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기…협객 자처한 그들
이성순(시라소니), 김두한(잇뽕), 고희경(구마적), 엄동욱(신마적) 등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폭력배들은 협객을 자처했다. 일제시대 활동한 주먹들은 식민시대의 설움과 울분을 가슴에 품었다. 또 의리와 명분을 목숨보다 중요시했다. 칼, 쇠파이프 등 각종 흉기가 난무하거나 뒤에서 공격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고 주먹 대 주먹 대결을 통해 승부를 냈다.
1기는 크게 조선 주먹과 일본 주먹으로 나뉘는데 조선 주먹들은 이제 갓 걸음마를 걷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조직은 미미했고 이권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일본 야쿠자들은 일본도로 중무장한데다 고급술집 등 자금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주먹의 보스는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하야시. 하야시는 평안도 출신으로 본명은 선우영빈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2기…정치 깡패 출현
해방공간에서 조폭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혼란의 시기에는 폭력배들의 힘이 막강해진다는 법칙이 맞아떨어진 것이다.
깡패들은 좌우익 대립 속에 정치와 밀착하기 시작했다. 장충동 정치테러 사건을 비롯해 4·19를 촉발시켰던 고대생습격사건 등 이 시기의 주먹들은 정치인들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김두한이 대한민청 감찰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일선에 뛰어들자 주먹세계의 판도는 급격히 변했다.
명동과 동대문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주먹계의 두 축을 형성했다.
명동은 만주와 이북에서 활동했던 주먹들, 이성순(시라소니), 이화룡 등이 포함돼 있었고 동대문에는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이승만은 깡패들을 잡아넣게 되고 이 와중에 명동은 완전히 무너졌고 동대문만 살아남게 됐다. 동대문사단이 ‘권력의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한 것이다.
제3기…‘회칼’ 등장
군사정권은 초기 부정부패 해소, 구악일소를 내세워 주먹을 탄압했다. 그러나 경제개발이 진행되면서 지방의 주먹패들이 상경해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1975년 명동의 사보이 호텔에서는 주먹계의 판도를 바꾸는 사건이 벌어진다. 서울 중심가를 장악했던 신상사파와 주먹계의 원로들이 모여 신년모임을 가지던 중 조양은이 이끄는 전라도파(후 양은이파)가 습격한 뒤 새로운 세력으로 성장한다. 또 광주에서 올라온 김태촌의 서방파도 상경, 주먹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이로서 양은이파와 서방파, OB파 등 호남 3대파가 서울의 주먹세계를 분할 점령하게 됐다. 부산지역에서는 일본 야쿠자 조직과 최초로 손을 잡은 국제적인 폭력조직 칠성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시기는 회칼, 일본도, 쇠파이프 등 갖가지 무기들이 등장하게 되고 기습적인 공격이 싸움에 난무했다. 비열한 조폭이란 말은 이때부터 등장했다.
제4기…몇 명만 모이면 조폭
새로운 시기에 맞춰 젊은 세대들이 조폭으로 탄생했다. 소규모로 구성된 군소 조폭들이 대도시 유흥가를 중심으로 이권다툼을 벌이며 세를 확장시켰다. 이에 따라 신흥조직의 수도 날로 증가했다. 전국적으로 조직의 수는 400여개에 조직원은 1만2000여 명이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된 것.
조직원의 나이도 점차 어려졌다. 심지어 10대들을 예비 조폭으로 뽑아 교육을 시키는 조직도 생겼다. 이들은 마치 신입사원을 뽑듯 각종 스펙을 따져 조직원을 뽑고 수습사원교육을 방불케 하는 교육으로 입맛에 맞는 조직원을 양성한다.
하지만 돈을 버는 수단은 날로 치졸해지고 있다. 명예보다는 돈이 우선인 탓이다. 속칭 양아치나 깡패들의 수입원에도 개의치 않고 기웃거리고 있다. 성매매 알선, 자해공갈, 주부도박단 운영 등 조폭들이 손대기엔 낯 뜨거운 짓도 서슴지 않는다.
이처럼 조폭들이 각종 돈벌이에 혈안이 된 것은 불황, 단속으로 굵직굵직한 돈줄이 막혔기 때문이다. 불황의 여파는 주먹세계에도 어김없이 불어 닥쳤고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은 점점 초라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