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에 얽히고설킨 ‘갈등 덩굴’
국내 최초의 종이박물관이 전북 전주 팔복동에 세워진 것은 1997년 10월. 한솔그룹은 국내 최대의 신문용지 제조업체인 한솔제지 전주공장에 ‘한솔종이박물관’을 개관했다. 당시 공사비용은 1백20억원. 종이박물관은 지하 1층∼지상 4층에 연건평 9백평, 전시면적 5백평 규모로 2개의 상설전시실과 기획전시실, 부속 한지재현관, 수장고, 사무동 등을 갖추고 있다.
국보·보물 불서 소장
여기에 소장된 유물은 국보1점(2백77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36)과 보물 7점(1천1백53호 묘법연화경 권 제1-3 등)을 비롯해 지공예품 6백90종, 고문서 및 고서적 2백31종, 종이류 91종, 종이제작도구 16종, 기타 1백69종 등 총 1천여점이었다. 국보는 고려시대(11∼12세기 추정)에, 보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제작된 불서다.
그러나 한때 19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서열 10위권까지 급성장했던 한솔그룹은 IMF 파고를 넘지 못하고 2001년 신문용지사업을 접었다. 전주공장을 노르웨이에 본사를 둔 노스케스코그(구 팬아시아페이퍼)에 매각한 것. 전주공장 내에 있던 종이박물관도 함께 넘겼다.
한솔그룹 측은 “IMF 때 이동통신 등 무리한 신규사업을 진행한 탓에 구조조정을 강행했다”며 “그룹 모태 격인 전주공장을 매각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설명했다.
이후 뼈를 깎는 경영정상화 노력으로 제자리를 찾은 한솔그룹은 지난해부터 종이박물관에 다시 눈독을 들이기 시작했다. 전주시 안팎에서 ‘종이박물관 이전설’이 나온 것도 이때부터다.
전주공장 외 종이박물관과 유물 권리 내용을 명시한 매각 계약 때문에 가능했다. 매각 계약서에 따르면 ‘한솔그룹은 노스케스코그의 종이박물관 매입 후 10년 이내에 재인수를 희망할 경우 우선적으로 이를 매입할 수 있다’는 조건이 예외 조항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매각 후 되찾은 전주종이박물관 타지역 이전 추진
“지역 전통·명물…자존심 강탈” 전북도 전체 반발
매각 시점이 2001년인 점을 감안하면 2011년까지 한솔그룹 측이 종이박물관에 대한 소유권을 내세울 수 있다는 얘기다. 이를 두고 업계에선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각별한 ‘유물 애정’이 작용했다는 관측이 나오기도 했다.
더구나 지난 6월 노스케스코그가 유동성 제고 차원에서 전주공장을 모건스탠리사모펀드와 신한사모펀드에 매각하면서 종이박물관 이전설이 구체화됐다. 매각 전 종이박물관의 명의를 한솔그룹으로 변경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소식이 지역에 전해지자 전주시는 물론 전북도, 전북 문화예술계 등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전주시가 ‘종이의 고장’인 만큼 종이박물관 이전은 물론 문화유산 반출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전주문화재단 등 한지 관련 협·단체들은 지난해 3월 ‘전주한지연대회의’를 구성, 종이박물관 이전 반대운동을 벌였다. 여기에 도내 18개 문화·사회단체가 참여한 ‘종이박물관 유물지키기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결성, 도내 문화유산 이전에 대해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비대위 측은 “한솔그룹은 종이박물관에 소장된 국보 1점과 보물 7점 등 한지 관련 문화재들을 전주시에 영구히 보존·전시해야 한다”며 “만약 이전을 강행한다면 전주, 나아가 전북 문화인 모두의 자긍심에 커다란 상처를 남길 것”이라고 비판했다.
도내 ‘유산지키기’가 확산되자 전주시와 전북도도 지역 문화재를 지키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한편 직접 나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전주시 관계자는 “종이박물관과 소장 자료가 반출될 경우 지역 전통이자 명물인 한지가 더 이상 유명무실해질 것으로 판단된다”며 “한솔그룹 측에 유물 매입을 제의했지만 사유재산이란 이유로 거절당했다”고 말했다. 전북도도 김완주 지사의 지시에 따라 한솔그룹 측에 소유 문화재 중 일부를 기증 또는 판매를 적극 요구했으나, 역시 같은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솔그룹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종이박물관과 유물들이 그룹의 사유재산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해할 권한이 없다는 것이다.
아지트로 극비 공수
한솔그룹 관계자는 “법적으로 그룹이 소유한 재산에 대해 전주시나 전북도, 시민단체들이 왜 왈가왈부하는지 모르겠다”며 “종이박물관 자료들을 뚜렷한 명분 없이 그저 그동안 전주에 보관돼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계속 둬야 한다는 논리는 억지에 불과하다”고 반박했다.
이같은 양측의 설전이 오가는 와중에 종이박물관의 국보급 유물들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한솔그룹 측이 극비 공수작전을 통해 ‘비밀 아지트’로 옮긴 것으로 알려졌다. 전북도 전체가 애타게 간절히 원하고 있는 국보급 유물들을 전주시에서 언제, 어디로, 어떻게 빼낸 것일까.
다음호에 한솔그룹 국보 전쟁 제2탄「보물 극비 공수작전」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