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산물 수입 재개 막후

원전사고 일어난 후쿠시마 생선 식탁 오른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정부가 2013년 9월부터 시행된 일본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의 수산물에 대한 수입금지 조치 해제를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정부가 WTO 제소까지 운운하며 우리정부의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조치를 압박하자 한일관계 개선용 카드로 일본산 수산물 수입재개를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방사능 오염 수산물이 우리 식탁에 오를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따른 주변 8개 현의 수산물 수입금지 조치가 조만간 해제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달 15일 정부 관계자는 일본 수산물 수입 규제 해제 여부를 놓고 관계부처 간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외교부 당국자는 이날 “일본은 우리정부에 수산물 규제를 빨리 풀라고 요구하고 있다”며 “법적인 근거가 약한 조치라 우리나라 전문가가 현지실사를 하고 있다. (양국 간 이견을)좁혀나가야 한일 경제관계가 다독여질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수산물
수입재개 임박?
 
이 당국자는 “올해가 한일 복교 50주년이므로 부담되는 사항을 빨리 털자는 게 외교부의 입장”이라며 “(수산물 수입규제 관련)유관부처와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3월11일 후쿠시마 사고 당시 모든 나라가 일본 수산물 금수조치를 했지만 재작년 9월 방사능 오염수가 흘러나왔을 때 추가 수입제한 조치를 한 나라는 우라나라가 유일하다”며 “지금은 모든 나라가 조금씩 풀고 있는 형국”이라고 설명했다.
 
이 당국자는 “통상법상 수입규제의 법적근거를 제시할 의무가 수입국인 우리에게 있다”며 “지난해 12월에 했고 지금 일본에서 하고 있는 게 입증 작업이다. 조사해봤더니 과학적으로 위해성이 입증 안됐는데 계속 수입을 금지하면 아마 일본은 이 문제를 WTO(세계무역기구)로 가져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이 당국자는 “(수입 재개를)결정할 부서가 식품의약품안전처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조사를 진행 중이라서 조사결과를 받아보고 충분히 검토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며 “정부나 외교부가(수입규제를)해제하는 방향으로 검토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외교부 노광일 대변인은 이와 관련해 “우리 측 조사단이 과거에 한 번 실사현장을 가서 실사를 한 적이 있고 앞으로 그런 조치가 또 이뤄질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런 조치들을 통해 과학적인 안전성 등이 입증되면 거기에 따라 우리가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후쿠시마 주변 8개현 수입금지 해제 검토
국민건강 버리고 국교정상화 선택? 
 
앞서 정부는 2013년 9월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오염수 유출로 국민 불안이 가중되자 후쿠시마 등 8개 현에서 생산되는 모든 수산물의 수입을 금지시켰고 일본 내 다른 지역 수산물에 대한 검사도 대폭 강화했다. 하지만 이번 발표로 인해 방사능에 오염된 수산물이 우리 식탁에 오를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일본은 2007년 한 해에만 326억엔(한화 2996억원)어치의 수산물을 한국에 수출했으나 후쿠시마 사태가 발생한 이후 지난해 8월까지 85억엔(한화 781억원) 수출에 그쳤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의 규제 강화에 대해 부당하다며 WTO에 제소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아직 결정된 바는 없어 단언하기는 이르지만 우리정부가 일본에 숙이고 들어가는 건 분명해 보인다. 한국정부가 일본정부에 휘둘릴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시민단체들은 정부와 외교부에 일본 후쿠시마 주변 8개 현 수산물 수입재개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고 촉구했다. 21일 시민방사능감시센터·여성환경연대·환경운동연합 등 30여개 단체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와 외교부는 후쿠시마 주변 8개 현 수산물 수입재개 시도를 즉각 중단하라”며 나아가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재개가 아니라 일본산 모든 식품의 수입을 금지하라”고 밝혔다.
 

이날 기자회견은 앞서 외교부의 입장에 따른 조치였다. 주최 단체들은 회견 도중 수입 재개된 일본 수산물을 먹는 한 가정의 모습을 퍼포먼스로 선보이기도 했다. 식탁에 일본 수산물을 올리는 외교부 모습을 표현하면서 외교부의 방침을 비판했다.
 
시민단체들은 외교부의 어설픈 태도를 두고 “한일 국교 정상화 50년을 맞아 일본에게 주는 선물로 수산물 수입재개 조치를 하겠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국민안전을 희생삼은 굴욕적 외교”라며 “외교부는 자신들의 무능으로 망친 한일 외교를 복원하기 위해 국민건강권을 내어주는 굴욕외교를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본사람도
안 먹는데…
 
앞서 우리정부는 후쿠시마 주변 8개 현에서 수산물만 수입하지 않았지 후쿠시마현 수산물가공품과 식품첨가물은 꾸준히 수입해왔다. 2013년 한국이 수입한 후쿠시마 현 가공식품 등은 6만3244kg에 이른다.
 
시민단체들은 이에 대해서도 “우리나라는 원전사고 이후 일본산 식품에 대해 어떠한 규제조치도 하지 않다가 방사능 오염수 사태가 벌어진 이후에야 수산물 수입만 중지하고 있다”며 “이에 반해 중국, 러시아 등 주변국들은 후쿠시마 사고 이후 지금까지 우리보다 훨씬 강도 높은 수입금지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 중국은 후쿠시마 주변 10개 현에 대한 모든 식품과 사료 수입을 중단했다. 대만은 5개 현에 대한 모든 식품의 수입금지와 5개 현 외에서 수입되는 과일, 채소류, 음료수, 유제품 등을 현지에서 전수조사를 하고 있다. 러시아 또한 후쿠시마 주변 8개 현 수산물과 수산가공품 수입을 중지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오염수는 여전히 바다로 방출되고 있으며 오염수를 통제할 어떠한 해결대책도 마련되지 않고 있다”며 “일본 국민도 일본 정부 발표를 믿지 않고 후쿠시마 주변 농수산물을 먹지 않는 상황에 왜 우리나라 정부가 돈을 주고 방사능 오염 수산물을 수입해 국민들 식탁에 올리려 하느냐”고 비판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조경태 의원도 일본산 수산물 수입 재개 검토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22일 조 의원은 “일본 원전 사고 이후 주변국들은 강도 높은 수입 금지조치를 취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는 반대로 수입 재개를 시도하고 있다”며 우리 정부의 대응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했다.
 
또한 그는 “원전 사고 이후 일본산 수산물의 안정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에도 수입 재개를 검토한다는 것은 국민안전을 희생삼은 굴육적인 외교로 보일 수밖에 없다”면서 “외교상 어떠한 문제도 국민건강보다 우선될 수 없다. 정부는 국민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결정을 해야한다”고 강조했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식품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국민들의 불안이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소비자원이 지난해 9월 수도권 지역 만 20세 이상 성인 600명을 대상으로 시행한 일본 원전사고와 방사능에 대한 소비자 인식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92.6%가 ‘일본 원전사고로 인한 방사능 누출이 국내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답했다.
 
특히 ‘어패류 등의 수산물 오염’에 대한 우려가 52.9%로 전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또한 국내산 식품(72.5%)보다 일본산 수입식품(93%)의 안정성에 더 높은 불안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소비자의 76.1%는 일본 원전사고와 방사능 관련 정보가 ‘국민들에게 충분히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68.9%는 일본 원전사고에 대한 정부의 조치 및 대응 내용을 잘 모르고 있다고 답했다.
 
또한 응답자의 49.8%는 TV방송으로 방사능 관련 정보를 얻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어 인터넷(31.3%), 신문(13.0%) 등의 순이었으며, 정부부처 및 유관기관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얻는 경우는 단 1.3%에 불과했다.
 
<일요시사>는 최근 식품의약품안전처 수입식품 중 방사능 검사현황 자료를 통해 일본 각지에서 수산물이 들어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원산지는 도쿄도, 교토부, 훗카이도, 오사카부, 야마구치현, 나가사키현, 사가현, 후쿠오카현, 히로시마현, 오이타현, 아오모리현, 이바라키현, 아이치현, 니가타현, 효고현, 지바현, 도치기현, 미에현, 나라현, 오키나와현, 기후현, 이와테현, 구마모토현, 사이타마현, 가고시마현, 가나가와현, 에히메현, 오카야마현, 군마현, 돗토리현, 도치기현, 와카야마현, 시마네현, 도쿠시마현 등이다.

일본에서 수입된 수산물 종류는 활돔(벵에동), 활가리비, 냉장돔(황돔), 활장어(먹장어), 냉동눈다랑어(횟감), 냉동눈다랑어(목살), 냉장명태, 냉장홍어, 활꼬막, 활꼬막(새꼬막), 활우렁쉥이, 냉장갈치, 활게(가시투성왕게), 냉동전갱이(흑점줄전갱이, 포장횟감), 냉동다랑어(남방참다랑어), 냉동다랑어(참다랑어, 횟감), 냉동방어(포장횟감), 냉동방어(잿방어, 포장횟감), 냉동어란(연어알, 횟감, 캐비아대용), 냉동큰실말, 냉동가리비살(자숙), 냉동가리비살(외투막), 활바리(자바리), 활전복, 활방어, 활돔(강담돔), 활돔(참돔), 냉장가오리, 냉장준치, 활해삼, 냉장민어(수조기), 냉동기름치, 냉동꼬막살(새꼬막, 자숙), 냉동상어(청상아리), 냉동멸치 등이다.

문제는 후쿠시마 인근 7개현(후쿠시마·이바라키·군마·이와테·도치기·지바·아오모리)에서 수산물가공품 등 식품이 계속 수입되고 있다는 것이다. 근 한 달 동안 수입된 품목은 이렇다.

▲후쿠시마현=수산물가공품, 혼합제제 ▲아오모리현=수산물가공품, 조미건어포류, 청주, 빵류, 드레싱 ▲도치기현=카레, 복합조미식품, 곡류가공품, 유탕면류, 장류절임, 식초절임, 청국장, 발효식초, 기타식초, 리큐르(알코올음료), 청주 소스류, 캔디류(캐러멜), 카라멜색소, 글리세린지방산에스테르 ▲이바라키현=과자(쿠키·비스킷·크래커·스낵과자), 효모추출물, 초콜릿가공품, 글리세린지방산에스테르, 혼합제제, 국수, 전분가공품, 기타가공품, 열량 및 영양공급용 의료용도식품, 젖산, 기타천연착향료 ▲군마현=복합조미식품, 떡류, 소스류, 청주, 혼합제제 ▲지바현=비타민, 볶은커피, 양조간장, 소스류, 당류가공품, 청주, 알긴산나트륨, 곡류가공품, 당류가공품, 액상커피, 카페인, 청주, 혼합제제 ▲이와테현=과자(크래커), 무기질, 청주 등이다.

수산물 가공품
계속 수입했다

세슘과 요오드는 검출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일본산 수산물 등 식품이 꾸준히 수입됐음에도 검사결과가 모두 ‘불검출’로 ‘적합’ 판정을 받은 것은 의구심이 드는 부분이다. 전수조사가 아닌 샘플조사여서 어느 정도 한계는 있다.

한 대기업 영양사는 “회사에 들어오는 모든 수산물은 국산으로 표기돼 있다”며 “일본산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산 수산물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들어오고 있다.

김현 녹색당 전 사무처장은 “국민의 안전을 우선한다면 일본산 수산물 수입 전 단계서부터 규제를 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정부는 통상 외교에 더 무게를 두는 것 같다”며 우려를 나타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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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