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커들이 판치는 세상이다. 각종 브로커들은 그들만의 세상을 구축하며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신종 브로커로 등장한 ‘스펙브로커’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스펙은 구직자나 수험생이 갖춰야 할 학점·경력 등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의 태동은 봉사활동이나 수상 경력 등 비(非)교과 부분이 중요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런데 학원가를 중심으로 활개를 치는 그들은 각종 위조를 일삼으며 교육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선의의 수험생과 구직자들을 울리고 있다. 그들의 실체를 추적했다.
자기소개서 대필·허위경력서·기관장 추천서 들고 먹잇감 사냥
수험생 학부모·구직자 대상 유혹 고가 요구…수천만원 호가도
“스펙을 높여주겠다.”
지난 3월2일 서울 강남 한 커피숍에서 만난 서모(28)씨. 서씨는 2년차 예비 구직자다. 그는 학원가를 떠돌며 나름대로 구직 준비를 해왔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그러던 그가 2월 중순 학원을 나오던 중 한 남자를 만났다. 그 남자가 제의한 것은 스펙을 높여줄 테니 관심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댓가도 제시했다. 자기소개서를 써 줄 경우 50만원을, 가짜 입상증명서는 1000만원을 요구했다.
자기소개서 한 장에 100만원?
서씨는 “나에게 당장은 큰돈이기때문에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취업만 할 수 있다면 빚을 내서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지긋지긋한 구직에서 해방되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같은 장소에서 만난 학부모 조모(51·여)씨도 스펙브로커를 만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수험생을 둔 조씨가 학원가를 돌고 있을 무렵 한 남자가 다가와 유혹했다는 것. 그 남자가 제의한 것은 허위 추천서와 입상증명서.
조씨는 “그 정도의 서류까지는 필요없다고 하니 자기소개서 대필을 추천하면서 100만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금액도 금액이지만 다른 수험생들이 대필로 작성 제출하는데 괜히 그냥 작성했다가 피해를 볼까봐 할지말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실제 학원가에는 스펙브로커가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서울 강남 지역 학원가의 경우 허위 추천서와 경력증명서가 고가에 거래된다는 소문이 퍼져 있는 실정이다.
스펙브로커의 주요 업무는 자기소개서 대필이나 허위경력서, 기관장 추천서, 가짜 허위학력 등을 판매하는 것. 이중에서도 입학사정관 전형에 필수인 자기소개서를 대필이 주종을 이룬다고. 자기소개서 대필 가격은 50만~100만원이 공식적이다. 가짜 수상 경력이나 기관장 추천서 등은 수천만원을 호가하기도 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스펙브로커들의 먹잇감(?)은 수험생을 둔 학부모나 구직자들이다. 브로커들은 이들에게 접근해 스펙을 높여주겠다고 유혹한다. 입학사정관 전형이나 수시전형 등 대학입시에서 스펙의 중요성이 점차 커지고 있고 다른 사람들도 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 밀린다는 말로 현혹시킨다. 그리고는 금액을 제시한다.
이들의 수법 중 눈에 띄는 것은 추천서 위조. 추천서는 이름만 있는 사단법인의 단체장 명의를 주로 이용한다. 가짜 입상증명서의 경우에는 해외 입상 경력 등 확인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증명서를 위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자기소개서는 기본이다. 학생들이 대충 써오면 전면 재구성해준다. 첨삭도 이뤄진다. 하지만 막상 만들어지고 나면 완전히 새로운 내용의 소개서가 탄생한다. 봉사실적도 부풀려 준다. 글짓기 공모 같은 것은 대신 응모해 입상하는 수법을 사용한다. 봉사활동은 학부모가 대신 다녀온 뒤 자녀 명의로 확인증을 받는 방법을 쓴다.
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모(47)씨는 “실제 추천서를 거래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언젠가 학부모가 찾아와 가짜 입상증명서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졸라 애를 먹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 지난달 28일 서울 종로경찰서는 스펙을 높여주겠다”는 광고를 한 입시학원장 이모(43)씨가 지난해 수험생을 둔 학부모 56명과 통화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들 중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응시한 수험생을 둔 학부모 5명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경찰 한 관계자는 “이씨가 지난해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응시한 수험생들에게 허위 증명서를 만들어 입시에 도움을 줬는지를 여부에 집중하고 있다”면서 “이씨는 서울 강남 지역에서 학원을 운영하면서 학부모들을 접촉했다”고 설명했다.
“엄격한 평가기준이 필요하다”
한편 이 같은 사건을 접한 학원가에서는 “드디어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다. 그동안 스펙브로커들의 활동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는 것. 고가로 이뤄지는 이런 거래들로 인해 순수하게 본인이 작성해 제출하는 수험생이나 구직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다는 학원 관계자들의 전언도 있다.
때문에 학원가 일각에선 서류 조작이나 실적 부풀리기와 같은 부정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근절대책이 마련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공정성 논란은 계속될 것이란 지적이다.
교육계 한 전문가는 “문제는 학생들이 제출한 서류를 대학들이 일일이 검증할 수 있는 체계가 없다는 입학사정관 제도 자체 허점 때문”이라면서 “입학 사정관 한 명이 지원자 수백 명의 추천서와 입상 경력, 해외연수 서류가 진짜인지 모두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한 현실에서 보다 엄격한 평가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