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솔그룹' 중소기업 기술 갈취 의혹

1년에 24억 벌어주는데 1억7000만원으로 ‘꿀꺽’

[일요시사 경제1팀] 한종해 기자 = 범정부 차원의 '중소기업 기술유용 근절' 공조체제가 가동 중인 가운데 한솔그룹이 중소기업인 어울림정보기술의 핵심기술 저작권을 두고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어울림은 "뺏겼다"고, 한솔에서는 "정당하게 샀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 그 속을 들여다보니 이상한 점은 한둘이 아니었다. 고소·고발이 난무하는 상황에서 <일요시사>가 양측의 주장을 토대로 사건을 재구성해봤다.

1997년 설립된 어울림정보기술은 보안 1세대 회사로 방화벽, 가상사설망(VPN) 등을 개발해온 정보보안 전문기업이다. 방화벽, VPN, IPS 등을 아우르는 통합 보안 솔루션(UTM)이 주력 제품이다. 뛰어난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금껏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3000여개에 약 5만대의 제품을 판매하고 유지·보수 업무를 이어왔다. 어울림정보기술(이하 어울림)는 어울림그룹의 계열사로, 어울림그룹은 수제 스포츠카 '스피라' '뱅가리' 등을 생산하는 어울림모터스로 유명하다.

대규모 퇴직후
압류→경매

한솔넥스지는 2001년 설립된 넥스지를 전신으로 한다. 국내 VPN 시장 1위 업체로 2013년 7월 한솔그룹에 인수됐다. 현재 한솔그룹 계열사인 한솔인티큐브와 솔라시아가 각각 지분 18.42%를 보유하고 있다. 

한솔그룹에 편입된 한솔넥스지(이하 한솔)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13년 12월 어울림 소유인 'SECUREWORKS V4.0(이하 시큐웍스 V4.0)' 프로그램 저작권을 경매를 통해 매수하면서부터다. 당시 한솔은 보도자료를 통해 "경매를 통해 매수한 시큐웍스 V4.0에 대한 모든 권리가 한솔에 있는 만큼, 시큐웍스 V4.0 제품과 기존 넥스지 제품과의 사업 시너지가 최대한 발취될 수 있도록 제품 개발과 서비스에 최선을 다하겠다"며 프로그램을 무단 복제해 사용하는 업체들에 대해 법률적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밝혔다.

한솔은 사업다각화에 속도가 붙게 됐다. 지난해 3월에는 "어울림 시큐웍스 V4.0을 사용 중인 고객사 800여곳 중 500여곳에 대한 유지보수를 함께 하고 있다"는 보도자료가 나오기도 했으며 지난해 3분기 기준 유지·보수용역 비용은 전년 동기 기준 20억원가량 증가했다.
 


이처럼 한솔의 성장에 주를 담당하는 시큐웍스 V4.0의 낙찰가는 1억7000만원이다. 경매 절차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경매 시작가도 평가사들의 감정에 의해 정해졌다. 그런데도 어울림은 현재 "한솔이 실체도 없는 시큐웍스 V4.0을 인수해 놓고 어울림 대부분의 기술에 대한 저작권을 불법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울림에 따르면 회사 내 이상 징후가 포착된 것은 2012년 3월 주주총회부터다. 이날 직원 수명이 어울림 지분 20%가량을 확보한 뒤 주총에 나타나 이사 선임을 시도했으나 무산됐다.

한솔넥스지 VS 어울림정보통신 이전투구
배임·업무방해·저작권침해 고소고발 난무

3개월 뒤 주총에 나타났던 일부 직원들이 회사와의 아무런 협의 없이 회생 신청을 내고 법정관리인을 자기 쪽 사람으로 선임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이마저도 없던 일이 됐다. 같은 달 직원 200~300명이 집단 퇴직했다. 2주 후 퇴직자들은 퇴직금지급소송을 내고 회사 내 모든 기물과 통장 계좌, 시큐웍스 V4.0에 대한 압류 신청을 했다. 회사는 퇴직금 지급을 위해 압류를 풀어달라고 수차례 요청했지만 퇴직자들을 묵묵부답이었다. 퇴직자들 중 20여명은 다넷정보기술이라는 업체를 설립했다. 2013년 10월 한솔은 다넷정보기술을 인수, 이듬해 청산종결했다.

수많은 압류물품 중에서 경매로 넘어간 것은 시큐웍스 V4.0 저작권 하나였다.

이상한 것은 어울림 내에서 시큐웍스 V4.0이라는 제품은 없었다는 점이다. 단지 시큐웍스 1000/2000/3000 V4 R3,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 등 여러 개의 제품을 통칭하기 위해 시큐웍스 V4.0이라는 단어를 썼을 뿐이다.

어울림이 저작권위원회에 확인한 결과 시큐웍스 V4.0 저작권은 2011년 9월에 등록된 것으로 확인했다. 법인 공인인증서를 통해 저작권위원회에 저작권이 등록됐지만 당시 대표이사는 물론 사내 어느 직원도 저작권 등록 사실을 몰랐다. 어울림은 당시 법인 공인인증서 관리를 맡았던 전 직원에게 "2011년 9월8일 연구소 직원이 찾아와 '급히 처리할 것이 있으니 컴퓨터를 쓰게 해 달라'는 요구가 있어 자리를 내준 적이 있다"는 답을 받았다.
 


통상적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을 등록할 때는 프로그램 소스코드파일이나 실행파일이 첨부된다. 소스코드는 프로그램 언어로 구성된 일종의 설계도다. 하지만 시큐웍스 V4.0 저작권은 소스코드 없이 제품을 설명하는 브로셔만 첨부돼 등록됐다. 그런데도 시큐웍스 V4.0 저작권은 2013년 11월, 1억7000만원에 한솔로 넘어갔다. 당시 어울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솔이 소스코드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 결과적으로 실체가 없는, 단순히 이름뿐인 저작권을 1억700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인수해 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해 초부터 거래처 이탈이 시작됐다. 어울림의 유지보수 관리를 받던 거래처가 하나 둘씩 한솔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어울림은 홈페이지에 "고객님들이 사용하고 계신 제품은 '시큐웍스 V4.0 R2ㆍR3ㆍR4'들이며 경매로 낙찰된 '시큐웍스 V4.0'과는 전혀 다른 별도의 저작물입니다"라는 내용을 게재하며 고객 이탈 막기에 나섰다.

회사도 모르는
저작권 등록

여기까지가 어울림의 주장이다. 어울림은 한솔 측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에 한솔은 오히려 문경석 어울림 이사를 저작권법위반과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했다. "프로그램 업데이트 권한과 유지보수 권한 등 시큐웍스 V4.0이라는 이름을 쓰는 모든 제품에 대한 저작권을 정당한 방법으로 인수했는데도 불구하고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저작권자의 허락을 득하지 않고 무단으로 제품판매 및 유지보수 활동을 해 저작재산권을 침해했다"는 게 고소 이유였다. 해당 고소는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혐의없음' 처분을 받았다. 한솔은 항고한 상태다.

쟁점은 시큐웍스 V4.0과 시큐웍스 V4.0 R2ㆍR3ㆍR4의 관련성이다. 한솔 측은 시큐웍스 V4.0이 시큐웍스 V4.0 R2ㆍR3ㆍR4 등을 총칭하는 제품명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어울림은 시큐웍스 V4.0은 어울림정보기술이 개발한 제품이 아닌 실체가 없는 저작권일 뿐이라는 주장이다.

어울림 주장의 첫 번째 근거는 소스파일의 용량이다. 시큐웍스 V4.0 저작권이 등록될 당시 소스파일 대신 제품설명서가 첨부됐다. 반면 어울림의 주력 제품인 시큐웍스 1000/2000/3000 V4.0과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는 저작권 등록당시 각각 실행파일과 소스파일이 첨부됐다. 시큐웍스 V4.0은 추후 저작권위원회의 요청으로 어울림이 소스파일을 첨부, 지금은 경정등록된 상태다.
 

한솔의 주장처럼 시큐웍스 V4.0이 위 제품을 모두 포함한다면 소스파일 용량은 최소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보다 커야 한다. 하지만 프로그램 등록부를 보면 시큐웍스 V4.0의 소스파일 용량은 1102만6988바이트,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 소스파일 용량은 2982만1579바이트로 턱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두 소스파일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어울림이 저작권위원회의 소스파일 등록 요청을 받아 재등록할 당시 보냈던 소스파일은 시큐웍스 V4.0 시리즈와 아무 관련 없는 파일이었기 때문이다.

"R2·3·4는
R1 수정버전"

두 번째 근거는 프로그램등록부 상 프로그램 내용 설명이다. 시큐웍스 V4.0의 프로그램등록부는 시큐웍스 V4.0를 '고성능 Multi-Core CPU를 사용한 경계선 방어형 네트워크 보안 솔루션으로 하나의 장비로 Firewall, VPN, IPS, QoS, Anti-Virus 등의 기능을 제공합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의 경우에는 '전용 서버 하드웨어에 설치되어 내부 네트웍자원에 대한 보안과 사용자들의 접근제어를 수행하고 암호화된 가상의 사설망을 제공하는 시스템 프로그램'으로 표현되고 있다.

시큐웍스 V4.0은 '장비',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4는 '프로그램'이라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컴퓨터 본체와 윈도우 시리즈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수원지검 성남지청도 비슷한 논리로 문 이사에 대해 불기소처분했다. 문 이사에 대한 '불기소이유통지'를 보면 검찰은 "고소인(한솔)은 소스코드의 주석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지만 소스코드 주석은 프로그램 개발자가 개발 편의상 코드 가독성을 위해 임의로 작성되는 부분으로 프로그램의 실행 및 작동에 관여되는 부분이 아니므로 이것만으로 프로그램이 동일하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 검찰은 "한국저작권위원회에서 프로그램 소스파일이 등록되지 아니하여 2014년 8월28일 경 직권 경정된 사실에 비추어 피의자(문 이사)가 2013년 11월29일부터 2014년 2월 경까지 '시큐웍스 V4.0과 시큐웍스 V4.0 R2ㆍR3ㆍR4는 전혀 다른 저작물입니다'라는 주장대로 브로셔 파일만 기재되어 있었던 사실이 인정되고, 문 이사가 한솔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영업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밝혔다.

장비 인수했다고 프로그램까지 넘어가나
3개월새 어울림 거래처 60% 한솔로 이동

박동혁 어울림 대표는 "2011년 9월 그 누구도 모르게 저작권을 등록하고, 퇴직 직원이 돈이 들어있는 회사 법인 계좌는 제외하고 실체도 없는 저작권에 대한 경매를 신청하고, 퇴직 직원이 설립한 회사를 한솔이 인수하고, 한솔이 결국 저작권까지 인수해 불법 행사를 하는 모양새가 한 편의 잘 짜여진 각본을 보는 듯 하다"고 전했다. 어울림은 유화석 한솔 대표이사를 '배임 혐의'로 고발했다.
 

한솔의 주장은 다르다. 소스코드가 없다고 해서 저작권을 인정 받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게 요지다. 한솔 관계자는 "마이크로소프트 경우에도 윈도우 시리즈를 등록할 때 소스코드를 등록을 하지 않고 실행 CD만 단순 등록을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제품에 대한 프로그램등록부를 보면 원 파일에 대한 소스 용량이 다 차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경매로 취득한 시큐웍스 V4.0은 R0, R1 버전이고 어울림이 주장하는 R2ㆍR3ㆍR4는 R1의 릴리즈(수정) 버전이다"며 "경매로 시큐웍스 V4.0을 낙찰 받을 때 개작권을 포함하고 있었으므로 R0ㆍR1ㆍR2ㆍR3ㆍR4는 하나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2014년 한솔을 상대로 어울림이 저작권위반 및 업무방해혐의로 고소한 사건에서도 '한솔이 시큐웍스 V4.0에 대한 저작권을 정당하게 인수했고, 이를 인정해 준다'는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고 덧붙였다.


한솔은 R2ㆍR3ㆍR4의 저작권 등록 시점을 잘 살펴봐야 한다는 당부도 했다. 한솔에 따르면 어울림이 시큐웍스 V4.0 저작권을 등록한 이유는 개별적으로 등록하면 인증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모든 제품 라인업을 시큐웍스 V4.0에 포함에 저작권을 등록했다는 것.

그런데 퇴사한 직원들이 시큐웍스 V4.0에 대한 압류를 하고, 경매를 신청하자 어울림이 이를 뺏길 수도 있다는 판단에 그제야 시큐웍스 1000/2000/3000 V4.0 R2, R3, R4와 시큐웍스 1500/2500/3500 V4.0 R2ㆍR3ㆍR4 저작권을 등록하고 과거 판매된 제품까지 자기들 소유라고 주장하고 있다는 게 한솔넥스지의 설명이다. 두 제품의 등록시점은 2013년 4월이다.

한솔 용역매출↑
시큐웍스 덕분?

한솔은 "가장 중요한 것은 어울림이 거래처인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 보낸 인증서에 그들 스스로가 제품명을 시큐웍스 V4.0으로 명시하고 있다는 부분"이라며 "어울림의 주장대로 R2ㆍR3ㆍR4 제품이 판매됐다면 현재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인증 담당자들은 비인증 제품 사용으로 징계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다"고 전했다.

 

<han1028@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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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아웃사이더’ 정청래 인싸 플랜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국회에서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독주가 이어지고 있다. 당원의 명령인 개혁을 완수하기 위한 질주다. 당의 ‘아웃사이더’였던 그가 당을 휘어잡기까지 수많은 당원이 등을 밀어줬다. 비주류에서 주류 ‘인싸’로 자리 잡기 위한 정 대표의 다음 스텝이 주목된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행보가 매섭다. 윤석열정부에서 막힌 과제를 해치우는 동시에 공약이었던 각종 개혁을 빠르게 완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정 대표는 같은 당 박찬대 의원보다 덜 알려졌다는 평이 나오지만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위원장으로서 보여준 ‘사이다’ 면모가 주목받으면서 강성 지지층의 환호를 받았다. 정청래가 걸어온 길 비주류였던 그가 당 대표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1대 국회 때는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 수석 최고위원을 지냈고, 22대 국회에선 법사위원장으로서 국민의힘에 호통을 치며 유튜브 단골 주제가 됐다. 당시 정 대표는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쟁점 법안을 밀어붙이고 상대편 의원과 대립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그동안 정 대표는 언론 대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유튜브 등 SNS를 통해 지지자와 직접 소통해 왔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보다 주목도가 떨어진다는 평이 나오지만 팬덤 정치에 최적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정 대표는 최근에도 자신을 둘러싼 의혹과 청-명 프레임에 대해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는 SNS에 ‘언론의 자유와 횡포 그리고 언론의 게으름의 관성’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조국 전 대표의 사면·복권을 놓고 일부 언론에서 ‘정청래 견제론’을 말한다.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근거 없는 주장일뿐더러 사실도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에서 바로 반박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어 “정청래는 김어준이 밀고, 박찬대는 이재명 대통령이 밀었다는 식의 가짜 뉴스가 이 논리의 출발”이라며 “어심이 명심을 이겼다는 황당한 주장, 그러니 정청래가 이재명 대통령과 싸울 것이란 가짜 뉴스에 속지 말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대통령과 각을 세울 일이 1도 없다. 당정대가 한 몸처럼 움직여 반드시 이재명정부를 성공시킬 생각이 100(이다)”이라고 덧붙였다. 계파 갈등 프레임이 씌워질 조짐이 보이자 이를 사전에 차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정 대표의 정치적 뿌리를 따지자면 친노(친 노무현)에 가깝다. 그러나 문재인 전 정부서는 친문(친 문재인), 이재명 대표 체제에서는 친명(친 이재명)으로 분류되는 등 계파색이 비교적 옅은 편이다. 1989년 미국 대사관저 점거 농성을 주도한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은 등 학생 운동권 출신이지만, 대표 운동권인 민주당 86 그룹과의 친분을 공개적으로 과시하지 않았다. 따라서 정 대표는 당의 주류보다 비주류에 가깝다는 게 여의도에 떠도는 평이다. 친문? 친명? 오히려 ‘계파 청산파’ “잘못된 586 문화 배운 97도 청산” 전당대회가 한참이던 당시 한 민주당 의원은 “사석에서 만난 정 의원은 아주 뚝심 있는 사람이었다. 박찬대 의원은 특유의 재치로 호감을 얻는 편이라면 정 의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할 말은 제대로 하는 캐릭터”라며 “그래서 계파를 분류하기 어려운 것 같다. 나만의 길을 가는 것 같으면서도 한번 정한 길은 꺾지 않고 걷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오히려 정 대표는 ‘계파 청산’을 외치는 인물이다. 그는 당 대표 후보이던 당시 “국민께서 비판하시는 586의 운동권 문화는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라디오에 출연해서는 “계파는 당을 좀먹는 독약”이라며 강도 높게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정파와 노선은 필요하지만, 계파는 없어져야 한다. 저 스스로 계파에 가입하지 않고, 그런 데서도 저는 안 불러준다”고 말했다. 이어 “저는 586의 질서, 운동권의 수직적 관계가 싫었다. 그런 분들과 몰려 다니는 게 너무 비생산적”이라며 “586의 안 좋은 문화를 따라 배운, 너무 빨리 늙어버린 97 세대들의 그런 것도 청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수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당원들의 요구를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였기 때문이다. 8·2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는 당선 이후 “이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것은 민주당 주류가 바뀌었단 뜻이고, 민주당에서 정청래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당의 주인인 당원들이 당의 운명을 결정하는 시대가 왔다는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해석했다. 이날 전당대회를 “예전에는 당원들이 국회의원 눈치를 봤지만, 이제는 국회의원들이 당원 눈치를 봐야 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민주당의 민주화’가 드디어 그 깃발을 높이 든 8·2 전당대회”라고 자평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 대표를 탄탄히 받쳐주는 건 여의도 인맥이 아닌 당원이었다. 정 대표는 이들을 대주주 삼아 힘을 키워 주류로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당원권에 힘을 쏟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평당원 최고위원’ 선출을 시도하는가 하면 당원 주권 정당 실현을 강조하기 위해 ‘대의원 1인1표제’를 띄우기도 했다. 대의원 1인1표제는 당원들의 권한을 대폭 향상하는 방안이다. 정 대표는 지난 18일 열린 국회 당원주권 정당특위 출범식에서 “10년 넘게 당원주권정당, 1인1표를 주장해 왔지만, 아직까지도 열리지 않았다”며 “헌법에서 얘기하고 있는 평등 선거가 민주당에서도 구현이 될 수 있도록 서둘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3대 개혁 풀가동 이어 “대한민국 헌법에는 평등 선거가 명시돼있고, 많은 선거에서 1인1표가 행사되지만 유독 더불어민주당에선 누구는 1표, 누구는 17표를 행사한다”며 “헌법적으로 보나 상식적으로 보나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이재명정부가 국민주권시대를 강조하는 만큼 이에 발맞추기 위해서라도 민주당은 권리당원의 권리를 보장하고 상징적인 ‘1인1표’ 시대를 반드시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밖에도 정 대표는 당헌·당규 개정을 비롯한 ▲평당원 선출 준비 지원 ▲연말 당원 콘서트 지원 등을 약속했다. 당원의 힘이 커질 수록 정 대표의 정치적 입지도 넓어진다. 정 대표는 연일 국민의힘 때리기에 집중하며 당원으로부터 지지를 받았고, 민주당의 목표로 3대 개혁 완수를 내걸었다. 이는 비주류였던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시키기 위한 전략으로도 읽힌다. 이 대통령이 ‘사이다’ 발언으로 당권까지 올랐다면 정 대표는 각종 특위를 띄우며 거침없는 개혁가의 모습을 굳히겠다는 것이다. 정 대표는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따라 검찰개혁에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청을 폐지하는 대신 가칭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과 공소청을 신설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을 다음 달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정 대표는 지난달 21일 의원총회에서 이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만찬 회동을 언급하며 “검찰청 폐지, 공소청·중수청 설립을 담은 정부조직법을 9월 내 본회의에서 처리하자고 당과 대통령실이 입장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약속드린대로 추석 귀향길 뉴스에서 ‘검찰청은 폐지됐다’ ‘검찰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는 기쁜 소식을 국민 여러분께 전해드릴 수 있도록 당에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임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된 추미애 의원 역시 “법사위원장 선출은 검찰과 언론, 사법개혁 과제를 완수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며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위원회도 속속들이 들어섰다. 우선 민주당은 ‘국민주권 검찰정상화 특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정 대표는 출범식 및 1차 회의에 참석해 “지금의 시대적 과제는 내란 종식, 내란 척결, 이정부 성공에 있다”며 “가장 시급히 해야 할 개혁 중 개혁이 검찰개혁”이라며 “개혁도 골든타임을 놓친다면 저항이 거세져서 좌초되고 말 것이기 때문에 시기가 중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특위의 주요 과제로는 ▲수사·기소 완전 분리 ▲국민 주권 실현 및 민생 뒷받침 등을 제시했다. 새로운 구심점 이어 언론개혁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언론 보도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추석 전까지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는 언론의 허위·조작 보도에 대해 피해자에게 손해액의 최대 5배 배상을 의무화하는 법적 장치다. 언론뿐만 아니라 ‘유튜버’도 포함하는 안이 논의되는 것으로 전해진다. ‘국민중심 사법개혁특별위원회’도 출범했다. 정 대표는 “대법관의 증원과 추천 방식을 변경하는 내용의 사법개혁안을 추석 전까지 처리하겠다”고 밝혔다. 구석구석 눈도장을 찍기 위한 지역별 공략에도 나섰다. 지난 21일 호남발전특별위원회를 출범시키고 “다들 대한민국 민주화에 대해서 호남이 기여한 바가 지대하다는데, 국가는 ‘호남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답을 이제 할 때가 되지 않았나”라고 꼬집었다. 정 대표는 “호남만 발전시키면 되겠느냐”며 영남발전특위도 띄웠다. 이는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대비해 대구·경북 등의 표밭을 다지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광폭 행보를 보이는 정 대표를 구심점으로 신흥 세력이 탄생할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정 대표는 계파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고 거듭 밝혔지만, 권력자의 주변에 사람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는 해석이다. 정 대표의 편에 선 동료 의원들에게도 시선이 쏠린다. 전당대회에서 정 대표를 공식적으로 지지했거나 개혁 선봉에 함께 섰던 의원 등이다. 정 대표가 당권 도전을 선언한 국회 기자회견장에는 장경태·최기상·문정복·임오경·양문석 의원 등이 자리했다. 여의도 이야기를 종합하면, 정 대표는 ‘당원 중심 정당’ 철학에 부합하는 인사로 장 의원을 꼽았다. 현재 장 의원은 평단원 최고위원 선출 절차를 위한 특위위원장을 맡고 있다. 최민희 의원은 정 대표를 공개 지지한 인물이다. 당시 정 대표가 수박 논란에 휩싸였을 당시 최 의원은 “심하게 비난받는 정청래 후보를 지켜보면 짠하다”며 “비난에도 역비난하지 않고 여전히 유쾌·상쾌하게 선거운동하는 정 후보를 격하게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 밖에도 한민수·김영환·이성윤 의원은 경선 유세 현장에 함께하며 힘을 실어줬다. 왼쪽으로 붙는 민주당…좁아지는 공간 강성 지지층 등에 업고 개혁가의 길로 개혁가의 길을 걷는 정 대표의 존재감이 커지자 일각에서는 조기 대선을 거치며 ‘중도 보수론’으로 넓혀놨던 민주당의 정치 공간이 다시 좁아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정 대표의 강경한 태도가 민주당의 기조가 된다면 야당과의 협치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평이다. 실제 정 대표는 “악수는 사람하고만 한다”며 국민의힘을 척결 대상으로 대하고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16주기 추모식에서 정 대표는 국민의힘 송언석 비상대책위원장(이하 비대위원장)과 악수는커녕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송 비대위원장 역시 적대감을 드러내면서 그야말로 ‘국회 빙하기’ 시대가 열렸다. 여당인 민주당은 좌우를 넓게 아우르는 정당이 돼야 앞으로 다가올 선거에서 유리한 구도를 유지할 수 있다. 지금처럼 국민의힘이 보수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왼쪽은 조국혁신당, 진보당 등에 맡겨둔 채 중도 보수를 자처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당원의 힘으로 대표가 된 만큼 그는 개혁을 완수하기까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민주당 상임고문단도 “집권여당은 당원만 바라보고 정치를 해선 안 된다”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당 상임고문단 간담회에서 “정당의 주인은 당원이어야 한다는 데 공감한다”면서도 “우리 국민은 당원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문희상 전 국회의장도 “내란의 뿌리를 뽑기 위해 전광석화처럼, 폭풍처럼 몰아쳐 처리하겠다는 대목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과유불급이다. 의욕이 앞서 결과를 내는 게 지리멸렬한 것보다는 훨씬 나으나, 지나치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민주당으로 민주당 사정을 잘 아는 한 관계자는 “‘포스트 이재명’ ‘이재명 키즈’가 아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 대표가 민주당의 새로운 길을 열어야 당이 계속해서 순환하는 등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민주당의 주류는 강성 지지층이다. 당원이 당을 좌지우지하는데 그들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 목소리가 커 여론을 만드는 것”이라며 “이 주류의 흐름에 올라탄 사람이 정 대표다. 이 대통령이 대표이던 때와는 다른 모습의 민주당을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아직 남은 정 견제 세력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가 SNS에 올렸다 곧바로 삭제한 게시글이 화제다. 민주당은 지난달 19~20일 양일간 경주를 찾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준비 상황을 점검했는데 정 대표가 마치 천마총 금관을 쓰고 있는 듯한 착시 사진이 문제가 된 것이다. 정 대표가 금관을 직접 착용한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시에 왕 노릇을 한다” “벌써 왕인 것처럼 군다” 등 거친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해당 사진은 삭제됐지만 8·2 전당대회 때 불거진 박찬대 의원과의 앙금이 아직 남은 게 아니냐는 뒷말이 나온 이유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