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기획> 일제강점기 4인의 지주일기 최초 공개

“상투 잘리는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일제 말기에 들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전시체제하의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받았다. 조선인으로선 처음 겪는 전시체제하의 일상생활은 끊임없는 동원과 수탈로 인해 의식부터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통제받았다.

특히 조선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라는 역할이 주어져 타 식민지보다 더 깊숙하게 전쟁체제에 편입됐다. 이는 각종 공출, 징용, 징병, 부역, 헌금 등 제도로 정착돼 조선사회의 뿌리인 촌락과 농민의 일상까지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사회는 90% 이상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고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서민들 역사 복원 
창씨개명과 정치동원

그간의 일제강점기 연구는 식민당국자가 발행한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식민 통치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연구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 <일기로 구성한 일제말 전시체제하의 일상>(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이라는 연구논문이 나와 일제강점기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을 시도했다. 특히 1930∼40년대에 전쟁 수행을 위해 수립한 지배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연속성을 띠고 오랫동안 운영된 점, 현재에도 남북한 모두 그러한 구습과 제도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논문에 등장하는 일기는 모두 4편으로, 일기의 저자 중 3명은 보수적 유생이자 중소지주이고, 나머지 1명은 식민지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학적 감성을 가진 폐병을 앓는 신식 지식인이다.

정강일기(1938∼1948)의 주인공 김주현은 경제력과 구학력을 갖춘 유지다. 치재일기(1911∼1962)의 주인공 김인수(1892∼1962)는 평생 동안 전통 의복을 고수하며 양복을 비롯한 모든 서양문물을 거절했다.

8·15 이후에도 직접 짚신을 삼아 신었으며, 손자가 학교에서 상투가 잘려왔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인수는 1925년 세상을 한탄하고 충북 중원군 동량면 하곡의 개천산으로 들어가 28년간 두문불출했다.

관란재일기(1912∼1947)의 저자 정관해(1873∼1949)는 보수적 유생이었지만 용인지역이 세상의 변화와 소식을 빠르게 수용하는 곳이어서 세상의 변화에 민감했다.

추탄일기(1936∼1942)를 쓴 박정락(1914∼1943)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과 야학활동을 하다가 1932년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 외곽조직인 Y그룹 활동과 관련해서 함께 체포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독서와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다가 1943년 30세 때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일기를 통해 식민지기 농촌의 인력동원(징용, 부역, 징병)과 물자동원(강제저축, 공출, 헌금), 창씨개명 등의 양태를 엿볼 수 있다.

정강일기의 1941년 11월 기사에 의하면 “집집마다 가는 모래 1석, 물 1동이를 문 옆에 비치하고 일본 국기를 게양하라 했다. 물어보니 경방대 방공연습이라 한다. 방공이란 것은 외국 비행기가 내공하여 폭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니, 과연 내공한다면 어찌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민심을 소동케 하는 것일 뿐이다”라며 염려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방공(비행기 폭탄) 훈련을 확대하면서 방공업무가 농촌 주민의 일상 속에 연래행사로 강요됐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골 유생에게 이것은 생경한 행정 간섭이었다. 현재에도 실시되는 방공훈련이 태평양전쟁 이후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집회와 시국동원에 대해선 치재일기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각종 시국좌담회, 중일전쟁 승전축하회, 싱가포르 함락 축하회, 한구 함락 축하회, 군인출정 환송식 등의 시국집회와 가마니짜기 장려회, 양잠강습회, 식량좌담회 등의 생산 관련 모임이 나타난다.

보수적 유생 3명·신식지식인 1명 기록서
일제 수탈에 찌든 모습 생생하게 나타나

일기의 주인공은 전쟁 초기엔 시국집회에는 물론이고 유림간담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장이 불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한 뒤부터는 시선을 의식해서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치재일기는 창씨개명에 대해 주인공 김인수가 최대한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인수는 “소위 창씨라 하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면에서 여러 차례 창씨를 강요하고 협박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주재소가 나섰다.

창씨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권력과 일기의 주인공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주인공의 신변에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이후의 일기에서도 창씨 때문에 주재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내 창씨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인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일본식 이름이 없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취직을 하거나 배급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총독부는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고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이 새 이름 안에 자기의 조선이름, 고향, 중요한 가문의 특징을 기발한 방법으로 반영해 넣었다.
 

힐디 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2011, 산처럼) 속 구술자 중 한 명인 김원극(1918년생)씨는 여러 차례 종친회를 열어 창씨개명에 따를지 여부를 놓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고 진술한다. 세 번째 회합 만에 집안 큰 어른의 결정으로 창씨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적어도 우리 지역(함북)에선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징용의 최우선 대상이 됐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가네쿠니(金國), 가네자와(金澤), 가네다(金田), 최(崔)씨는 야마모토(山本), 이(李)씨는 기모토(木元)라고 이름 짓는 식으로 자기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호하고자 했다.

강제적 동원 후
죄인 다루듯 관리

정강일기의 주인공 김주현은 노동력의 강제동원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월19일자 일기에 따르면, “17∼55세의 조선 인민을 모두 저들의 모집 징용 장부에 기재하였다. 그 명목은 병정이요, 군속이요, 역부요 하며, 연령징용, 일반징용, 특별징용의 구별이 있다. 여자 역시 14∼25세로 미혼인 자, 과부인 자,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자는 방직공장과 군부조수로 징용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역시 끌어가니 이는 오랑캐요 짐승”이라고 해 강제동원의 유형과 실태를 잘 정리했다.

치재일기에선 조선총독부의 선전용어인 ‘산업전사’라는 명칭으로 동원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1941년 5월22일 장남이 산업전사로 부역을 나간 것이 최초의 기사였고, 1942년부터는 산업전사 선발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됐다.

8월 이강길이 산업전사로 선발됐으나 나이가 많아 불합격한 이야기나 5형제 중 장남을 제외한 4형제 모두 일본으로 모집돼 간 집 이야기, 남양군도로 끌려간 이웃집 아들은 생사불명이고, 남겨진 부인과 딸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내용 등 산업전사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관란재일기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937년에도 강제적인 동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의 해저철도 건설에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청자 중 가지 않으려는 사람을 경찰이 강제로 데려갔다고 썼다. 문촌리(관란재일기 주인공이 사는 마을)의 국내동원은 주로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정강일기에선 집안 머슴과 둘째 아들, 막냇동생이 징용령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징용을 갔다. 일제의 징용은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렸다. 징용이라는 이름 앞에선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월 평균 1회 이상 징용 관련 내용이 일기 속에 등장한다. 관란재일기와 치재일기는 모두 1944년 10월부터 산업전사나 근로보국단이 아니라 ‘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강일기는 “1943년 7월 저들의 북선 역부모집령이 몹시 심하여 소위 면리원이라는 자가 조석간에 마을마다 수색하여 저들의 공장에 부역할 만한 자(18세 이하 30세 이상자. 북선, 남양 등 정해진 바를 알지 못한다)를 보면 마치 죄인 다루듯이 바로 잡아간다. 이 같은 폐해가 2∼3달 가면 본지의 농사를 지을 자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적었다.

“창씨 안하면 징용 대상”
의식주 통제 실상 담아

치재일기의 1938년 12월엔 “오늘은 소위 군용모피의 독촉일이다. 저녁에 떠들고 요란을 피워 오늘 어쩔수 없어 기르던 개를 삶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가마니, 개가죽, 돼지가죽, 백미, 대두, 면화, 누에, 소, 벼, 보리, 철기 등 전쟁물자를 민간에서 공출했다.

특히 군용 가마니를 할당 받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마니 짜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마니 짜기는 중일전쟁 전부터 부업으로 장려돼 왔으나 전쟁 이후엔 군수용 가마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군용가마니 공출은 2차대전 내내 사람들을 괴롭혔다.

가마니 짜기가 완료되자 ‘앓던 이 빠진 기분’이라고 쓴 관란재일기의 주인공 정관해의 심정은 그 고충을 잘 표현한 것이다. 식민당국은 가마니공출을 마을 단위로 할당한 뒤 주민들 중 완수하지 못한 분량은 완료한 집에 다시 할당했다.

김인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매일 가마니를 짜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적었다. 양반인 그가 가마니를 짜는 데 익숙하지 못해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마니공출을 완료하지 못한 집은 지붕을 새로 이는 것을 금지했다.

정강일기 1942년 9월엔 “군면이원이 또 모미(보리와 쌀)를 수색하러 출장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땅을 파서 5∼6일의 양식을 묻었다. 모두 가족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다행히 저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오호 고소하도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숨겨둔 곡물이 발견된 집은 호주를 잡아갔다. 공출량이 부족하면 주재소에 고발하겠다고 하거나 태형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공출에 비협조적인 집은 징용을 보내는 방법도 썼다. 박창서가 반드시 공출 때문에 징용을 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민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전쟁에 따른 상시적 물자부족은 촌락공동체 내부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관지리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한 편이었다. 변종근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과 옷을 모두 도난당하자 모두 어려운 형편에도 십시일반 해 도와줬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도 누군가가 곡식을 숨겨둔 것을 주재소에 밀고했다. 관란재일기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견된다.

정강일기에선 막냇동생 김주해를 비롯해 김한표, 변종배, 백민교 등의 기사가 있다. 사위 김한표는 벌금을 내지 못해 징용당한 경우다. 1944년 2월29일자의 일기를 보면, 하곡마을에서 징용대상자 전체가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주재소는 가족을 감금해서 도망자가 출두하도록 했다. 출두하지 않은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을 끌고 가서 할당량을 채웠다.

정강의 장남도 징용을 피해 도망쳤다. 장남은 1943년11월에 황실불경죄로 체포돼 이듬해인 44년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7월에 ‘전과자 징용령’으로 소환장을 받자, 몸을 피했다. 장남은 도피 도중 간간이 집에 들렀으나 연말까지 숨어있었다.

공포의 할당량
소극적 저항도

징용자들의 도주는 신문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유포시키는 기능도 했다.

정강일기 1945년 7월7일자 일기를 보면 징용갔던 “변한희가 일본 동경의 공장에서 도망쳐 와서 말하길, 동경은 영미의 폭격을 받아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한다. 듣고 보니 통쾌하지만, 왜놈들 죽는데 조선인도 죽으니 비통하다. 질아, 창흠, 병흠 소식이 거의 끊겨 우울하다”고 쓰고 있다. 전쟁 말기의 보도 통제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징용을 다녀온 이가 일본 본토의 공습을 전해준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기에서 쉽게 확인되는 각종 국방헌금과 여러 유형의 공출은 전시체제기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며 “인적, 물적 수탈과 통제 하의 일상이 모여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형성됐으며, 이것이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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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단독] 진주교대 교수 논문 표절 의혹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대학의 교수 수준은 강의의 질과 비례한다. 학교는 학생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고 있다. 과거와 비교해 그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상아탑’으로 불리는 대학의 본질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인재 양성, 특히 초등학생을 가르칠 선생님을 배출하는 ‘교대’라면 그 본질을 향해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진주교육대학교(이하 진주교대)에서 2020년 시작된 교수 채용 논란이 6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932년 공립사범학교로 시작해 100여년 동안 초등교육 발전에 힘을 보태 온 학교로서는 불명예스러운 논란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진주교대가 마치 ‘제3자’인 것처럼 멀찍이서 논란을 지켜만 보고 있다는 점이다. 첫 단추 잘못 끼웠나 2020년 10월 진주교대는 미술교육과, 수학교육과 등에 각 1명씩 총 4명의 교수를 채용하기 위한 계획을 수립했다. 2021년 1학기 임용을 목표로 같은 해 11월부터 채용 절차가 시작됐다. 교육공무원법에 명시된 결격사유가 없어야 한다는 일반 요건과 함께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자격 요건이 붙었다. 전형은 ▲자격 심사 ▲전공 적부 및 전공 심사 ▲경력 심사 ▲면접 심사(심화 과정) ▲면접 심사(최종) 등으로 이뤄졌다. 논란은 미술교육과 교수 채용 과정에서 불거졌다. 진주교대는 채용 계획에서 미술교육과 전공 분야를 ‘도자공예 또는 미술교육(도자공예)’으로 정했다. 도자공예 교수가 정년 퇴임을 앞두고 있어 그 후임자를 뽑기 위한 채용이었다. 문제는 미술교육과에 최종 합격한 A 교수가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요시사> 취재에 따르면 A 교수는 진주교대에서 초등교육을 전공(학사)했고, 석사 학위는 초등미술 교육(진주교대), 박사학위는 디자인학(광주대) 전공으로 받았다. 미술교육과 채용에 지원하려면 ‘전공 분야별 박사학위’ 즉, 도자 관련 전공 박사학위가 있어야 하는데 그가 자격 요건에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 A 교수의 전공 적부 논란은 면접 심사 과정에서 언급됐다. 면접에 들어간 한 심사위원이 A 교수의 전공이 채용 분야와 맞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 것이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면접 심사(5배수) 대상자 명단’ 자료에 따르면 A 교수를 제외한 4명의 지원자는 학사, 석사, 박사 과정 등에 도자 관련 전공을 이수한 사실이 확인된다. 당시 면접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미술교육과 B 교수는 “전공 적부와 관련해 다시 심사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고 재심사가 이뤄지긴 했다”며 “그런데 첫 번째 전공 적부 전형에 참여했던 위원들이 재심사를 담당했다. 결과가 바뀔 리가 있겠나”라고 한탄했다. A 교수는 2021년 2월 최종 임용됐다. A 교수를 둘러싼 논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가 쓴 <프리미티비즘의 조형 표현 요소 및 특성을 통한 현대 도자 작품 연구> 논문이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광주대학교 대학원 디자인학 전공으로 박사 과정을 밟은 A 교수의 학위 논문이다. 2020년 6월경 논문 심사를 통과한 것으로 파악된다. 진주교대 교수 채용공고가 뜨기 3~4개월 전이다. 채용 과정에서 전공 적부 논란 임용 이후 추가 문제 제기됐다 2021년 3월, B 교수는 A 교수의 연구 부정행위(표절)를 광주대에 제보했다. A 교수가 해당 논문으로 광주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기에 검증도 광주대에서 진행해야 했다. 교육부 훈령 제449호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18조(연구부정행위 검증 절차)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를 검증하려면 예비조사와 본조사, 판정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이 절차를 총괄하는 게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위한 위원회 구성과 운영에 대한 심의, 의결 권한을 갖는다. 또 예비조사와 본조사에서 나온 결과를 승인한다. 제보를 받은 광주대는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를 소집했다. 황당한 지점은 광주대에서 A 교수의 논문을 두고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수차례 반복했다는 사실이다. B 교수가 마지막에 나온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결과를 두고 민사소송을 제기한 시점은 2024년 8월로, 처음 제보했던 2021년 3월 이후 무려 3년5개월이나 걸렸다. 그나마도 표절 여부는 여전히 판명 나지 않았다. 교육부의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제25조(판정)에 따르면 예비조사 착수 이후 판정까지의 모든 조사는 6개월 이내에 종료해야 한다고 돼있다. 물론 이 기간 안에 조사가 이뤄지기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연장도 가능하다. 하지만 광주대의 경우는 ‘절차상 하자’가 연이어 발생했다. 제보자나 피조사자 양측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재조사하는 일이 반복됐다. 2021년 8월 광주대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에 대해 만장일치로 표절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A 교수에게 의견 진술권을 부여하지 않은 점이 문제로 떠올랐다. 다시 말해 A 교수가 자신의 논문이 표절이 아니라고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이다. 결국 모든 조사는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2022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가 재구성됐는데 5월 예비조사와 8월 본조사에서 정반대의 결론이 나왔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 논문의 총 1234개 문장 중 425개(34.4%)가 표절로 의심되며 ▲특정인의 논문을 몇 페이지에 걸쳐 연속적으로 사용했고 ▲독창적인 부분을 적시해 달라는 요청에 피조사자가 답변을 회피하며 적극적 방어를 하지 않아 비교 대조표를 그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점 등을 근거로 표절로 판정했다. 거듭된 하자 조사만 4번 반면 본조사위원회는 “이 사건 논문은 ‘작품 논문’이라는 특성상 다른 분야와 같은 기준으로 표절 여부를 판단하기 쉽지 않다”며 “작품 논문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논문의 핵심 부분인 작품 그 자체에는 독창성이 인정되므로 논문 자체를 표절이라고 판정할 수 없다”고 했다. 두 번째 조사에서도 또다시 ‘하자’가 발견되면서 판정이 무효로 돌아갔다. B 교수는 피조사자인 A 교수가 심사위원 제척 여부를 이유로 외부위원 명단을 요청했고 실제 공개된 점, 제보자에게 의견 진술의 기회를 주지 않은 점 등의 절차상 하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 본조사위원회 보고서에 각 당사자의 진술 요지와 조사 결과 등이 반드시 포함돼야 하는데도 이 부분을 빠뜨리면서 실체상 하자도 발생했다고 강조했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법원에 본조사위원회 판정 효력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다. 이 건은 피고(광주대 측)가 “원고 측 이의를 받아들이고 기존 본조사 판정을 무효화하고 다시 본조사위원회를 소집하겠다”고 약속하고 B 교수가 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 2023년 세 번째로 소집된 본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을 표절로 판정했다. 의견서에는 ▲전체 1200여개 문장 중 출처 표시 없이 인용된 문장이 360여개로 과도하게 많은 점 ▲저자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부분이 많지 않은 점 ▲논문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제4장과 결론에서도 타인의 학술 논문과 내용이 유사하거나 출처 표시가 없는 문장이 다수인 점 등이 근거로 기재됐다. 하지만 이 결과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구성 문제가 대두되면서 전면 무효화됐다. ‘광주대학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설치 운영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학장, 교무처장 및 산학협력단장은 당연직으로 하고 교무처장이 위원장이 된다’는 조항이 있는데 이를 일부 준수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다시 해를 넘겨 2024년 6월 예비조사위원회는 표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놨다. 예비조사위원회는 A 교수의 논문이 박사학위 논문 심사를 통과했고, A교수가 KCI 논문 유사도 검사에서 1%의 유사도를 보인 결과서를 제출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저작위원회 “유사성 인정” 또 A 교수가 인용 표시를 하지 않은 부분이 타인의 아이디어나 창작물을 침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다른 저자의 논문 역시 다른 논문이나 저서를 그대로 따른 것으로 ‘독창적인 아이디어나 창작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표절이 아니라고 판정한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에서 승인했다는 점이다.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없다는 판정을 내리고 결론을 확정했다. 3년5개월여 동안 진행된 조사에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의 판정 승인이 떨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일단 표면상으로는 최종 결론이 난 셈이다. 첫 채용 공고 시기로 따지면 4년 가까이 이어진 논란은 B 교수의 반발로 법정에 가게 됐다. B 교수는 2024년 7월 광주대가 자신의 이의 신청을 기각하자 같은 해 8월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학교법인 호심학원을 상대로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 판정 무효확인 등’의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른다. 예비조사위원회의 결론을 승인한 부분과 본조사위원회가 불필요하다고 한 부분을 무효로 판단해 달라는 취지였다. 이 과정에서도 절차상 하자가 언급됐다. B 교수는 “광주대 연구윤리위원회 규정에 따르면 연구 부정행위에 대한 충분한 혐의를 인지했을 경우에 예비조사를 생략할 수 있고, 피조사자가 연구 부정행위 사실을 모두 인정할 경우 본조사를 생략하고 바로 판정을 내릴 수 있다”며 “또 연구윤리진실성위원회는 예비조사 결과를 확정해 판정할 근거가 없다. 본조사 결과만 승인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A 교수 논문에 대한 표절 여부도 제대로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비조사와 본조사를 거치는 과정에서 표절 판정이 엇갈린 만큼 저작권법, 연구윤리 확보를 위한 지침 및 한국연구재단이 제시하는 인용 방법 및 논문 표절 기준 등에 따라 A 교수의 논문을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설명이다. 실제 B 교수는 A 교수의 논문을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감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법원에 요청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저작권법 제112조에 따라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이다. 법원이 B 교수의 요청을 받아들이면서 한국저작권위원회는 A 교수가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표절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12편의 논문을 비교, 감정했다. 반복된 조사 엇갈린 판정 결국 법정 공방으로 번져 <일요시사>가 입수한 감정 결과서에 따르면 A 교수의 논문은 총 12편의 비교 대상 논문 중 총 11편에 대해 저작권법상 보호를 받는 창작적인 표현 형식을 상당 부분 복제하고 있다며 저작권법상 실질적인 유사성이 인정된다고 했다. 또 ‘단순히 학술적 아이디어나 이론적 사실을 공유하는 수준을 넘어 선행 저작자들이 자신의 학문적 관점과 예술적 주관에 따라 논리적으로 체계화한 문장 구조, 단어 선택, 서술 방식 등을 그대로 사용했다’ ‘외국 문헌을 연구자 본인의 시각으로 재해석해 요약하거나 번역한 문장의 경우에도 원저작자의 창작적 개성이 반영돼 저작권법의 보호 범위에 포함됨에도 불구하고 A 교수의 논문은 이를 무단으로 복제해 논문에 활용했다’ 등의 감정 결과를 내놨다. B 교수는 “저작권법 위반 여부는 표절보다 그 인정 범위가 좁다. 논문의 독창성을 저작권으로 인정해 그 부분을 침해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한국저작권위원회의 결론은 A 교수가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의 독창성을 인용 없이 가져다 썼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광주대의 운영 주체인 호심학원 관계자는 “소송 중인 사안으로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을 해왔다. 문제는 상황이 여기까지 흘러오는 동안 손 놓고 있는 진주교대의 태도다. A 교수의 박사학위 논문 표절 여부는 진주교대의 교수 채용과 밀접하게 얽혀있다. 채용 공고에서 지원 자격으로 박사학위 소지자가 명시됐던 만큼 논문 표절 여부는 이번 논란의 중요한 요소다. 표절로 판명되면 학위 자체가 취소되는 사례도 있어 A 교수가 진주교대 교수 채용에 아예 지원조차 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진주교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광주대와 B 교수 간의 소송 결과가 나오고 그에 따라 광주대가 조치한 뒤에야 행동을 취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진주교대 교무처 관계자는 “(학교가) 손 놓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라며 “소송이 진행 중인 만큼 결과를 기다리는 과정에서 법률 검토 등 내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B 교수는 “학교는 학생들의 수업권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저 누가 학교에 책임을 물을까 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학교 측에서 했다는 법률 검토도 현재 손 놓고 있는 학교의 행보가 나중에 직무유기로 문제가 될까 알아본 것이라고 한다. 교대는 학생들이 커리큘럼에 따라 수업을 신청해야 하는 구조라 교수에게 문제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학생들만 뒷전 됐다 그러면서 “광주대와의 소송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이라도 A 교수가 수업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해야 한다. 공무원의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직위해제’ 조치를 하지 않나.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 초등학교 교사를 길러내는 대학이다. 학교가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를 보여야 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한편, A 교수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드릴 말씀이 없다”고 답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