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는 게 없는’ 무한 렌탈시대 천태만상

명품부터 애인까지 “빌려드립니다”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보통 렌탈이라고 하면 승용차나 정수기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대여상품은 날이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명품 핸드백, PC, 노트북, 휴대폰, TV, 악기, 가구, CCTV, 보청기, 비데, 제습기, 공기청정기, 침대 매트리스, 전자레인지, 음식물처리기 등. 교환 주기가 짧은 소비자들의 비용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내고 있다는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물건뿐만이 아니다. 애인대행 서비스도 여전하다. 바야흐로 못 빌리는 게 없는 세상이다.

 
국내 렌탈 시장이 새로운 소비문화로 정착하고 있다. 세대가릴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렌탈서비스를 통해 적은 비용으로 다양한 소비를 경험하고 있다. 생활의 여유를 즐기고자 하는 소비문화가 퍼지면서 렌탈 시장은 지금 빠르게 급증하고 있다. 

점점 얇아지는
주머니 사정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대학생 이모(23)씨는 주로 학교에 있는 데스크탑을 사용한다. 평소 큰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지만 가끔은 노트북이 생각난다. 카페에서 과제를 하거나 멀리 이동할 시에 그렇다. 그래서 노트북 시세를 알아보던 중 ‘노트북 렌탈’ 서비스를 알게 됐다. 1박2일 기준으로 1만원 미만, 한 학기 기준으로 대여하는 것도 가능했다. 이씨는 일단 급한대로 1박2일 동안 노트북을 렌탈했다.
 
3년만 지나도 성능이 떨어져 구형이 되는 시대인지라, 이씨는 단기적으로 필요할 때마다 최신용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는 노트북 렌탈서비스에 만족했다. 노트북 안에는 최신 영화, 음악, 게임 등 콘텐츠도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이씨는 이렇게 노트북을 빌려서 사용하는 게 오히려 더 합리적이라고 판단, 이후에도 이따끔씩 노트북 렌탈서비스를 이용했다.
 

직장인 차모(34)씨는 캠핑시즌 때마다 텐트 등 캠핑용품을 렌탈한다. 캠핑용품을 전부 구입해봤자 1년에 쓰는 건 단 몇 번 뿐이고, 크기도 크고 종류도 많아 보관하는 데 애를 먹겠다는 판단이 들어서다. 사서 안 쓰고 묵혀두는 것보다 빌리는 게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해 여름, 가을에 렌탈 전문 사이트를 통해 각종 캠핑용품을 빌렸다.
 
차씨는 캠핑 전 텐트, 캠핑매트, 파라솔, 바비큐 그릴, 불판, 침낭, 접이식 테이블 및 의자, 아이스박스, 캠핑용 랜턴 등을 빌렸다. 전부 상태가 A급이라서 만족스러웠다. 차씨는 캠핑용품 외에도 가족과 즉석으로 사진을 남길 수 있는 폴라로이드까지 빌렸다. 
 
렌탈 전문 업체의 렌탈제품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컴퓨터(노트북, 넷붓, 데스크탑, 복사기, 프린터, 기타주변기기), 디지털 캠코더/카메라(HD화질 메모리 캠코더, 수중방수 캠코더, DSLR카메라, DSLR렌즈, 디지털카메라, 수중방수 카메라, 즉석카메라), 네비게이션(7인치·4인치), 영상기기(PDP TV, 프로젝터, DVD 플레이어), 멀티미디어(PMP, 닌텐도/PSP 등 게임기·전자사전), 가전/주방/업소/생활(정수기, 비데/연수기, 공기청정기, 청소기, 안마기, 유아용품, 명품가방), 스포츠레저(텐트, 취사용품, 사이클/카이클론, 런닝, 천막/캐노피, 무선모형, 기타 제품) 등이 있다.
 
 
렌탈 방법은 간단하다. 우선 렌탈 전문 업체의 사이트에 가입한 뒤 원하는 상품을 고르고 렌탈 시작일로 지정을 원하는 날짜를 선택하고 렌탈 일수를 조정한다. 대여시작일은 상품을 택배로 수령하거나 직접 방문 수령하는 날짜다. 렌탈 기간을 지정한 후 신청 버튼을 누르면 된다. 반납은 택배로 이루어진다. 렌탈 일수를 조정하는 것 외에는 일반 쇼핑몰 이용 방법과 큰 차이가 없다.

새로운 소비문화
소유 대신 대여
 
다소 낯선 렌탈 상품도 있는데, 바로 명품백이다. 경기침체에도 명품 소비는 불황을 모른다. 그렇다고 모두가 새 제품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온 게 명품백 렌탈서비스다. 명품백을 갖고 있는 소비자가 자신의 명품백을 렌탈 업체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이다. 렌탈 요청이 들어오면 업체는 명품백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한다. 렌탈료는 5만원 선으로, 1주일 동안 사용할 수 있다. 물론 명품백을 제공하는 사람에겐 일정 부분 수익을 공유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명품이라는 희소가치를 누구나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반 소비자 외에도 행사를 주관하는 이들을 위한 렌탈서비스도 있어 눈길을 끈다. 행사용 테이블, 의자, 엠프 등 각종 음향장비, 간이화장실, 전시용 진열대, 테이블, 벤치 의자도 렌탈이 가능하다. 우리가 참석하는 행사장에 있는 용품 중 일부는 렌탈 제품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온라인으로 장난감을 대여하는 렌탈서비스도 눈길을 끈다. 이 렌탈서비스는 장난감 비용을 줄이고, 장난감 소비 방법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해 마련됐다. 소비자는 합리적인 가격에 장난감을 대여할 수 있고, 아이들도 더 많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있다.
 
비싼 가전·가구 대여 유행
목돈 부담에 웬만하면 빌려
 
대여 방법은 해당 업체 홈페이지에서 원하는 장난감을 위시리스트에 담고, 추후 배송된 장난감을 재미있게 갖고 논 후 반납하면 된다. 배송 후에는 초음파 세척기 및 자외선 살균 건조기를 이용해 위생관리된다. 이용 금액은 월정액 회원제로 운영된다. 현재 키마, 닌자고, 프렌즈, 스타워즈, 시티, 크리에이터, 디즈니, 레고 무비 등의 레고 시리즈를 대여하고 있다. 아이를 가진 부모라면 한 번쯤 느꼈던 문제, 이제는 대여로 해결이 가능해졌다. 이외에도 휴대폰, TV, 악기, CCTV, 보청기, 음식물처리기 등 다양한 제품이 렌탈 상품으로 올라오면서 소비자들의 호평을 받고 있다.
 
 
대행서비스도 렌탈서비스의 한 축이라고 볼 수 있다. 애인, 부모, 결혼식 하객 등의 역할을 대신 해주는 건전대행도 꾸준히 주목을 받고 있다. 함께 밥을 먹고 쇼핑하고 영화도 보는 애인대행을 비롯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부모대행, 결혼식 하객이 없어 걱정인 신랑, 신부를 위한 하객대행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역할대행과 같은 서비스가 성행하는 원인으로는 온라인을 통한 인간관계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대면접촉을 피하게 되면서 사회적 관계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점차 개인주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퇴폐적인 이미지로 연결되는 등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한다. 지난해 한 온라인 커뮤니티와 SNS로 건전대행 소식이 전해졌다. 당시 건전대행을 제안한 게시자에 따르면 한 시간을 기준으로 같이 걷는 것은 3만원, 장보기는 4만원, 밥 먹기는 5만원이다. 같이 걸을 경우 사람이 없는 곳은 1만5000원의 추가 요금이 발생하며, 장을 볼 때 짐이 많으면 1만원을 더 받는다. 밥을 먹을 때는 무엇을 먹든 상관없이 무조건 5만원이며 옷에 음식 밴 냄새 때문에 세탁비 2만원이 추가된다. 드라이브는 4만원이며 원거리로 나갈 경우 추가 할증료 2만원이 붙는다.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 차와 쿠키 혹은 케이크 비용을 부담해야 하며 이와 별도로 요금은 4만원이다. 게시자는 본인을 ‘167cm 48kg’라고 소개한 뒤 지적이고 세련된 스타일이라고 어필했다. 씁쓸한 세태를 비꼬았다고 볼 수도 있다.

갈수록 커지는
유료 대여시장
 
KT경제경영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2011년 8조5000억원에 달하던 개인 및 가구용품 렌탈 시장이 2016년 11조4000억원으로 34% 늘었다. 5000만 인구 모두가 1인당 20만원 이상의 물건을 빌려 쓸 때 나오는 수치다. KT경제경영연구소는 렌탈 시장이 오는 2016년에 25조9000억원까지 팽창할 것으로 내다봤다.
 
국내 렌탈시장은 1970년대 건설시장과 기업시장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렌탈이 합리적인 소비 대안으로 떠올랐고,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렌탈 시장이 부흥을 이끈 일등공신은 경기침체라 할 수 있다. 불경기에는 적은 돈으로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는 렌탈이 호황을 이룬다. 물건은 사야 하는데 목돈은 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소비자들은 눈이 높아진 상황인데, 경기는 좋지 않다. 즉 필요한 물건은 많아졌지만 경제적 여유가 없어 렌탈 시장으로 눈길을 돌리는 것이다.
 
 

렌탈 업체 수도 2만5000여개에 달할 정도로 성업 중이다. 생활가전 등 기존에 자리를 잡은 업종부터 시작해 다소 생소한 명품이나 그림 등 의외의 품목도 렌탈 제품으로 등록돼 있다. 렌탈 관련업에 종사자는 15만명이다. 전문가들은 하루가 다르게 출시되는 신제품의 등장과 함께 1인 가구가 늘어나는 현상이 렌탈 시장을 견인하고 있다고 말한다.
 
사람도 물건도 ‘입금만 하면 OK’
불경기 합리적인 대안으로 떠올라
 
렌탈 시장을 기업이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리 없다. 이미 여러 기업이 다양한 렌탈 물품을 공급하고 있다. 정수기, 가습기, 제습기 등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한 생활가전용품은 이미 렌탈 시장의 트렌디셀러로 여겨지며, 여기에 사용기간이 짧은 육아용품, 안마 의자처럼 구매단가가 높은 의료 건강 장비, 하루가 다르게 최신형이 출시되는 카메라 같은 IT기기, 분기에 한 번 쓰면 많이 쓰는 캠핑용품 등. 소비자가 원하는 물건은 대부분 빌릴 수 있는 환경이다.
 
과거에는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목돈을 들이더라도 소유하려고 하는 경향이 짙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마주칠 경우에만 물건을 빌렸다. 그러나 최근에는 렌탈을 대하는 분위기가 다르다. 못 사서 빌리는 것이 아니라 렌탈 자체가 새로운 소비 방식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특히 요즘에는 렌탈 대여 기간 동안 업체로부터 관리도 받을 수도 있어, 렌탈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변하고 있다.
 
렌탈 시장은 경기침체와, 렌달에 대한 소비자 인식변화, 렌탈 기업의 다양화라는 세 가지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서 급성장하고 있다. 그만큼 시장은 소비자들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렌탈을 원하는 소비자들이 가장 불편해 하는 것 중 하나는 서비스를 비교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를 빌리더라도 업체마다 일일이 연락을 취해서 확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온 것이 ‘렌탈 전문 오픈 마켓’이다. 온라인은 물론 앱을 통해 모바일에서도 렌탈서비스를 비교할 수 있어 호평을 받고 있다. 렌탈 전문 오픈 마켓에서는 생활가전용품, 육아용품, 의료 건강 장비, IT기기, 캠핑 용품 등 다양한 업체들의 렌탈 품목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어 소비자들의 합리적인 선택을 돕고 있다. 여기에 ‘재능(전문MC, 출장 카메라맨, 초대 가수 등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까지 빌려준다는 콘셉트가 등장에 눈길을 끌고 있다.  이처럼 렌탈서비스는 어느덧 새로운 소비문화로 자리 잡았다. 이 시장의 진화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반짝 유행’
일각서 우려도
 
지난달 한국렌탈협회에 따르면 국내 렌탈서비스 시장규모는 2004년 1조원에서 2013년 약 10조2000억원으로 10배넘게 늘었다. 이는 피부관리, 헬스, 성형 등 국내 뷰티산업이나 게임시장, 배달음식 시장과 대등한 규모다. 각 업체별로 매년 15∼30% 가량 매출이 늘고 있다.
 
반면 한국소비자원의 자료를 보면 ‘소유권 이전형 렌탈’ 관련 소비자상담은 2011년 7447건에서 2012년 6988건으로 소폭 줄다가 지난해 8558건으로 다시 늘고 있다. 소유권 이전형 렌탈은 일정 기간 렌탈료를 지불하고 계약 종료 후에 제품 소유권이 소비자에게 이전되는 렌탈 방식이다.
 
소비자 상담 가운데 계약 해지 관련 불만 비중이 37%로 가장 높았고 이어 품질 및 사후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21%로 뒤를 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렌탈 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관리와 서비스 인력을 갖춰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이 부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반짝 성공에 그칠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혼수도 렌탈, 뭐가 되나?
 
최근 예식장과 ‘스드메(스튜디오·드레스·메이크업)’ 비용이 상대적으로 비싸지는 봄, 가을 성수기 대신, 비용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겨울과 여름 비성수기 시장으로 예비부부들이 몰리고 있다. 혼수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결혼 초기 비용을 줄이기 위해 가전·가구 등 혼수를 소유하는 대신 렌탈서비스를 이용해 실속을 챙기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비용절감이 중요하다고 해서 예쁘고 아기자기한 신혼살림을 포기하는 건 아니다. 젊은 층일수록 유행에 민감하고 기능과 디자인에 대한 안목이 높다. 그래서 나온 것이 ‘혼수 렌탈 패키지’다.
 
가전제품 렌탈 전문 업체 관계자는 “상대적으로 이사가 잦고 제품 교환 주기가 짧은 신혼부부들을 비롯해 다양한 소비자들의 비용부담을 획기적으로 덜어냈다”고 설명했다. 한국렌탈협회에 따르면 혼수용품을 다루는 생활가전 렌탈 업체는 1100개에 달한다고 한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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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계엄 1년’ 여전히 요동치는 정치판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27분,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가 최고 통수권자의 선택은 정치권을 넘어 대한민국 전역을 강타했다. 내란의 밤이 지나고 탄핵의 강을 건너 마침내 대선 정국까지 넘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여의도 곳곳에 계엄의 여파가 남아 있다. 그날 오후 10시 무렵 윤석열 전 대통령이 예산안 관련 긴급 발표를 진행할 예정이라는 정보지가 돌았다. 얼마 뒤 정장 복장으로 대통령실 브리핑룸 카메라 앞에 나타난 윤 전 대통령은 다소 격양된 어투로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스스로 걸어간 자멸의 길 민주당이 주요 예산을 전액 삭감해 국가 기능을 훼손하고 대한민국을 공황 상태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더니 돌연 야당을 반국가 세력으로 몰아세웠다. 윤 전 대통령은 “북한 공산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자유 대한민국을 수호하고 우리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약탈하고 있는 파렴치한 종북 반국가 세력을 일거에 척결하고 자유 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비상계엄을 선포한다”고 밝혔다. 1979년 이후 45년 만에 내려진 비상계엄이었다.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봉쇄됐고 헬기를 타고 도착한 무장 군인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국회 밖에서는 시민이, 안에서는 야당 보좌진들이 군인과 대치하면서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이어졌다. 먼저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가 입장을 냈다. 한 전 대표는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는 잘못된 것”이라며 “국민과 함께 막겠다”고 밝혔다. 이후 한 전 대표는 탄핵을 찬성한다는 의미의 ‘찬탄파’로 찍혀 친윤(친 윤석열)계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민주당 당시 이재명 대표는 실시간 방송을 통해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며 민주주의의 마지막 보루인 국회를 지키기 위해 신속히 국회로 와달라는 말을 남겼다. 내란 사태가 지나고 난 뒤 이 대통령은 이날을 회상하며 “이 상황을 최대한 빨리 많은 시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실시간 방송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뒤이어 국민의힘 추경호 전 원내대표가 비상 의총을 소집했다. 추 전 원내대표는 국회 예결위 회의장으로 의총을 소집했다가 10분 뒤 장소를 여의도 당사로 옮겼다. 그리고 약 20분 뒤 다시 국회 예결위장으로 바꿨다. 이는 현재 추 전 원내대표가 받는 ‘비상계엄 해제 표결 방해 의혹’과 연결된다. 다음 날 새벽인 4일 오전 1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국회에 상정됐다. 국회경비대가 국회 출입을 통제하자 담을 넘어서 국회로 진입한 우원식 국회의장은 결의안 상정에 앞서 “(윤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하면 국회에 지체 없이 통보해야 한다는 의무조항이 있으나 통보가 없었고, 이는 대통령의 귀책사유”라며 “우리는 그와 관계없이 (비상계엄 해제 의결을 위한) 절차를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결의안은 여야 의원 190명이 참석한 가운데 190명 전원이 찬성해 가결됐다. 국회 본청에 투입됐던 계엄군은 철수했고 이로써 윤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약 세 시간 만에 무효가 됐다. 비상계엄의 끝은 탄핵 정국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민주당을 비롯한 ▲조국혁신당 ▲개혁신당 ▲진보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 등 야6당은 계엄이 해제된 당일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들은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내란’으로 규정하고 “하야하지 않으면 탄핵소추를 진행할 것”이라고 압박했다. 국민의힘은 탄핵 반대를 당론으로 추인했다.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과정을 겪으며 당이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점 등을 의식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렸다. 대통령에서 내란수괴 피의자로 썩은줄 알면서도 못 놓는 윤 동아줄 이날을 기점으로 국민의힘에서는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 탄핵을 반대하는 ‘반탄파’의 친윤계와 찬탄파 친한(친 한동훈)계로 당원들이 갈라서면서 내부 총질이 시작된 것이다. 당초 한 전 대표 역시 탄핵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비상계엄 당시 자신을 포함한 주요 정치인을 체포하려고 한 정황이 드러나면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두 계파의 갈등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나흘 뒤인 7일,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정족수 미달로 국회에서 부결돼 자동 폐기됐다. 재적 의원 300명 중 195명이 참석한 가운데 탄핵이 상정됐지만 국민의힘 의원 대다수가 불참하면서 투표가 불성립된 것이다. 이날 표결에 참여한 국민의힘 의원은 김예지, 김상욱, 안철수 의원뿐이었다. 민주당 박찬대 의원은 표결에 참여하지 않은 의원 105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본회의장으로 와줄 것을 요구했다. 두 번째 탄핵소추안은 일주일 뒤인 14일 국회에 상정됐다. 당시 국민의힘은 “표결 참석을 제안한다”면서도 탄핵 반대 당론을 유지했다. 결국 300명 가운데 ▲찬성 204표 ▲반대 85표 ▲기권 3표 ▲무표 8표로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11일 만에 윤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공은 헌법재판소(이하 헌재)로 넘어갔고 긴 진통 끝에 지난 4월4일 헌법재판관의 만장일치로 윤 전 대통령이 파면됐다. 현직 대통령의 파면에 따라 조기 대선이 치러졌고 민주당에서는 이변 없이 이재명 대표가 대선주자로 나섰다. 국민의힘에서는 여전히 찬탄파와 반탄파가 대립했고 어느 날 늦은 밤을 틈타 ‘대선후보 날치기’를 시도하는 등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민주당은 ‘내란 세력 청산’을 앞세웠다. 이 후보는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비상 경제 대응 태스크포스(TF) 구성을 약속하는 등 경제 성장을 강조하면서도 “내란 세력의 죄는 단호하게 벌하겠다”고 강조했다. 민주당 역시 “이번 선거는 내란 정권에 대한 준엄한 심판”임을 강조하며 윤 전 대통령과 국민의힘 심판론을 부각시켰다. 두 번의 선거 강경파만 남았다 6·3 조기 대선 투표 결과 이재명 후보가 49.42%를 득표하면서 21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는 41.15%로 이 후보가 8.27%p 차이로 앞섰다. 계엄 극복과 내란 청산을 외친 민주당이 국민의 선택을 받은 것이다. 국민의힘이 윤 전 대통령과 완전히 절연하지 못한 점 또한 보수가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원인으로 꼽힌다. 탄핵 정국 당시 앞장서서 윤 전 대통령을 엄호한 국민의힘 윤상현 의원은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 불참’에 따른 역풍을 우려하던 당 의원에게 자신이 박 전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서 반대한 점을 언급하며 “나는 끝까지 갔다. 그때 욕 많이 먹었다. 그런데 1년 후에는 ‘윤상현 의리 있어 좋아’(라고 하면서) 무소속으로 나와도 다 찍어줬다”고 말했다. 김문수 후보 역시 대선 투표 직전까지 윤 전 대통령에게 단호히 탈당을 요구하지 못했다. 김 후보는 “대통령 탈당(여부)은 본인 뜻”이라며 “자기가(국민의힘이) 뽑은 대통령을 탈당시키는 방식으로 책임이 면책될 수 없고, 도리도 아니”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은 대선에서 패배했지만 아직도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친윤계를 비롯한 중진 의원의 지역구가 보수의 심장인 TK(대구·경북)임을 고려했을 때, 윤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것은 핵심 지지층을 놓는 것과 같다는 우려에서다. 지난 8월 국민의힘 전당대회서도 반탄파인 장동혁 후보가 김문수 당 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장 후보는 탄핵 정국 당시 극우 색채가 짙은 탄핵 반대 집회를 찾아가 강성 지지층에게 표심을 구애하는가 하면 찬탄파들을 향해 “내부 총질 세력과는 같이 갈 수 없다”는 발언도 서슴치 않았다. 당선 직후에는 “우파 시민들과 연대해 이재명정부를 끌어내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며 강경 노선을 예고하기도 했다. 그의 말처럼 장 대표는 지난 9월 장외투쟁을 통해 이정부와 본격적으로 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국민의힘이 장외투쟁에 나선 것은 ‘조국 사태’ 이후 6년 만이다. 당 지도부는 대구를 시작으로 전역을 돌며 여론전을 통해 반격에 나설 기회를 보고 있다. 민주당은 “내란 옹호 대선 불복 세력의 장외‘투정’”이라고 비꽜다. 마찬가지로 지난 8월 강성 지지층의 지지를 받아 대표로 당선된 정청래 대표는 “윤어게인 내란 잔당의 역사 반동을 국민과 함께 청산하겠다”며 국민의힘 청산을 강조했다. 강경파인 정 대표와 장 대표가 당권을 잡으면서 국회는 점차 극한으로 치달았다. 정면충돌 치킨 게임 계엄 1년을 앞두고는 민주당의 ‘내란 세력 척결’에 국민의힘이 ‘내란 팔이’라고 맞불을 놓는 지경에 이르렀다. 국민의힘 강경파 의원들의 입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고, 민주당은 그때마다 계엄 카드를 꺼내며 “내란 옹호 세력과 협치할 수 없다”고 반격했다. 내란 팔이라는 단어는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의 메시지로 시작됐다. 나 의원은 자신의 SNS를 통해 “특검 연장은 오로지 내란 정국을 연장하려는 민주당의 정략일 뿐”이라며 “내란팔이 없이는 국민의 마음을 얻을 자신도, 국정을 책임질 정책 능력도 없으니 이 지경”이라고 몰아세웠다. 민주당 주도로 ‘더 센 특검법’이 통과하자 이를 지적한 것이다. 나 의원은 “에라잇, 맨날 내란, 내란하다 보면 국민들도 결국 지쳐버릴 것”이라며 “소위 내란 약발도 곧 떨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계엄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사과나 해명도 없이 여전히 민주당 뒷다리만 잡는 게 국민의힘”이라며 “내란팔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동안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를 돌아보시라. 윤 전 대통령을 면회하기 위해 구치소로 뛰어간 것이며 극우 집회에서 마이크를 든 것까지, 사과의 기미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벌써부터 ‘지겹다’는 경솔한 표현은 국민께 비판받을 일”이라고 지적했다. 오는 3일 계엄 1년 메시지를 통해 양당의 향배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민주당은 정당해산 심판을 꺼내든 반면, 국민의힘은 메시지 톤을 놓고 여전히 갈팡질팡하면서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지난달 26일 “내일(27일) 국회 본회의에서 추경호 전 원내대표 체포동의안 표결이 이뤄진다. 추 전 원내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불법 계엄 당시 의원총회(이하 의총) 장소를 여러번 변경하며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을 의도적으로 방해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 창문을 깨고 진입하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 의총 장소를 국회 밖으로 공지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처사”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고 적극적인 계엄 해제 방해로밖에 볼 수 없는, 충분히 의심되는 상황”이라며 거듭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강경파만 살아남은 포스트 탄핵 여의도 계엄 1년 메시지, 여야 모두 주목 국민의힘 내에서는 메시지의 세기를 놓고 충돌 조짐이 보인다. 강성 지지층을 의식한 지도부는 강경 메시지를 주장한 반면, 원내지도부를 비롯한 일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서는 사과를 포함한 톤다운된 메시지를 요구하는 등 온도 차가 생긴 것이다. 초선인 국민의힘 김용태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지난해 극한 여야 대립 속에 다수 야당(민주당)의 입법 전횡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계엄으로 군대를 동원해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건 국가 발전이나 국민통합, 보수 정치에 있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불법적이고 무모하고 과격한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간 1년 동안 국민의힘이 비상계엄을 어떻게 생각해 왔는지 등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그것이 규명되면 사과와 반성은 당연한 일”이라며 “단순히 사과와 반성으로만 끝나서도 안 된다. 앞으로 국민의힘이 어떻게 바뀔 것인지에 대한 메시지까지 내놔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상계엄이 지난 특수성을 감안하더라도 현재 여야가 보이는 양상은 박 전 대통령 탄핵 이후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탄핵 이후 조기 대선에서 당선된 문재인 전 대통령은 해결 과제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고, 이 대통령은 ‘내란 청산’을 주장했다. 사면초가인 국민의힘 상황 역시 10년 전 탄핵 후폭풍을 직면하고 분열한 새누리당과 닮아있다. 이듬해 6월 지방선거가 예정된 점까지, 지금의 여야가 과거를 그대로 답습할지 이목이 쏠린다. 당시 새누리당은 자유한국당으로 간판까지 교체했지만 2018년 지방선거에 참패하면서 국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국민에게 사죄했다. 지금 국민의힘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내년 지방선거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란 해석이 나오는 이유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힘 김재원 최고위원은 CBS 라디오에서 ‘중도층 등 외연 확장을 위해 계엄에 대한 사과가 필요하지 않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투표율을 55%에서 60% 정도로 봤을 때 중도층은 투표를 하지 않는 계층일 경우가 많다. 오히려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투표한다”고 분석했다. 김 최고위원은 “정치 고관여층보다는 정치 무관심층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건가. 보수는 아직도 분열돼있고 내부 싸움도 있는 상황에서 지금 당장 이동해 갔을 때 벌어질 손실도 굉장히 클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발언은 선거에 직면하면 중도층 포섭을 위한 전략을 세워야 하지만, 아직 당이 불안정한 만큼 중심이 되는 지지층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0년 전 데자뷔? 비상계엄 사과 메시지에 대해서는 “우리가 배출한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 우리 숙명인데 그분들이 탈당했다고 해서 벗어나 지겠느냐”며 “자꾸 절연, 절연하는데 인연이 끊기겠느냐. 없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일회성 사과로 과거 잘못을 끊어내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며 “역사적 공과를 안고 가면서 우리가 어떤 정치를 할 것인가를 보다 고민하는 그런 모습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쉽게 사과하고 끝날 문제가 아니”라며 “사과하는 모습보다는 우리가 앞으로 이런 정치를 해나가고 국민에게 믿음을 드리겠다는 것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