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양호원재개발 횡령배임 무혐의 비밀 <2탄>

“검찰도, 경찰도 조합장에게 속았다!”

[일요시사 경제2팀] 이창근 기자 = 안양호원지구 재개발 조합의 김모(57·여) 조합장은 작년 6월 조합원 장금덕(54)씨로부터 ‘횡령·배임, 도정법 위반’ 혐의로 피소된 바 있다. 그리고 작년 말 수원지검 안양지청으로부터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최근 “수사 당시 무혐의 판단의 결정적 근거가 됐던 조합장의 해명자료에 큰 오류가 있다”는 주장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파장이 일고 있다.

“경찰과 검찰이 김 조합장에게 속았습니다.”

호원지구 재개발조합 창립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어 4개월간 활동했던 문종식씨(65)의 일갈이다. 현 조합장이 ‘횡령·배임 및 도정법 위반’으로 피소되었을 당시 경찰을 통해 제시된 증거는 조합장의 무죄를 입증하는 근거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동안경찰서 수사과와 수사지휘를 한 수원지검이 잘못 해석해서 무혐의 결정의 근거로 삼았다는 주장이다.

“김 조합장이 내 이름으로 수사팀에 제시한 서류는 잘못된 겁니다. 내막을 알고 보면 전혀 다른 사안의 문건인데, 재개발 사업의 복잡한 정황을 잘 모른다는 수사팀의 허점을 노린 조합장에게 속은 것이죠.”

조합 돈은 개인 돈?

안양호원지구 재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김 조합장이 조합원에게 고발(횡령·배임)을 당한 빌미가 된 것은 2012년 4월 즈음의 일이다. 이 시점 전까지 정비업체 M사와 총회대행업체 D사는 호계동 일대 주민들을 상대로 재개발 동의서 확보경쟁을 벌였고, D사 단독으로 총회를 개최하고 조합장을 선출하자 M사가 절차상 하자를 들어 원천무효를 주장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2년여의 치열한 법적공방을 벌였다. 두 용역회사의 법정공방으로 사업이 지연되자 호원지구 조합원들이 나서 중재를 한 것이 바로 2012년 4월의 일이다.


중재합의서의 주요 내용은 ▲서로의 고소를 취하할 것 ▲새로 추진위를 구성해서 창립총회를 개최할 것 ▲양측이 호원지구와 관련해서 집행한 비용은 검토 후 창립총회에 상정할 것 등이다. 합의서에는 M사와 D사의 대표를 비롯 M사 측 활동 조합원 대표 6명과 D사 측 활동 조합원 대표 6명을 포함 14명이 서명했다. 

중재가 성립된 이후 선관위는 4월28일 창립총회에 앞서 조합원들에게 총회 안내책자를 배포했다. 그리고 이 책자 안에는 중재합의서 전문과 함께 M사와 D사에 지급할 용역비 및 법정공방에 소요된 변호사비 내역서가 포함됐다.

이 내역서를 두고 또 다시 갈등이 생겼다. 조합원들 사이에 “M사와 D사 갈등의 법적비용은 조합과 무관한 비용인데, 왜 조합 돈으로 집행하겠다는 것이냐”는 반발이 터져 나온 것이다. 특히 중재합의서에 서명했던 조합원 대표의 반발이 거셌다. 중재를 발의한 문종식씨를 비롯해 당시 추진위직무대행이던 김상대, 이상혁, 김경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합의서 작성 당시 (제반 비용은) 검토 후 총회 상정한다고 했지, 언제 30억원을 집행하기로 했느냐”면서 “특정업체의 이익을 보전해 주기 위한 중재안이었으면 절대 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사진1) 조합 일과 상관없는 M사와 D사의 분쟁비용을 조합이 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다.
 

게다가 소요예산 30억원을 마치 중재합의서의 부속자료처럼 끼워 넣은 것은 M사와 D사를 위한 조작이 아니냐는 지적도 쏟아냈다. 모든 계약서에 찍혀있어야 할 조합의 관인도 없는 만큼 절차에도 하자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거센 반발은 수용되지 않았다. 선관위 간사를 포함한 M사와 D사의 대표 6명이 사전에 투표용지를 조작해서 자신들이 원하는 조합장을 당선시켰고(본지 1011호 보도), 투표조작으로 당선된 조합장은 ‘30억원 지출 불가’를 외치는 조합원들의 반발을 애써 외면했던 것이다. 단순한 외면만이 아니다. 조합의 공식출범 이후 시공사 차입으로 120억원의 자금이 조달되자마자 M사와 D사의 비용을 우선 집행했다.

이 과정에서 문종식씨가 “조합장이 검찰과 경찰을 속였다”고 지적하는 문제의 문건이 작성됐다. 시점은 30억 자금이 집행되기 직전인 2012년 10월15일부터 11월14일 사이다.


먼저 10월15일, 조합 측은 문씨에게 ‘창립총회 당시 중재협의안 의결에 따라 첨부된 업체에 대한 자금을 집행할 예정’이라며 ‘계약당사자인 귀하로부터 사실을 확인을 받고자 한다’는 내용증명을 보낸다.

첨부된 목록은 총 6건. 경호업체(더 퍼**클*스), 총회대행업체(루비***디) 등과 체결한 계약서 두 건과 사건번호 <2011카합42>건으로 개인 변호사와 체결한 계약서 그리고 <2011비합6>건으로 법무법인 S사와 체결한 계약서 총 4건이다. 그리고 법무법인 H와 체결한 2건의 약정계약이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조합의 계약사실 확인요청에 대해 문씨는 ‘조합이 요청한 계약관계와 약정은 사실’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러자 조합 측은 곧바로 ‘각 사안별로 사실확인서를 자필로 작성, 인감증명서를 첨부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문씨는 자필로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약정서 2건, 계약서 2건 조합에서 보내준 계약서는 사실입니다.’

문씨는 추진위 시절 자신이 발의자 대표로 서명했던 계약과 약정에 대해 있는 그대로 답변했다. 그리고 이 문건들은 김 조합장과 고소인 장씨가 횡령배임 혐의로 대질 심문을 받기 전까지 수면 아래에 묻혀 있었다.

핵심문건 작성자 조사도 생략?

조합원 장씨는 작년 6월 ‘조합이 설립되기 이전에 발생한 M사와 D사의 분쟁비용을 포함한 30억원 지급에 조합장이 서명한 것은 명백한 배임이며, 조합원의 민·형사사건 변호사 비용을 조합 돈으로 지급한 것은 횡령에 해당한다’며 김 조합장을 고소했다.

그리고 4개월 뒤, 동안경찰서에서 고소인과 피고소인의 대질심문이 이뤄졌다. 대질심문에서 장씨는 “김 조합장의 행위는 도정법 위반은 물론 배임 및 횡령에 해당한다”고 주장했고, 김 조합장은 “30억원 지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리고 이 때, 담당 수사관이 “횡령 배임으로는 보이지 않던데...”라며 장씨에게 꺼내 보여준 문건이 있었다. 바로 문씨와 조합이 주고받았던 내용증명 중 일부다. (사진2)
 

수사관으로부터 문건을 받아 본 장씨는 이내 두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하나는 문씨는 30억 지급에 결사 반대를 외치던 인물이라는 점. 30억원이 조합돈으로 나가는 줄 알았다면 결코 중재합의서에 서명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확인서를 작성했던 그가 조합이 요청한 계약과 약정은 사실이라는 문건을 써 줄 리가 없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하나는 해당문건의 서명이 문씨의 것이 아닌 장씨 본인의 것이라는 점이다.

김 조합장이 횡령·배임에 대한 무혐의 근거를 조작해 수사관에게 제시했다는 판단이 든 장씨는 수사관에게 필적감정을 요청했다. 하지만 담당 수사관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수사관의 시원찮은 반응에 장씨는 다시 ‘최소한 작성자인 문씨와 통화라도 해 볼 것’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그리고 두달 뒤, 김 조합장 횡령·배임 피소 건에 대한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수원지검으로부터 ‘혐의 없음’을 통보를 받은 장씨는 수사팀이 조작된 문건을 근거로 무혐의 판단을 내린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문씨에게 문제의 문건에 대한 사실 확인 및 부실수사에 대한 이의제기를 해 볼 것을 권유했다. 이것이 문씨가 “내가 서명한 서류가 있다면서요?”라며 안양 동안경찰서를 찾게 된 배경이다.

오리발이 통했다?


지난 6월3일, 안양 동안경찰서를 찾은 문씨는 문제의 문건을 볼 수 있었다.

‘귀측이(조합) 내용증명으로 확인 요청한 계약관계와 약정이 사실임을 확인합니다. 문종식.’

이 문건만 보면 조합이 집행한 30억원이 적법한 절차에 의해 집행됐다고 판단할 소지가 다분하다. 담당 수사관이 아닌 누구라도 문씨의 문건에 근거해 판단하면 ‘혐의없음’으로 판단할 공산이 높은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문씨의 판단은 전혀 달랐다. 문씨는 “전후사정을 다 파악할 수 없었던 경찰과 검찰이 김 조합장에게 속은 것”이라고 단언했다. “이 문건만 보면 마치 조합이 집행한 일체의 용역비 및 변호사 비용 30억원에 대해 내가 확인해 준 것처럼 해석이 가능한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그렇다면 문건의 내용은 무엇일까?

“내가 확인해 준 것은 추진위 시절 고용한 경호업체와 총회대행업체에 대한 계약 두 건, 변호사 계약 두 건 등 총 4건에 대한 사실 확인입니다. 30억원의 비용집행에 대한 확인이 아닙니다.”


문씨는 조합측이 자신에게 보낸 1차 요청서(사진3)에 첨부된 6건의 항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속아 넘어가는 것은 이 부분 때문이라는 것이다.

“첨부된 용역업체 두 곳은 M사나 D사가 아닙니다. 잠깐 용역을 맡은 중소업체예요. 그러니까 내 확인서가 M사와 D사에 자금을 집행해도 된다는 근거가 될 수가 없죠.”

변호사 비용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조합 총회자료에 보면 M사 관련 변호사 선임 건이 19건, D사 관련 변호사 선임 건이 26건입니다. 이 45건은 각각 별도의 변호사 비용이 책정되어 있고요. 내가 계약사실을 확인해 준 것은 <2011카합42>건과 <2011비합6호>건 2건 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마치 45건의 변호사 비용을 인정한 것처럼 써 먹었네요. 모르면 속겠죠?”

결국 담당 수사관이 “횡령배임은 아닌 것 같은데...”라며 보여준 자료는 김 조합장에게 내려진 ‘횡령·배임 무혐의’ 판단 근거로는 부적합한 문건이라는 것이다. 고소사건의 쟁점은 김 조합장이 집행한 30억원이 배임과 횡령에 저촉되는지 아닌지에 대한 부분이지, 문씨에게 받은 계약 4건에 대한 진위여부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검찰과 경찰이 속은 거죠. 조합장이 앞 뒤 문건(사진3, 4) 빼놓고 가운데 한 장(사진2)만 떡하니 내놓았으니 속을 밖에요. 나에게 A사안으로 받은 확인서를 수사관에게는 B에 대한 근거로 써 먹은 것입니다. 아주 악질이죠, 지능적이고요.”
 

애초부터 무혐의 짜 맞췄나?

안양 호원지구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김 조합장에게 내려진 횡령·배임 무혐의 처분에 대해 말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조합창립총회 투표용지 조작사건이 증거와 증인, 82건 중 43건이 조작되었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판단이 있음에도 ‘혐의 없음’ 처분을 결론을 내린 여파가 크다. 수사를 맡은 경찰과 검찰이 제대로 수사를 하지 않은 채 원인모를 이유로 인해 무혐의 판단을 내렸을 것이란 시각이다.

특히나 이번 횡령·배임 건은 대질심문을 하던 수사관 입에서 “횡령·배임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언급으로 수사를 진행한 것도 ‘애초부터 혐의 없음이라는 결론을 염두에 두고 사건에 접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사는 빌미가 되고 있다.

처음의 취재 의도는 고소인 장씨가 제기한 ‘조합 측 해명 자료의 조작 여부’에 관한 부분이었다. 조합이 어떻게 ‘문씨가 작성한 서류에 장씨의 서명이 들어있는 문건’을 수사팀에 제출하게 됐는지 경위를 파악하고자 한 것이다.

 

지난 6월3일, <일요시사>가 조합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김 조합장은 자리에 없었고, 30분 뒤 재차 사무실을 찾았을 때 김 조합장은 임원들과 막 회의를 시작하려는 중이었다. “문종식 씨 문건에 대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취재 의사를 밝히자 김 조합장과 임원들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회의 중이니 나중에 연락 하겠다”는 조합장과 “잠깐이면 된다”는 기자의 실랑이가 이어졌고, 마침내 김 조합장은 회의를 하고 조합의 총무이사가 대신 답변을 하는 식으로 취재가 이어졌다.

테이블에 마주앉은 총무이사는 문건 조작 의혹에 대해 “모든 것의 근거가 전부 있다”며 입을 연 뒤, 문씨와 조합 측이 주고받은 1, 2차 내용증명과 회신(사진2, 3, 4)을 보여줬다. 이어 “안양우체국을 매개로 왕래한 서신을 무슨 수로 위조하겠느냐”고 해명했다.

조합 측의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듣고 즉시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던 문씨를 찾았다. 그리고 조합 측 총무이사가 보여준 해명과 서류를 찍은 사진을 보여줬다. 3장의 사진을 보던 문씨는 이내 “아, 이렇게 속였구만...”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두 건의 용역계약과 두 건의 변호사계약 부분에 대해 사실이라고 했을 뿐입니다. 그것을 마치 내가 전체의 소송계약을 확인해 준 것처럼 포장하고, 30억원 집행 자체에 동의한 것처럼 써 먹었네요.”

A 사안으로 받아간 서류를 B 사건의 근거로 위장해서 검찰과 경찰을 속였다는 것이다. 문씨의 지적에 따라 사안의 핵심은 ‘경찰서에 제시한 문건의 진위파악’이 아니라 ‘왜, 조합장은 문씨의 문건을 30억 횡령·배임 고소사건의 해명자료로 제출했는가?’에 대한 부분으로 옮겨졌다.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나

이 부분에 대한 김 조합장의 입장을 듣고자 문씨와 동행해서 조합사무실 문을 열었다. 문씨와 함께 조합사무실에 들어가자 김 조합장은 “딱 회의가 끝났을 때 오셨다”면서 회의테이블로 안내했다. 총무이사도 다시 불렀다. ‘해명서류 조작 여부’에 대한 보강취재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기자가 총무이사에게 “이 문건이 30억 집행에 대한 근거로 제시된 것이 맞느냐”는 질문을 던지자 사태가 돌변했다. 회의테이블 근처에 머물던 김 조합장이 돌연 “잠깐, 이사님 대응하지 마세요!”라고 끼어들더니, 총무이사 손에서 해명자료를 회수해갔다.

그러고는 “우리가 기자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다. 당신은 조합원이 아니니 당장 나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안면이 바뀐 조합장에게 “조합에서 해명할 일이 아닌가?”라고 되묻자 김 조합장은 주위 직원들에게 경찰을 부르라며 소리를 질렀다.

“경찰 불러, 경찰. 이건 업무방해야!”

조합장의 돌변한 태도는 주위를 놀라게 했다. 회의테이블에 있던 총무이사마저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하는데...”라며 당혹해 했다. 그럼에도 김 조합장은 막무가내였다. “(총무)이사님, 아무 말씀 마세요!”라고 말을 가로막더니 “경찰 불러! 경찰 불러!”를 반복했다.

결국 기자와 문씨는 떠밀리듯 조합사무실을 나와야 했고, 문씨는 “김 조합장이 조합임원들이 진실을 알까 두려워서 저러는 것”이라며 혀를 찼다. 이제껏 횡령·배임에 대해 무혐의 받았다고 떠들어 댔는데 사실은 경찰과 검찰이 속아 넘어간 탓임을 사람들이 알게 될까봐 과잉반응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다른 검사가 재수사를 한다고 하니까 이번에는 검찰과 경찰이 속지 않기를 바라야죠.”

한편, 이 사건은 고소인의 항고로 수원지검에서 전면 재수사에 착수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manchoic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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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