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특별기획> 일제강점기 4인의 지주일기 최초 공개

“상투 잘리는 순간 하늘이 무너졌다”

[일요시사 취재1팀] 신상미 기자 = 일제 말기에 들어 식민지 조선의 주민들은 일제가 일으킨 중일전쟁(1937)과 태평양전쟁(1941)으로 전시체제하의 고통스러운 삶을 강요받았다. 조선인으로선 처음 겪는 전시체제하의 일상생활은 끊임없는 동원과 수탈로 인해 의식부터 식생활에 이르기까지 통제받았다.

특히 조선은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라는 역할이 주어져 타 식민지보다 더 깊숙하게 전쟁체제에 편입됐다. 이는 각종 공출, 징용, 징병, 부역, 헌금 등 제도로 정착돼 조선사회의 뿌리인 촌락과 농민의 일상까지 질적으로 변화시켰다. 당시 사회는 90% 이상의 인구가 농촌에 거주했고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이었다.

서민들 역사 복원 
창씨개명과 정치동원

그간의 일제강점기 연구는 식민당국자가 발행한 자료를 중심으로 진행됐다. 식민 통치자의 시선으로 구성된 연구가 주를 이뤘으나 최근 <일기로 구성한 일제말 전시체제하의 일상>(김민철,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이라는 연구논문이 나와 일제강점기 평범한 사람들의 시선으로 ‘아래로부터의 역사 구성’을 시도했다. 특히 1930∼40년대에 전쟁 수행을 위해 수립한 지배체제는 해방 이후에도 연속성을 띠고 오랫동안 운영된 점, 현재에도 남북한 모두 그러한 구습과 제도가 남아있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

논문에 등장하는 일기는 모두 4편으로, 일기의 저자 중 3명은 보수적 유생이자 중소지주이고, 나머지 1명은 식민지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문학적 감성을 가진 폐병을 앓는 신식 지식인이다.

정강일기(1938∼1948)의 주인공 김주현은 경제력과 구학력을 갖춘 유지다. 치재일기(1911∼1962)의 주인공 김인수(1892∼1962)는 평생 동안 전통 의복을 고수하며 양복을 비롯한 모든 서양문물을 거절했다.


8·15 이후에도 직접 짚신을 삼아 신었으며, 손자가 학교에서 상투가 잘려왔을 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는 심정을 밝혔다. 김인수는 1925년 세상을 한탄하고 충북 중원군 동량면 하곡의 개천산으로 들어가 28년간 두문불출했다.

관란재일기(1912∼1947)의 저자 정관해(1873∼1949)는 보수적 유생이었지만 용인지역이 세상의 변화와 소식을 빠르게 수용하는 곳이어서 세상의 변화에 민감했다.

추탄일기(1936∼1942)를 쓴 박정락(1914∼1943)은 프롤레타리아 문예운동과 야학활동을 하다가 1932년 조선공산당 간부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될 때 외곽조직인 Y그룹 활동과 관련해서 함께 체포됐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독서와 글쓰기 등으로 소일하면서 지역 유지로 활동하다가 1943년 30세 때 지병인 폐병으로 사망했다.

이들의 일기를 통해 식민지기 농촌의 인력동원(징용, 부역, 징병)과 물자동원(강제저축, 공출, 헌금), 창씨개명 등의 양태를 엿볼 수 있다.

정강일기의 1941년 11월 기사에 의하면 “집집마다 가는 모래 1석, 물 1동이를 문 옆에 비치하고 일본 국기를 게양하라 했다. 물어보니 경방대 방공연습이라 한다. 방공이란 것은 외국 비행기가 내공하여 폭격하는 것을 방어하는 것이니, 과연 내공한다면 어찌 그것을 막아낼 수 있겠는가? 민심을 소동케 하는 것일 뿐이다”라며 염려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방공(비행기 폭탄) 훈련을 확대하면서 방공업무가 농촌 주민의 일상 속에 연래행사로 강요됐음을 드러내고 있다. 시골 유생에게 이것은 생경한 행정 간섭이었다. 현재에도 실시되는 방공훈련이 태평양전쟁 이후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다. 

집회와 시국동원에 대해선 치재일기가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각종 시국좌담회, 중일전쟁 승전축하회, 싱가포르 함락 축하회, 한구 함락 축하회, 군인출정 환송식 등의 시국집회와 가마니짜기 장려회, 양잠강습회, 식량좌담회 등의 생산 관련 모임이 나타난다.


보수적 유생 3명·신식지식인 1명 기록서
일제 수탈에 찌든 모습 생생하게 나타나

일기의 주인공은 전쟁 초기엔 시국집회에는 물론이고 유림간담회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장이 불참에 대한 책임 추궁을 한 뒤부터는 시선을 의식해서 참석하는 횟수가 늘어났다.

치재일기는 창씨개명에 대해 주인공 김인수가 최대한 버티는 모습을 보여준다. 김인수는 “소위 창씨라 하는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라고 하면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면에서 여러 차례 창씨를 강요하고 협박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자 마침내 주재소가 나섰다.

창씨 문제를 둘러싸고 식민권력과 일기의 주인공 사이에 팽팽한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그러나 주인공의 신변에 큰 문제가 일어나진 않았다. 이후의 일기에서도 창씨 때문에 주재소에 끌려가 곤욕을 치른 기사가 없는 것으로 보아 끝내 창씨를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인수는 운이 좋았던 것 같다. 일본식 이름이 없이는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고 취직을 하거나 배급표를 받을 수도 없었다. 조선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총독부는 허가증을 발급해주지 않았고 우체부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조선인들이 새 이름 안에 자기의 조선이름, 고향, 중요한 가문의 특징을 기발한 방법으로 반영해 넣었다.
 

힐디 강의 <검은 우산 아래에서>(2011, 산처럼) 속 구술자 중 한 명인 김원극(1918년생)씨는 여러 차례 종친회를 열어 창씨개명에 따를지 여부를 놓고 격한 토론을 벌였다고 진술한다. 세 번째 회합 만에 집안 큰 어른의 결정으로 창씨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씨는 “적어도 우리 지역(함북)에선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들이 징용의 최우선 대상이 됐다”고 증언했다.  김씨는 가네쿠니(金國), 가네자와(金澤), 가네다(金田), 최(崔)씨는 야마모토(山本), 이(李)씨는 기모토(木元)라고 이름 짓는 식으로 자기의 정체성과 전통을 보호하고자 했다.

강제적 동원 후
죄인 다루듯 관리

정강일기의 주인공 김주현은 노동력의 강제동원을 비교적 정확하게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1945년 1월19일자 일기에 따르면, “17∼55세의 조선 인민을 모두 저들의 모집 징용 장부에 기재하였다. 그 명목은 병정이요, 군속이요, 역부요 하며, 연령징용, 일반징용, 특별징용의 구별이 있다. 여자 역시 14∼25세로 미혼인 자, 과부인 자, 결혼했지만 자식이 없는 자는 방직공장과 군부조수로 징용한다. 남자는 말할 것도 없고 여자 역시 끌어가니 이는 오랑캐요 짐승”이라고 해 강제동원의 유형과 실태를 잘 정리했다.

치재일기에선 조선총독부의 선전용어인 ‘산업전사’라는 명칭으로 동원의 실태를 확인할 수 있다. 1941년 5월22일 장남이 산업전사로 부역을 나간 것이 최초의 기사였고, 1942년부터는 산업전사 선발에 관한 내용이 자주 언급됐다.

8월 이강길이 산업전사로 선발됐으나 나이가 많아 불합격한 이야기나 5형제 중 장남을 제외한 4형제 모두 일본으로 모집돼 간 집 이야기, 남양군도로 끌려간 이웃집 아들은 생사불명이고, 남겨진 부인과 딸은 굶주림과 추위에 떨고 있다는 내용 등 산업전사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했다.

관란재일기에 따르면 중일전쟁이 일어난 해인 1937년에도 강제적인 동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흥의 해저철도 건설에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신청자 중 가지 않으려는 사람을 경찰이 강제로 데려갔다고 썼다. 문촌리(관란재일기 주인공이 사는 마을)의 국내동원은 주로 ‘근로보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됐다.


정강일기에선 집안 머슴과 둘째 아들, 막냇동생이 징용령으로 신체검사를 받고 징용을 갔다. 일제의 징용은 구체제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렸다. 징용이라는 이름 앞에선 양반과 천민의 구별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 월 평균 1회 이상 징용 관련 내용이 일기 속에 등장한다. 관란재일기와 치재일기는 모두 1944년 10월부터 산업전사나 근로보국단이 아니라 ‘징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정강일기는 “1943년 7월 저들의 북선 역부모집령이 몹시 심하여 소위 면리원이라는 자가 조석간에 마을마다 수색하여 저들의 공장에 부역할 만한 자(18세 이하 30세 이상자. 북선, 남양 등 정해진 바를 알지 못한다)를 보면 마치 죄인 다루듯이 바로 잡아간다. 이 같은 폐해가 2∼3달 가면 본지의 농사를 지을 자가 없어질 것이다”라고 적었다.

“창씨 안하면 징용 대상”
의식주 통제 실상 담아

치재일기의 1938년 12월엔 “오늘은 소위 군용모피의 독촉일이다. 저녁에 떠들고 요란을 피워 오늘 어쩔수 없어 기르던 개를 삶았다”는 기사가 나온다. 일제는 가마니, 개가죽, 돼지가죽, 백미, 대두, 면화, 누에, 소, 벼, 보리, 철기 등 전쟁물자를 민간에서 공출했다.

특히 군용 가마니를 할당 받아 온 가족이 모여 앉아 가마니 짜기에 열중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마니 짜기는 중일전쟁 전부터 부업으로 장려돼 왔으나 전쟁 이후엔 군수용 가마니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이 때문에 군용가마니 공출은 2차대전 내내 사람들을 괴롭혔다.

가마니 짜기가 완료되자 ‘앓던 이 빠진 기분’이라고 쓴 관란재일기의 주인공 정관해의 심정은 그 고충을 잘 표현한 것이다. 식민당국은 가마니공출을 마을 단위로 할당한 뒤 주민들 중 완수하지 못한 분량은 완료한 집에 다시 할당했다.


김인수는 “식구들을 거느리고 매일 가마니를 짜니 가소로울 뿐이다”라고 적었다. 양반인 그가 가마니를 짜는 데 익숙하지 못해 할당량을 채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가마니공출을 완료하지 못한 집은 지붕을 새로 이는 것을 금지했다.

정강일기 1942년 9월엔 “군면이원이 또 모미(보리와 쌀)를 수색하러 출장 나온다는 소리를 듣고 땅을 파서 5∼6일의 양식을 묻었다. 모두 가족의 바람을 따른 것이다. 다행히 저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오호 고소하도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숨겨둔 곡물이 발견된 집은 호주를 잡아갔다. 공출량이 부족하면 주재소에 고발하겠다고 하거나 태형에 처한다고 협박했다. 공출에 비협조적인 집은 징용을 보내는 방법도 썼다. 박창서가 반드시 공출 때문에 징용을 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주민들에겐 그렇게 받아들여졌다. 

전쟁에 따른 상시적 물자부족은 촌락공동체 내부에도 균열을 가져왔다. 관지리는 공동체의 유대감이 강한 편이었다. 변종근 집에 도둑이 들어 양식과 옷을 모두 도난당하자 모두 어려운 형편에도 십시일반 해 도와줬다. 그런데 이 마을에서도 누군가가 곡식을 숨겨둔 것을 주재소에 밀고했다. 관란재일기에도 유사한 사건이 발견된다.

정강일기에선 막냇동생 김주해를 비롯해 김한표, 변종배, 백민교 등의 기사가 있다. 사위 김한표는 벌금을 내지 못해 징용당한 경우다. 1944년 2월29일자의 일기를 보면, 하곡마을에서 징용대상자 전체가 도주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주재소는 가족을 감금해서 도망자가 출두하도록 했다. 출두하지 않은 집은 나이에 관계없이 사람을 끌고 가서 할당량을 채웠다.

정강의 장남도 징용을 피해 도망쳤다. 장남은 1943년11월에 황실불경죄로 체포돼 이듬해인 44년2월에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러나 7월에 ‘전과자 징용령’으로 소환장을 받자, 몸을 피했다. 장남은 도피 도중 간간이 집에 들렀으나 연말까지 숨어있었다.

공포의 할당량
소극적 저항도

징용자들의 도주는 신문을 통해 알 수 없었던 정보를 유포시키는 기능도 했다.

정강일기 1945년 7월7일자 일기를 보면 징용갔던 “변한희가 일본 동경의 공장에서 도망쳐 와서 말하길, 동경은 영미의 폭격을 받아 거의 멸망에 이르렀다 한다. 듣고 보니 통쾌하지만, 왜놈들 죽는데 조선인도 죽으니 비통하다. 질아, 창흠, 병흠 소식이 거의 끊겨 우울하다”고 쓰고 있다. 전쟁 말기의 보도 통제로 인해 당시 조선인들은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었는데 징용을 다녀온 이가 일본 본토의 공습을 전해준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일기에서 쉽게 확인되는 각종 국방헌금과 여러 유형의 공출은 전시체제기 농민들의 곤궁한 생활상을 잘 보여준다”며 “인적, 물적 수탈과 통제 하의 일상이 모여 집단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형성됐으며, 이것이 세대를 거쳐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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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