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2팀] 박정원 기자 = 서울 서남권 일대를 공포로 몰아넣으며 20년간 미제로 남아있던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이 드디어 특정됐다. 범인은 사건 당시 범행 현장 인근 건물의 관리인으로 일했던 60대 남성 A씨로 밝혀졌다.
특히 이번 수사 결과, 대중에게 이 사건과 동일범의 소행으로 강력하게 인식돼온 이른바 ‘엽기토끼 신발장 살인 사건’과는 전혀 무관한 별개의 사건임이 확인돼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단 형사기동대는 21일 브리핑을 통해 “2005년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의 피의자로 당시 60대였던 A씨를 특정했다”고 밝혔다.
2005년 6월과 11월, 신정동 주택가에서 20대 여성 B씨와 40대 여성 C씨가 각각 쌀 포대와 비닐에 싸인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 당시 두 피해자의 시신을 묶은 끈은 섬세하고 정교하게 매듭 지어져 있었는데, 이는 범인을 특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됐다.
사건 직후 양천경찰서는 전담팀을 꾸려 8년간 현장 증거물 감식, 시신에서 발견된 모래 성분 분석, 포대와 비닐 유통 경로 추적 등 광범위한 수사를 벌였으나 끝내 피의자를 특정하지 못했고, 사건은 2013년 6월 장기 미제 사건으로 전환됐다.
반전은 2016년 서울경찰청 미제 사건 전담팀이 기록을 넘겨받으며 시작됐다. 수사팀은 2020년 발전된 유전자 분석기법을 통해 1·2차 사건 피해자의 속옷과 노끈에서 검출된 DNA가 동일인의 것임을 확인했다. 두 사건이 한 사람의 소행임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다.
경찰은 이를 바탕으로 수사망을 좁혀갔다. 동일 수법 전과자, 기지국 통신 내역, 신정동 전·출입 기록 등을 분석해 추려낸 수사 대상자만 무려 23만1897명에 달했다. 인터폴 공조를 통해 중국인 용의자 가능성까지 열어두고 DNA를 대조했지만 소득이 없자, 경찰은 사망자로까지 수사 범위를 넓혔다.
경찰은 ▲신정동 거주 및 직장 경력 ▲설비·봉제업 등 끈을 다루는 직종 ▲독립된 작업 공간 보유 ▲3회 이상 전과 ▲부자연스러운 사망 원인 등의 까다로운 프로파일링 기준을 세워 사망자 56명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이 과정에서 양천경찰서 기록보관실을 3차례나 정밀 수색한 끝에, 2006년 2월 강간치상 혐의로 체포됐던 A씨의 기록을 찾아냈다. A씨는 1·2차 사건 발생 장소인 빌딩의 관리인으로 근무했으며, 과거에도 성범죄 등 강력범죄 전과가 3차례나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A씨는 이미 2015년 7월 암으로 사망한 뒤 화장돼 유골조차 없는 상태였다. 수사가 다시 난관에 봉착했지만, 집요한 수사는 계속됐다.
A씨가 생전 다녔던 병원과 검사 업체 등 40곳을 탐문 수사한 끝에, 한 병원에서 조직검사 등을 위해 보관 중이던 A씨의 ‘파라핀 블록(인체 유래물)’과 슬라이드를 찾아냈다.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이 검체를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결과, 올해 8월 사건 현장 증거물 DNA와 일치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주변인 진술도 이를 뒷받침했다. 경찰이 A씨와 함께 수감생활을 했던 재소자들을 탐문한 결과, “A씨가 60대임에도 180cm의 건장한 체격이었으며, 노역 당시 노끈 매듭을 매우 깔끔하고 정교하게 묶었다”는 결정적인 진술을 확보했다.
또 2006년 2월 A씨에게 성범죄를 당할 뻔했던 피해자를 재조사해 범행 수법의 유사성도 확인했다.
이번 발표에서 경찰은 대중들이 ‘신정동 사건’의 핵심 단서로 알고 있던 ‘엽기토끼 스티커’와의 관련성에 선을 그었다. 결론적으로 2005년 신정동 연쇄살인 사건의 진범 A씨는 엽기토끼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엽기토끼 사건은 2006년 5월, 신정역 인근에서 납치됐다가 탈출한 생존자가 “신발장에 엽기토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고 증언하며 알려졌다. 시기와 장소가 비슷해 세간에는 동일범의 소행으로 굳어져 있었다.
하지만 경찰 수사 결과, 엽기토끼 목격담이 나온 2006년 5월 당시 진범 A씨는 이미 다른 강간치상 혐의로 체포돼 구치소에 수감 중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물리적으로 범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동안 20년 가까이 ‘엽기토끼=신정동 연쇄살인’으로 잘못 알려진 대중의 인식을 이번에 확실히 바로잡은 셈이다.
경찰 관계자는 “방송과 언론을 통해 두 사건이 혼재돼 알려졌지만, 명백히 다른 범인의 소행”이라고 설명했다.
경찰은 A씨가 이미 사망한 만큼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할 예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살인범은 저승까지라도 쫓아가 잡는다’는 각오로 수사에 임했다”며 “남은 장기 미제 사건들도 끝까지 규명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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