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주영·이병철 자금 대준 기업은?

삼성? 현대? 진짜 재벌은 따로 있다

[일요시사 취재1팀] 이광호 기자 = 부동산 관리회사인 해성산업은 재계에서 알짜배기 회사로 통한다. 해성산업이 강남에 보유한 건물가치만 1조원을 웃돈다. 단재완 해성산업 회장의 아버지 고 단사천 회장은 1950∼60년대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과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에게 자금을 빌려줄 정도로 뛰어난 자금동원력을 자랑했다. 해성산업은 규모는 작지만 해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며 결코 가볍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해성그룹은 부동산 관리회사인 해성산업, 복사지 ‘밀크(Miilk)’로 유명한 종이 전문업체 한국제지, 전동공구 및 자동차DC모터 제조 전문기업 계양전기, 종이포장 업체 한국팩키지, 스크류콘베어 및 척을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우영엔지니어링, 첨단 화학 신소재 업체 오미아한국케미칼, 지난해 4월 인수한 반도체 부품업체 해성디에스 등의 계열사를 갖고 있다. 전체 매출액은 약 1조3000억원 규모로 이 가운데 한국제지가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여기에 해성학원과 해성문화재단을 설립해 교육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사채로 빌딩 사들여
 
최근 한국제지는 국일제지 중국공장을 320억원에 인수해 특수지 시장에 진출, 복사지 브랜드를 런칭하고 국내복사지 시장 1위를 탈환했다. 계양전기는 스마트 그린카 전동화 핵심부품 기술 개발과 전기차 2단 변속기를 개발 중이다. 지난해 삼성테크원에서 분사한 반도체 부품 제조회사 해성디에스는 내년 상반기를 목표로 코스피 또는 코스닥시장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해성그룹 자회사들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이중 해성산업은 매출액 100억원대로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지만 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하고 있다. 해성산업이 해성그룹의 지주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부동산 때문이다. 해성산업은 서울시청 앞에 있는 해남빌딩과 주상복합건물 신축지, 강남대로 송남빌딩, 부산역 앞 송남빌딩, 남대문 수상빌딩, 동해식품공장 등 전국 요지에 빌딩을 보유하고 있다.
 
실적에서 수익이 나오는 구조는 아니지만 소유하고 있는 다수의 토지와 빌딩에서 나오는 임대료와 시설관리비 등의 현금 수익이 크다는 점에서 우량한 재무구조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부채비율은 9.7%에 불과하다. 해성산업은 그룹의 현금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1954년 설립된 해성산업은 앞서 설명한 빌딩 등 건물의 시설관리용역사업을 수행하며 일부 상가에 대해 임대사업을 하고 있다. 62년 해남빌딩 본관을 준공하면서 오피스빌딩 임대사업을 시작했다. 65년에는 화양간설을 합병했으며 66년 해남빌딩 신관을 준공했다.
 
78년 동해식품공장을 인수하고 80년 송남빌딩, 84년 부산송남딜딩 등을 준공, 88년 수상빌딩을 인수했다. 90년대 들어서 시설관리용역사업에 진출해 92년 성수빌딩, 95년 해성2빌딩 등의 시설관리용역을 시작했다. 98년 우영테크노센터를 건립해 분양사업을 했다. 99년에 비로소 코스닥시장에 주식을 상장했다.
 
숨은 재벌 해성산업 슬슬 존재감 드러내
한때 재벌 총수들도 손 벌렸던 ‘현금왕’
서울 주요 상권에 수조원대 부동산 보유
 
해성산업은 주식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강남을 비롯한 서울 주요 상권에 수조원대에 달하는 부동산을 보유한 대표적인 자산주로 꼽힌다. 현재 해성산업 단재완 회장이 가진 부동산들은 대부분 선친 고 단사천 회장이 일궈낸 결과물이다. 단사천 회장은 1960년대부터 80년대까지 명동 사채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재계 총수들에게도 돈을 빌려줬다고 전해진다. 해성산업은 하루에 수천억원의 현금을 움직일 정도로 자금동원력이 대단했다. 사채업자들 사이에서는 ‘현금왕’으로 통했다.
 
단사천 회장과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의 관계에 대한 에피소드는 꽤 유명하다. 정주영 회장은 단사천 회장이 연락을 하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정 회장은 대규모 사업을 펼치면서 돈이 마를 때마다 은행에서 돈을 다 빌리지 못해 골머리를 앓았다고 한다. 이럴 때마다 정 회장은 단 회장에게 SOS를 날려 위기상황을 벗어났다는 것이다.
 

삼성 창업주 이병철 회장도 마찬가지였다. 사업 확장으로 돈줄이 막힐 때면 단 회장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단 회장의 막강한 자금력 때문에 당시 재계와 명동 사채시장에서는 ‘그가 부르면 기업 총수들도 두말하지 않고 달려온다’ ‘마음만 먹으면 재벌 몇 정도는 금방 날려버릴 수 있다’는 등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이 같은 단 회장의 존재감은 당시 은행 등 금융시장의 자금조달 능력이 기업의 성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사실상 해성산업이 1금융권 역할을 했던 것이다. 현금에 목말라 있던 기업들에게 단 회장은 오아시스 같은 존재였다. 일부에서는 그를 ‘재계의 전당포’라고 부르기도 했다. 단 회장은 명동 사채업계에서 ‘전주’로 군림하며 큰 규모의 현금을 손쉽게 조달했다고 전해진다.
 
단 회장은 자신이 다 조달하지 못하는 규모의 자금이 필요할 때면 사채업자들까지 동원해 자금을 만들어 빌려줬다. 60년대 중반 단 회장이 한 번에 빌려줄 수 있는 자금의 규모는 약 60억원대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삼성그룹의 연간 영업이익 규모가 약 190억원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단 하루에 삼성그룹 연간 이익의 3분의 1이 넘는 자금을 빌려준 것이다. 80년대 국내 경제규모가 팽창하면서 단 회장의 현금동원 능력도 커져 자금의 규모가 약 300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단 회장은 황해도 서흥 출신으로 무일푼으로 서울에 내려온 이후 모은 돈으로 일만상회라는 재봉틀 조립회사를 열어 돈을 벌었다. 50년대 이후부터는 명동을 무대로 사채를 통해 자금을 굴렸다. 돈을 높은 이자에 빌려주고 받는 식으로 재산을 축척한 것이다. 그는 이렇게 모은 돈으로 전국 노른자 땅을 사들이며 재산을 불렸다.

부동산 재벌로 우뚝
 
단 회장은 82년 단자회사(종합금융사) 설립이 자유화되자 같은 북한 출신 기업인인 김종호 세창물산 회장, 남상옥 타위호텔 회장 등과 손잡고 신한투자금융 설립에 참여했다. 그러나 공동 설립자 간의 경영 분쟁과 정부의 경영 개입 등으로 결국 지분을 털고 나왔다. 이때부터 단 회장은 사금융에서 발을 빼 지난 2001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해성산업과 한국제지, 계양전기, 한국팩키지 등의 회사를 경영하며 재산 모으기에 집중했다. 단 회장이 일궈낸 재산은 그의 외아들인 해성산업 단재완 회장 손에 있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해성그룹 경영구도
 
지난달 13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단재완 회장의 장남인 단우영 한국제지 부사장은 해성산업 2대주주(15.70%)이자 한국제지의 3대주주(4.72%)다. 한국제지 2대 주주는 단 부사장의 동생인 단우준 계양전기 전무다. 단 부사장은 이외에도 계양전기(1.89%), 한국팩키지(6.0%)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단 부사장이 보유한 지분가치는 573억원(12일 종가기준) 수준이다. 그는 지난해 배당금으로만 2억8600만원을 가져갔다.
 
단 부사장은 지배구조 최상위인 해성산업을 통해 그룹 지배력을 일정부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단 회장이 해성산업의 지분 30.13%를 보유한 최대주주로 이 지분의 향방에 따라 경영권 승계 여부가 최종 결정될 전망이다.
 
한국제지의 기획총괄업무를 맡고 있는 단 부사장은 2011년 복사지 ‘밀크(Miilk)’가 성공을 거두는 등 경영에서도 합격점을 받고 있다. 단 부사장과 단 전무는 2010년부터 경영에 참여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등기임원에 오르지는 못한 상태다. <광>
 


배너






설문조사

진행중인 설문 항목이 없습니다.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본에 번진 핵잠 나비효과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한미 정상회담 팩트시트가 공개되자, 가장 큰 화제가 된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에 대해 “문구가 추상적이어서 모호하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이에 자극 받은 일본도 핵잠수함 도입을 준비하고 있다. 핵잠수함 건조를 현실화하지 않으면 “일본에 핵 보유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의 국내 정치용으로 활용하게 했다”는 비판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29일 진행된 한미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한미 관세·안보 협상 팩트시트(공동 설명자료)가 지난 14일 공개됐다. 가장 큰 논란은 핵 추진 잠수함(이하 핵잠수함) 관련 합의 문구였다. 산 너머 산 구체성 없다 팩트시트를 통해 확인되는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선 “구체성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팩트시트에 따르면, 미국은 ▲한국 민간·해군의 원자력 프로그램 ▲한미 원자력 협정에 부합하고 미국의 법적 요건을 준수하는 범위 내에서 한국의 평화적 이용을 위한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로 귀결될 절차 등을 지지한다. 이어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고, 한국과 조선 사업 요건 진전·연료 조달 방안 등을 포함해 긴밀히 협력한다. 미국은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와 관련해 지지·승인·협력할 뿐이다. 이를 두고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같은 날 브리핑에서 “한미 정상의 논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국에서 건조하는 게 전제였다”며 “우리 핵잠수함을 미국에서 건조하는 방안은 거론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같은 날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며 “국내 건조 장소 합의는 팩트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30일 기자들 앞에서 한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을 발표하면서 “필라델피아 조선소에서 건조될 것”이라며 “미국 조선업이 곧 대대적인 부활을 맞이할 것”이라고 말했다. 핵잠수함이 건조되려면, 산적한 현안을 모두 해결해야 한다. 팩트시트엔 건조 장소가 적시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필라델피아 조선소를 명시해 발표했기 때문에, 미국이 순순히 양보할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같은 회담 결과를 두고 양국의 주장이 엇갈리는 자체가 논란이 되고 있다. 민간 우라늄 농축·사용 및 핵연료 재처리엔 ▲한미 원자력 협정 부합 ▲미국의 법적 요건 준수 ▲한국의 평화적 이용 등 단서가 붙는다. 기술 이전 과정에도 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다. 핵잠수함 보유국은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인도 등 6개국이다. <로이터통신>은 지난달 30일 “미국이 핵잠수함 기술을 공유한 사례는 1950년대 최우방국 영국과 협력한 사례밖에 없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미국의 핵잠수함 기술은 미군이 보유한 가장 민감하고 철저히 보호돼온 기술”이라며 “가까운 동맹인 영국·호주와 체결한 핵잠수함 협정에서도 직접 기술 관련 내용은 포함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우리에겐 우라늄 농축·재처리 기술이 없어서 미국으로부터 핵연료를 공급받는 방안이 유력하게 거론된다. 하지만 연료 공급 장소·방식은 팩트시트에 명시되지 않았다. 연료 공급 방법을 확보하지 못하면, 핵잠수함을 만드는 의미가 없다. 핵잠 건조 추상적인데 “고정밀지도 내놔” 발 빠르게 비핵 3원칙 수정하려는 일본 미국의 법률 개정 절차도 거쳐야 한다. 미국 원자력법은 ‘미국이 다른 나라와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협력을 하려면, 원자력 협정을 체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한미 원자력 협정을 개정한 후 미국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국제 무기 거래 규정도 상원의 동의를 얻어 개정해야 한다. 원자력 협정 개정이 팩트시트에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해선 “미국 에너지부의 반대 때문”이란 지적도 있다. 미국 일각에서 “한국이 자체 핵무장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한단 것이다.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 여부는 확정되지 않았는데, 우리는 미국에 고정밀지도를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팩트시트엔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를 포함한 디지털 서비스 관련 법·정책에 있어 미국 기업이 차별당하거나 불필요한 장벽에 직면하지 않도록 보장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있다. 또 “위치·재보험·개인정보에 대한 것을 포함해 정보의 국경 간 이전을 원활하게 할 것을 약속한다”는 내용도 있다. 미국 빅테크 기업들은 온라인플랫폼의 ▲자사 우대 ▲끼워팔기 ▲멀티호밍 제한 등을 막는 내용이 담긴 우리의 온플법 제정을 반대했다. 팩트시트를 따르면, 미국 빅테크 기업에 대한 규제가 어려워진다. 아울러 우리는 구글·애플이 요청하는 1:5000 축척 고정밀지도 국외 반출 요청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정부는 애플이 요청한 지도 반출 여부를 다음 달에, 구글의 요청은 내년 2월 결정할 예정이다. 팩트시트에 게재된 합의 사항대로라면, 애플·구글의 요청을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국민의힘 박성훈 수석대변인은 지난 15일 논평을 통해 팩트시트 속 위험요소를 조목조목 지적했다. 박 대변인은 “정부는 ‘농·축산물 개방은 없다’고 말해 왔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대로 농·축산물 개방 문구가 포함됐다”고 주장했다. 이어 “망 사용료·온라인 플랫폼 규제·고정밀 지도 반출 등 대한민국의 디지털 주권과 직결된 사안까지 미국의 요구를 반영해 슬그머니 끼워 넣었다”고 비판했다. 이어 “반도체 관세에 대해서도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지 않게 한다’는 모호한 문구만 있다”며 “경쟁국 대만과 비교해 어떻게 적용할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팩트 시트에 담기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250억달러(약 36조7183억원) 규모의 미국산 군사 장비를 5년 동안 구매하고, 주한미군에 대해 330억달러(약 48조4682억원)를 포괄적으로 지원하면, 천문학적인 재정 부담을 떠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핵잠수함 건조 과정은 결코 쉬운 과정이 아니라서 장밋빛 전망만 내세울 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고정밀지도 반출 가능성 실제로 일각에선 “핵잠수함 건조가 실현되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서 실질은 아직 불투명하다”며 “선언이 지나치게 앞섰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제는 핵잠수함 나비효과가 일본으로 번졌단 점이다.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하자, 일본 정치권도 크게 술렁였다. 고이즈미 신지로 방위상은 지난 12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미국·중국은 이미 핵잠수함을 갖고 있고, 지금은 핵잠수함을 보유하지 않은 한국·호주가 앞으로 보유하게 된다”며 “일본의 억지력·대응력을 강화하려면, 전고체·연료전지·원자력 등 다양한 동력원에 대해 폭넓게 논의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했다. 일본은 1967년 사토 에이사쿠 당시 총리가 선언했던 비핵 3원칙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비핵 3원칙은 “핵무기를 만들지도, 가지지도, 반입하지도 않는다”는 선언이다. 다카이치 사나에 총리는 일찍부터 핵무기 반입 금지 방침 완화를 주장했다. 기하라 미노루 관방장관도 같은 날 “현 시점에선 재검토 여부를 단정할 수 없다”고 말했다. 자유민주당(이하 자민당)은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다카이치 총리는 국회 연설에서 “내년 중 3대 안보 문서 개정을 위해 검토를 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3대 안보 문서는 ▲국가안보 전략 ▲국가방위 전략 ▲방위력 정비 계획 등을 말한다. 여기엔 비핵 3원칙이 모두 포함돼있다. 일본은 이미 지난 2022년 “반격 능력을 보유하고, 장거리 미사일 전력을 향상한다”는 내용을 3대 안보 문서에 포함했다. 묘한 것은 미국의 핵잠수함 건조 승인이 일본 국내 정치구도까지 뒤흔들 가능성이 있단 것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카이치 총리가 선출될 당시 라이벌이었다. 지난달 4일 진행된 자민당 총재 선거 1차 투표에서 다카이치 총리는 183표(31.1%)를 얻었고, 고이즈미 방위상은 164표(27.8%)를 얻었다. 결선투표에선 다카이치 총리가 185표(54.3%)를, 고이즈미 방위상은 156표(45.7%)에 머물렀다. 하마터면 다카이치 총리는 자민당 총재·총리로 선출되지 못할 뻔했다. 고 아베 신조 전 총리의 후계자로 통하는 다카이치 총리에 반발한 공명당이 지난달 10일 자민당과의 연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당시 공명당 사이토 데쓰오 대표는 고이즈미 방위상에 대해선 “정치자금 규제와 관련된 공명당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었다”면서 호평했다. 고이즈미 방위상도 “지금까지 정책 실현에 대해 힘써 주신 것에 대해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고 화답했다. 미일 협력 중국 견제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0일 기적적으로 일본유신회와의 각외 협력 형태의 연립 정권 구성에 합의했다. 각외 협력은 연립 정권 구성엔 합의하지만, 내각엔 참여하지 않는 형태를 말한다. 일본유신회가 제시한 조건은 ▲오사카 부수도 지정 구상 수용 ▲국회의원 정원 10% 감축 ▲기업·단체 후원 폐지 ▲평화 헌법 개정 ▲방위력 강화 등이었다. 자민당과 다카이치 총리는 이를 모두 수용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1일 내각을 출범시키면서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했다. 가장 큰 정치적 의미는 ‘당내 정적 포용’이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전혀 없는 고이즈미 방위상을 임명해 기회를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다. 정반대의 의미를 강조하는 해석도 있다. “방위 관련 경력·경험이 없는 고이즈미를 현안이 산적한 방위성 장관으로 임명해 자멸을 유도한다”는 취지의 해석이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주어진 현안은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 ▲자주적 방위력 강화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 ▲방위 장비 수출 운용지침 폐지 등이다. 이중 미일 방위 협력 재조정은 ‘중국 견제’라는 미국·일본의 공통 이해관계로부터 시작됐다. 일본은 군사력을 강화해 더 광범위한 지역에서 역할을 맡으려고 한다. 미국은 일본의 적극적인 역할을 통해 더 효율적으로 중국을 견제할 수 있다. 문제는 돈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에 “방위비를 GDP(국내총생산)의 3.5%로 증액하라”고 요구했다. 다카이치 총리는 지난달 28일 진행된 미일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방위비 증액·방위력 강화 방침을 설명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다음 날 피트 헤그세스 미국 국방부 장관을 만나 “방위비를 올리겠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정부는 오는 2028년 3월까지 방위비를 GDP의 2%까지 늘리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방위 정책과 관련해 국내 정세와 가장 민감하게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을 곤란하게 할 사안이 있다. 바로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이다. 일본 오키나와현 소재 후텐마 기지는 기나완시 시가지 한복판에서 시 면적의 1/4을 차지하고 있다. 후텐마 기지는 1945년 건설됐고, 일본에서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오키나와현의 주민 중 상당수는 미군의 범죄와 소음 피해 등을 이유로 기지 이전을 요구하고 있다. ‘팩트시트’ 고이즈미 날개 다나 견제 압박 와중에 뜻밖의 호재 지난 2004년엔 후텐마 기지 소속 헬리콥터가 오키나와국제대학에 추락하는 등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편입된 시점은 1879년이었다. 1945년부터 1972년까진 미국의 지배를 받았다. 따라서 오키나와에선 반미 감정이 강하고, 자민당 지지율이 낮은 편이다. 후텐마 기지와 관련해서도 일본 정부는 오키나와섬 내 나고시 헤노코 이전을 추진했지만, 오키나와 현·주민의 반대가 강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23년엔 다마키 데니 현지사가 방위성이 신청한 비행장 설계 변경 신청을 승인하지 않고 공사 중단을 요구했다. 후텐마 미군 기지 이전은 일본의 역사적 맥락과 맞물려 수십년 넘게 해결되지 못한 사안이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주도하는 중국 견제를 위한 새 안보 질서와 맞물려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정치적 압박을 가할 수도 있다. 아베 전 총리는 지난 2019년 고이즈미 방위상을 환경상으로 발탁했다. 이 임명에 대해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무게를 키우면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그를 정치적으로 낙마시킬 수도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의 아버지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는 퇴임 이후 강력한 원자력 발전소 폐지론자가 됐다. “아버지의 활동이 아들의 정치적 미래를 흐리게 할 수 있어 고이즈미 방위상을 견제하는 묘수”란 평가도 있었다. 고이즈미 방위상은 “기후 변화 문제는 펀하고, 쿨하고, 섹시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등 적당히 괴상한 발언을 하는 등 바보 행세를 하면서 견제를 피했다. 한동안 일본에선 고이즈미 방위상이 진짜로 바보인지, 바보인 척 연기를 하는지 장난 섞인 논쟁이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후 고이즈미 방위상은 이시바 시게루 전 총리·고노 다로 전 외상과 연합해 이시바 내각 탄생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농림수산상으로서 쌀값 폭등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지난 2023년엔 자민당 내 정치자금 문제가 불거지자, 조기 의회 해산 및 총선거 진행을 적극적으로 제안한 후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당시 자민당은 중의원 과반에 미달하는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일각에선 “더 큰 패배를 당하기 전에 적절한 시점에서 중의원 해산을 건의했다”며 긍정적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방위상 취임 이후엔 어떻게 구 아베파·아소파의 견제를 피할 것인지 관심을 모았다. 하지만 미국이 우리의 핵잠수함 건조를 승인한 사안은 고이즈미 방위상에게 견제 수위를 낮추면서 자민당·내각의 협조를 얻을 수 있는 뜻밖의 호재로 다가왔다. 고이즈미 방위상이 일본의 핵잠수함 도입을 주도한다면,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가 될 수도 있다. 견제 회피 일거양득 우리의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일본 정치의 판도를 바꿀 수 있는 사안이 된 것이다. 만약 핵잠수함 도입 추진이 불확실해지면, 이재명정부는 이 때문에 더욱 큰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일본의 군비 증강에 빌미를 제공하고, 고이즈미 방위상의 정치적 미래를 위한 발판을 제공한 것”이란 비판이 따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핵잠수함 나비효과는 이렇게 일본으로 번졌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