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그리운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

위기의 한국경제…왕회장 리더십이 절실하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초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실리는 유일한 기업인이 있다. 바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다. 교과서에는 정 회장이 소 떼를 몰고 북한에 넘어가는 모습이 소개된다. 그 순간이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장면 중 하나기 때문이다. 사업가로서 일군 업적이라고 하기에는 정 회장이 대한민국에 미친 영향력은 지대했다. 산업화를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남북 관계 개선에도 이바지해서다. 아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과 철학을 재조명했다.

정 회장은 1915년 11월25일에 강원도 통천군 답전면 아산리(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강원도 통천군 노상리)에서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 사이에서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산’이라는 그의 아호는 자신의 출생지 옛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통천 송전소학교를 졸업했고 그와 함께한 동창생은 27명이다. 정 회장의 최종 학력은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이 유일하다.

4번의 가출
그리고 성공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아버지의 농사를 도왔다.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여러 차례 가출을 반복하였으나 실패했다가 결국 가출에 성공했다.

가출 후 청진의 개항 공사와 제철 공장 건설 공사장에 노동자가 필요하다는 <동아일보> 기사를 보고 소를 판 돈으로 고향을 떠나 원산 고원의 철도 공사판에서 흙을 날랐는데 이것이 첫 번째 가출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정 회장은 무려 4번이나 가출했다.

두 번째 가출해 금화에 가서 일했다. 세번째 가출 때는 아버지가 소를 판 돈 70원을 들고 도망해 경성실천부기학원에서 공부를 하다가 덜미를 잡혀 고향으로 돌아갔다. 4번째 가출은 1933년으로 19살에 상경하여 이듬해 복흥상회라는 쌀가게 배달원으로 취직했다.


배달원 자리는 꽤 흡족해 집을 나온 지 3년이 지나 월급이 쌀 20가마가 됐다. 장부를 잘 쓸 줄 아는 정 회장은 쌀가게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쌀가게 주인의 아들은 여자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기 때문에 주인은 아들이 아닌 정 회장에게 가게를 물려줬다.

1938년 주인으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아 ‘복흥상회’라는 이름을 짓고 그 가게의 주인이 됐다. 하지만 복흥상회 개업 후 2년 만인 1940년에 중일전쟁으로 인해 쌀이 배급제가 되면서 결국 가게를 정리했다.

이후 ‘아도서비스’라는 자동차 수리공장을 세워 직원이 80명에 달할 정도로 크게 운영했다. 그러나 화재로 건물이 전소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다행히 평소에 그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당시 후원인이 거금을 빌려줘 재기에 성공했다.

6.25 전쟁 시기에 피난하여 부산에서 건설회사를 시작했다. 지금 현대그룹의 토대가 되는 현대토건이다. 당시 은행에서 큰돈을 빌리는 사람들을 봤더니 건설업자가 많은 것을 보고 자동차 수리공장 사장이 순식간에 건설사를 세운 것이다.

회고록에 의하면 미군으로부터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방한에 맞춰 한겨울에 미군 묘지에 잔디 입히는 일을 발주받았다. 당시 한국의 여건상 겨울에 잔디를 구하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에 다른 업체에서 전부 거절한 것을 정 회장은 받아들였다.

일단 파란 풀로만 덮으면 된다는 확인을 받은 후 트럭 30여대를 동원해서 밭에 나있는 보리 싹을 사다가 심어서 행사를 무사히 마쳤다. 이후 겨울이 지나자 보리를 전부 갈아엎고 다시 잔디를 심어 마무리했다. 이 일이 화제가 된 후 미군으로부터 많은 일을 발주 받게 됐다.

한국경제사에 있어서 정 회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한국 전쟁 직후 전쟁으로 파괴된 도시와 교량, 도로, 집, 건물 등을 복구해야 했다. 전후복구사업에서 공업입국, 중화학공업화, 첨단산업화로 이어지는 경제사의 주요 물줄기를 민간부문에서 이끌어 온 주역이 바로 정 회장이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부터
도전·실험정신

19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화의 사회간접시설은 대두분 정 회장이 주도했다. 소양강다목적댐(1967년), 경부고속도로(1970년), 울산조선소(1973년), 원자력발전소(1970년) 등 국내 굴지의 대공사는 한국경제사 측면에서 보면 무에서 유를 창조한 사업이었다.

한국경제가 자립국가 확립을 목표로 수출에 눈을 돌릴 때 정 회장은 국내에서 쌓아 올린 경험을 바탕으로 1965년 국내 기업 최초로 태국 고속도로 사업 등 해외 건설시장 개척에 나섰다.

당시 자원이 부족한 대한민국 현실에서 해외시장 개척은 새로운 돌파구였다. 하지만 기술과 경험, 자본, 장비 등 모든 부분이 미비한 까닭으로 아직 그 누구도 해외시장 개척은 상상조차 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정 회장은 과감하게 해외 건설시장 진출을 선언했고, 국내에서 축적된 기술과 노하우를 기반으로 1970년대 중동 건설시장에 진출했다. 정 회장은 20세기 최대의 역사라 불리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산업항 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침으로써 수출주도형 경제기반을 구축했다.

탄생 100주년 맞아 업적·철학 재조명
가장 존경하는·가장 사랑하는 기업인

1971년 정 회장은 혼자서 미포만 해변 사진 한 장과 외국 조선소에서 빌린 유조선 설계도 하나 들고 차관을 받기 위해 유럽을 돌았다. 거절만 당하다 1971년 9월 영국 바클레이 은행의 차관을 받기 위한 A&P 애플도어의 롱바톰 회장을 만나 추천서를 부탁했지만 대답은 역시 ‘No’였다.

이 때 정 회장은 대한민국 500원짜리 지폐를 꺼내 보이며 거북선 그림을 보여줬다. 정 회장은 “우리는 영국보다 300년이나 앞선 1500년대에 이미 철갑선을 만들어 외국을 물리쳤소”라며 “비록 쇄국정책으로 시기가 좀 늦어졌지만, 그 잠재력만큼은 충분하다고 생각하오”라며 롱바톰 회장을 설득했다. 정 회장의 기지와 배짱 끝에 결국 차관 도입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1977년 아산사회복지사업재단을 설립,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처음부터 아산재단을 미국의 록펠러 재단이나 포드 재단에 버금가는 재단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 아래 재단의 중점 사업부문을 의료사업과 사회복지 지원사업, 연구개발 지원사업, 장학사업 등 4개 부분으로 설정했다. 그는 특히 전국의 의료 취약지역에 대한 지원사업에 관심을 갖고 9개의 병원을 건립하는 한편 울산의과대학 및 아산생명과학연구소를 설립하는 등 의료 지원사업을 열정적으로 펼쳐 왔다.

90년대부터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되어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정 회장은 대북사업에 관심을 쏟았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정 회장은 다시 한번 세상이 놀랄만한 일을 해낸다. 당시 김 대통령의 대북 햇볕 정책에 맞춰서 금강산 개발 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1998년 통일소라고 명명된 소 떼 1001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는다. 당시 이 장면은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역사적인 순간 중 하나로 꼽힌다.


정 회장은 2차에 걸쳐 북한을 방문했다. 1차는 6월 16일 500마리 소를 데리고 갔으며, 2차는 501마리 소를 몰고 갔다. 이때 소 501마리와 함께 직접 판문점을 통해 방북,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면담하고 남북 협력 사업 추진을 논의했다. 당시 프랑스의 세계적인 석학 기 소르망은 정 회장이 몰고 간 소 떼를 두고 ‘20세기 최후의 전위 예술’이라고 말했다.

소떼 몰고 방북
역사적인 장면

그리고 마침내 금강산 관광사업에 관한 합의를 얻어 그해 11월 18일에 첫 금강산 관광을 위한 배가 출발했다. 금강산 관광사업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과 개성공단 건립 합의의 초석이 됐다. 당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 회장이 묵고 있던 평야의 백화원 초대소를 직접 방문하는 등 국가원수급에 달하는 극진한 예우를 했다. 후에는 평양에 ‘정주영 체육관’까지 건립됐다.

이런 정 회장의 업적으로 역사는 남북화해와 협력, 교류의 신기원을 개척했다는 평가와 시대사적 사명을 인식하고 분단의 벽을 뛰어넘은 현대사의 걸출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이런 업적 때문에 정 회장은 여론조사에서 국민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부자’로 꼽혔다. 이 외에도 그 동안 정 회장은 ‘한국 경제 60년 가장 위대한 기업가’ ‘기업인이 존경하는 최고 경영자’ ‘오피니언 리더들이 꼽은 한국 사회 대표 인물’ ‘대학생들이 부활하기를 바라는 기업인’ 등에 선정된 바 있다.

무에서 유 창조…불도저 정신
“이봐 해봤어?” 불굴의 개척자


“이봐, 해봤어?”


1984년 충남 서산간척지 개발사업을 맡은 현대건설은 최종 물막이 공사를 앞둔 상황에서 방조제용 바위가 계속 거센 물살에 휩쓸려 가는 바람에 공사가 더는 진행되지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 회장은 당시 현장을 찾아 폐유조선을 가라앉혀 물길을 잡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담당자가 ‘현실성이 있느냐’며 머뭇대자 정 회장은 “이봐, 해 봤어?”라고 되물으며 “해보지도 않은 채 고민하지 말고 일단 해 보라”고 말했다. 결국 정 회장의 아이디어는 성공적이었다. 현대건설은 공사기간을 무려 3년이나 앞당길 수 있었다. <뉴욕타임스> 등은 이 공사를 ‘정주영 공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라는 말이 ‘우리나라 경영인을 대표하는 최고 어록’으로 선정됐다. 대기업 전·현직 홍보 책임자들의 모임인 한국 CCO클럽은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간행물인 <재계 인사이트> 독자 278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정 회장의 말이 대표 어록으로 선정됐다고 지난달 23일 밝혔다.

한국 CCO 클럽은 설문에서 ‘기업가정신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기업인 어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복수 응답한 응답자의 20.2%가 정 회장의 “이봐, 해봤어?”를 최고의 어록으로 꼽은 것이다. 이 말은 ‘정주영 리더십’의 핵심 키워드다. 무한한 긍정 마인드와 무에서 유를 개척해낸 도전정신, 실패를 상쇄하고도 남는 창의성 등을 함축해서 표현한 말이다.

최근 정 회장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는 바람이 불고 있다. 그의 업적과 기업 철학을 되새겨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취지다. 이런 움직임의 배경에는 한국의 답답한 경제 현실이 깔려있다고 풀이된다.

오래도록 저성장의 늪에서 헤매고 있는 한국경제를 구출해낼 사람이나 방법을 찾다보니 정 회장의 리더십이 부상하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긍정과 도전정신, 창의성을 골자로 한 정주영 리더십이 환생해야 할 때라는 얘기다. 기업인들은 새로운 성장 동력 찾기보다 현상 유지와 대중의 눈치 살피기에 더 매달리는 분위기다. 창업 2·3세로 경영권이 넘어가면서 더욱 그런 느낌을 받는다.

맨땅에 일군
현대왕국 신화


최근 현대자동차그룹은 정 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기념식과 학술포지엄, 음악회, 사진전 등의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진행한다고 밝혔다. 정 회장 100주년의 재조명은 한국경제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다. 점점 기업가 정신이 상실되고 있는 시점에서 정 회장의 기록들은 한국만의 독특한 경영리더십의 표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min1330@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화제의 신간' 정주영 리더십 재조명
‘정주영은 살아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의 업적과 철학을 재조명한 서적도 잇달아 출판되고 있다. 그중에서 <정주영은 살아있다>(도서출판 솔)가 가장 주목받고 있다.

기성세대는 물론 2∼30대 젊은이들이 정주영 부활가를 부르고, 피터 드러커를 비롯한 세계의 석학들이 정주영 회장을 새롭게 주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 시사주간지 <타임>은 정주영을 아시아의 영웅으로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이 정주영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필자(김문현 현대중공업 자문역)는 그 답을 정주영의 리더십에서 찾고 있다. 바로 도전, 신용, 긍정, 창의, 이타의 리더십이다. 현대그룹 문화실에서 소 떼 방북, 금강산 관광 등 정주영의 홍보 전략을 담당했던 필자는 정주영의 어록과 에피소드를 보다 친숙한 언어로 재해석했다. 또한 사진 한 장만으로 정주영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진귀한 사진을 대거 수록했다. 게다가 에피소드 말미에 필자의 넓고 옅은 지식을 보너스로 채워 넣음으로써 바쁜 현대인들의 구미를 당긴다.

필자는 “10만명에 육박하는 청년실업 속에 도전정신은 희석되고 열정페이에 청년들이 위축되고 있다”며 “현재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한 대한민국 청년들에게 정주영의 다소 투박한 어록과 일화는 젊은이들에게 다시금 도전정신과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고 전했다.

필자는 성균관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했고, 1990년대 초부터 2000년까지 현대그룹 문화실 홍보팀장으로 재직하면서 정 회장의 홍보전략을 담당해왔다. 현대중공업 홍보실장과 인재교육원장직을 거친 뒤 2014년부터 울산대학병원, 현대백화점, 현대해상화재, 현대미포조선 등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든 정주영 리더십'이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는 등 정 회장의 기업가정신을 널리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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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용산에 날아들 영수회담 성적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꼬박 720일이 걸렸다. 한 나라의 대통령과 제1야당 대표가 만나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쳐 궁지에 몰린 용산 대통령실이 꺼내든 최후의 카드는 영수회담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이 무색하게 이번 만남은 여야 어느 한쪽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임기가 3년 차에 접어든 시점서 또다시 ‘강 대 강’ 매치가 예상된다. 정치권이 학수고대하던 윤석열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만남이 성사됐다. 이번 영수회담은 지난 19일, 윤 대통령이 이 대표에게 만남을 제안하면서 시작됐다.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브리핑을 통해 “윤 대통령은 이날 오후 3시30분 이 대표와 통화했다”며 “이 대표에게 다음 주 형편이 된다면 용산서 만나자고 제안했다”고 말했다. 둘의 만남은 윤 대통령 취임 이후 1년 11개월 만이다. 어렵게 만났는데… 같은 날 민주당은 즉각 환영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 강선우 대변인은 “윤 대통령은 이 대표에게 내주에 만날 것을 제안했다”며 “이 대표는 ‘많은 국가적 과제와 민생 현장에 어려움이 많다’며 되도록 이른 시일 안에 만나자고 화답했다”고 전했다. 그동안 이 대표는 꾸준히 영수회담을 요청했지만 윤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을 받고 있는 이 대표가 피의자 신분인 만큼 만남이 적절치 않다는 무언의 거절이었다. 윤 대통령의 변심에는 지지율이 20%대로 급락한 상황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풀이된다. 여당인 국민의힘이 4·10 총선서 참패한 데 이어 인사 문제를 두고 대통령실의 손발이 맞지 않자 비선 개입 의혹까지 가중됐다. 야당과 소통함으로써 단단하게 굳어진 불통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등 현 상황을 돌파하겠단 뜻이다. 개혁신당 이준석 당선인은 “이번 총선 이후 ‘야당 대표를 무시하다가는 총리도 임명 못하겠구나’라는 상황을 파악한 것”이라며 “아마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총리 인선 협조 정도를 받아내기 위한 피상적 대화가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이 대표에겐 편한 회담이 될 것이다. 자기 할 말만 하면 되기 때문”이라며 “예를 들어 ‘채 상병 특검 받고 거부권 행사하지 말아달라’고 했을 때 대통령이 못 받으면 회담까지 하고 욕먹는 건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두 사람이 만남을 갖기로 합의를 봤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조율해야 하는 상황의 연속인 만큼 넘어야 할 고비는 많았다. 1차 실무진 회의도 쉽지만은 않았다. 당초 지난 22일 예정됐던 만남이 대통령실의 일방적인 취소로 불발된 것이다. 대통령실의 수석급 교체 일정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생긴 것으로 전해진다. 피치 못할 사정이라지만 준비 회동조차 잡음이 새 나오면서 위태위태한 앞날이 예고됐다. 결국 첫 실무진 만남은 이로부터 하루 뒤인 지난 23일 이뤄졌다. 대통령실 측에서는 홍철호 정무수석과 차순오 정무비서관이 참석했다. 민주당 측에서는 천준호 비서실장과 권혁기 정무기획실장이 자리했다. 이날 회의는 영수회담 날짜는 물론 의제도 정하지 못한 채 빈손으로 종료됐다. 지지율 하락에 반등 노렸지만… 의제 놓고 격돌…샅바 잡은 윤-이 지난 25일 진행된 2차 회의도 큰 소득은 없었다. 테이블에 올릴 의제를 놓고 양측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그동안 민주당은 채 상병 사망 사건 수사외압 의혹을 담은 특검법 수용과 윤 대통령의 거부권 남용에 대한 사과 등을 의제로 다루자는 입장을 밝혀왔다. 반면 이를 전해 들은 대통령실은 난감하단 태도를 보이며 팽팽하게 대립했다. 천 비서실장은 실무 협상 직후 브리핑서 “사전에 조율해 성과 있는 회담이 되도록 의제에 대한 검토 의견을 (대통령실이)제시하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고 말했다. 홍철호 대통령실 정무수석은 “지도부와 상의를 거쳐야 한다”며 추후 답변을 주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측이 제안한 의제와 관련해서는 ‘포괄적 수용’이라는 입장을 전달했다. 의제를 놓고 양쪽이 평행선을 달리면서 이대로 영수회담이 불발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왔다. 하지만 지난 26일 이 대표가 “다 접어두고 먼저 윤 대통령을 만나도록 하겠다”고 말하면서 논의는 급물살을 탔다. 진통 끝에 영수회담 날짜가 정해지면서 세간의 관심이 두 사람의 입에 집중됐다. 윤 대통령과 이 대표는 지난달 29일 오후 2시 용산 대통령실서 만났다. 대통령실에선 정진석 대통령 비서실장과 홍철호 정무수석, 이도운 홍보수석이 배석했다. 민주당에선 천준호 당 대표 비서실장과 진성준 정책위의장, 박성준 수석 대변인이 자리했다. 대통령실은 이번 영수회담을 통해 정국을 풀어갈 실마리를 확보할 것으로 기대했다. 민주당은 ‘총선 민의’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재명 15분 독주 윤 대통령은 대통령실로 들어선 이 대표를 웃음으로 맞이했다. 곧이어 두 사람은 악수를 한 뒤 건강 등 안부를 주고받았다. 이 대표는 “저희가 (국회서 이곳으로)오다 보니 20분 정도 걸리던데, 실제 여기 오는 데 700일이 걸렸다”며 뼈 있는 농담을 건넸다. 윤 대통령은 대답 대신 웃음으로 갈음했다. 이날 영수회담서 가장 눈길을 끈 건 이른바 이 대표의 ‘작심 발언’이다. 윤 대통령의 인사말 이후 취재진이 퇴장하려 하자 이 대표는 “퇴장할 건 아니고, 제가 대통령님한테 드릴 말씀을 써왔다”며 멈춰 세운 뒤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읽어 내려갔다. 700일 동안 묵혀둔 말을 몽땅 쏟아내겠다는 듯, 이 대표의 발언은 장장 15분 넘게 이어졌다. 이 대표는 “대통령님께서 너무 잘 아시겠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이 참으로 팍팍하고 국민의 삶이 어렵다”고 운을 띄웠다. 이어 “국가적으로 보면 정치, 경제, 사회, 또 외교 안보, 모든 영역서 많은 위기가 도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물가, 고금리, 고환율 이런 삼중고를 포함해서 우리 국민의 민생과 경제가 참으로 어렵다는 것은 대통령님께서도 절감하실 걸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곧이어 이 대표는 ‘전 국민 1인당 25만원 민생회복지원금 지급’을 요구하면서 본격적인 의제를 던졌다. 이 대표는 “민간경제가 어려울 때 정부가 나서는 것이 원칙이다. 우리 민주당이 제안한 긴급 민생회복 조치를 적극적으로 검토해주실 것을 부탁드린다”며 “특히 지역화폐로 지급하면 소득 지원 효과에 더해서 골목상권 소상공인 자영업자 지방에 대한 지원 효과가 매우 큰 민생회복지원금을 꼭 수용해주길 부탁드린다”고 강조했다. 이 대표는 ‘김건희 특검법’ 수용도 에둘러 촉구했다. 그는 “이번 기회에 국정운영에 큰 부담이 되는 가족 등 주변 인사들의 여러 의혹도 정리하고 넘어가시면 좋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 밖에도 이태원 참사나 채 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밝혀 그 책임을 묻고 재발 방지 대책을 생각할 것과 연구·개발(R&D) 예산 등도 화제로 올렸다. 거부권 행사를 자제할 것도 강하게 요구했다. 아울러 “지금까지 제가 말씀드린 게 상당히 불편하실 수 있을 것 같다”면서도 “또 민심을 과감하게 가감 없이 전달하는 것이 이 자리가 마련된 이유라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윤 대통령은 이 대표의 말을 들으면서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답했다. 처음 웃는 얼굴로 이 대표를 맞이할 때와 달리 표정은 점차 굳어져 갔다. 모두발언이 끝나자 윤 대통령은 “이 대표와 민주당이 강조해 오던 이야기라 예상하고 있었다”며 모두발언은 생략한 뒤 비공개 회담을 이어갔다. 이날 회담은 예상 시간인 1시간을 훌쩍 넘은 오후 4시10분쯤에 마무리됐다. 130분간 자리를 함께했지만 도중에 배석자를 제외하는 등 두 사람이 독대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다. 정치권 안팎에서는 두 사람이 영수회담 도중 배석자를 물리고 자연스럽게 만찬 회동을 가질 것으로도 기대했지만 이번 만남은 차담 수준서 그쳤다. 영수회담을 마친 뒤 대통령실과 민주당은 각각 브리핑을 진행했다. 같은 장소서 같은 시간을 보냈지만 이번 회담을 바라본 양측의 시각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두 쪽 난 여론 국민의 판단은? 이도운 대통령실 홍보수석은 영수회담 종료 직후 브리핑을 통해 “전체적으로 볼 때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대표와 민생 문제 등에 대해 깊이 또 솔직하고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눴다”며 “합의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양측이 총론적 혹은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수석의 설명처럼 별도의 합의문은 없었다. 다만 의료개혁이 필요하고 의대 정원 증원이 불가피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대표가 “의료개혁은 시급한 과제며 대통령의 정책 방향이 옳다. 민주당도 협력하겠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것이다. 다만 “민생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대통령실과 여야 간의 정책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데 대해서도 조금 이견이 있다는 것도 확인했다”며 “대통령은 민생 협의를 위한 여야정 협의체 같은 기구가 필요할 수 있다고 말했고 이 대표는 ‘여야가 국회라는 공간을 우선 활용하자’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특별법에 대해서는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조사나 재발 방지책, 피해자 유족들에 대한 지원에 대해서는 공감을 하지만 지금 국회에 제출된 법안이 법리적으로 볼 때 민간조사위원회서 그 영장 청구권을 갖는 등 좀 법리적으로 문제가 있을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런 부분은 조금 해소하고 다시 논의를 하면 좋겠다’ ‘그렇게 한다면은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대통령과 이 대표는 앞으로도 종종 만나기로 했다”며 “두 분이 만날 수도 있고 여당의 지도체제가 들어서면 3자 회동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측이 대승적으로 인식을 같이한 부분은 있었다는 대통령실의 평가와 달리 민주당은 이번 영수회담에 대해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회담에 배석한 박성준 민주당 수석 대변인은 같은 날 국회서 브리핑을 열고 “영수회담에 대해 큰 기대를 했지만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박 수석 대변인은 “상황 인식이 너무 안일해서 향후 국정이 우려된다”며 “특히 우리 당이 주장했던 민생회복 국정기조와 관련해 민생을 회복하고 국정 기조를 전환하겠다는 의지가 없어 보였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 대해 이 대표의 소회를 묻는 질문에는 “답답하고 아쉬웠다. 소통의 첫 장을 열었다는 데 의미를 둬야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소통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서로 공감했으나 이 대표가 내민 청구서에 윤 대통령이 딱 떨어지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범야권 집중 포격 맞은 대통령실 “결과도 실리도 없다” 쏟아진 질타 범야권도 일제히 쓴소리를 얹었다. “이럴 거면 대체 왜 만났냐”는 반응이 대체적이다. 조국혁신당(이하 조국당)은 “윤 대통령의 답은 거의 없었다”며 “총선 민심에 관한 시험을 치르면서 백지 답안지를 낸 것과 다름이 없다”고 혹평했다. 조국당 강미정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이번 회담을 통해 윤 대통령의 기조가 곧바로 바뀌진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강 대변인은 “준비가 덜 된 대통령과 그럼에도 최대한 민심을 담아 질문을 한 야당 대표의 만남”이라며 “(대통령이)여러 가지 법안과 자신의 가족 문제 등 민감한 질문은 빼버렸다. 추후 만남을 기약한 정도일 뿐 아무런 결실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다만 “그래도 윤 대통령 측에서 ‘자주 소통하자’는 뉘앙스가 나왔다”며 “만남을 거듭한다면 나아질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걸어본다”고 말했다. 새로운미래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은 없었다”며 “130분간 회담을 했으나 공동합의문은 없고 소모적인 정쟁에 불과했다”고 양측을 모두 비판했다. 새로운미래 신재용 대변인은 <일요시사>와의 통화서 “가장 시급한 문제인 의료대란 관련해 조금이라도 진정성 있는 결과가 나왔어야 이번 회담이 성과가 있었다고 본다”며 “진전도 성과도 없이 끝나 버렸다”고 혹평했다. 김준우 정의당 대표는 자신의 SNS를 통해 “130여분간 진행됐다는 대화의 결말은 결국 ‘2년 만에 첫 대화를 했다’는 그 자체와 여야 모두 입장이 애초에 비슷했던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확인한 것 외엔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고 비판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이번 영수회담이 아쉽게 끝난 것에 대해 이 대표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봤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권 관계자는 <일요시사>와의 통화에서 “(이 대표는)대화의 기본이 안 돼있다”며 “대화라는 건 서로 말을 주고받는 걸 전제로 해야 하는데, (이 대표처럼)하고 싶은 말을 모조리 한다고 해서 소통이 되는 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정치권 관계자 역시 “이번 만남은 이 대표의 1승”이라면서도 “이 대표가 무리하게 정국을 끌고 갈 가능성처럼 비칠까 우려되는 지점도 있다”고 말했다. 첫술에 배부르랴 현재로서는 이번 회담이 윤 대통령의 ‘자충수’라는 여론이 강하다.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TK·PK 기반의 집토끼를 꽉 쥐는 데 효과적일지 몰라도 중도층이 보기에는 여러모로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이다. 영수회담 민심이 반영된 여론조사 결과도 주목된다. 레임덕 돌파구로 이 대표와의 만남을 선택한 윤 대통령의 선택이 자충수인지 신의 한 수인지 지켜봐야 할 전망이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