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1000호 특별기획 ②> 본지 달군 최고의 뉴스메이커 100인

말 많고 탈 많았던 그때 그 사람들

[일요시사 사회팀] 강현석 기자 = 1996년 5월 창간한 <일요시사>는 김대중정부의 탄생을 지켜봤고, 6·15남북공동선언과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등 역사적인 사건을 두루 경험했다. 한나라당의 정권 탈환과 미국발 금융위기, 박근혜 대통령의 청와대 입성은 <일요시사>에게도 큰 사건이었다. <일요시사>는 지령 1000호를 맞아 본지 지면을 달궜던 뉴스메이커 100인을 선정했다. 100인의 면면을 통해 <일요시사>가 걸어왔던 길을 되짚어 봤다.

<일요시사>는 지난 4일 편집국 회의를 통해 1996∼2015년까지 신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뤘던 뉴스메이커 100인을 선정했다. 정치인, 기업인, 유명인, 연예인, 스포츠스타를 비롯해 범죄자를 항목에 집어넣었다. 각 포털사이트에서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검색어'도 일부 참고했다. 표기의 혼란을 막기 위해 경어를 생략하고 본명 그대로 싣는다.

[편치 않았던]
[정치 20인]

1997년 12월 대한민국은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다. 김영삼정부는 IMF를 상대로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른바 'IMF 사태'라고 불리는 사건의 요체다. 물론 대한민국이 어느 날 갑자기 부도를 맞게 된 것은 아니다. 김영삼정부의 외환관리정책은 너무 미숙했다.

더구나 김영삼정부는 부패했다. '소통령'으로 불렸던 YS의 차남 김현철(1)은 국회 한보특위 청문회장에 불려나왔다. TV로 생중계된 청문회는 많은 국민의 공분을 자아냈다. 김현철은 권력형 비리에 연루돼 구속됐다.

김대중(2)은 우리 역사상 첫 정권교체를 이룩했다.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관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하지만 그의 아들들은 김현철과 마찬가지로 권력형 비리를 저질렀다. 한국 현대사의 증인 김대중은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남기고 2009년 숨을 거뒀다.


6·15 선언의 또 다른 주역은 김정일(3)이었다. 김정일은 남북협력을 약속하고 일부 영토를 개방했다. 하지만 세계의 이목을 피해 핵개발을 추진하는 등 한반도 평화를 위협했다. 우리 언론은 김정일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악마'라는 평가와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라는 평가가 교차했다. 독재자로 살았던 김정일은 2011년 사망했다.

그의 아들 김정은(4)은 아버지의 권력을 승계했다. 왕좌에 오르자 대규모 숙청작업을 단행했다. 2014년 초 '김정은 사망설'이 유포됐지만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충청권의 맹주였던 김종필(5)은 DJP연합을 통해 국무총리에 내정됐다.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중앙정보부장을 역임한 그는 국회의원에 아홉 번이나 당선(또는 내정)된 실력자였다. 김대중정부와 결별한 뒤로는 독자 노선을 걸었다.

이회창(6)은 김영삼정부가 낳은 스타였다. 대법관으로 재직했을 당시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화 이후에는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냈다. 한나라당 소속 대선 후보로 대권을 노렸지만 두 번 다 낙선했다. 독자 출마한 17대 대선에서도 큰 표 차로 낙선했다.

노무현(7)은 대통령 당선 전후의 파격 행보로 기대를 모았다. 의회는 노무현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상정해 의결했다. 헌법재판소가 탄핵안을 기각했으나 노무현에 대한 기성언론의 공세는 계속됐다. 검찰 수사를 받던 노무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후임인 이명박(8)은 '경제 대통령'의 이미지를 등에 업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국밥을 먹는 홍보영상이 크게 히트했다. 임기 중에는 '촛불 수사' '4대강 사업' 등 크고 작은 논란에 휩싸였다. 이명박으로부터 서울시장 자리를 물려받은 오세훈(9)은 한때 잠재적인 대권 후보로 부상했다. 무상급식 주민투표는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박원순(10)은 시민단체 출신으로 서울시장에 당선됐다. 2014년에는 재선에까지 성공했다. 그에게 서울시장 후보를 양보했던 안철수(11)는 18대 대선에 출마했다가 자진 사퇴했다. 현재는 새정치민주연합에 입당해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노무현정부의 국무총리였던 고건(12)은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했다. 이명박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정운찬(13)은 '세종시 수정안'을 설계했으나 계획대로 입안하지 못했다. 충청권 출신인 이인제(14)는 민선 1기 경기도지사를 지내고 대선에 두 차례 나왔으나 모두 낙선했다. 당을 옮겨 다니면서도 국회의원 6선에 성공해 '피닉제'라는 별명이 붙었다.

소통령 대쪽판사 피닉제 등 별명 다양
경영싸움 폭행사건 등 재계 명암 뚜렷

박근혜(15)는 18대 대선에서 51.6%의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됐다. 박근혜에게는 늘 아버지의 그림자가 따라 붙었다. 원세훈(16)은 국정원장 자리에서 댓글을 통한 대선 개입을 지시해 실형을 선고받았다. 전두환(17)은 거액의 추징금을 내지 않고 버티다가 2013년에야 완납 의사를 밝혔다.

'친박'의 상징이었던 전여옥(18)은 대변인 당시 내뱉은 말들이 화제가 됐다. 비슷한 예로 유시민(19)은 논리정연한 말과 글솜씨로 주목받았다. 허경영(20)은 '화성인'스러운 돌출 행동으로 웃음을 안겼다. "내 눈을 바라봐"와 같은 희대의 유행어도 남겼다.

[신화와 몰락]
[기업 20인]

1998년 6월 남북관계의 물꼬가 터졌다. 정주영(21)은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넘어 북한에 당도했다. 이를 기점으로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까지 유치했다. 그러나 정주영은 편히 눈감지 못했다. 그룹 후계구도를 놓고 이른바 '왕자의 난'이 발발했다.

차남 정몽구(22)와 5남 정몽헌(23)이 대립각을 세웠다. 정몽헌은 2003년 대북송금 사건과 관련해 정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지는 아내인 현정은(24)이 물려받았다. 정몽구는 현대자동차그룹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지만 2007년 횡령·배임 사건 피의자로 법정에 섰다.

이건희(25)는 '삼성 신화'를 대한민국에 아로새겼다. 2009년에는 헌정 이래 최초로 단독 사면을 받았다. 2014년에는 건강이 악화돼 병원에 입원했다. 그의 장남인 이재용(26)은 사실상 그룹 후계자로 지목됐다.

허창수(27)는 지난 2011년 전경련 회장으로 추대됐다. GS그룹 총수 외에도 프로축구 구단 FC서울 구단주를 겸임 중이다. 박용만(28)은 두산그룹 회장이 된 후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수락했다. 현대가처럼 '왕자의 난'을 겪고 법정에도 섰지만 트위터를 통한 소통 행보로 그룹 이미지를 제고했다.

김승연(29)은 지난 2007년 보복폭행 사건으로 물의를 빚었다. 그렇지만 프로야구 구단 한화에 쏟은 투자가 많은 팬의 칭송으로 돌아왔다. 천안함 승조원 유가족을 그룹 채용에 배려하는 등 사회적인 활동에도 열심이다. 최철원(30)은 이른바 '멧값 폭행'으로 국민적인 지탄을 받았다. SK그룹 재벌 2세인 그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풀려났다.

이외에도 많은 기업인이 손가락질을 받았다. 정태수(31)는 한보그룹 사태가 터지자 휠체어에 앉았다. 고액체납자가 된 그는 행방불명 상태다. 김우중(32)은 1999년 대우그룹 해체와 함께 해외로 도피했다. 국내로 귀국해 실형을 선고 받았으나 2007년 사면됐다.

강덕수(33)는 샐러리맨 신화의 주인공이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몰락했다. 현재현(34) 역시 동양그룹 사태로 수많은 서민을 울렸다. 유병언(35)은 세월호 참사로 파생된 수사 과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요란했던 '삼성X파일' 수사의 주인공은 이학수(36)였다. 통일교의 창시자 문선명(37)은 2012년 숨질 때까지 여러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문국현(38)은 한때 창조한국당 당수로 대권에 도전했으나 정권에 밉보인 죄로 정계를 은퇴했다.

대상그룹 장녀인 임세령(39)은 2009년 이재용과 이혼했다. 최근에는 연예인과 열애설에 휩싸였다. 엔씨소프트 김택진(40)은 '리니지'라는 게임으로 억만장자 대열에 합류했다.

[파문의 주인공]
[사회 20인]

밀레니엄 열풍이 불었던 1999년 도올 김용옥(41)은 국내 철학 강의의 새 지평을 열었다. 뒤이어 등장한 구성애(42)는 '아우성'이란 프로그램으로 대중에게 각인됐다. 강금실(43)은 노무현정부 당시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법무부장관이 됐으며, 호주제를 폐지했다.

이라크에서 피랍된 김선일(44)은 2004년 유명을 달리했다. 다음해에는 이른바 '줄기세포 스캔들'이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황우석(45)은 그해 가장 많이 검색된 인물이었다. 2007년에는 신정아(46)라는 이름이 연일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같은 해 심형래(47)는 문제작 <디워>를 내놨다. 문화평론가 진중권(48)은 이 논쟁에 참여해 이름을 알렸다. 장자연(49)의 유서는 연예계의 판도라를 열었다. 불행히도 사건은 흐지부지 됐다. 신영철(50)은 이명박정부의 뇌관인 '촛불재판'에서 외압 논란을 자초했다. 사법부의 독립성이 땅에 떨어졌다. 조현오(51)는 잇따른 막말로 구설에 올랐다. 경찰청장으로 이명박정부를 적극 호위했다.


한국 가톨릭계의 큰 어른인 김수환(52)은 200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였다.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던 앙드레김(53)도 2010년 작고했다. 그를 기리는 각계의 추모 메시지가 쏟아졌다.

성접대 스폰서 혼외아들 발칵
연쇄·토막살인 아동폭행 경악

언론인 손석희(54)는 MBC를 떠나 JTBC로 옮기면서 화제가 됐다. 아나운서 김주하(55)는 불우한 가정사가 노출됐다. 혼혈인이자 성공한 뮤지컬 음악 감독인 박칼린(56)은 일약 스타가 됐다. '트위터 대통령' 이외수(57)는 존경과 모멸을 한 몸에 받았다.

남성연대로 유명세를 치렀던 성재기(58)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검찰총장후보로 거론됐던 김학의(59)는 사상 초유의 성접대 스캔들에 휘말렸다. 그를 밀어낸 채동욱(60)은 혼외아들 의혹으로 낙마했다.

[뜨거나 지거나]
[스타 20인]

1998년 개그맨 김국진(61)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유동근(62)은 사극 <용의 눈물>로 신드롬을 일으켰다. 홍석천(63)은 국내 연예인 가운데 최초로 커밍아웃했다. 그룹 GOD(64)의 콘서트장에는 수만명의 팬이 몰렸다.

배용준(65)은 드라마 <겨울연가>를 통해 한류스타로 등극했다. 유승준(66)은 병역기피 논란으로 국내에서 추방됐다. 개그맨 박준형(67)은 2003년 <개그콘서트>에 출연해 연말 시상식을 휩쓸었다. 같은 해 이효리(68)는 정규앨범을 발표하고 '섹시'의 대명사가 됐다.

이영애(69)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 <대장금>을 성공시키며 최고의 여배우가 됐으나 결혼과 동시에 작품 활동을 중단했다. 2007년에는 걸그룹 원더걸스(70)가 '텔미'를 유행시켰다. 2008년 최진실(71)의 자살은 전 국민을 충격에 빠뜨렸다. 해가 가도 애도 분위기가 이어졌다.

<슈퍼스타K>란 오디션 프로그램은 허각(72)의 인생을 바꿨다. 이듬해 신정환(73)은 원정도박 사건에 연루되며 방송가에서 퇴출됐다. 가수 싸이(74)는 '강남스타일'로 미국 음원차트를 휩쓸었다. 배우 설경구(75)는 재혼을 둘러싼 여러 루머로 몸살을 앓았다.

전지현(76)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김구라(77)는 '막말 파문' '억대 보증' 등 여러 논란에 휩싸였다. 그럼에도 방송가에서의 존재감은 빛을 발했다.

방송인 노홍철(78)은 케이블TV에서 시작해 공중파를 장악했다. 현재는 음주운전 논란으로 자숙 중이다. 유재석(79)은 '유느님'으로 불리며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소신 있는 가수였던 신해철(80)은 최근 의료사고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국민에 힘 준]
[스포츠 15인]

IMF 사태로 온 국민이 시름하고 있던 당시 메이저리거 박찬호(81)와 프로골퍼 박세리(82)의 활약은 큰 힘이 됐다. 박세리와 함께 깜짝 스타가 된 '땅콩' 김미현(83)은 상당한 인기를 구가했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는 히딩크(84)와 태극전사들의 땀이 만들어 낸 결과였다. 축구선수 박지성(85)은 프리미어리그에 입성해 해외축구 붐을 일으켰다.

농구계에 혜성같이 등장한 김승현(86)은 코트를 휘저었다. '홈런왕' 이승엽(87)은 아시아 홈런기록을 갈아치웠다. '피겨여왕' 김연아(88)는 벤쿠버올림픽에서 전설적인 연기로 금메달을 따냈다. '마린보이' 박태환(89)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또 다른 메이저리거 추신수(90)는 초대형 계약으로 잭팟을 터뜨렸다. 쇼트트랙 영웅 안현수(91)는 러시아에 귀화해 선수 생활을 잇고 있다. 역도 금메달리스트 장미란(92)은 세계를 들어 올렸다.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93)은 격투기 선수로 변신했다. 배구 여신 김연경(94)은 해외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였고, e스포츠 선수였던 홍진호(95)는 방송인으로 변신에 성공했다.

[충격과 경악]
[범죄자 5인]

신창원(96)은 1997년 탈옥을 감행해 우리 사법당국을 농락했다. 조두순(97)은 아동 성폭행을 저질러 피해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겼다. 살인마 유영철(98)은 죄 없는 여성 수십명을 죽였고, 오원춘(99)은 경기 수원에서 끔찍한 토막살인을 저질렀다.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100)은 출소 이후에도 연예인 협박 사건에 연루되며 체면을 구겼다가 2013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angeli@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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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의 100일 결정적 장면들

이재명의 100일 결정적 장면들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체감상 1년은 된 것 같다.” 어느 덧 이재명정부가 출범 100일째를 맞았다. 이재명 대통령에겐 숨 가쁜 3개월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탄핵 정국, 조기 대선 등 대형 정치 이슈는 지나갔다. 이제 본격적으로 국정 운영의 청사진을 실현해야 하는 시기다. 지지율은 이미 요동치고 있다. 어떤 이슈가 이정부를 뒤흔들었던 걸까? 지난 6월3일 21대 대통령선거가 열렸다. 지난해 12월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지 6개월 만에 대선이 치러졌다. ‘어대명(어차피 대통령은 이재명)’이라는 말이 대선 전부터 파다했고 실제로 이변은 없었다. 재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역대 최다 득표수를 기록했다. 다만, 과반 득표율에는 미치지 못했다. 무정부 상태 산적한 이슈 이번 대선은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보궐선거여서 인수위원회 기간 없이 바로 임기가 시작됐다. 이 대통령 앞에는 비상계엄 사태 수습, 민생 회복, 국민 통합 등 국내 문제는 물론 미국발 통상 전쟁 등 국외 문제까지 이슈가 산적한 상태였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무정부’나 다름없는 상태로 6개월 동안 이어진 국정 공백을 메워야 했다. 이 대통령은 당선이 확정된 후 소감 연설에서 “이 나라의 민주주의를 회복하고 민주공화정 공동체 안에서 국민이 주권자로 존중받고 협력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 반드시 그 사명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란 극복 ▲민생 회복 ▲국민 안전 ▲한반도 평화 ▲국민 통합 등을 언급했다. 실제 이 대통령은 국회의 과반 의석을 등에 업고 ‘윤석열정부 지우기’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이재명 정부 1호 법안으로 ‘내란 특검법’ ‘김건희 여사 특검법’ ‘채 해병 특검법’ 등을 통과시켰다. 김건희 특검법, 채 해병 특검법 등은 윤정부에서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로 번번이 폐기됐던 법안이다. 이 대통령은 취임 엿새 만인 6월10일 국무회의에서 3대 특검법을 의결했다. 그는 국무회의 이후 SNS를 통해 “이재명 정부 1호 법안인 3대 특검법은 내란 심판과 헌정 질서 회복을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받들기 위한 결정”이라고 밝혔다. 특검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를 구속 기소하는 등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침체된 내수를 회복하기 위한 소비쿠폰도 지급했다.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사회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이는 곧 경기 부진으로 이어졌다. 정치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사람들이 소비를 줄이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연말 연초 대목 장사를 망친 자영업자는 폐업을 걱정해야 할 지경에 몰렸다. 민생 회복 소비쿠폰 지급은 이 대통령이 대선후보 때부터 내세운 공약이다. 지난 7월21일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1차 소비쿠폰이 지급됐다. 기본 15만원에 인구 감소 지역 등에 일정 금액을 더했다. 2차 소비쿠폰은 상위 10%를 제외한 국민 90%가 오는 22일부터 신청할 수 있다. 13조원의 재정이 투입됐다. 윤정부 때부터 이어진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은 이재명정부 들어서도 쉽게 출구 전략을 찾지 못하는 모양새다. 무엇보다 의대생 수업 복귀에 대한 이정부의 행보에 민주당 지지자 사이에서도 불만이 제기됐다. 의료 정상화를 이유로 조건 없이 의대생 복귀를 추진하는 모습에 공정과 원칙이 깨졌다며 실망감을 표출한 것이다. 두 번의 도전 끝에 당선 내란 종식, 민생 첫 손에 의정 갈등은 윤정부 시기인 지난해 2월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겠다는 보건복지부의 발표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전공의는 집단 사직하며 병원을 떠났고 의대생은 집단 휴학을 강행했다. 응급실 뺑뺑이 사건 등 의료 공백이 가시화되고 의료 붕괴까지 우려되다가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핵심 이슈에서 멀어졌다. 새 정부의 현안으로 넘어간 것이다. 이 대통령이 정은경 전 질병관리청장을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하면서 의정 갈등 해소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정 장관 지명 이후 의료계에서 일제히 환영 입장을 내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대생 복귀와 관련해 특혜 논란이 나왔고 국민 여론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의료계와 국민 여론의 괴리가 큰 상황이라 해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산재와의 전쟁’은 임기 초 이정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는 모양새다. 이 대통령은 산재 사망사고가 발생한 SPC 공장을 현장 방문하는가 하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 ‘반복 공시로 주가 폭락’ 등 수위 높은 발언으로 건설업계를 겨냥했다. 이 대통령이 산업재해 근절을 외치자 건설업계가 납작 엎드렸다. 산재 사고가 발생하면 사용주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내용의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고도 일터에서 근로자가 죽는 사례가 거듭 일어나자 대통령이 직접 칼을 빼든 것이다. 연이어 산재 사고가 발생한 포스코이앤씨는 대표이사가 바뀌었고 DL건설은 임직원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 일각에서는 이정부가 지나치게 기업을 ‘잡도리’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코스피 5000’을 외치며 주가 부양을 공언한 것과 실제 행보는 정반대라는 의견이다. 지금까지의 주가 상승은 이정부에 대한 기대감에서 비롯됐다면 앞으로의 상승분은 실물 경제에서 끌어 올려야 하는데 이를 이끌 기업을 너무 옥죄는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온다. 경제 정책의 방향도 엇박자를 내고 있다는 의견이 꾸준히 제기된다. 지난달 1일 코스피 지수가 126.03포인트(3.88%)나 하락했다. 주가 3200선이 깨졌고 하락률은 미국발 상호 관세 부과로 충격을 받았던 지난 4월7일(-5.57%) 이후 4개월 만에 가장 컸다. 이른바 ‘검은 금요일’의 배경은 전날 이재명 정부가 발표한 세제 개편안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침체된 경기 소비쿠폰으로 이정부는 주식 양도소득세 과세 대상인 대주주 기준을 50억원에서 10억원으로 낮추고 최고 35% 배당소득 분리과세 도입 등을 담은 세제 개편안을 공개했다. 금융투자소득세 도입 조건부로 인하된 증권거래세율도 현재의 0.15%에서 2023년 수준인 0.2%로 환원됐다. 또 법인세 세율을 모든 과세표준 구간에 걸쳐 1%포인트씩 일괄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검은 금요일’의 후폭풍은 상당했다. 무엇보다 국내 주식시장에 대한 투자 심리가 위축됐다는 게 문제였다. 주가가 폭락한 지난달 1일 이후 열흘 사이에 거래 대금이 20%가량 줄었다. 이른바 ‘국장’에서 빠져나간 개인 투자자들이 ‘미장(미국 주식시장)’으로 몰려가면서 나스닥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가뜩이나 관세 협상으로 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증시 부양책에 대한 의구심이 커졌다는 방증이었다. 일명 ‘노란봉투법’으로 불리는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제2·3조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점도 우려를 더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은 하청 노동자에게 원청과의 교섭권을 부여하고 파업 노동자에 대한 기업의 손해배상청구를 제한하는 내용이 골자다.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 활동이 위축될 것이라는 예상이 끊이지 않았다. 법안이 통과되기 전부터 한국경영자총연합회 등 경영계를 대표하는 경제단체는 물론 주한미국상공회의소(암참) 등이 노란봉투법에 반대 의사를 드러냈다. 법안이 통과되면 기업이 규제가 덜한 외국으로 나갈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경제단체 등은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시행을 유예해 달라고까지 했지만 그대로 진행됐다. 대통령실은 법안 통과 이후 상황을 주시하는 모습이다. 이 대통령은 노란봉투법 통과 이후 “노란봉투법의 진정한 목적은 노사의 상호 존중과 협력 촉진”이라며 “노동계도 상생의 정신을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책임 있는 경제 주체로서 국민 경제 발전에 힘을 모아주시기를 노동계에 각별히 당부드린다”고 강조했다. 광복절을 앞두고는 사면 문제가 불거졌다. 취임한 지 2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전임 정부에서 임기 초 정치인 사면을 한 적이 없던 터라 이정부 역시 같은 길을 갈 것이라는 의견이 우세했다. 사면 대상으로 거론되던 조국혁신당 조국 전 대표가 자녀 입시 비리 혐의 등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수감된 지 8개월 밖에 안된 점도 ‘사면 불가론’에 힘을 더했다. 주가 부양 공약 반대되는 정책 지난해 12월12일 대법원은 자녀 입시 비리와 청와대 감찰 무마 등의 혐의로 기소된 조 전 대표에게 징역 2년에 추징금 600만원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조 전 대표는 나흘 뒤인 12월16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만기 출소일은 내년 12월15일이었다. 조 전 대표가 이끌던 조국혁신당은 당시 대선에서 후보를 내지 않고 이 대통령을 지지했다. 조 전 대표의 사면 관련 언급이 나올 때마다 ‘대선 청구서’라는 말이 따라붙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후 종교계, 시민단체, 정치권 일부에서 조 전 대표를 사면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조 전 대표가 검찰의 횡포에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 있다는 주장도 일부 진영에서 제기됐다. 특히 문재인 전 대통령이 대통령실 등이 조 전 대표의 사면을 직접 요구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조 전 대표는 문재인정부 시절 민정수석, 법무부 장관 등 요직을 맡은 바 있다. 문 전 대통령은 조 전 대표에게 ‘마음의 빚이 있다’고 언급하는 등 각별히 챙긴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빗발치는 사면 요구에 고심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정치권 등에서 조 전 대표를 사면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과 달리 여론이 좋지 않았기 때문. 특히 민주당 지지층 내에서도 조 전 대표의 사면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된 입시 비리 혐의 등이 민주당 지지층이 중요하게 여기는 공정과 상식의 가치에 반한다는 것이다. 지지율이 떨어지는 등 민심 이반이 예상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이 대통령은 장고 끝에 조 전 대표의 사면을 결정했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조 전 대표를 비롯해 윤미향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 은수미 전 성남시장,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 등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27명을 포함해 총 83만6678명에 대한 대규모 특별사면을 단행했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분열과 반목의 정치를 끝내고 국민 대화합 차원에서 이뤄지는 광복절 특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광복절 사면은 이 대통령의 지지율을 뒤흔들었다. 사면 논의가 시작됐을 때부터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한 지지율은 발표 이후 눈에 띄게 꺾였다. 조 전 대표가 사면 이후 ‘광폭 행보’를 보이며 노출도가 높아진 것도 한몫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제 개편안·사면으로 지지율 흔들 한일·한미 정상회담은 긍정적 평가 조 전 대표는 이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에 대해 ‘(사면이 끼친 영향은) N분의 1 정도’라고 발언한 부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조 전 대표는 수감 한 달여 만에 정국의 핵으로 떠올랐다. 여권 내에서도 조 전 대표의 행보를 불편해하는 기류가 감지되며 야권에서는 이정부를 공격하는 소재가 된 모양새다. 특히 조 전 대표를 비롯한 조국혁신당에서 우리의 길을 가겠다는 ‘마이웨이’ 행보를 공언하면서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정계 개편이 일어나는 게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대통령의 임기 5년간 외교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정상회담도 잇따라 열렸다. 이 대통령이 취임하기 전부터 전 세계를 뒤흔들고 있던 ‘트럼프발 통상 전쟁’의 대응 방향이 윤곽을 드러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1월 당선 직후부터 ‘관세’를 무기로 전 세계에 싸움을 걸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미 FTA’로 쌀 등 일부 품목을 제외하고 관세가 ‘0’이었기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여기에 트럼프 대통령은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증액 등을 언급했다. 시장을 개방하고 미국에 이른바 ‘동맹 비용’을 내라는 요구였다. 실무진이 진행한 관세 협상은 그 시발점이었고 정상회담은 미국발 청구서의 윤곽이 드러난 자리였다.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은 표면상으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각국 정상을 불러놓고 면전에서 망신주기 하는 등 어디로 튈지 모르는 방식의 트럼프 대통령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한 점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일각에서는 정작 중요한 사안은 하나도 논의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앞서 조선업 협력, 원전 문제를 비롯해 자동차 등 주력 산업에 붙는 관세까지 불확실성을 해소하지 못했다는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실무진이 틀을 만들고 정상회담에서 결정되는 방식의 외교 관행이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먹히지 않았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서 공동성명이나 합의문 등은 나오지 않았다. 이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앞서 이시바 시게루 일본 총리와도 만났다. 이 대통령은 일본 방문 전 과거 한일 간 위안부 합의와 징용 배상 문제와 관련해 “국가 간 약속은 존중돼야 한다”며 기존 합의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다. 당시 한일 정상회담에서는 미국발 관세 관련 논의도 이뤄졌다. 당분간 민생 집중 취임 후 첫 외교 시험대를 넘은 이 대통령은 당분간 민생을 살피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당분간 국민의 어려움을 살피고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민생과 경제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이규연 대통령실 홍보소통수석은 “몇 주간 정상회담에 몰두했기 때문에 국내, 특히 민생·경제성장과 관련된 부분을 앞으로 주력해서 챙기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