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인물> 조용히 떠난 고 천경자 화백

영혼과 꽃의 화가 '영원히 잠들다'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영원한 나르시시스트였던 천경자(91) 화백이 미국에서 숨을 거둔 것으로 뒤늦게 알려졌다. 절필을 선언한 천 화백은 외부와 인연을 끊으며, 칩거에 들어갔다. 그 누구와도 연락이 닿지 않은 탓에 생사 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아 많은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전설인 여류 작가 천 화백은 굴곡진 삶을 살다 갔다.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여성화가 천경자 화백이 미국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자택에서 두 달 전 별세한 것으로 전해졌다.
 
천 화백의 딸 이혜선씨는 “어머니가 2003년 7월2일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줄곧 병석에 계셨는데 지난해 11월 추수감사절 이후 급격히 몸이 안 좋아 지셨다”며 “지난 8월6일 새벽 5시쯤 현저히 맥박이 떨어지더니 의사가 보는 가운데 잠자는 것처럼 평안하게 돌아가셨다”고 지난 22일 한 언론을 통해 밝혔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
 
수년간 뉴욕에서 거주해온 천 화백은 국내 미술계와 소식이 끊기면서 1년 전부터는 생사 논란이 있었다. 이씨는 “뉴욕의 한 성당에서 조용하게 장례를 치렀고 한구과 미국 양쪽에 사망 신고를 했다”고 밝혔다. 이어 “지난 8월 중순 서울시 측에 협조를 구해 어머니 유골함을 들고 그림이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시실과 수장고를 한 바퀴 돌고 보내드렸다”고 했다.
 

김홍희 서울시립미술관장은 “이씨가 몇 달 전 유골함을 들고 미술관의 수장고에 다녀갔다는 보고를 받았다. 이씨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김 관장은 “당시 이씨가 관련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말아줄 것을 강력 요청했다고 들었다. 개인적인 일이라 본인이 적절한 시점에 밝힐 것으로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천 화백이 17년 전 기증한 작품 93점이 있다.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들이다.  
 
천 화백은 1924년 전라남도 고흥군에서 군서기였던 아버지와 무남독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1남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외동딸을 남장을 시켜 서당에까지 보낼 정도로 깨어 있던 외할아버지는 그 딸이 낳은 큰 손녀를 금지옥엽으로 예뻐하며 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천 화백은 밤마다 외할아버지의 무릎에 누워 ‘심청전’ ‘흥부전’ ‘수호지’ ‘춘향전’을 듣다 잠이 들었고 천자문과 창까지 배우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천 화백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보통학교 1학년 때 일본인 담임선생이 그림에 재능이 있음을 알아봤으며, 대청마루 흰 횟가루 벽에 그린 여인상이 외할머니 눈에 띄어 매를 맞기도 했다.
 
뇌출혈 투병생활…두달전 별세 뒤늦게 확인
외부와 연락 끊고 칩거 “소문·의혹 무성”
 
1940년 17세 때 여수항을 출발해 도쿄 유학길에 올랐다.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녀의 동경 유학행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아버지는 결혼을 하거나 의대에 진학하라고 해서다, 천 화백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 ‘미친 척’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느날 아버지에게 유학 문제로 꾸지람을 듣던 천 화백은 갑자기 “하하 하하하”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미친 척을 한 것이다.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이번엔 “꺼이꺼이”하며 대성통곡을 했다. 이 작전이 성공해 천 화백은 바라던 대로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이 무렵 천 화백은 본명이던 옥자를 버리고 경자라는 이름을 스스로 지어 붙인다. 
 
천 화백은 학교에서 일본화(당시 동양화를 일본화라고 불렀다)를 전공했다. 그 시설 유행하던 그림은 입체파와 야수파였지만 천 화백은 서양화보다 일본화에 더 끌렸다. 일본화는 서양화보다는 곱고 섬세했다. 천 화백은 색체에 관심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를 따라 포목점에서 명주 비단 등 옷감 보는 걸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시기 겪어
‘생태’ 탄생 배경
 
일본 유학 중이던 1942년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아버지를 그린 ‘조부’가 입선하고 1943년 제23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외할머니를 그린 졸업 작품 ‘노부’가 입선하면서 재능을 인정받는다. 조부는 고혈압으로 반신불수가 된 몸이지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의 모델이 되어준 외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그린 작품이다.
 
일본이 세계 2차 대전으로 패망하기 직전 천 화백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다. 이때 당시 귀국하던 표를 구하지 못해 도쿄역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당시 우연히 만나 표를 건넨 이철식과 1944년 결혼을 한다.
 
이후 첫 딸 둘째 아들을 낳았으며, 1946년 전남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천 화백의 결혼생활은 길지 않았다. 그러다 사회부 신문 기자였던 두 번째 남편 김남중을 만난다. 두 번째 남편 사이에서 딸과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그렇게 오래가지 못했다. 이후 남편 없이 네 명의 자식을 보살핀다. 
 
그러다 천 화백은 유부남과 불륜 관계를 맺기도 한다. 천 화백은 자서전에 이 유부남에 대해 “청춘에 메말라 버린 나는 목 타는 사막에서 감로수를 마신 듯한 기분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천 화백은 떳떳하지 못한 관계에 대한 자괴감과 그의 변덕스러운 태도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이어갔다.
 
여동생마저 6·25전쟁이 끝나자마자 폐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병명조차 알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당시 천 화백은 절망적인 상태였다. 화단에 파란을 일으켰던 ‘생태’가 이때 당시 탄생했다. 
 
 
아픔을 견디지 못한 천 화백은 자신의 고통을 마비시킬 만큼 무섭도록 끔찍한 자극을 줄 수 있는 소재를 찾아 헤맸다. 그리하여 발길이 멈춘 곳은 광주역에 있는 한 뱀집이었다. 천 화백은 당시 매일 아침이 되면 스케치북을 들고 출근하듯 뱀집으로 향했다.
 
다행히 뱀집 주인은 천 화백을 이해하며, 그림을 그리기 좋도록 유리 상자에 많은 뱀을 담아주기도 했다. 그림을 완성한 후 얽히고설킨 뱀의 숫자가 총 33마리였다. 그녀는 당시 사랑하던 유부남의 나이가 35세에 뱀띠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어 두 마리를 더 그려 넣었다.
 

천 화백은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생태에 대해 “잔뜩 독을 품고서 세상을 향해 혀를 내밀던 독사들 (중략) 세상사람들이 징그럽고 흉측하다고 고개를 돌리는 그 뱀들이 나에게는 생명수 마냥 느껴졌다.(중략)”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1952년 피란지인 부산에서 연 개인전에 내놓은 생태는 화단이 주목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72년 베트남전 당시 문공부에서 베트남전 전쟁 기록화를 그리기 위해 화가 열 사람을 파견한다는 기별을 받고 김기창, 박영선, 김원, 임직순 등 남자 화가들 틈에서 홍일점 종군화가가 된다. 맹호부대에 종군해 1주일간 종군하면서 M-16소총을 들고 꽃나무 그늘에 잠복하는 병사들, 연분홍 아오자이를 입고 자전거로 거리를 누비는 아가씨들을 많은 스케치와 담채 작품으로 남겼다.

최대 스캔들
‘미인도’ 논란
 
뱀으로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알린 천 화백의 그림 소재는 주로 꽃과 여인이다. 미의 대명사로 통하는 꽃과 여인은 일반적인 그림소재다. 화가가 기피할 것 같은 뻔한 소재지만 천 화백은 개의치 않았다. 아마 소재 자체의 특수성보다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을 그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천 화백이 그린 여인의 모습에선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자화상이 아닌 경우에도 여인들의 얼굴이 대부분 화가 자신과 닮아서다. 외국인을 모델로 그렸다 해도 예외는 아니다. 천 화백이 영원한 나르시시스트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시대였음에도 천 화백은 하이힐과 양장을 입었을 정도로 상당히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이미 오래전 세계일주를 했을 뿐만 아니라 상당한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담배가 소재로 자주 등장할 정도다. 사실 과거에는 회충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담배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천경자 집안에는 대대로 애연가가 많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애연가였으며, 천경자의 딸 또한 애연가였고, 모녀간에 맞담배를 즐겼다 한다.
 
천 화백은 노년까지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그는 절필까지 하게 된다. 
 
 
천 화백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려 있는 자신의 그림 ‘미인도’가 자신의 작품이 아닌 위작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국립현대미술관은 10·26사태로 김재규의 재산을 환수한 후 인도받은 진품이라며 한국화랑협회에 감정을 의뢰했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말했으니 위작으로 결론 날 것으로 예상했지만, 국립현대미술관이 이 작품은 진품이라고 맞서는 바람에 미술계 최대 위작시비가 벌어지게 됐다.

위작 시비로 스트레스
말년 붓 꺾고 은둔생활 
 
천 화백은 자신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혼이 없다며 반박하는 가운데 한국화랑협회는 현미경 분석, 적외선과 X선 촬영 등 정밀 감식을 했다. 그 결과 감정위원 전원 일치로 진품 판정을 내렸다. 당시 천 화백은 “내가 낳지도 않은 자녀를 남들이 당신 자녀라고 윽박지르면 어떡하느냐”고 항변했다. 하지만 당시 여론은 ‘정신이 이상해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라는 시선이 더 많았다. 
 
한국화랑협회는 2차에 걸쳐 진품이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이는 생존 작가이고 정신 상태가 정상이라면 작가의 의견에 감정의 우선 순위를 둔다는 화랑협회 내부의 규정에도 어긋난 결론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재판까지 가게 됐지만, 법원에서는 판단 불가를 판정했다.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은 천 화백은 “붓을 들기 두렵다. 창작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로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 채 대한민국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하였으며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이후 1998년 천 화백은 일시 귀국해 자신의 작품들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일단락된 듯하던 사건은 8년 뒤 한 위조범의 자백으로 재차 논란이 불거졌다. 그러나 검찰은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할 수 없다며, 수사하지 않았다. 이런 탓에 위작을 증명할 공신력 있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이 사건은 여전히 진위여부가 밝혀지지 않았다.
 
현대 미술 전설
굴곡진 삶 살아
 
천 화백에 대한 또 다른 논란도 있다. 천 화백이 절필을 선언한 이후 누구도 그의 생사 여부를 알지 못했다. 2003년 미국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이후 거동이 불가능해 10년 넘게 큰딸의 간호를 받으며 투병 중인 것으로 전해졌지만, 한편에서는 그녀가 이미 사망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지난해 대한민국예술원이 천 화백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 의료 기록 등을 요청했다. 큰딸은 명예훼손이라며 자료 제출을 거부했고, 예술원은 생사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월 180만원의 수당 지급을 중단했다.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검머외 쿠팡’ 막가는 싸가지 행보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쿠팡의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현재까지 대응만 봐서는 국민은 물론, 정부와도 전면전을 벌일 기세다. 새어나간 정보의 범위와 규모가 ‘역대급’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최악의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쿠팡의 고개는 꺾일 줄 모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뭘 믿고 저러나’ 소리가 나오는 중이다. 쿠팡의 고객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른바 쿠팡 사태가 점입가경이다. 사태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수습은커녕 국민의 화만 돋우고 있다. 쿠팡의 대응 태도가 미지근한 수준을 넘어 뻔뻔한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 김범석 의장은 모습을 비추지 않고 보상안은 꼼수로 가득하다. 국민을 조롱하는 게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한 달 만에 고개 숙여 지난해 11월 말 3370만명에 이르는 쿠팡 고객의 개인정보가 ‘탈탈’ 털렸다. 앞서 쿠팡은 4500여건의 고객 정보가 유출됐다고 정부 당국에 신고했지만 2주 만에 그 수치는 7500배까지 늘어났다. 전 국민의 65% 수준이며 지난해 4월 SKT 개인정보 유출 사태 범위(2300만명)를 훌쩍 넘는 사태였다. 쿠팡은 이커머스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다. 대형마트 등이 규제에 막혀 뒷걸음질 칠 때 쿠팡은 로켓배송으로 시장을 싹쓸이했다. 전날 저녁에 주문해도 새벽이면 물건이 문 앞에 와 있는 총알 배송에 소비자는 쿠팡으로 몰렸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비판을 받던 물류센터는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번 사태는 아이러니하게도 쿠팡이 국민의 실생활에 얼마나 스며들어있는지를 바로 보여줬다. 쿠팡 사태가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글로벌 투자은행 JP모건은 “쿠팡이 경쟁자가 없는 시장 지위를 누리고 있고 한국 고객이 데이터 유출에 덜 민감해 보인다”며 “잠재적 고객의 이탈은 제한적일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내놨다. 그래서일까? 쿠팡은 역대 최악의 정보 유출 사태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도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대통령이 언급하고 정부 차원의 TF가 꾸려졌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힘겨루기’를 하는 태도를 보이는 중이다. 최근에는 정부의 반박에도 자체 조사 결과를 고집하는 등 이해할 수 없는 행보로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쿠팡은 지난달 25일 ‘정보 유출자는 3300만개 계정에 접근했으나 실제 저장한 정보는 3000여개에 불과하며 제3자 유출 정황은 없는 등 피해가 미미하다’는 내용의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유출자는)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언론 보도를 접한 이후 저장했던 정보를 모두 삭제하고 범죄에 사용한 노트북을 파손해 하천에 던졌다”고 주장했다. 쿠팡은 “잠수부들이 벽돌에 담긴 쿠팡 가방에 든 노트북을 하천에서 회수했고 유출자가 클라우드 계정에 등록한 일련번호와 해당 노트북의 일련번호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어 “범행에 사용된 PC 와 노트북 등 모든 장치를 회수해 안전하게 확보했고 글로벌 보안업체들의 조사 결과도 진술 내용과 같았다”고 설명했다. 국내에서 매출 90% 나오는데 정보 유출 태도·대응 낙제점 쿠팡이 발표한 대로라면 고객 정보 유출 피해 규모는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또 유출자와 접촉해 장치를 확보했으니 추가 피해는 없다. 전체적으로 사건이 축소되는 것이다. 쿠팡의 발표에 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쿠팡의 조사 내용은 사전에 정부와 어떤 논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됐다는 설명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정보 유출 종류와 규모, 경위 등은 민관합동조사단이 조사 중인 사안”이라며 “쿠팡이 발표한 내용은 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바 없다”고 밝혔다. 서울경찰청 사이버수사과도 “쿠팡 측이 제출한 진술서와 노트북 등 증거물을 분석 중”이라며 “사실관계를 면밀하게 확인하겠다”고 했다. 논란이 계속되자 쿠팡은 정부의 지시를 받아 조사를 진행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경찰은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사실관계가 엇갈리고 있는 것이다. 쿠팡은 지난달 26일 내놓은 입장문에서 “정부의 지시에 따라 수주간 진행한 조사였다”고 선을 그었다. 같은 달 9일 정부가 쿠팡 측에 유출자와 접촉할 것을 제안했고 14일 쿠팡은 유출자를 처음 만난 뒤 해당 사실을 정부에 보고했으며 16일에는 정부 지시에 따라 유출자의 데스크톱과 하드드라이브를 정부에 제공했다는 게 쿠팡 측 주장이다. 하지만 국가정보원(이하 국정원)도 “쿠팡의 입장문 형식의 보도자료에서 정부와 협력했다는 내용 중 일부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부분도 사실과 다르거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고 반박했다. 쿠팡이 자체 조사와 관련해 정부와 사실 공방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 김범석 쿠팡 의장이 사건 발생 한 달여 만에 사과했다. 그동안 박대준 전 대표가 청문회 등에서 뭇매를 맞고 있는 동안에도 김 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정부의 압박이 거세지자 처음으로 입을 연 것이다. 5만원 상당 속사정은? 김 의장은 지난달 28일 “쿠팡의 창업자이자 이사회 의장으로서, 쿠팡 전체 임직원을 대표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저희의 책임으로 발생한 이번 데이터 유출로 인해 많은 분께서 자신의 개인정보가 안전하지 않다는 두려움과 불안을 느꼈고 사고 초기부터 명확하게 직접적으로 소통하지 못한 점으로 인해 큰 좌절감과 실망을 안겨 드렸다”며 “사고 직후 미흡했던 초기 대응과 소통 부족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김 의장은 한 달 만에야 입을 연 부분에 대해 “무엇보다 제 사과가 늦었다”면서 “모든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 공개적으로 소통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돌이켜보면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고개를 숙였다. 비판과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인다고도 했다. 하지만 자체 조사 논란에 대해서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김 의장은 “쿠팡은 조사 초기부터 정부에 전면적으로 협력해 왔다”며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오정보가 확산하는 상황에서도 정부의 ‘기밀 유지’ 요청을 엄격히 준수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의 사과는 국회 6개 상임위원회가 참여하는 대규모 연석 청문회를 이틀 앞두고 나왔다. 정부가 범부처 TF를 과기부 총리 산하로 확대하고 다각도로 압수수색과 조사를 진행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 압박을 느꼈을 것이라는 분석이 제기된다. 그러나 사과와는 별개로 김 의장은 청문회에 불출석하겠다고 밝혔다. 김 의장뿐만 아니라 동생인 김유석 쿠팡 부사장, 강한승 전 쿠팡 대표 등이 불출석 사유서를 제출하면서 쿠팡에 대한 부정적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여기에 쿠팡이 내놓은 보상안도 도마 위에 올랐다. 쿠팡은 지난달 29일 고객 정보 유출 사태와 관련해 총 1조6850억원 규모의 보상안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전체적으로 보면 1인당 5만원 상당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뜯어보면 쿠팡의 ‘꼼수’가 보인다. 청문회는 나 몰라라 보상안은 ▲쿠팡 전 상품 구매 이용권 5000원 ▲쿠팡이츠 5000원 ▲쿠팡트래블 2만원 ▲명품 플랫폼 알럭스 2만원 등으로 구성됐다. 소비자들은 보상금의 상당 부분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 등 평소 이용 빈도가 낮은 서비스 이용권 위주로 구성된 점을 지적했다. 실제 이번 보상안을 통해 쿠팡트래블과 알럭스를 처음 알게 됐다는 소비자도 있다. 시민단체도 쿠팡의 보상안에 반발했다. 참여연대는 “1인당 5만원 보상이라고 했지만 현금이 아닌 구매 이용권으로 사실상 강제 소비를 유도하는 방식”이라며 “보상이 아니라 매출 확대를 위한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논평을 발표했다. 쿠팡의 행보는 사사건건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국민을 조롱하고 정부를 기만하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쿠팡이 미국 시장에 상장한 기업이지만 매출 대부분을 우리나라에서 벌어들이는 상황인데도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회원 탈퇴, 보상안 거부, 집단소송 참여 움직임이 거세지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통령도 쿠팡 사태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다. 이 대통령은 쿠팡 사태가 일어나고 사흘 뒤인 지난달 2일 “쿠팡 때문에 국민의 걱정이 많다”면서 “사고 원인을 규명하고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관계부처는 해외 사례를 참고해 과징금을 강화하고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도 현실화하는 등 실질적인 실효적 대책에 나서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뒤늦은 사과·꼼수 보상안 도마 위에 이래서 정치권 인사 영입했나? 의혹 12일에도 개인정보 유출 사고가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경제 제재가 너무 약해서 규정 위반을 밥 먹듯이 한다”며 “앞으로는 규정을 위반해 국민에게 피해를 주면 엄청난 경제 제재를 당해서 ‘회사가 망한다’는 생각이 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규정을 위반하면 난리가 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런데 위반해도 태도를 보면 ‘그래서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 든다”고 지적했다. 정부도 쿠팡에 강력하게 경고하며 전방위 대응을 예고했다. 실제로 같은 달 29일, 배경훈 부총리 겸 과기부 장관 주재로 ‘쿠팡 사태 범정부TF’ 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과기부와 경찰청, 개인정보위원회, 금융위원회 등은 역할을 분담해 신속한 조사를 진행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배 부총리는 “쿠팡이 국내 고객 정보 3000만건 이상을 유출한 것은 명백한 국내법 위반 사항으로 정부는 쿠팡이 관련 법령을 위반한 사실이 확인될 경우, 다른 기업과 동일하게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하게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황에 따라서는 영업정지 여부도 판단할 것으로 보인다. 사방에서 몰아치는 압박에도 쿠팡이 연달아 이상한 행보를 보이자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됐다. 그 정도로 쿠팡의 현재 대응 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 기업인 것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 증시가 쿠팡의 모든 결정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소라는 것이다. 실제 쿠팡이 자체 조사 결과를 발표한 다음 날 미국 뉴욕 증시에서 쿠팡의 주가는 6% 급등했다. 국내에서는 쿠팡의 ‘셀프 조사’에 분통을 터트리고 있는데 미국 시장에는 호재로 작용한 것이다. 쿠팡이 정치·국회 인사를 대거 영입한 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정치권 인사를 영입해 쿠팡 관련 각종 논란을 틀어막고 있다는 의혹이다. 해당 의혹은 ‘강력 경고’ ‘전방위적 대응’ 등의 수사를 사용하고 있지만 실제 조사는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관측이 조심스럽게 나오는 배경으로도 꼽힌다. 변죽 울리다 무사통과? 실제 최근 원내대표직에서 사퇴한 더불어민주당 김병기 의원이 국정감사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 박대준 전 쿠팡 대표 및 대관 총괄과 오찬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쿠팡이 일용직 퇴직금 미지급 사건에서 검찰 외압 의혹, 물류센터·배송 기사의 과로 및 산재 사망 문제가 제기된 상황이었던 만큼 적절성 논란이 불거졌다. 김 의원은 그달 16일 자신의 SNS에 “공개 일정이고 적어도 5명이 (함께) 식사했다”고 적었다. 그러면서 “만남보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 아니냐? 참고로 지난해 7월16일 쿠팡 물류센터도 방문했었다”고 적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