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자금 투입된 기업들 현주소

눈치 안보고 방만기업 살리고자 혈세로 돈잔치

[일요시사 경제팀] 양동주 기자 = 밑 빠진 독에 열심히 물을 채운다 한들 그 끝은 요원할 뿐이다. 물을 가득 채울 요량이라면 구멍 난 곳을 찾아 고치거나 아예 새로운 독을 찾는 게 순리다. 누구나 알법한 상식이지만 정작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이 같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방만한 운영으로 위기에 봉착한 기업을 살리기 위해 무작정 국민의 혈세를 쏟아 붓는 모습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공적자금’은 정부가 금융기관의 구조조정을 지원하기 위해 마련한 정부재정자금을 의미한다. 통상 금융기관이 기업여신을 회수하지 못해 어려움에 처할 경우 투입된다. 이 경우 공적자금은 정부예산에서 직접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금보험공사와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채권을 발행해 조달한다.

다만 예금보험공사와 자산관리공사가 발행한 채권의 이자와 원금손실은 예산으로 부담하기 때문에 때에 따라 국민의 부담으로 되돌아올 가능성이 크다. 공적자금 투입 여부를 두고 혈세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못받는 돈
떼인 돈도

지난달 7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민병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에 따르면 정부의 공적자금 투입액은 지난 6월 말 기준 168조6553억원에 이른다. 은행, 증권, 투자신탁, 보험, 종합금융, 저축은행, 신협에 지원된 공적자금을 합한 규모다.

문제는 정부가 투입한 공적자금 가운데 지금껏 회수하지 못한 금액이 60조원에 육박한다는 사실이다. 현재까지 회수 금액은 110조8525억원, 회수율은 65.7%에 불과하다. 특히 은행에 지원된 공적자금 86조8768억원 가운데 회수금액 66조3243억원을 제외한 나머지 20조5525억원은 완전 회수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다.


보험에 들어간 공적자금 21조2012억원 가운데 미회수금액은 14조2148억원이다. 또한 22조7503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된 종금사의 경우 12조121억원의 미회수금액이 남아 있다.

증권·투신에는 21조8926억원의 공적자금이 지원돼 14조881억원이 회수됐다. 미회수 공적자금은 7조8045억원이다. 2011년 부실 사태를 겪은 저축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은 8조5114억원이고 미회수금액은 2조5063억원이다. 5조2억원의 공적자금이 들어간 신협의 경우 1조5810억원이 미회수금액으로 남았다.

기업별로 살펴보면 금융업 분야에 공적자금 투입이 집중됐고 우리은행, 한화생명, 수협, 서울보증보험 등은 아직까지 미회수금액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은행에 투입된 공적자금중 미회수금액은 약 4조7000억원이다. 현재 정부는 우리은행 보유 지분 중 15%를 중동지역 국부펀드에 매각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가 보유한 우리은행 지분은 51.04%(3억4514만2000주)다.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 부실화 된 대한생명(현 한화생명)에는 3조5500억원의 공적자금이 투입됐고 약 1조6000억원을 회수했다. 현재 정부가 가지고 있는 한화생명 지분은 22.75%(1억9759만1000주)다. 정부는 시장상황을 고려해 지분 매각을 추진할 방침이다. 지난 3월에도 지분 2%를 매각한 바 있다.

하지만 한화생명에 투입된 공적자금의 추가 회수는 난항이 예상된다. 한화생명 주가가 8300원대에 머물러 있는 만큼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반등해야 원금회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금융권 170조…회수율 70%도 못미쳐
국민 세금 눈먼돈?…무작정 쏟아부어


외환위기 당시 파산위기에 몰렸던 서울보증보증에 들어간 공적자금 10조2000억원의 회수도 불투명하다. 정부의 서울보증보험 지분율은 93.85%(3276만4000주)다. 정부 관계자는 “외환위기 당시 기업들의 부실 때문에 보증회사들이 시스템 안정을 위해 공적자금으로 매꿔 준 부분이라 서울보증보험에 투입된 자금은 회수가 힘들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반면 우선출자증권(주식회사의 상환우선주 성격)을 가지고 있는 수협의 경우 1조1580억원의 공적자금 회수가 가능할 전망이다. 예금보험공사 관계자는 “현재는 수협중앙회의 신용사업 특별회계를 통해 회수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 수협은행의 당기순이익을 중앙회가 배당받아 특별회계를 통해 공적자금을 상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나마 앞의 사례는 양호한 편이다. 2011년 저축은행 사태에 따른 구조조정 과정에서 투입된 공적자금 27조원 가운데 지금까지 회수된 금액은 6조원에도 못 미친다. 지난달 21일 민 의원이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제출 받은 ‘2011년 이후 부실저축은행 지원 및 회수현황’에 따르면 예금보험공사는 2011년 이후 31개 부실 저축은행에 27조1701억원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5조9031억원을 회수하는데 그쳤다. 회수율은 21.7%.

솔로몬저축은행에 3조5243억원으로 가장 많은 공적자금이 편성됐고 부산저축은행 3조1580억원, 토마토저축은행 3조150억원, 제일저축은행에 2조3941억원이 투입됐다.

이들 중에서 공적자금 회수율이 저조한 곳은 에이스저축은행(3.12%)과 보해저축은행(3.72%), 부산2저축은행(7.40%), 부산저축은행(8.05%) 등이다. 심지어 해솔저축은행과 골든브릿지저축은행의 회수실적은 전무했다.

밑 빠진 독
대우조선해양

반면 대영저축은행의 경우 투입된 1426억원 전액을 회수했다. 6677억원이 투입된 신라저축은행은 50.5%, 3672억원이 들어간 더블유저축은행은 45.5%로 회수율이 높은 축에 속했다.

이처럼 저조한 공적자금 회수율이 공론화되는 가운데 최근 대우조선해양에 대한 자금 지원방안이 논의되자 공적자금을 둘러싼 논란이 다시 불붙기 시작했다.
 

지난달 29일 산업은행은 이사회를 열고 대우조선해양 실사 결과 및 자금 지원 등 정상화 방안을 공식 발표했다. 지원 방안에는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의 자금을 지원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지원규모는 내년도 상반기 대우조선해양의 부족자금 4조2000억원을 고려한 조치다.

우선 자본확충은 유동성 지원과 연계한 유상증자, 출자전환 등의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지원으로 산은은 2016년 말까지 대우조선의 부채비율을 500% 이하로 끌어내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산업은행,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는 대우조선해양의 정상적인 사업 수주를 지원하기 위해 선수금환급보증(RG)의 90%를 각각 1/3씩 나눠 공급할 예정이다. 당초 산업은행은 대우조선에 유상증자와 신규대출로 2조원을 지원하고 수출입은행 등이 나머지 2조원을 분담하는 방안이 거론된 바 있다.

산업은행의 자금지원과 함께 대우조선해양은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할 계획이다. 또한 인력과 조직을 최적 생산 규모, 선박 포트폴리오에 부합할 수 있도록 축소할 예정이다.

그러나 채권은행들의 지원 방안에 대한 비난 여론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세금을 투입하더라도 대우조선해양의 미래를 낙관하기 힘든데다 책임자 문책은 덮어둔 채 지원방안 마련에 나섰다는 지적이 빗발치고 있다. 즉, 금융당국의 안일한 관리감독이 이미 공적자금 투입으로 연결된 만큼 지원 방안에 앞서 잘못을 가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산업은행 노동조합은 관리감독 의무가 있는 산업은행이 대우조선해양 부실 사태에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인 뒤 실사에 따른 책임소재 파악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산업은행 노동조합 관계자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방식은 은행이 취해야 할 시장안전판의 구조조정 방식이 아닐뿐더러 큰 부실사태를 일으킬 것”이라며 “위기일수록 원칙에 따른 과감한 정책 결정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수혈만 해놓고 관리 허점투성
줏대 없는 당국 정책 조정 논란

대우조선해양 자금 지원이 결정되자 화살은 곧바로 국책은행에 쏠리고 있다. 국책은행들이 기업자금조달이나 수출금융지원 등 본연의 임무는 외면한 채 기업구조조정 등 전문성이 없는 분야에 손을 대면서 '부실기업 처리반'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국책은행의 손실은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하는 만큼 부실 관리에 대한 책임과 함께 국책은행의 본분에 대한 비판마저 커지고 있다.

특히 산업은행은 최근 5년간은 대우조선해양 최고재무책임자(CFO)에 자사 출신 인사를 임명하는 등 회사 전반을 관리·감독했다는 점에서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 게다가 산업은행은 STX의 허위장부를 근거로 9000억원을 지원해 적자를 기록한 전력이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은행 외에는 기업 구조조정을 담당할 수 있는 곳이 전무한 상황”이라며 “은행들마다 이해관계가 달라 기업 구조조정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구조”라고 말했다.


수출입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2011년 이후 수출입은행이 유동성을 지원한 기업 중 법정관리에 돌입한 회사는 102곳이며 이들에 대한 여신 규모는 1조3000억원에 달한다. 특히 성동조선해양 구조조정 난항으로 대규모 손실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성동조선해양의 구조조정이 더디게 진행되는 상황에서 SPP조선 역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수출입은행의 속을 썩이고 있다. 수출입은행은 정부 지분이 70.08%(한국은행 15.04%·산업은행 14.88%)에 이른다. 

그러나 이들 국책은행은 정부 소유인 만큼 여신공급이나 구조조정에 있어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 달리 해석하자면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고 위기의 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모든 상황에 윗선의 개입과 압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수출입은행은 성동조선해양에 채권단의 반대를 무릅쓰고 3000억원을 단독으로 지원했지만 이 과정에서 특정 국회의원의 눈치를 본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대규모 손실 불가피

문제는 국책은행이 부실기업에 투입하는 공적자금은 궁극적으로 국민 세금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대우조선해양을 ‘혈세 먹는 하마’로 바라보는 시선과 지원에 앞서 분식회계 등 불거진 의혹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이 선행돼야 한다는 지적 역시 비슷한 맥락이다.

IB업계 관계자는 "국책은행의 관리 소홀로 결국 부실기업의 손실을 세금으로 메워주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며 "국책은행이 부실기업을 관리하고 구조조정을 이뤄낼만한 역량이 없다면 아예 기업구조조정 업무에서 손을 떼든지, 역할 재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자 국책은행의 정책금융체계를 대폭 개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구정한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서울 은행회관에서 열린 ‘정책금융 역할 강화방안 세미나’에서 “국책은행은 대기업이나 각종 지원이 많은 중소기업보다 중견기업 지원에 집중해야 한다”고 밝혔다.


<djyang@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대재벌’ 산업은행 파워

정부가 100% 지분을 지닌 산업은행은 지난 6월 기준으로 지분 15% 이상을 보유한 자회사를 무려 288곳 소유하고 있다. 이 가운데 정부기관을 제외한 비금융 자회사가 116곳에 이른다.

지금껏 산업은행은 자금난에 직면한 기업을 출자전환 형태로 지원하면서 자회사로 편입해 왔다. 물론 국책은행인 만큼 경영정상화를 거쳐 시장에 지분을 매각한 후 공적자금을 회수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그러나 산업은행은 식구를 늘릴 때만 기민할 뿐 정작 품안의 구성원을 출가시키는 데 미적거리고 있다. 결국 자회사 매각에 소극적이었던 행보는 엉뚱하게도 산업은행을 수많은 대기업을 거느린 '재벌'로 둔갑시켰다.

그 사이 STX조선해양마저 산업은행 휘하에 편입될 수 있다는 소문마저 나돌고 있다. STX조선은 글로벌 불황 여파로 유동성 위기에 처한 2013년 5월 자율협약에 들어갔다. 자율협약 체결 이후 회계법인 실사를 거쳐 STX조선에는 2조7000억원의 자금이 투입됐다. 그러나 잇단 선박수주 취소와 원가 경쟁력 하락으로 손실이 계속 발생해 추가 지원이 불가피해졌고 이듬해 채권단은 1조8000억원을 추가 지원했다.

이렇게 4조5000억원에 달하는 자금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STX조선은 자본잠식 상태로 채권단 관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면 STX조선해양을 산업은행이 떠안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업은행마저 정상화에 실패하면 곧바로 국민의 혈세가 투입돼야 한다. 문제는 산업은행 휘하로 편입된 상당수 기업들이 가치 하락을 겪고 있으며 그만큼 매각작업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지분 15% 이상 보유 회사 288곳
때마다 헐값·특혜 의혹 시달려

실제로 대우조선해양의 경우 2008년 매각 추진 당시 6조원 수준으로 평가됐지만 현재 시가총액은 약 1조원에 불과하다. 산업은행 휘하에 들어가면 회생하지 못한 채 산업은행 계열사로 주저앉아 경쟁력을 잃는다는 지적이 계속 나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금호산업의 경우 매각까지 5개월을 끌다 7228억원에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에게 넘겼다. 경영정상화까지 1조원 이상의 금액이 투입됐다는 점에서 사실상 손실을 본 셈이다. 특히 금호산업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박 회장에게 다시 넘기는 과정에서 ‘특혜성 구조조정’이라는 사례마저 남겼다.

물론 산업은행은 한진그룹이나 현대그룹의 구조조정 과정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그동안 축적해 온 기업 구조조정 경험에 비춰 보면 전문성이 기대이하라는 지적이 많다.

IB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은 정책금융기관으로서 대형 수출산업 지원을 주로 하다가 부실기업 인수 등을 겪으면서 허점을 노출하기 시작했다”며 “최후의 보루 역할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도 생각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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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