에 비료 값이 하늘 높을 줄 모르고 오르고 있는데 비자금을 만들고 그걸로 흥청망청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농민들을 도우라고 세운 농협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도대체 누가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이어 “농협에 들어서면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맞아주던 직원들의 얼굴이 가식처럼 느껴질 정도다. 발길을 들이기조차 싫다. 농협중앙회는 지역농협의 상전이고, 지역농협은 그 지역농민의 상전이고 채권자로 변한 지가 이미 오래 전이다”라며 분개했다.
또 “농협에서 권하는 것을 따르는 사람도 별로 없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하면 돈을 번다는 우스개 소리에도 이젠 쓴웃음조차 지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배신감이기도 하고 우리 삶에 대한 절망감이기도 하다”라고 지적했다.

매입가 놓고 줄다리기
“노는 게 돈 버는 거야”
올해의 경우 특히 평년작(10a당 4백83㎏)을 웃도는 풍년이 예상되고 있다. 하지만 농사가 잘된다고 해도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태풍의 피해도 비교적 적었고 따라서 이삭당 벼알수가 지난해보다 늘었다. 병충해도 1990년 이후 가장 적은 것으로 파악됨으로써 여러 가지 호조건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농민들은 웃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벌써부터 매입 가격을 놓고 농민들과 산지 매입 주체들이 상당한 시각차를 드러내고 있다.
농가에선 지난해 대비 10% 이상의 매입가 인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미곡종합처리장(RPC)에선 농민들의 이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오히려 내년에는 쌀 판매가격이 하락할 우려까지 있다. 실제 농민들의 말을 들어 보면 매입가 인상 요구는 그리 무리한 것처럼 들리지 않는다.
최철민(69)씨는 “일단 비료와 기름값이 엄청나게 올랐다. 자재비가 오르면 쌀의 생산비가 오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 자재비는 오르는데 가격은 그대로면 우리 늙은 농부들 보고 그 손해를 다 떠맡으라는 이야기인가. 인부 한 명을 쓰려면 그 품값이 얼만지나 알아보고 애길 해, 그냥 앉아 노는 게 돈 버는 거라니깐”이라고 신세를 한탄했다.
이렇게 쌓인 농민들의 불만은 이제 폭발을 넘어 폭동의 기미를 보이고 있을 정도다. 지난 8월 20일 부산의 농민단체들은 비료값 인상과 생산비 폭등에 대한 대책 마련을 요구하며 1만 5천 명이 운집했다. 그들은 ‘한 끼 쌀값은 5년 전에도 2백 원이고 지금도 2백 원이다. 껌값이 쌀값을 추월한 지는 이미 오래’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전남농민회도 지난 9월 19일부터 본격적인 ‘벼 출하거부 투쟁’에 돌입했다. 농민들은 ‘국내 식량자급률이 25%밖에 안 되는데도 정부가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농민들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다’며 ‘식량자급 법제화와 나락값 7만 원 보장 등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해 입법청원과 조례제정 투쟁에 나서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농민들은 한결같이 ‘우리들은 죽어가고 있다’고 절규하고 있지만 그 절규는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버린다. 농민들의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상황에서 땜질식 처방은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발표할 때에는 그럴 듯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무용지물이 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다.
김의석(54)씨는 “그까짓 발표를 위한 발표나 담화와 같이 어린 애들 울면 일단 어르고 달래기식의 선심세례를 한 두 해도 아니고 수십 년 내내 겪은 우리가 모를 성 싶어서 그러는지 뉴스를 통해 들으면서 어이없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며 “애꿎은 마을 이장만 욕을 얻어 먹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물론 정부 측에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다. 쌀 생산량은 증가하고 소비량은 해마다 줄어들고 정부의 공공비축용 벼 매입량은 축소됐고 의무 수입량은 증가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무턱대고 농민의 입장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기가 힘든 점도 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객관적인 상황 탓만 하고 있기에 상황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
문제는 개인 농가뿐만 아니라 농업 법인도 수익성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농업법인은 개인 농가들이 뭉쳐 보다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한 하나의 방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노력마저 ‘무력화’되고 있는 셈이다.
농업법인의 경우 외형 매출은 늘었지만 그 속내를 살펴보면 상당수가 적자를 보고 있다. 최근 통계청이 내놓은 ‘2007년 농업법인 사업체 통계조사 결과’에 따르면 법인 한 곳당 평균 판매액은 11억9천만 원으로 1년 전보다 2.4% 증가했다.

이것도 저것도 무용지물
“우리는 뭘 해야 해?”
그러나 당기순이익은 4천8백만 원에서 2천8백만 원으로 41% 가량 감소했다. 법인당 부채 비율도 1백88%로 뛰었다. 법인 세 곳 중에 한 곳이 적자를 기록한 셈이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상황이 비슷하다는 얘기다.  
김지익(52)씨는 “법인을 세우는 이유가 뭔가. 개인이 못하는 걸 힘을 합쳐서 해보자는 거 아닌가. 정부에게 보조도 제대로 받고 품질검사도 엄격히 해서 소비자들에게 사랑 한번 받아보자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제 그런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어져 버렸다. 개인도 안 되고 법인도 안 되고, 이제 우리는 뭘 해야 하는가”고 허탈해 했다.
과수 농가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추석 대목이 실종된 후 각 과일 농가들은 한숨을 쉬고 있다. 추석을 대비해 출하량을 늘렸지만 실제 판매량은 30%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일부 과수 농가들은 삶의 의욕을 잃어버릴 정도다. 한 상자의 과일을 팔아봤자 생산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언론들의 무분별한 보도도 농가를 위축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배의 경우 국내의 한 방송사에서 ‘추석에 출하되는 배에 지베렐린를 사용함으로써 품질을 떨어뜨리고 있다’고 보도하는 바람에 선물용 배 시장을 크게 위축시켰다는 지적이다.
경기도의 한 과수 농가를 운영하는 오세출(54)씨는 “농촌 실정을 잘 모르는 도시 사람들은 무조건 방송사만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잘못된 보도가 나가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믿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와 언론이 나서서 소비 촉진을 장려해야 농가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대목을 앞두고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그런 방송을 내보내는 건 도대체 농민들을 죽이겠다는 심사도 아니고 뭐냐”며 분통을 터트렸다. 오씨의 표현은 과격했지만 자신들의 처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부와 언론사 관계자들에 대한 분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실제 배 농가의 경우 남은 배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다. 심지어 저온저장고마저 없는 상태에서 그대로 썩어가거나 아니면 헐값에 팔아넘기는 수밖에 딱히 대책이 없는 것이다.
또한 추석을 앞두고 언론에서 연일 ‘비싼 과일 값 때문에 추석 물가가 불안할 것이다’는 보도를 내보기도 했다. 예년에 비해 이른 추석으로 인해 과일 공급이 원활치 못할 것으로 예상되며 따라서 물가가 크게 오를 것이란 게 보도의 주요 골자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농산물의 소비를 위축시키는 결과는 가져왔다. 실제로는 전체적으로 수급에 전혀 문제가 없었고 시세상승도 이뤄지지 않았다. 도리어 예년보다 값이 떨어졌다. 정확하지 않은 언론보도가 오히려 농민들을 ‘물가 인상의 주범’으로 몰고 간 것이다.
가을은 점점 다가오고 한 해의 결실들은 노동의 아름다움을 몸으로 웅변하고 있지만 농민들의 마음은 오히려 그 아름다움을 두려워할 정도다. 무의미한 노동과 애정 없는 농산물로 변한 그 오곡백과들을 그나마 거둬들이기 위해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을 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노인들과 젊은 외국의 아낙네들이 지키고 있는 게 우리 농촌의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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