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제발로 나온 한상균 민노총 위원장

버티고 버티다 결국 철창행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조계사 은신 24일 만에 자진출두 했다. 경찰은 곧바로 한 위원장 손목에 쇠고랑을 채워 체포영장을 집행했다. 한 위원장은 어떤 죄목으로 체포됐으며, 그는 누구인가.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이 지난 10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조계사 관음전에서 나왔다. 예정대로 조계종 화쟁위원장인 도법 스님이 동행했다. 한 위원장은 이후 대웅전에 도착해 삼배를 올리고 자승 총무원장과의 면담을 위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으로 이동, 기자회견을 위해 다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경찰과 숨박꼭질
조계사로 들어가
 

“저는 다시 머리띠를 동여맸습니다”라는 말로 기자회견을 시작한 그는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을 노동개악으로 규정하며 강하게 정부를 규탄했다. 아울러 전날인 9일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1000여명의 경력이 배치된 상황을 비판하며 “저는 살인범도, 파렴치범도, 강도범죄·폭력을 일으킨 사람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5월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불법시위를 벌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한 위원장이 재판에 잇따라 불출석하자 법원이 지난달 11일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민중총궐기대회를 5일 앞둔 상황이었다. 

경찰은 한 위원장 지난달 16일 열렸던 민중총궐기대회에서 검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날 한 위원장 검거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당시 한 위원장은 집회를 앞두고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연 긴급기자회견에서 “정부가 추진 중인 노동개혁안이 국회를 통과하면 오는 12월부터 총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집회에서 끝까지 조합원과 민중의 맨 앞에 서겠다”고 강조했다. 


경찰은 기자회견이 끝나고 한 위원장 검거를 시도했지만, 집회 참가자들에게 막혀 실패했다. 당시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한 위원장 검거를 위해 접근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프레스센터 로비까지 진입했던 경찰은 5분 여만에 현장에서 철수했다. 

그 사이 건물 18층 전국언론노동조합 사무실에 몸을 숨겼던 한 위원장은 경찰이 물러난 뒤 현장을 빠져나와 집회에 합류했다. 당시 검거작전에 실패한 서울지방경찰청은 한 위원장 검거 전담반을 30명으로 확대했다. 

한 위원장은 이날 밤 10시께 조계사에 신변보호를 요청했다. 조계사 측은 이날 긴급회의를 소집해 한 위원장 피신 요청을 수용했다. 한 위원장은 조계사 측이 수용 결론을 내리자 이날 오후 11시께 곧바로 조계사로 들어가 관음전에 머물었다. 당시 조계사는 “한 위원장을 강제로 내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세월호 추모집회 불법시위 수배
민중총궐기 마치고 조계사 피신
 

그러자 경찰은 서울청 광역수사대 등 수사인력을 확대하고 기동부대 등을 동원해 조계사 인근을 봉쇄했다. 한 위원장 검거 경찰관에게는 1계급 특진까지 내걸었다. 

한 위원장이 조계사로 피신한 이유는 종교시설이라는 특수성 때문이다. 경찰이 무리하게 진입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명동성당은 1970, 1980년대 군사정권에 저항하던 이들의 농상장과 도피처였다. 1990년대엔 주로 노동계 인사들이 명동성당을 찾았다. 

신도들의 불편 때문에 명동성당 측이 잇따라 퇴거를 요청하자 2000년대 들어 조계사가 새로운 피신처가 됐다. 경찰은 이따금 수배자 검거를 위해 조계사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때마다 승려와 신도의 강한 반발을 샀다. 경찰은 2002년 발전노조 조합원 150여명을 쫓아 조계사 안으로 들어간 뒤로 진입을 시도한 적이 없다. 


한 위원장은 지난달 18일 대한불교조계종 화쟁위원회의 중재를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조계사는 19일 화쟁위원회를 열어 중재문제를 논의했다. 조계종 화쟁위원회는 사회 현안과 갈등을 중재하고, 대화와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기 위해 2010년 구성한 기구다. 화쟁위원회는 그동안 4대강 사업, 한진중공업 사태, 쌍용 자동차 사태, 강정마을 문제, 청도 노사 문제 등 사회 현안의 갈등을 중재하는 역할을 해왔다. 

중재를 수용한 조계사는 지난달 23일 한 위원장과 첫 면담을 갖고 “다음달 5일로 예정된 2차 민중총궐기대회가 평화적으로 진행될 수 있도록 중재해달라고 요청했다”고 밝혔다. 당시 한 위원장은 화쟁위에 ‘2차 민주총궐기의 평화로운 진행’과 함께 ‘정부와 노동자 대표의 대화’ ‘정부의 노동개악 정책 강행 중단’ 등에 대해 중재를 요청했다.

병력 2000명 투입
자진해 경찰서로 
 

한 위원장의 조계사 은신과 관련해 정치권에서 여러 말이 나왔다. 특히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은 지난달 20일 한 라디오방송에서 “경찰 병력을 (조계사)경내에 투입해 (한 위원장을) 검거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조계사 승려 7명은 지난달 23일 김 의원의 사무실에 항의 방문했다. 승려 7명은 이날 “범법자는 인권이 존중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냐”며 “불교의 자주성이나 지혜를 훼손하는 발언”이라며 김 의원에게 사과를 촉구했다. 
 

한 위원장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2차 민중궐기대회와 관련해 “비폭력 저항으로 국민과 함께 평화행진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한 위원장은 인터뷰에서 “우린 평화시위를 할 것이고, 차벽이 있다면 연좌를 포함한 정당한 항의 표현을 하겠다”며 “살수를 하면 우리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맞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위원장은 정부도 물대포와 차벽을 자제할 것을 요구하며 “(23일 화쟁위원회에 요청한 대로) 정부와 대화가 진행되고 정부가 (노동개편 관련) 정책을 철회한다면 언제든지 출두할 생각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30일부터는 조계사 신도회에서 한 위원장의 퇴거를 강도 높게 요구하고 나섰다. 이날 신도회는 한 위원장 거처에 찾아가 “신도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며 퇴거 및 경찰 자진 출두를 요구했다. 하지만 한 위원장은 5일만 시간을 달라며, 신도회의 퇴거요구를 거부했다. 

일부 신도들은 한 위원장의 퇴거를 요구하고 강제로 들어내려 해 그 과정에서 홀로 있던 한 위원장의 옷이 찢기는 등 물리적 충돌을 빚기도 했다.

반면 화쟁위원회는 “신도회와 화쟁위가 같은 생각인 것은 아니다”며 “한 위원장의 신변보호는 물론, 2차 총궐기에서 ‘사람벽’으로 평화지대를 형성한다는 입장에도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지난 5일 서울 도심에서 열린 2차 민중총궐기대회가 평화 집회·시위로 끝났다. 이날 서울광장과 종로, 대학로 등에서 6시간 넘게 진행된 2차 집회에서 폭력과 충돌은 없었다. 

한 위원장이 조계사 은신 22일째인 7일 “노동개악 처리를 둘러싼 국회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조계사에 머물겠다”는 뜻을 밝혔다. 한 위원장의 은신이 장기화될 조짐을 보이자 구은수 서울경찰청장은 지난 8일 오전 조계사를 방문해 조계사 주지 스님과 조계종 화쟁위원장인 도법 스님을 만나 한 위원장이 자진 퇴거토록 요청했다. 

도로교통법·집시법
경찰 소요죄도 검토
 

조계사 내부에서는 “한 위원장이 신도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점은 유감이다”라며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한 위원장 역시 페이스북에 “사찰(조계사)은 나를 철저히 고립 유폐시키고 있다”는 글을 올려 조계사와 관계가 불편해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경찰은 지난 8일 24시간 이내에 자진출석하지 않으면 체포영장을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시한은 9일 오후 4시까지다. 강신명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를 열고 “한 위원장의 도피행위를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다. 체포영장 집행에 순순히 응할 것을 마지막으로 통보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민주노총은 ‘자진출두는 없다’며 강력 투쟁으로 맞서겠다고 선언, 이날 오후 경찰이 한 위원장을 검거하기 위해 조계사 진입을 시도하면서 시민과 신도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경찰 병력 1000여명이 투입되는 등 신도와 시민 사이에서 첨예한 대립 분위기가 조성됐다. 하지만 자승 총무원장이 직접 나서서 한 위원장 거취 문제 해결을 약속해 불상사는 피했다. 

현재 한 위원장이 받고 있는 혐의는 ‘집시법’ 및 ‘도로교통법’ 위반이다. 한 위원장은 앞서 세월호 집회 당시 불법 시위를 벌인 혐의로 기소됐지만 재판에 4차례 출석하지 않아 구속영장이 한차례 발부된 적이 있다. 또 올해 5월 노동절 집회 때도 불법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돼 줄곧 수배를 받아왔다. 경찰은 한 위원장이 폭력시위와 집회를 주도했다고 경찰은 보고 있다. 

특히 소요죄 적용 여부가 주목된다. 경찰은 지난달 14일 열린 1차 민중총궐기대회에서 불법 폭력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 위원장에 대해 형법상 소요죄 적용을 검토해 왔다.

잡으려 사활 건 경찰
25일 만에 자진 출두

소요죄는 다중이 집합해 폭행·협박 또는 손괴 행위를 했을 시 성립하는 죄로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게 돼 있다. 반면 실제로 소요죄가 인정된 경우가 드물기 때문에 적지 않은 논란이 뒤따를 공산도 크다. 그밖에 특수공무집행방해, 특수공무집행방해 치상 혐의 등이 새롭게 적용될지도 눈여겨 볼 대목으로 꼽힌다. 


한 위원장은 1962년생으로 전남 나주가 고향으로 전남기계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군제대 후 부산에서 일하다 1985년 지프차 생산회사인 거화에 입사했다. 거화가 동화자동차공업으로 인수되고, 다시 동화가 쌍용그룹으로 인수되면서 쌍용자동차 직원이 됐다. 

1987년 쌍용자동차 평택공장에서 일하면서 쌍용자동차노조 추진위원장이 됐고, 2008년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지부장이 됐다. 2009년 1월 법정관리를 신청한 쌍용자동차가 같은 해 4월 ‘건국 이래 최대 규모’라는 2646명의 노동자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자 5월 21일부터 77일간 평택공장 점거 파업을 주도했다.

당시 한 위원장은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구속돼 3년을 선고 받았고, 2012년 8월 만기 출소했다. 2012년 11월부터 2013년 5월까지 평택공장 인근 30m 높이의 송전탑에 올라가 쌍용자동차 해고자 복직을 촉구하며 171일간 고공농성을 벌이는 등 현장 투쟁을 주도했다. 

쌍용차 직원 출신
해고자 복직 주도
 

이후 한 위원장은 지난 해 11월 민주노총 사상 직선제로 치러진 위원장 선거에서 ‘박근혜 정부에 맞선 노동자 살리기 총파업’을 주요 공약으로 내걸어 당선됐다. 노동계 인사들은 “한 위원장이 선거 기간 내내 공무원 연금 개악과 민영화·노동악법 개악 저지 등을 묶어 총파업을 조직하겠다고 공언했다”고 밝혔다. 이어 “한 위원장은 민주노총내에서 강경파로 구분된다”고 입 모아 말했다. 민주노총은 올해 4월24일 총파업, 5월1일 노동절 집회, 9월23일 총파업, 11월14일 제1차 민중총궐기대회, 12월5일 제2차 민중총궐기대회 등을 잇따라 열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엘리엇 1300억원 소송’ 마지막 남은 반전 기회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2015년 진행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의 여파가 아직까지 남아있다. 정부는 당시 합병으로 인해 외국계 투자회사인 엘리엇 매니지먼트및 메이슨 캐피탈과 국제투자 분쟁에 휩싸였다.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판정으로 정부는 이들에게 약 2100여억원을 배상해야 하는 상황 중 아주 작은 소생의 실마리가 나왔다. 엘리엇 분쟁 사건의 판정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승소한 것이다. 정부가 미국계 해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와의 8년간 진행 중인 국제투자 분쟁에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1300여억원을 배상하라는 국제투자 분쟁 판정에 불복해 제기한 소송의 항소심에서 승소하면서다. 이로 인해 배상 판결이 취소될 가능성도 되살아났다. 사건 발단 짚어보니… 법무부에 따르면 영국 항소법원은 지난 17일 한국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여 1심 법원인 고등법원에 사건을 환송했다. 이에 따라 사건을 되돌려받은 영국 고등법원은 엘리엇에 대한 한국 정부의 배상을 결정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의 재판 관할권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한국 정부로서는 중재판정 자체를 무효화할 가능성을 다시 확보하게 된 셈이다. 엘리엇 배상 사건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국제투자분쟁(ISDS) 사건이다. 해당 사건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정부가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이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면서 시작됐다. 엘리엇은 해당 의혹이 발발한 지 3년이 지나서야 7억7000만달러의 손해를 입었다며 ISDS를 제기했다. 엘리엇의 ISDS 제기는 대한민국 정부에게는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만약 엘리엇의 주장이 받아들여질 경우, 막대한 국민 세금이 배상금으로 지급돼야 하는 상황이었다. 또 국제 중재 절차는 매우 복잡하고 오랜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국가의 대외 신인도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법무부를 중심으로 전담팀을 구성하고 국제 법률 전문가들과 협력해 엘리엇의 주장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양측은 수년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서 치열한 법적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국정 농단 사건의 재판 결과와 국민연금 관계자들의 증언 등이 중요한 증거로 활용됐다. 기나긴 법적 공방 끝에 지난 2023년 6월20일, 네덜란드 헤이그의 PCA는 엘리엇의 ISDS 사건에 대한 최종 판정을 내렸다. 판정 결과는 대한민국 정부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PCA는 한국 정부가 엘리엇에 5358만6931달러(당시 환율로 약 690억원) 와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명령했다. 이는 엘리엇이 청구한 금액인 약 7억7000만달러의 약 7%에 해당하는 금액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국제 중재에서 패소해 배상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점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PCA는 판정문에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합병 찬성 행위가 한국 정부에 귀속되는 행위며, 이로 인해 엘리엇에 손해가 발생했다고 판단했다. 이는 국민연금이 공적기금으로서 정부의 통제 하에 있으며, 그 의사결정이 정부의 행위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또 정부가 국민연금의 의사결정에 부당하게 개입해 엘리엇의 정당한 주주 권리를 침해하고 투자가치를 훼손했다고 봤다. 배상 취소 소송 항소심 승소 한미FTA상 성립 불가능 판단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이 판정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았다. 법무부는 판정 직후 즉각적으로 불복 절차에 돌입하겠다고 밝혔다. 2023년 7월18일, 정부는 중재판정부에 판정의 해석·정정을 신청하는 동시에, 중재지인 영국 법원에 판정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정부는 판정에 법리적 오류가 있거나 중재 절차에 중대한 하자가 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주장하며 판정을 뒤집기 위한 총력전을 펼쳤다. 특히, 정부는 엘리엇 사건이 한미 FTA상 ‘성립 불가능’한 사건이라는 점을 취소소송에서 가장 크게 주장했다. 구체적으로 국제투자 분쟁은 해외 투자자가 ‘투자국’의 협정 위반 행위에 대해 제기하는 국제중재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는 ‘상업적 행위’일 뿐 국가의 행위로 볼 수 없다는 게 정부의 논리였으나 1심 법원에서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정부는 해당 판결에 대해서도 항소를 진행했고 지난 17일 영국 항소법원은 우리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였다. 이에 따라 사건은 다시 1심 법원인 영국 고등법원으로 환송됐으며, 영국 고등법원은 배상 판결을 한 상설중재재판소(PCA)에 애초 재판 관할권이 있었는지부터 다시 심리하게 된다. 이 판결은 한국 정부가 거액의 배상을 면할 수 있는 반전의 기회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된다. 엘리엇 배상 사건의 발단은 삼성물산 제일모집 합병에서 촉발됐다. 지난 2015년 5월26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은 합병 계획을 발표하며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제일모직이 삼성물산을 1대 0.35의 비율로 흡수합병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그룹 경영권 승계 및 지배력 강화를 위한 것으로 해석됐으나, 삼성물산 주주들에게는 불리한 합병 비율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8년 소송 결말은? 당시 제일모직의 주가는 삼성물산의 약 3배였지만, 자산총액 기준으로는 삼성물산이 제일모직의 3배에 달했기 때문이다. 이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는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음을 공시하며 합병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합병 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펼쳤다. 당시 엘리엇은 삼성물산의 가치가 지나치게 저평가됐으며 합병 조건이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법원은 엘리엇의 가처분신청을 모두 기각하며 삼성의 손을 들어줬다. 합병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였던 국민연금이었다. 국내외 의결권 자문사들이 합병 반대 의견을 내놨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연금은 내부 투자위원회를 거쳐 합병에 찬성표를 던졌다. 결국 2015년 7월17일, 삼성물산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이 통과됐고, 그해 9월1일 통합 삼성물산이 공식 출범했다. 이후 박근혜정부 국정 농단 사건이 불거지면서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의 불법성 의혹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특별검사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와 지배력 강화를 위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이 이뤄졌고, 이 과정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씨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등 불법 행위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특히 국민연금이 합병에 찬성하도록 정부가 부당하게 개입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관련 인사들이 재판에 넘겨졌다. 2025년 7월17일, 대법원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및 삼성바이오로직스 회계 부정과 관련한 자본시장법상 부정거래 행위, 시세조종, 업무상 배임 등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에 대해 전부 무죄를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회장은 약 10년간 이어져 온 사법 리스크에서 벗어나게 됐다. 리스크 해소 다양한 반응 엘리엇 배상 사건이 새로운 국면을 맞으면서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는 항소심에서 ‘한국 승소’로 뒤집히자, 취소 청구를 주도한 법무부 장관으로서 환영했다. 한 전 대표는 “최선을 다하고 성과를 낸 많은 ‘좋은 공직자’들에게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한동훈 전 대표는 이날 페이스북에 “제가 법무부 장관으로서 지휘했던 엘리엇 국제투자분쟁(ISDS) 중재판정의 취소소송 항소심에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더불어민주당이 저 소송(취소소송 제기) 관련해 저를 많이 비난했었다”고 정쟁적 비판을 상기시켰다. 그는 “‘국익’이 걸렸지만 결과가 나쁠 수도 있는 위험 부담이 큰 문제를 결정할 때, 몸 사리면 공직자들은 편하다. ‘지면 네 돈 낼 거냐’는 폭력적인 질문 앞에서 ‘안 하고 말지’ 생각이 들게 마련”이라며 “그래도 몸 사리지 않고 국익을 생각한 좋은 공직자들이 있다. 이 경우가 그랬다”고 설명했다. 특히 “엘리엇 항소에 대해 ‘질 가능성이 크니 항소하지 마라, 그래서 지면 한동훈 사비로 돈 대신 내라’는 감정적 비난이 많았고, 그런 제목의 언론 사설까지 있었다”면서 공직사회에 “피 같은 국민 세금 아끼기 위해 많은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해온 것을 제가 잘 안다”고 격려를 보냈다. 한 전 대표는 “의미있는 승리지만 이 사안은 아직도 갈 길이 먼, 쉽지 않은 싸움”이라며 “끝까지 최선을 다해 국익을 지켜주시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법조계에서는 엘리엇 배상 사건처럼 메이슨 캐피탈이 같은 이유로 제기했던 ISDS의 중재판정 취소소송 항소 포기에 대한 아쉬움을 내비쳤다. 한 국제통상 전문 변호사는 “엘리엇과 메이슨은 같은 이유로 ISDS를 제기했다”며 “엘리엇은 취소소송의 항소심을 진행하면서 메이슨은 지연이자 등으로 항소심을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엘리엇 사건이 항소심에서 승리하면서 메이슨도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쉬울 따름”이라고 평가했다. 앞서 법무부는 지난 4월 정부 대리 로펌 및 외부 전문가들과 논의한 끝에 정부의 메이슨 ISDS 중재판정 취소 청구를 기각한 싱가포르 국제상사법원의 1심 판결에 대해 항소를 제기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이 발단 “이재명정부가 구상권 제기해야” 메이슨은 지난 2018년 9월 우리 정부가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달러(약 2609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이자를 지급하라는 ISDS를 제기했다. 정부는 한미 FTA상 ‘정부가 채택하거나 유지한 조치’는 공식적인 국가 행위를 전제로 하는데, 개별 공무원의 불법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비위 행위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4월 우리 정부를 향해 메이슨 측에 3203만876달러(약 438억원) 및 지연이자를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정부는 지난해 7월 취소소송을 제기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 법원은 메이슨 측 주장을 받아들여 한국 정부 측에 손해배상을 명한 중재판정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다. 법무부는 "법리뿐 아니라 항소 제기 시 발생하는 추가 비용 및 지연이자 등 여러 가지 사정을 종합해 결정했다"고 항소 포기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이번에 항소심에서 정부가 승리했지만, 여전히 문제는 국민 세금으로 내야 할 배상액이다. 정부가 메이슨에 지급해야 할 돈은 지연이자까지 포함해 약 887억원이 됐다. 엘리엇에 배상해야 할 금액은 당초 1300억원에서 지연이자까지 더하면 약 1500억원가량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시민단체에서는 엘리엇과 메이슨이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봤다며 소송을 제기한 만큼 당시 합병을 주도한 이 회장과 두 기업의 합병 과정에서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상대로 구상권을 제기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복리이자가 계속 쌓이면서 배상액도 천문학적으로 계속 늘고 있는 상황이라, 이재명정부의 대응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5월 대선을 앞두고 참여연대는 대선후보들에게 엘리엇·메이슨 ISDS 배상금 구상권 행사 여부를 듣기 위해 질의문을 보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은 질의에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참여연대는 “단순한 침묵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세금 수천 억원의 손실을 되돌리기 위한 의지와 책임을 보여야 할 자리에서 책무를 방기하고 있다는 점이 중대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 17일에는 이재용 회장의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직후 다시 한번 “재벌 봐주기 판결로 사회 정의를 무너뜨리고 총수 일가의 전횡을 용인하는 해로운 판례를 남긴 법원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주장과 함께 정부를 향해 구상권 청구를 요청했다. 구상권 문제는? 다만 국제통상 전문가로 활동한 송기호 변호사가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에 있다는 점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송 실장은 변호사 시절 “법무부는 당시 중과실로 불법 행위한 대한민국 공무원들, 이들과 공모 관계라고 인정된 이재용 회장을 상대로 신속하게 구상권 청구를 해야 한다”며 “박 전 대통령 등 공무원에겐 국가배상법에 따라 당사자에게 청구하고, 이 회장에 대해선 민법상 공동불법행위자로서 청구할 수 있다고 본다”고 밝힌 바 있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