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음식에 장난을 치는 기업의 두둑한 ‘배짱’이 도마에 올랐다. ‘먹거리 파문’관련 해당업체의 늑장 대응이 화를 키우고 있다는 지적이다. 식품업계는 그동안 이물질 사태가 벌어지면 즉각 수습에 나서지 않고 뭉그적대다 달랑 사과문만 발표하는 데 그쳤다. 이번 멜라민 파문도 마찬가지다. 팔짱을 끼고 ‘버티기’로 나오다, 이제 ‘배째라’식이다. ‘나몰라라’하는 업체들의 수수방관에 소비자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일이 터질 때마다 반복되고 있는 기업의 늑장 대처 실태를 되짚어봤다.
일단 버티기…그리고 호미 대신 가래로
1982년 10월 미국 시카고. 유명 진통해열제 ‘타이레놀’을 복용한 환자 7명이 갑자기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제조사인 존슨&존슨의 시장점유율은 30%대에서 10%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그러나 이 회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즉각 원인 규명에 나섰다. 언론 매체를 통해 소비자들에게 “타이레놀을 복용하지 말라”고 알리는 동시에 미국 전역에서 판매되고 있는 타이레놀을 모두 회수해 폐기처분했다. 그 비용만 무려 2억5천만달러(약 2천7백억원)에 달했다.
당국의 조사 결과 제품 제조와는 전혀 상관없는 한 정신병자가 타이레놀을 몰래 훔쳐 독극물을 투입한 후 진열대에 다시 갖다 놓은 것으로 밝혀졌지만, 이물질을 넣지 못하도록 용기를 새로 제조하고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등 존슨&존슨의 자구책은 계속됐다. 그 결과 존슨&존슨은 추락한 명성을 회복했고, 시장점유율도 순식간에 이전 수준으로 올라섰다. 이 사건은 타이레놀 제품은 물론 존슨&존슨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높이는 계기가 됐다.
지난달 일본. 농약 성분이 남아 있는 오염된 공업용 쌀이 식용으로 유통된 것으로 조사되자 이를 납품받은 회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일본 정부는 건강문제를 일으켰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밝혔지만, 맥주업체 1위인 아사히맥주는 재빠른 대응에 나섰다. 문제의 쌀로 만든 자사의 소주 제품 전량을 자진 회수한 것.
아사히맥주는 지난 6월 출고된 ‘카노카’ 등 4가지 상표 65만병을 회수했으며, 회수비용으로 15억엔(약 1백67억원)을 쏟아 부었다. 아사히맥주 측은 “자체 조사 결과도 살충제가 남아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지만, 신뢰 회복 위해 자진리콜을 실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95년 3월 구미. 삼성전자 구미사업장에서 ‘불량제품 화형식’이 진행됐다. 당시 불량 휴대전화가 유통되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이건희 전 회장은 “전량 회수하라. 그리고 공장 사람들이 전부 보는 앞에서 태워 없애라”고 지시했다.
삼성전자는 곧바로 제품 회수에 들어갔고, 5백억원대의 제품이 한순간에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이 일화는 삼성전자를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케 한 원동력이 됐다.
‘신뢰·윤리 경영’의 사례들이다. 글로벌 경쟁시대에 신뢰와 윤리는 기업 운명을 좌우할 만큼 선택이 아닌 필수다.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들이 먹거리 파문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는 요즘 신뢰·윤리 경영은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대책과 해결보다 사건의 본질을 숨기는데 급급한 실정이다.
끊이지 않는 ‘분유 파동’이 대표적이다. 2006년 9월 국내 분유업체 제품에서 대장균의 일종인 ‘사카자키균’이 검출, 한바탕 소동을 겪었다. 이 제품들을 전량 회수한 각 업체들은 다른 제품에서 사카자키균을 완전히 제거했다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지난해 4월 이유식 제품에서 또다시 사카자키균이 검출된데 이어 9월 한 업체의 조제분유에서 역시 사카자키균이 검출되기도 했다.
앞서 2000년 8월 중국산 ‘납 꽃게 파문’때도 업체들의 늑장 대응이 도마에 올랐다. 당시 해양수산부는 “전량 회수해 폐기하겠다”고 발표했지만, 회수까지 3달이나 걸렸다. 논란이 증폭되는 사이 중국산 납꽃게가 수입업자들의 은폐로 대량 유통되는가 하면 중국산 꽃게의 회수 및 폐기처분 조치 직후에도 여전히 판매돼 충격을 더했다.
지난해 2월 ‘식용유지 파문’도 상황은 비슷했다. 식약청은 옥수수유와 참기름, 들기름 등 10여개 제품에서 발암물질로 알려진 ‘벤조피렌’이 허용 권고기준을 초과, 해당업체에 자진 수거를 요청했으나 수거율은 지지부진했다. 업체들이 강제로 수거할 의무가 없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나중에 일부 제품은 회수되지 않은 채 시장에서 팔린 것으로 확인되기도 했다. 식약청도 자진 회수 권고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벤조피렌 발생을 자율적으로 줄이도록 촉구하는 선에서 사건을 넘겼다.
올 들어 먹거리 비상등에 불을 켠 ‘생쥐깡’과 ‘칼날 참치’파문도 기업들의 안이한 대처가 화를 키웠다. 지난 3월 농심은 1971년 첫 선을 보인 이후 ‘국민 간식’으로까지 불리며 오랫동안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새우깡에서 생쥐머리로 추정되는 이물질이 검출돼 창립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문제는 사건을 ‘쉬쉬’한 농심의 태도다.
농심은 이물질이 나온 사실을 알고도 한달 동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2월 말 충북의 한 소비자가 슈퍼마켓에서 산 새우깡에서 1.6㎝ 크기의 털이 난 이물질을 발견하고 회사 측에 통보했지만, 농심은 최근 식약청이 이 문제를 발표한 뒤에야 내부조사 사실을 털어놨다. 어이없는 사고를 터트리고도 이를 은폐하려다 위기를 자초한 셈이다.
‘칼날 참치’생산업체인 동원 F&B도 2006년 11월 참치캔에서 커터 칼날이 나왔다는 소비자 불만신고를 받았지만,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사건을 덮으려 했다. 동원 F&B는 이를 신고한 소비자에게 참치 선물세트를 주며 사태 무마를 시도했다. 제품 수거조치도 없었다. 동원 F&B는 지난 3월 참치에서 또다시 칼날이 나왔으며, 이후에도 여러 제품에서 잇달아 이물질이 발견돼 진땀을 흘렸다.
유해물질 식품업체 안이한 대응 도마…사건 때마다 반복
‘나몰라라’수수방관에 소비자 속수무책 “불신만 키운다”
“국민들은 음식과 걱정 같이 먹는다”
더욱이 이 두 제품은 대부분 회수되지 않은 채 소비·유통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새우깡과 참치캔의 회수율은 각각 7.2%와 36.4%에 그쳤다. 특히 농심은 행정기관이 명령한 회수량도 이행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생쥐깡’회수량은 지난 4월 식약청이 시행한 ‘위해식품 회수지침’시행 이전의 평균 회수율인 10.8%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이같이 국내에서 ‘위해’판정을 받은 식품 회수율은 극히 저조하다. 국회 보건복지가족위원회 소속 한나라당 손숙미 의원이 공개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위해 식품 회수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부터 올 6월까지 수입산 과자류 제품 가운데 8백64.5t이 위해 식품으로 분류돼 회수 조치가 내려졌지만 회수 물량은 9.9%에 불과했다. 미 식품의약청(FDA)의 위해식품 회수율은 평균 36% 정도다.
올해의 경우 6월까지 위해 식품으로 적발된 수입 과자 81.3t이 유통됐지만 회수량은 1.2%(1t)에 그쳤다. 올해 적발된 과자류 가운데 캔디와 캐러멜 등에서 발암물질 논란이 있는 ‘시클라메이트’가 검출된 경우도 38.6t에 달했지만 회수량은 0.7t에 머물렀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먹는 음식에 장난치는 업체들은 국민 건강은 뒷전이고 어떻게든 사태 수습에만 급급하다”며 “제조회사가 진솔하게 경위를 파악하고 문제가 있으면 리콜 등으로 적극 대응해야 소비자들의 신뢰가 회복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번 ‘멜라민 파동’에 휩싸인 식품업계의 대응도 별반 다르지 않다. 멜라민 검출 제품이 늘어나면서 전국이 들썩거리고 있는데 반해 업체들의 느슨한 위기관리가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것.
해태제과 등 업체들은 멜라민 파문 초기 “자사 제품은 문제가 없다”고 하나같이 발뺌했다. 그러다 국내 식품에서도 멜라민이 검출되자 돌연 입장을 바꿨다. 손을 놓고 있다가 뒤늦게 전량 회수에 나선 것. 해태제과는 3천5백여명의 전 직원을 동원해 제품을 거둬들여, 9월말 현재 98% 정도 물량을 회수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대형마트 등을 제외한 영세 점포 등엔 아직도 버젓이 팔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롯데제과도 당초 “중국산 제품은 1개뿐”이라며 멜라민 식품 유통 사실을 숨기다 식약청의 판매금지 품목에 일부 제품이 포함되자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소비자단체 관계자는 “업체들은 관련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유통 물량도 회수해 폐기하고 있지만, 그전에 판매된 제품들은 이미 소비자의 입속에 들어간 상태”라며 “업계의 ‘쉬쉬 관행’이 반복되자 소비자들은 해당업체가 생산하는 다른 제품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다”고 꼬집었다.
이에 따라 위해 식품 관련 법·규정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 1일 한나라당 이종혁 의원이 위해식품사범에 대한 벌칙을 강화하고 시급히 회수를 하도록 식품위생법 개정안을 발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식약청은 위해 우려 식품으로부터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위해 권장규격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법적 규제력은 없다.
이 의원이 발의한 식품위생법 개정안에 따르면 식품회수 위반 및 허위보고에 대해 현행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의 벌금형에서 최대 10년까지 징역형을 받을 수 있게 했으며 벌금도 2억원으로 늘렸다. 이 의원은 “현재 식품안전사고를 일으킨 업체에 대해서 벌금이나 행정처분 등을 관대하게 처벌하는 것이 대부분이여서 식품안전사고의 재범률이 높다”며 “식품안전사고가 끊이지 않는 것은 관련 법상 사전규제와 사후 징벌 모두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식약청도 저조한 회수율을 높이기 위해 신속한 회수시스템의 구축 등 이물사태 재발방지를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식약청은 “위해 우려 식품을 회수하지 않거나 은폐한 영업자에 대한 행정처분과 형사고발을 강화할 것”이라며 “위해식품의 원인규명과 신속한 회수를 위해 식품이력추적제도와 회수대상 식품을 정부가 직접 회수해 폐기처분하고 그 비용을 영업자에게 청구하는 행정대집행제도의 도입도 추진된다”고 설명했다.
‘먹거리 쇼크’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식품업계를 바라보는 소비자들의 불신 또한 되풀이되고 있다. 그동안 먹거리 사고가 터지면 그때뿐이었다. 언제까지 국민들은 음식과 걱정을 같이 먹어야 할까.
‘불량품 쉬쉬’쪽박찬 회사들
“소비자 우롱은 폐업 지름길”
자사의 불량품을 쉬쉬하다 한순간에 쪽박 찬 회사들도 하나 둘이 아니다.
일본 미쓰비시자동차는 2000년 일부 차량의 결함을 알고도 소비자들의 리콜 요구와 클레임을 감춰오다 내부 고발로 이런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미쓰비시는 무려 76만여대 리콜을 실시했다. 그러나 이는 판매 부진으로 이어져 2000년 3천6백억엔 적자를 기록했고, 주가도 40%나 폭락했다.
2004년 6월엔 주력 승용차와 트럭·버스 등의 차량 결함 은폐 사실이 들통 나기도 했다. 그해에만 일본 내 판매가 40%나 줄어들었다.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된 셈이다. 미쓰비시의 부도덕한 위기관리는 기업 이미지를 크게 훼손시켰고, 고객의 신뢰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일본의 햄·소시지 시장의 80% 가량을 차지했던 유키지루시식품회사는 2002년 문을 닫았다. 호주산 쇠고기를 일본산으로 속여 팔다 적발됐기 때문이다. 소비자가 등을 돌리자 파산을 면치 못했다.
1990년대 초반 급부상한 미국의 엔론 역시 분식회계를 일삼은 대가로 2001년 12월 문을 닫았다. 이 회사는 이익 부풀리기를 통한 분식회계와 이를 숨기기 위한 정·관계로비 등으로 시장의 신뢰를 잃어 결국 파산했다.
시민단체 관계자는 “사고를 숨기기에 급급해 잘못을 은폐하다 더 큰 위기를 자초하는 경우가 일어난다”며 “이런 안이한 조치는 소비자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결국 매출에도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