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단체장탐구-완결편>좌절? 그게 뭔데! 우근민 제주도지사

“4년 후는 없다! 마지막 도전에 임하는 자세로 간다”


이번 제주도지사 선거는 피를 말리는 ‘대역전극’이었다. 우근민 제주도지사는 개표 중반을 넘도록 좀처럼 표차를 줄이지 못하다 읍면지역 투표함이 막판에 열리면서 0.8%포인트 차이의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동안 관선, 민선 등 모두 4차례나 제주도지사를 지낸 우 지사는 이로써 다섯 번째 제주도정을 이끌게 됐다.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 하차 등 좌절 딛고 일어나
첫 역점 과제는 ‘제주해군기지 해법 제시’ 될 전망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해녀의 아들로 태어난 우근민 제주도지사. 평생을 제주도에서 살아온 토박이로, 그만큼 제주 지역정서에 밝다.

제주 토박이로
제주 정서에 밝아

우 지사는 군장교로 복무하던 1974년 합참의장 출신인 심흥선 총무처 장관의 비서관으로 발탁되면서 공직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총무처 인사국장, 기획관리실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91년 처음 관선 제주지사를 지냈다. 처음 출마한 1995년 민선 초대 제주지사 선거에서는 맞수인 신구범 후보에게 밀리면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1998년, 2002년에는 잇따라 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그간 우 지사는 관선·민선을 합쳐 4번 지사를 지냈다. 여기에 지난 6·2지방선거에서 다시 제주도민들의 선택을 받으면서 한 번도 하기 힘든 도백을 다섯 차례나 맡게 됐다. 두 차례는 임명직이었던 점을 차치하더라도 이는 지방정치사에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렇지만 정치인으로서 굴곡이 없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숱한 시련과 역경이 그를 기다렸다.
가장 큰 고비는 2002년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린 TV토론회에서 “신 전 지사가 축협중앙회장으로 재직할 때 대우 채권 같은 것을 사서 5100억원의 손실을 입혔다”는 내용의 발언을 했다가 허위사실 공표 혐의(선거법 위반)로 불구속 기소된데 이어 2004년 4월 대법원에서 30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 받으면서 중도 하차한 것이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사 재임시절의 불미스런 전력은 최근까지도 그의 발목을 붙들었다. 6.2선거를 앞두고 그게 화근이 돼 결국 민주당 공천에서 배제되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나중에 공천장을 준다 해도 찢어버리겠다”며 울분을 삼킨 우 지사는 무소속으로 선거에 출마, 피 말리는 접전 끝에 현명관 삼성물산 전 회장을 누르고 신승했다.

좌절을 모르는 정치인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본인 말마따나 ‘6년 백수’는 결과적으로 절치부심, 와신상담을 위한 공백기였던 셈이다.
우 지사의 이런 강인함의 원천은 어린 시절 모진 가난을 견뎌낸 경험에서 비롯됐다는 의견이 많다. 가난한 어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네 살 되던 해 아버지를 여읜 그가 오로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에 매달리면서 승부 근성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총무처 등 서울 생활을 하면서 쌓은 친화력과 폭넓은 인맥, 특유의 조직관리 능력도 그가 여기까지 오는데 한 몫 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 지사는 선거기간은 물론 당선 직후에도 “4년 후는 없다”고 했다. 마지막 도전이라는 자세로 도정에 임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불우한 가정환경에
승부근성 생겨나

우 지사의 첫 역점 과제는 ‘제주해군기지’ 해법 제시가 될 전망이다.
우 지사가 이미 후보 당시 공약을 통해 일방적인 해군기지 공사착공 중단을 누차 강조했고, 합리적 해결방안 마련을 공언해온 마당에 해군측이 공사강행 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는 우 지사가 도민갈등 해소와 소통 도정의 핵심사업으로 거듭 천명해온 해군기지 합리적 해법 도출에 대한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에 따른 우 지사의 대응이 주목되는 가운데 그는 “상대방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마음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며 “해군이 공사 강행만을 강조한 것은 시기적으로 적절치 않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해결 방안을 바라는 도민 여론에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 지사는 “해군기지 갈등을 풀지 않으면 제주 사회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 한다”며 “제주도민, 국방부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윈윈’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우 지사가 경제공약으로 내놓은 ‘일자리 2만 개 창출’도 역점 사업 중 하나다. 구체적으로 식품산업과 한방·바이오융합산업 등 5대 향토자원 성장사업을 통해 일자리를 만든다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1500억원을 투자하게 될 ‘고품질 감귤 생산 및 감귤 클러스터 구축’ 방안은 감귤 생산이 많은 지역 특성을 살린 일자리 공약으로 평가된다.

청년 일자리 창출과 관련해 ‘청년희망 프로젝트’가 눈길을 끌었다. 우 지사는 “우수 중소기업에 1년에 500명씩 임금의 절반을 지원하는 조건으로, 2년 동안 일한 청년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내용”이라고 설명했다.

이밖에 ▲향토자원 5대 성장산업 육성 5280개 ▲첨단기술 4대 제조업 600개 ▲국제자유도시 프로젝트 7220개 ▲성장유망·타켓 기업 및 콜센터 유치 1500개 ▲중소기업 육성 연계형 일자리 1700개 ▲미래를 위한 인재육성 분야 3700개 등이 제시됐다.

일자리 2만 개 창출…희망청년 프로젝트에 눈길
“‘수출 1조원 시대 개막’ 임기 내 반드시 이룰 것”


연도별 일자리 창출 계획은 올해 1069명을 시작으로, 2011년 3095명, 2012년 3199명, 2013년 5606명, 2014년 7031명 등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높다. 예산 확보 계획은 물론 안정적 일자리 창출방안, 산업현장에서 발생하고 있는 ‘미스매치’ 해결 방안 등이 아직 제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실천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민·관·산·학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협의체 구성 등 공론화 전략과 함께 국비 확보를 위한 중앙절충 강화가 요구되고 있다.

우 지사가 약속한 ‘수출 1조원 시대 개막’은 임기 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바다. 이에 대해 우 지사는 “제주 수출은 그동안 큰 관심을 받지 못해 수출입국의 변방이었고 사각지대였다”며 “수출정책은 도전과 개척의 경영마인드로 경쟁력을 갖춰간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그는 울산, 거제, 창원 등과는 다른 제주의 청정환경, 향토자원, 그리고 농수축산물을 활용해 경쟁력 있는 수출 상품을 만들고, 수출경제의 활성화를 중장기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제조업의 한계에도 도전, 레저용 선박 부품 제조업, 레저스포츠용품 제조업, 스마트그리드 및 재생에너지 부품 제조업, IT융합산업 등 첨단기술 신성장 4대 제조업을 육성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제주의 1차산업을 유통서비스 경영과 결합, 2~3차산업으로 업그레이드시키고, 제주의 청정농수축산물과 향토자원을 활용한 ‘제주의 식품산업’을 대한민국의 대표적 수출산업으로 육성할 방침이다.
또 수출정책을 주도할 ‘통상마케팅본부’를 설치해 ‘통상마케팅본부 준비기획단’을 구성하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전략 산업으로 물, 농수축산물과 같은 향토자원을 활용한 5대 신성장산업을 육성할 예정이다.

우 지사는 또 영리병원은 일체의 논의를 중단해 줄 것을 도민사회에 요청했다. 우 지사는 “공공의료 체계가 미흡한 상태에서 경제적 측면만을 고려해 영리병원을 도입하는 게 과연 바람직한지 생각해 봐야 한다”며 “영리병원 도입에 대한 일체의 논의 중단을 요청한다”고 밝혔다.

또한 내국인 카지노와 관련, 우 지사는 “경제적·재정적 이익과 더불어 사회적 비용과 부작용도 면밀하게 검토하고 분석해야 한다”며 “한쪽 측면만 중시하다가는 제주 사회에 상당히 부담될 수 있는 현안이기에 도민 공감대가 형성될 때까지 논의를 보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는 도민 역량을 결집하고 도민 사회를 통합하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환경 정책과 관련해 우 지사는 ‘선보전 후개발’ 방식을 기초로 환경과 경제의 통합, 주민 참여의 활성화, 갈등 예방 등 3대 방향을 적용할 뜻을 분명히 했다.
또 그는 탐라천년 문화권 정립사업을 국책종합사업으로 추진하고, 문화예술정책은 지원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을 확고하게 지킬 것과 저출산 탈피를 위한 출산율 2.0 제주플랜과 무상보육 및 무상급식을 통한 맞춤형 보육시스템 구축에도 나설 것을 약속했다.

특히 우 지사는 특별자치와 국제자유도시라는 두 가지 제도를 충분히 활용, 동아시아 시대의 중심지로 웅비할 수 있는 기회를 충분히 살리기 위해 가칭 ‘특별자치와 국제자유도시 글로벌 네트워크’를 창설해 제주가 동아시아 지역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도록 추진할 계획이다.

“온 몸 바쳐 제주
발전에 헌신할 것”

이에 대해 우 지사는 “이는 도정의 힘만으로는 어렵다”며 “종교인, 시민운동가, 언론인 등 도덕성을 요구받는 분들은 더 무거운 책임을 짊어주셔야 한다”고 각계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와 함께 우 지사는 “제가 지사직에서 물러난 후 도민 여러분이 ‘우근민 도지사와 함께 한 시간이 즐거웠고 행복했다’는 말씀을 하실 수 있도록 온 몸을 바쳐 제주발전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맹세했다.


우근민 제주도지사 프로필
 
학 력
1958 ~ 1961 : 성산수산고등학교
1967 ~ 1971 : 명지대학교 법정대학 행정학과(학사)
1971 ~ 1973 : 경희대학교 경영행정대학원(행정학 석사)

경 력
1982. 08 ~ 1991. 03 : 총무처 인사국장 및 기획관리실장
1991. 03 ~ 1991. 07 : 제12대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1991. 08 ~ 1993. 12 : 제27, 28대 제주도지사
1996. 09 ~ 1997. 03 : 남해화학 주식회사 사장
1997. 03 ~ 1998. 03 : 제17대 총무처 차관
1998. 07 ~ 2002. 06 : 제32대 제주도지사
2002. 07 ~ 2004. 04 : 제33대 제주도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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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