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천외' 모뉴엘 상납수법 백태

관피아 살살 녹인 ‘황제 접대’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1조원이 넘는 매출을 올리다 지난해 돌연 법정관리를 신청한 가전업체 모뉴엘이 8억여원의 뇌물로 3조원대 사기대출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모뉴엘은 7년간 금융권 관계자들을 상대로 답뱃갑이나 비눗갑, 휴지상자 등에 뇌물을 담아 전달하는 기상천외한 신종수법을 동원해 전방위적인 금품·향응 로비를 펼쳤다. 모뉴엘의 몰락 뒤엔 관피아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지난해 파산 선고를 받은 ‘로봇 청소기’로 유명한 중견 가전업체 모뉴엘이 8억원의 뇌물을 뿌려서 무려 3조4000억원대의 사기대출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사과상자를 사용하던 과거와 달리 담뱃갑과 휴지 상자 등을 이용해 뇌물액수의 4000배가 넘는 금액을 손에 쥐었던 것이다.

진화된 로비
 
지난달 25일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제2부(부장 김범기)는 모뉴엘의 사기 대출 행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 회사 박홍석 대표(53·구속기소)가 한국무역보험공사와 한국수출입은행 등 금융권 관계자들에게 “대출과 여신 한도를 늘려 달라”는 청탁과 함께 금품을 건넨 단서를 잡고 박씨를 특경법 사기, 허위유가증권작성·행사,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위반, 뇌물공여, 배임증재 등 혐의를 적용해 추가기소했다.
 
박씨의 로비 행각은 치밀했다. 검찰 조사결과 박씨는 담뱃갑이나 비눗갑에 500만∼1000만원어치 기프트카드를 넣어 건네거나 5만원권 현금을 과자·휴지·와인 상자 등에 넣어 1회에 3000만∼5000만원씩 전달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 뿐만 아니라 로비 대상자를 모뉴엘의 협력업체에 고문으로 위장 취업시켜 임금 명목으로 금품을 제공하고, 서울 강남의 유흥주점에서 하룻밤 접대비로 1200만원을 사용하기도 했다. 모뉴엘이 이런 식으로 뿌린 로비자금만 모두 8억600만원이다. 무역보험공사, 수출입은행 등의 로비 대상자 중에는 자신의 자녀를 모뉴엘에 취업시키거나 유흥주점에서 술을 마신 뒤 모뉴엘 측에 술값을 대납시킨 경우도 있었다. 관피아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러한 전방위적 로비 덕분에 모뉴엘의 무역보험 한도액은 2011년 950억여원에서 2013년 300억여원으로 늘었다. 수출입은행의 여신 한도액 역시 2011년 40억원에서 지난해 1131억원으로 30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해외수입자로부터의 수출대금 회수를 수출입은행이 책임지는 금융상품인 수출팩토링으로 2013년 419억원, 2014년 840억원을 더 지원받았다. 앞서 검찰은 지난해 11월 박 대표와 모뉴엘 임원들을 관세법 및 외국환거래법 위반, 국외재산 도피 등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담뱃갑에 기프트카드, 휴지상자엔 현금 가득
하룻밤 술값 1200만원…자녀 유흥비 대납도
 
이로써 모뉴엘의 대표 박씨를 포함해 부사장 신모(50·구속기소)씨, 재무이사 강모(43·구속기소)씨, 조계륭 전 무역보험공사 사장(60), 수출입은행 비서실장 서모(54)씨 등 한국무역보험공사 전·현직 임직원과 한국수출입은행과 서울 역삼세무서, KT 자회사인 KT ENS 간부까지 포함해 모두 13명이 재판에 넘겨졌다. 미국으로 달아난 무역보험공사 전 영업총괄부장 정모(48)씨는 기소중지하고 범죄인인도청구 절차를 준비 중이다. 그는 모뉴엘 법정관리 신청 직전 사표를 내고 국외로 도피했다.
 
검찰 관계자는 “국책 금융기관 일부 임직원의 심각한 도덕적 해이로 인해 제도의 근본 취지가 심각하게 훼손됐다”며 “관계기관의 제도 개선에 협력하고 유사한 무역금융 비리를 엄단할 것”이라고 말했다.
 
모뉴엘의 파산으로 상환이 불가능해진 5500억원은 결국 국책 금융기관을 포함한 은행들이 고스란히 떠안게 됐다. 이 가운데 한국무역보험공사의 보험·보증액은 3428억원이다. 이 돈은 주로 M&A 자금이나 회사 운영비, 연구개발비, 제주사옥 건축비, 커미션, 직원 월급 등에 사용된 것으로 검찰 조사결과 확인됐다. 한국무역보험공사는 이에 반발하며 소송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이다. 모뉴엘 사기대출 사건 관련 시중은행이 청구한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부 은행은 법적 대응은 물론 앞으로 한국무역보험공사 보증서 대출 자체를 거부할 움직임까지 보이고 있어 애꿎은 중소기업들의 피해가 우려된다.
 

박 대표 등은 2007년 10월부터 지난해 9월까지 저가의 홈시어터 컴퓨터(HTPC) 가격을 부풀려 작성한 허위 수출채권을 꾸미고 허위 수출로 발생한 수출대금 채권을 금융기관에 판매하는 수법 등으로 시중은행 10곳에서 3조4000억원을 불법 대출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들의 수법은 이른바 ‘회전 거래’로 빚으로 빚을 막는 ‘카드 돌려막기’와 동일했다. 박 대표는 수출대금 채권의 상환기일이 다가오면 또 다른 허위 수출을 꾸며 대출받은 돈을 해외 페이퍼컴퍼니(유령회사)를 거쳐 수입업자에게 송금, 대금을 결제하도록 했다.

몰락한 벤처
 
이 과정에서 은행에서 대출 실사를 나오면 실제 제품을 만드는 것처럼 꾸미는 치밀함도 보였다. 2008년부터 6년여간 허위 수출입거래를 매출과 순이익에 포함시켜 2조7000억원 상당을 부풀려 회계분식을 한 사실도 드러났다.
 
모뉴엘은 로봇청소기와 홈시어터 컴퓨터(HTPC) 등으로 급성장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가 2007년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기조연설에서 주목할 회사로 지목해 지명도를 높인 바 있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모뉴엘 사기’ 850억 지킨 은행원 스토리
 
우리은행은 모뉴엘에 850억원을 대출해줬다 회수 결정을 내려 손해를 피해갔다. 대출 회수 결정을 내린 담당자는 기술금융팀 계약직 직원 강윤흠 차장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고 있다. 강 차장은 지난달 28일 <한수진의 SBS전망대>에 출연, “우리은행은 당시 모뉴엘의 주거래 은행이었고, 모뉴엘은 이자도 꼬박꼬박 내는 등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모뉴엘의 재무재표상 의심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주위에서 모뉴엘 제품을 샀다거나 좋은 평가를 준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 미국에서 주로 판매를 하고 있다는 게 그 이유였는데, 미국의 쇼핑몰들을 다 돌아봤지만 모뉴엘 제품을 구하기 어려웠다. 거기서 의심스러웠던 부분이 더욱 커졌다”고 모뉴엘 뒷조사 배경을 밝혔다.
 
이어 강 차장은 “모뉴엘의 구조가 홍콩을 통한 제 3국 수출구조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뉴엘이 가지고 있는 수출 신용증은 대부분 홍콩에서 받은 거였다. 거기엔 최종고객이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기존의 은행 거래상에서는 신용성이 있기 때문에 거래가 됐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최종고객의 실체가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해외 최종 고객과 크로스 체크가 되어야 하는데 그 부분이 안됐고, 대출금 회수를 결정했다”고 덧붙였다.
 
회사의 손해를 막은 강 차장은 이후 포상금 300만원과 함께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았다. 매년 재계약을 하며 눈치를 보던 마흔 둘 ‘미생’에서 ‘완생’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게 된 것이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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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