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속내 궁금한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

“어떻게 일궜는데 네놈들이…”

[일요시사 취재1팀] 박창민 기자 = 그동안 롯데그룹 경영권을 놓고 두 아들 사이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창업자인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두 아들은 기어코 아버지를 가운데 두고 ‘형제의 난’을 벌였다. 장남은 신 총괄회장을 앞세워 경영권을 장악하려 했고, 차남은 그런 아버지를 총괄회장에서 명예회장으로 물러나게 했다. 자식들의 재산 싸움과 복잡한 가계도로 신 총괄회장의 노년은 복잡하기만 하다.

신 총괄회장은 1922년에 태어났다. 원래는 1921년생이지만 호적에 1년 늦게 올라간 것으로 전해진다. 경남 울주군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5녀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울산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도립 종축장에 말을 돌보는 기수보로 일했다. 
 
단돈 38엔 들고 
일본으로 건너가
 
신 총괄회장이 19살이 되던 1941년 돈을 벌 작정으로 단돈 83엔을 들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다. 당시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조선인’이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일본에 있는 고향친구 자취방에 얹혀살며 신문·우유 배달 등 닥치는 대로 잡일을 했다.
 
신 총괄회장은 이때 당시만 해도 작가를 꿈꾸는 문학도였다. 돈만 모이면 헌책방으로 달려갔다. 특히 세계적인 문학가인 괴테를 동경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의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문학으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서였다. 그는 결국 기술만이 살길이라 느끼며, 와세다대학교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신 총괄회장은 1944년 대학교를 졸업했다. 당시 일본 패전의 기색이 짙었다. 조선인 청년의 성실성을 평소 눈여겨보던 한 일본인 노인은 신 총괄회장에게 커팅오일(기계를 갈고 자르는 선반용 기름) 사업을 제안했다. 그 노인은 선뜻 6만엔을 내놓았다. 그러나 첫 사업체는 미군의 공습을 맞아 완전히 불타버렸다. 신 총괄회장은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면서 많은 한국인은 귀국에 올랐다. 신 총괄회장 친구들 역시 “귀국선을 타고 돌아가자”며 종용했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는 살 수 없다며, 일본에 남았다. 그는 1946년 5월 도쿄 스기나미구의 낡은 창고에 가마솥을 내걸었다. 그는 커팅오일을 응용해 비누와 크림을 만들어 팔았다. 신 총괄회장이 만든 비누는 불티나게 팔리면서 1년반만에 노인에게 진 빚을 모두 갚았으며, 감사의 표시로 집을 한 채 사서 선물했다. 이때부터 그의 사업가 기질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신 총괄회장은 남은 밑천으로 ‘히카리 특수화학연구소’를 차린다. 유지류나 특수고무 같은 물질들을 연구했다. 당시 시판된 껌들을 연구했는데, 이들의 장점을 모두 집약해서 껌을 개발했다. 신 총괄회장이 개발한 껌은 인기가 좋았다. 과자점 주인들이 서로 납품하겠다고 신 총괄회장의 연구소 앞에는 새벽부터 줄설 정도였다. 신 총괄회장은 투자자를 모집에 본격적으로 회사를 차려 껌을 팔기로 했다. 
 
껌으로 세운 재계 5위…무너진 성공신화
장·차남 경영권 싸움…아버지 누구 편?
 
1948년 신 총괄회장은 신주쿠 허허벌판에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를 탄생시켰다. 롯데라는 이름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샬롯데 이름에서 유래됐다. 껌회사에 붙인 이름 치곤 생뚱맞아 보이지만, 못다 한 신 총괄회장의 문학 작가의 꿈을 투영한 것이었다. 신 회장은 훗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라며 흡족해했다. 껌으로 시작한 롯데는 오늘날 재계 롯데그룹의 효시였다.
 
신 총괄회장은 껌 사업으로 큰 성공을 거두며, 롯데 상사, 롯데 부동산, 롯데아도, 롯데 물산, 주식회사 훼밀리 등 상업, 유통업을 망라한 일본의 10대 재벌이 됐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 프로야구 퍼시픽 리그의 롯데 오리온스를 인수해 현재까지 3대 구단주로 소유하고 있다. 
 
1965년 한일수교로 일본 기업이 한국에 대한 투자가 가능해지자 1966년 롯데알미늄,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다. 국내에서 라면과 과자로 종합 식품기업의 토대를 다져갔다. 그 뒤 한국에서도 사업을 다른 분야로 확장한다. 1973년 호텔롯데, 롯데 전자, 롯데 기공을 설립. 1974년 롯데 산업, 롯데 상사, 롯데 칠성 음료를 설립한다. 이외 한국 후지 필름, 대홍기획 등 건설사와 화학 공장 등 식품·유통·관광·건설을 아우르는 국내 재계 5위 종합 그룹으로 성장했다.  
 
신 총괄회장은 나이를 먹어가며, 그의 꿈을 대부분 이뤘다. 하지만 마지막 꿈이 남았다. 세계 최고 높이의 테마파크를 짓는 것이었다. 이른바 지금의 ‘제2롯데월드’였다. 
 

끝없는 사업 확장
제2롯데 화룡정점
 
신 총괄회장이 제2롯데월드 사업을 구상한 것은 1987년부터였다. 당시 계획은 잠실 롯데월드 부지 옆에 108층 높이의 마천루를 짓겠다는 거였다. 1994년부터 본격적인 사업 준비를 했다. 하지만 1998년 암초에 부딪혔다. 인근에 있는 성남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공군 기지로 쓰이는 곳이라, 근처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 전투기 조종사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근처에 고층 빌딩 높이 제한으로 부지 허가를 받기 어려웠다. 게다가 외환 위기도 겹쳐 자금 조달도 어려웠다. 

신 총괄회장은 꿈을 접을 수 없었다. 김대중정부 말기 사업을 다시 추진했다. 계획도 더 키웠다. 계획했던 108층 높이(450m)를 123층 높이(555미터)로 수정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2006년 착공식을 했다. 하지만 서울공항 활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던 탓에 공사는 곧바로 중단됐다. 이명박정부가 들어서자 건물 높이 제한 규제가 풀렸다. 2009년 최종 허가가 났다. 
 
2013년부터 제2롯데월드는 부분 개장했다. 당초 2015년 12월 완공 예정이었으나, 약 1년 연기되어 2016년 말에 완공될 예정이다. 이 건물은 그동안 한반도 최고층 빌딩이었던 높이 330m, 101층의 평양 류경호텔을 제치고 한반도 최고 높이의 건물이 되며, 완공 시 세계에서 6번째(555m)로 높은 빌딩이 된다. OECD 국가 중에서는 미국의 1WTC를 제치고 가장 높은 건물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500m)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제2롯데월드를 개장하고 온갖 사고가 잇따랐다. 거푸집 장비가 무너져 노동자가 사망했으며, 배관이음 폭발, 추락사 등 사상자와 부상자가 발생했다. 또 메가기둥, 피복 균열, 석촌호수 수위 변화, 석촌지하차도 싱크홀 등 안전성 논란도 끊이질 않았다. 여론이 나빠지자 공사를 중단하기도 했으며, 서울시가 나서기도 했다. 정밀 안전 진단을 실시했고, 재개장 허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2롯데월드 논란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신 총괄회장은 1970년대부터 한국과 일본에서 사업이 점차 확장되자 홀수 달엔 한국에서, 짝수 달엔 일본에서 머물며 셔틀경영을 펼쳤다. 이 때문에 ‘대한해협의 경영자’라는 별명을 갖게 됐다. 93세가 된 현재까지 경영일선을 지켜왔다.
 
신 총괄회장은 성공한 사업가인 반면, 가족사는 전체적으로 불운하다. 신 총괄회장은 유난히 형제간 다툼이 심해 '비운의 빅 브라더'로 불리기도 했다. 롯데그룹 초창기 신 총괄회장은 남동생을 모두 경영에 참여시켰다. 그러나 크고 잦은 분쟁이 이어지면서 동생들은 모두 분가(分家)했다. 남동생은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 신선호 일본 산사스 사장,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신준호 푸르밀 회장이다.
 
아래 동생인 신철호 전 롯데사장은 1958년 신 총괄회장이 국내에 없는 틈을 타 서류를 위조하는 방식으로 롯데를 인수하려다 발각돼 구속됏다. 이후 신격호 회장과 틀어진 그는 작은 제과 회사를 차려 독립했고, 지금은 고인이 됐다. 3남 신춘호 회장과는 현재 전혀 교류하지 않을 정도로 관계가 틀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불씨는 ‘라면’이었다.
 
신춘호 회장은 일본 롯데 이사로 재직하던 1960년대 신격호 회장의 만류에도 라면 사업을 시작했다. 1965년 아예 롯데공업을 차리며 기존 롯데의 라면 사업과 경쟁을 벌이자 갈등의 골이 깊어졌고 신춘호 회장은 롯데공업을 농심으로 개명하면서 롯데 이름을 포기했다.두 사람 사이의 앙금은 깊어 신춘호 회장은 아직까지 부친 제사에도 일절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막내동생인 신준호 푸르밀 회장은 롯데제과ㆍ롯데칠성ㆍ롯데물산 등 주요 계열사의 대표를 두루 거쳤고 롯데그룹의 컨트롤타워인 운영본부의 부회장을 맡는 등 사실상 신 총괄회장을 대신해 한국 롯데 경영을 실무적으로 총괄했다.
 
그러나 지난 1996년 서울 양평동 롯데제과 부지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을 치르며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그는 그룹의 요직에서 밀려났고 2007년 롯데그룹에서 분할된 롯데우유 회장으로 취임했다. 롯데우유는 롯데 브랜드 사용 금지 요청에 2009년 사명을 푸르밀로 바꾸면서 롯데그룹으로부터 독립했다.
 
복잡한 갈등구도

복잡한 가족관계
 
신 총괄회장은 24살 터울 막내 여동생 부부와도 갈등의 골이 깊다. 막내 매제인 롯데관광 김기병 회장과 신정희 동화면세점 사장 부부를 상대로 샤롯데 엠블럼 사용을 금지하는 가처분 신청을 내면서 갈등을 겪었다. 특히 롯데그룹이 2007년 롯데JTB를 설립하면서 관광업에 진출해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신 총괄회장의 가족사 또한 복잡하다. 신 총괄회장은 18세 때 노순화와 결혼했다. 노씨는 현 롯데복지재단 이사장인 신영자씨의 모친이다. 신 총괄회장은 노씨와 결혼을 한 상태에서 1941년 돌연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딸인 다케모리 하쓰코와 1950년 중혼을 했다. 
 
두 번째 부인이 된 하쓰코는 1945년 9월2일 일본 항복 문서 조인식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한 쪽 다리를 잃은 전범 시게미쓰 마모루의 조카다. 그녀의 부친은 일본 육군대좌로 1944년 사이판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알려졌다.
 
 
또 신 총괄회장이 일본에서 성공한 데에는 하쓰코의 친정 도움이 적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신격호는 하쓰코와 결혼하면서 그의 외삼촌의 성씨를 따 시게미쓰 다케오로 창씨개명을 했고, 부인 역시 남편 성을 따른다는 일본의 관습에 따라 시게미쓰로 성씨를 바꿨다. 타국에서 사업가로 뿌리를 내리기 위해 일본 명문가와 피를 섞은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으로 귀화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신동주(히로유키), 신동빈(아키오) 형제 역시 한국 국적이다. 신격호가 일본에서 사업 기반을 다지는 사이, 첫 번째 부인인 노씨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동안 잡음 끊이지 않더니…
결국 갈등 수면 위로 떠올라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 서미경씨도 빼놓을 수 없다. ‘롯데의 별당마님’으로 불리는 서미경씨는 제1회 미스롯데(1977) 출신으로 영화배우로 활동하다 돌연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37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신격호의 세 번째 부인으로 깜짝 등장해 구설에 올랐다. 그는 백화점과 영화관 매점 사업권 등 알짜 사업을 소유하며 그룹 내부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두 사람 사이에서 낳은 딸 신유미씨를 신격호의 호적에도 올릴 정도로 각별한 사이라고 한다.
 
 
이번 ‘형제의 난’으로 드러난 불투명한 롯데그룹의 지배 구조가 드러났다. 특히 차남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과 장남 신동주 전 일본 롯데홀딩스 부회장의 경영권 분쟁이 첨예한 가운데 롯데그룹 지배구조가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혔다. 첫째 딸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과 셋째 부인 서미경씨의 딸 신유미 롯데호텔 고문도 롯데그룹의 소수지분을 갖고 있어 팽팽한 지분 구조를 이루고 있다.   
 
일단 재계 안팎에서는 신동주 전 부회장의 경영권 확보 시도를 무산시킨 차남 신동빈 회장의 절대 우세를 점치고 있다. 하지만 롯데그룹의 복잡한 지분구조 등을 고려할 때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지분을 확보한 뒤 신동빈 회장을 향한 반격에 나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그룹의 총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롯데판 왕자의 난'이 사실상 본 궤도에 들어섰다는 분석이다. 
 
롯데그룹 계열사의 대표격인 롯데쇼핑의 경우 신동빈 회장(13.46%)과 신동주 전 부회장(13.45%)의 지분율은 사실상 동일하다. 롯데제과도 신동빈 회장은 5.34%, 신동주 전 부회장은 3.92%를 보유하고 있다.
롯데칠성은 각각 5.71%와 2.83%다. 무엇보다 롯데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있는 일본 비상장 법인 광윤사의 경우 현재 신동빈 회장과 신동주 전 부회장은 29%씩, 신 총괄회장은 3%를 보유하고 있다. 신 총괄회장의 지분율은 상대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 하지만 신 총괄회장은 오랜 기간 광윤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의 롯데그룹을 지배해 왔다. 따라서 신 총괄회장의 의중에 따라 후계구도에 변동이 생길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여기에 신영자 롯데장학재단 이사장 등의 행보도 변수로 꼽힌다. 앞서 신동주 전 부회장이 지난달 27일 신 총괄회장의 일본행을 주도할 때 신 이사장 역시 조카인 신동인(69) 롯데자이언츠 구단주 직무대행 등과 동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놓고 재계에서는 신 총괄회장의 형제자매도 신동빈 회장의 반대편에 섰다는 관측이 나왔다. 신동주 전 부회장과 신영자 이사장이 연합할 경우 한국 롯데그룹 일부 계열사에서는 신 회장의 지분율을 앞서게 된다.
 
경영승계 임박
자녀끼리 혈투
 
한편 지난달 30일 신동주 전 부회장이 자신을 다시 롯데홀딩스 사장에 임명한다는 신격호 총괄회장의 서명 지시서를 공개했다. 신 총괄회장이 이 지시서로 이사들을 해임시키려 했으나 이사들이 불복하자 직접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게 신 전 부회장의 주장이다. 
 
 
<min1330@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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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티 추태’ 윤석열 드러누운 노림수

‘팬티 추태’ 윤석열 드러누운 노림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특검의 수사가 진행되면서 ‘무작정 버티기’에 나섰다. 내란 특검의 조사와 내란 우두머리 혐의 재판에 불출석하는 것과 더불어 김건희 특검의 소환 조사와 체포 집행에도 강력하게 저항하고 있다. 이를 두고 ‘법조인으로서 부끄럽다’는 의견과 ‘어차피 실익이 없으니 다른 것에 집중해야 한다’는 등의 의견이 나온다. 김건희 여사와 관련된 의혹을 조사하는 민중기 특별검사팀(이하 김건희 특검팀)이 윤석열 전 대통령을 결국 조사하지 못했다. 조사에 응하지 않아 체포영장까지 발부받았지만 윤 전 대통령의 완강한 거부로 이도저도 못하게 됐다. 드러누운 법꾸라지 김건희 특검팀은 ▲통일교 청탁 의혹 ▲집사 게이트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및 재판 청탁 의혹 ▲공천개입 등 ‘명태균 게이트’ ▲양평고속도로·양평공흥지구 특혜 의혹 ▲삼부토건 주가조작 의혹 등을 중심으로 수사를 벌이고 있다. 김건희 특검팀은 김 여사와 이들 의혹의 직접적인 연관고리를 밝혀내기 위해 ‘키맨’이라 불리는 여러 핵심 피의자들을 불러 조사한 뒤 윤 전 대통령 부부에게 소환 조사를 통보했다. 당초 김건희 특검팀은 지난달 29일 윤 전 대통령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 조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법조계 안팎에서는 윤 전 대통령이 특검팀의 소환에 불응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 전반적이었다. 윤 전 대통령은 건강상 이유를 거론하며 지난달 재구속된 이후 내란 특검(조은석 특별검사)의 소환 조사에도 줄곧 불응해왔고, 내란 우두머리 혐의 형사 재판에도 같은 이유로 3주 연속 불출석했기 때문이다. 법조계 예상대로 윤 전 대통령은 해당 소환 조사에 불응했다. 특검 측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이날 소환 요구 시한인 오전 10시까지 변호인 선임계도 제출하지 않았고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의 변호인단은 윤 전 대통령의 지병인 당뇨가 악화하고 간 수치가 상승하는 등 건강이 나쁜 상태라고 밝힌 바 있다. 최근에는 주치의로부터 실명 위험 소견까지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이와 상관없이 김건희 특검팀은 언론 공지를 내고 “윤 전 대통령에게 오늘 오전 10시에 출석하도록 통보했으나 별다른 설명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며 “내일 오전 10시에 출석하라는 수사협조요청서를 서울구치소장에게 재차 송부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2차 소환 조사에도 불응할 경우 체포영장 청구 등 강제 수사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밝혔다. 건강상 이유로 모두 불응 속옷 차림에 부상 주장까지 그러면서 김건희 특검팀은 윤 전 대통령의 건강에 대해 “아직 구치소에서 윤 전 대통령의 건강과 관련한 어떠한 소식도 전해 들은 바 없다”며 “내란 특검에서 소환했을 때도 건강에 큰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안다”고 덧붙였다. 김건희 특검팀의 엄포에도 윤 전 대통령은 지난 30일 예정된 2차 소환조사에도 불응했다. 김건희 특검은 이날 오전 언론 공지를 통해 “윤 전 대통령에게 오늘 오전 10시에 출석하도록 통보했으나 별다른 설명 없이 출석하지 않았다”며 “향후 조치에 관하여는 오후 브리핑 때 말씀드릴 예정”이라고 했다. 결국 김건희 특검팀은 지난달 30일 오후 2시12분경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고 법원은 이를 발부했다. 법원이 체포영장을 발부하면서 윤 전 대통령은 반드시 특검 사무실로 출석하게 됐다. 서보학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사가 영장 집행을 위해 구치소로 오면 구치소 직원들을 지휘해 영장을 집행하도록 법이 정하고 있다”며 “검사가 지휘하면 따라야 한다. 이는 강제조항”이라고 말했다. 다만 실제 현장에 투입된 실무자들이 집행을 거부할 우려도 있었다. 앞서 윤 전 대통령의 내란 혐의를 수사하는 조은석 특별검사는 세 차례 구치소 강제구인을 시도했으나 구치소 측이 “물리력 행사가 어렵다”고 호소하면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윤 전 대통령이 내란 관련 혐의로 구속돼 있어 내란 특검은 별도의 체포영장 없이도 강제구인할 수 있다. 실제로 김건희 특검팀은 체포영장이 발부된 이후 윤 전 대통령에 대한 강제 구인을 2차례나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김건희 특검팀은 지난 1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집행하려 했지만 윤 전 대통령의 저항 때문에 중단했다. 이날 오전 8시40분 김건희 특검팀의 문홍주 특검보는 검사와 수사관과 함께 서울구치소에서 윤 전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 집행에 착수했다. 특검팀이 체포영장 집행을 위해 윤 전 대통령을 찾았을 당시 그는 팬티와 메리야스(민소매 속옷 상의)만 입고 수용소 바닥에 누워있었다고 한다. 체포 집행 점입가경 특검팀은 20~30분 간격으로 총 4회에 걸쳐 체포영장 집행에 따를 것을 요구했으나 윤 전 대통령은 응하지 않았다. 특검팀이 협조를 구하는 과정에서 윤 전 대통령이 수차례 말을 끊으면서 응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보였다고 한다. 이날 물리력을 동원한 강제 집행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렇게 2시간여 동안의 대치는 빈손으로 끝났다. 당초 문 특검보가 서울구치소를 직접 방문해 체포영장 집행에 나선 건 교도관을 지휘해 어떻게든 조사실로 데려오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속옷 차림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정희 특검보는 이에 대해 “옷을 다 갖춰 입지 않은 상태에서 물리적인 접촉을 하면 강하게 대응할 것이 예상돼 접촉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구인을 위해선 옷을 입도록 해야 하는데 강제로 옷을 입히는 과정에선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 오 특검보는 “피의자(윤 전 대통령)에게 다음번엔 물리력 행사를 포함해 체포를 집행할 것임을 고지했다”며 “피의자는 평소 법과 원칙 및 공정과 상식을 강조해왔다. 전직 검사·검찰총장·대통령으로서 특검의 법 집행에 협조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윤 전 대통령은 체포영장 집행이 중지된 지 1시간 만에 변호인단을 접견한 것으로 알려졌다. 접견 이후 변호인단은 “40도에 육박하는 더운 날, 협소한 공간에서의 수용자 복장 상태를 실시간으로 설명하며 논평하는 건 인신 모욕”이라며 “윤 전 대통령은 심장혈관 및 경동맥 협착의 문제, 자율신경계 손상으로 인한 체온조절 장애까지 우려돼 수사와 재판에 응하는 것에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 김건희 특검팀은 체포영장 만료 시일인 지난 7일 2차 체포영장 집행을 시도했지만, 윤 전 대통령의 완강한 저항으로 또다시 불발됐다. 이날 체포영장 집행 시도는 서울구치소 기동순찰팀(CRPT) 요원을 포함한 교도관 10여 명이 윤 전 대통령을 붙잡고 끌어내는 방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물리력을 동원한 2차 체포 집행으로 윤 전 대통령과 김건희 특검팀은 또다시 갈등을 빚었다. 이날 윤 전 대통령은 체포영장 재집행을 앞두고 이날 오전 9시에 변호인 접견을 신청했다. 특검팀은 이보다 이른 오전 7시50분쯤 서울구치소에 도착했고, 윤 전 대통령 측 김홍일·배보윤·송진호 변호사도 오전 8시를 약간 넘은 시각 구치소에 도착했다. 특검 측과 변호인단은 오전 8시쯤 사랑방(휴게공간)에서 마주쳤고, 변호인단은 특검 측에 동행을 요구했으나 특검 측이 거절했다고 한다. 버티는 이유가⋯ 김건희 특검팀과 윤 전 대통령이 면담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양측 모두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이다. 윤 전 대통령 측 송진호 변호사는 “오전 8시20분쯤 특검 측과 교도관들이 윤 전 대통령 측에 ‘이야기 좀 하자’고 요청했고, 윤 전 대통령은 ‘변호사를 불러준다면 가겠다’며 응했다”고 전했다. 이에 수의를 입은 윤 전 대통령이 면담을 위해 별도 건물에 있는 출정과장실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특검 측이 주차돼 있던 차에 윤 전 대통령을 태우려 했다는 게 변호인단 주장이다. 윤 전 대통령 측 반발로 양측은 출정과장실에서 마주앉았다고 한다. 변호인단은 “특검 측이 윤 전 대통령의 팔짱을 끼고 데려가려 하고, 이에 실패하자 바퀴 달린 의자에 앉아있던 윤 전 대통령의 팔과 다리를 잡은 채 의자를 밀어서 데리고 가려 했다”고 했다. 윤 전 대통령 측과 문홍주 특검보 사이 통화가 이뤄졌다고도 전했다. 문 특검보는 “자발적으로 오실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고, 윤 전 대통령은 “불법에는 응할 수 없다”는 취지로 답했다고 한다. 변호인단은 양측이 대치하는 과정에서 윤 전 대통령이 바닥에 떨어졌다고도 강조했다. 윤 전 대통령 측은 “의자가 확 빠지며 윤 전 대통령이 땅에 철썩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며 “허리를 의자 다리에 부딪혔고 팔을 너무 세게 잡아당겨서 ‘팔이 빠질 것 같다, 제발 좀 놔달라’고 해서 강제력에서 겨우 벗어났다”고 했다. 김건희 특검팀은 이날 오전 9시50분쯤 “물리력을 행사하는 등의 방법으로 체포영장 집행을 했으나, 피의자의 완강한 거부로 부상 등의 우려가 있다는 현장의 의견을 받아들여 오전 9시40분 집행을 중단했다”고 공지했다. 강제 집행 이후에도 김건희 특검팀과 윤 전 대통령 측의 갈등은 멈추지 않았다. 윤 전 대통령 측은 특검 관계자 고발을 예고했다. 변호인단은 “형사적으로 강요죄이며 그 자체로 가혹행위”라며 “변호인들은 수차례 걸쳐서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하더라도 물리력과 강제력을 행사해서 인치하는 건 불법이라고 주장해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법리 검토를 마친 뒤 집행에 참여한 사람들을 고발할 것”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오 특검보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법원이 적법하게 발부한 영장을 피의자가 수감된 상황까지 고려해서 집행한 상황”이라며 “적법하게 영장을 집행했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오늘 변호인이 출입할 수 없는 곳에 변호인 들어와 있어 그 경위를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윤 전 대통령의 체포영장 만료 기한인 7일에도 윤 전 대통령을 체포하지 못하자 법조계와 정치권에서는 다양한 반응이 나왔다. 정치권에서는 윤 전 대통령의 행보를 비판하기 바밨고, 법조계에서는 조사가 성립되더라도 혐의를 부인할테니 다른 키맨 수사에 몰두해 확실한 증거를 잡는 것이 더 낫다는 의견이 나온다. 기한 만료까지 강제 구인 못해 “어차피 진술거부권 행사할 듯” 더불어민주당 수석최고위원을 맡고 있는 전현희 의원이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특검의 2차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된 것을 두고 “특검은 물러서지 말라”고 촉구했다. 전 최고위원은 지난 7일 자신의 SNS에 “속옷 저항으로 버티던 윤석열의 완강한 거부에 이어 부상 우려가 있다며 또다시 체포영장 집행이 무산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전 최고위원은 “국민에 총칼을 겨눴던 자에게 부상 우려가 웬 말인가”라며 “윤석열은 대한민국 공권력이 그리 만만한가”라고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내란수괴 윤석열은 당장 특검의 체포영장 집행에 응하고 특검에 출두하라”며 “국민과 법을 기만하는 자에게 한 치의 관용도 베풀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도 이날 SBS라디오 ‘김태현의 정치쇼’에 출연해 “검찰총장을 지낸 전직 대통령이 속옷 차림으로 누워서 버티고, 특검의 체포영장에 불응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국민이 뭘 배우겠나”고 비판했다. 이어 “윤석열 전 대통령 개인의 인격 수준이나 이런 문제가 아니고 대한민국의 법치주의와 민주주의 수준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2017년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에 소속됐던 한 변호사는 “체포영장 집행 기간이 7일까지지만, 이미 집행에는 착수한 것이고 그 이후 중지된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며 “또한 국정농단 특검 당시에도 최순실에 대한 체포영장을 받아 강제 구인도 쉽지 않았지만 체포영장을 다시 받아서 결국에 강제 구인에 성공했다. 이를 제일 잘 아는 것은 당시 수사 팀장이었던 윤 전 대통령”이라고 꼬집었다. 일각에서는 김건희 특검팀이 강제구인에 성공하더라도 실익이 크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서 교수는 “(윤 전 대통령을) 사무실까지 끌고 올 수 있어도 진술을 거부하는 것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며 “과거와 같이 조서에 날인을 안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차피 진술을 안 하거나 거짓말을 할 거라 꼭 조사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며 “주변인 조사로도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규 형사전문 변호사도 “재판도 안 나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간다고 입을 열진 않을 것”이라며 “인권 측면에서 보더라도 조사받기 싫다는 사람을 수사기관에 강제로 데려간다는 것 자체가 좋은 선례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한편 김건희 특검팀은 윤 전 대통령의 2차 체포 집행이 진행되는 날에 김 여사에 대한 구속영장을 청구하기도 했다. 김 여사에게 적용된 혐의는 3가지로,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위반 ▲정치자금법 위반 ▲특정 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알선수재)이다.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