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호 교수의 대중범죄학> ‘피해자 사법’ 통한 ‘사법 정의’

  • 이윤호 교수
2025.05.17 00:00:00 호수 1532호

범죄를 예방하고 통제하는 전통적 제도를 우리는 ’형사사법(Criminal Justice)‘이라고 부른다. 이는 범죄자(Criminal) 정의, 범죄자 사법을 의미한다.



그간 국내 형사사법 제도는 가해자·범죄자 중심으로 이뤄졌다. 범죄자에게 죄에 상응하는 법의 심판을 내리면 ’사법 정의‘가 실현됐다고 말한다.

다만 죄에 상응하거나 죄보다 훨씬 무거운 처벌을 내렸다고 해서 국가나 사회가 할 일을 다했다고 볼 수 있을까? 물론 전통적인 ‘형사사법’ ‘범죄자 사법’ 틀에서 보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봐야할 것이다.

사법 정의가 실현되더라도 바뀌지 않는 사실이 있다. 바로 피해자다. 가해자가 상응하는 처벌을 받아도 피해자가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피해를 당한 그대로인 것이다. 이래도 우리는 사법 정의가 실현됐다고 할 수 있을까?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국가는 범법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워 죄에 상응하는 처벌을 내린 것으로 사법 정의 실현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피해자는 당사자임에도 자신의 역할을 검사라는 국가가 대신하는 과정에서 주변인으로 전락하게 된다.

사법 절차에서 별다른 역할을 할 수 없고, 권한이 주어지지 않는 그야말로 ‘잊힌 존재(Forgotten being)’에 불과할 뿐이다.


또 피해자는 피해를 회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법 절차를 거치면서 2차 피해를 당하기도 한다. 반면 가해자는 자기 주도하에 변호인의 조력을 받으면서 모든 사법 절차와 과정에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충분히 낼 수 있다.

이런 현실이 과연 정의로운 것인가. 가해자는 유죄가 확정되고 수형생활을 하더라도 의료·교육·훈련 등 최대한 인권이 보장되는 처우를 받는다. 피해자는 범죄로 인한 치료비조차 스스로 부담해야 하고, 피해 회복을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치료 및 상담조차 받기 힘든 게 현실이다.

우리 사회는 이처럼 ‘부정의(Injustice)’한 기현상을 정의로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전통적으로 범죄는 국가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졌고, 당연히 국가가 범죄의 당사자가 됐으며, 사법제도는 국가와 피의자 간 적대적인 대심제도로 운영됐다.

개인 피의자의 인권과 권리가 침해받지 않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 국가에 동등하게 대응할 수 있도록 피의자에게 최대한의 권한과 권리를 부여했다.

그러나 범죄가 국가에 대한 도전이나 위해만 있겠는가. 절대다수의 범죄는 개인 간 갈등과 충돌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국가가 피해자를 대신하는 것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직접 피해 입은 당사자보다 국가를 대신하는 검사가 피해를 잘 이해하고 피해자를 잘 대변할까? 굳이 ‘수처작주 입처개진(어디서나 주인으로 행동하라)’을 언급하지 않아도 대답은 명료할 것이다.

범죄에 대한 궁극적인 정의 실현을 도모하려면 가해자의 죄에 상응하는 처벌과 피해자가 겪은 피해의 회복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피의자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피해자의 권리가 보장돼야 완전한 사법 정의가 실현되는 것이다.

물론 피해자학에서는 피해자의 역할과 책임을 논하기도 한다. 당연히 전적으로 피해자의 책임인 경우도 가해자보다 피해자가 더 비난받는 경우도 없지 않다.

그러나 대다수 피해자는 범죄가 발생한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로 변을 당했을 뿐이다. 불행하고 완전히 무고한 사람, 그래서 아무런 책임이 없음에도 잊힌 존재로서 아무런 역할과 권리가 없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부정의다.

피해자가 사법 절차와 과정에서 잊힌 존재가 아닌 당사자이자 주체로서 권리를 누리는 일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현안이다. 사법 절차가 피해의 회복이 우선되는, 피해자를 중심에 둔 ‘피해자 사법(Victim Justice)’으로 전환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이윤호는?]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명예교수
고려사이버대 경찰학과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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