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속살인사건으로 얼룩졌던 2009년의 마지막을 장식(?)한 사건이 벌어졌다. 홧김에 부모를 살해한 김모(24)씨가 장본인이다. 부모와 특별한 갈등 조차 없었던 김씨는 화를 이기지 못해 패륜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 더욱 충격을 줬다. 이 사건으로 갈수록 잔혹해지는 존속살인범죄의 위험성이 또다시 도마에 올랐다.
크리스마스이브 날 큰아들 손에 살해된 공무원 부부
홧김에 우발적으로 부모 살해, 존속살인 심각성 부각
지난달 28일, 전남 영암의 한 가정집에서 부부가 숨진 채 발견됐다. 영암군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김모(51)씨와 아내 조모(50)씨가 싸늘한 주검이 된 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 이들의 죽음은 김씨의 동료들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동료는 “성탄절 연휴에 계획된 여행도 불참하고 출근도 하지 않아 열쇠 수리공을 불러 집에 들어가 보니 부부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발견 당시 김씨는 둔기로 심하게 폭행을 당하고 피를 흘린 채 작은 방 침대 밑에 누워 있었고 조씨는 흉기에 찔린 채 부엌에서 숨져 있었다. 또 장롱 등 집안 곳곳이 어지럽혀 있었다. 강도 살인사건으로 보일 만한 현장이었다.
성탄절 여행 가자더니
그러나 용의자의 윤곽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부부 모두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특별히 원한을 살 만한 일을 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단서가 될 만한 부분은 집안 출입구가 모두 잠겨있고 부부의 시신에 별다른 반항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것. 이는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의 소행일 수 있다는 추측을 가능케 했다.
이에 경찰은 가족 등 가까운 사람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수사를 이어갔다. 부부의 두 아들 중 작은 아들은 지난달 초 군 입대를 했고 같이 살고 있던 큰아들(24)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집에서 나간 뒤 부모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 큰아들은 경찰에서 “광주에서 여자친구와 놀다가 부모님의 소식을 듣고 집에 왔다”고 진술했다.
이처럼 태연하게 유족조사를 받던 큰아들 김씨. 그러나 경찰은 김씨가 타고 다녔던 차량에서 단서를 포착했다. 차 안에서 혈흔을 발견한 것. 집에서 사라진 귀금속도 발견됐다. 이에 경찰은 증거를 내세워 그를 추궁했고 아들 김씨는 결국 자신이 부모를 죽였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아들 김씨가 부모를 잔혹하게 살해한 이유는 ‘홧김에’ 였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이브였던 지난달 24일 밤, 아들 김씨는 족구동호회 회원들과 회식을 한 뒤 10시쯤 귀가했다.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부싸움 후 울고 있는 어머니 조씨. 선천성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했던 조씨는 이날 남편 김씨에게 폭행을 당하고 있었다. 이를 본 아들 김씨는 아버지에게 “그만 좀 괴롭혀라”라고 말을 했고 아버지에게 뺨을 맞았다. 이에 격분한 아들 김씨는 둔기로 아버지를 때려 살해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들 김씨는 범행이 발각될 것이 두려워 자신의 범행을 지켜본 어머니마저 흉기로 살해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들 김씨는 경찰에서 “범행이 발각될까 봐 어머니까지 살해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순간에 부모를 죽인 패륜아가 된 김씨. 정신을 차렸을 때는 너무 늦은 뒤였다. 이후 김씨는 강도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어지럽히고 목걸이, 반지 등 귀금속 30여 점을 가지고 집을 빠져나왔다.
부모의 피가 묻은 옷과 흉기 등을 폐기한 그는 광주 여자친구 집, 장흥 등을 돌아다니다 28일 숨진 부모가 발견된 뒤에야 태연히 집으로 돌아왔다. 모든 사실이 밝혀진 뒤 김씨는 뒤늦은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는 형사에게 “돌이킬 수 없지만 후회하고 있다. 부모님께 죄송하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장검증 당시에도 집안 곳곳에 남아 있는 부모의 혈흔을 보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처럼 범행동기와 범행과정이 모두 밝혀진 뒤에도 의문은 남았다. 우발적인 살인사건이라기엔 시신의 훼손 정도가 너무나 심각했던 것. 경찰에 따르면 아버지의 시신은 머리 부분이 깊게 함몰돼 있었고 어머니의 시신은 복부와 옆구리 등 수십 군데가 찔려있었다. 이 점에 미뤄 경찰은 또 다른 살인동기가 있었는지에 대해 조사를 벌이고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훈훈한 소식이 들려야 할 연말에 벌어진 존속살인 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갈수록 흉악해지는 존속살인범죄를 막을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국이 외국에 비해 최대 5배나 존속살인비율이 높다는 연구결과 역시 우려를 높이고 있다.
강원지방경찰청 검시관 등이 한국법과학지에 발표한 ‘살인사건 중 존속살해와 정신 분열의 연관성 분석’이란 논문에 따르면 2008년 1월부터 2009년 6월까지 국내에서 발생한 1734건의 살인사건 중 존속살인은 72건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체 살인사건의 4.2%를 차지하는 수치다. 그러면 외국의 경우는 어떨까. 논문에 따르면 미국은 2%, 프랑스는 2.8%, 영국은 1% 등으로 한국에서 많게는 5배에 달하는 존속살인 사건이 벌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정신분열이 원인?
이 논문에서는 존속살인이 정신분열과 연관성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존속살인의 동기로 ‘정신분열’이 43.1%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언쟁 중 우발적 살인(19.4%)’ ‘계획적인 살인(4.2%)’ 등의 동기는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했다. 반면 일반 살인사건의 경우 정신분열증이 동기가 된 사건은 3%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패륜범죄가 늘어나는 또 다른 원인으로 가족의 해체를 꼽는다.
핵가족화가 자리 잡으면서 가족구성원 간 대화가 단절되고 가치관의 차이가 벌어지는 등 가족 간의 연대의식이 상실돼 가족을 상대로 거리낌 없이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 또 부모를 상대로 한 범죄의 경우 1차적으로 자녀 양육 과정에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한다. 문제 있는 자녀에겐 문제 있는 부모가 있다는 것이다. 경제난도 패륜범죄의 증가를 부른다는 분석이다. 특히 최근 벌어진 패륜범죄가 대부분 돈을 노렸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