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대한민국 新 쩐의 전쟁 ②재계 현금사수 백태

재계가 ‘쩐의 전쟁’에 돌입했다. 현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는 것. 이는 대기업일수록 두드러지는 현상이다. 유동성 위기설, 부도설, 사정설 등의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경영환경 속에서 믿을 만한 구석이 ‘쩐’밖에 없다는 심리가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돈에 웃고 돈에 우는 세상’이란 말을 실감케 한다. 이런 분위기는 이명박(MB) 대통령의 강력한 투자 주문에도 요지부동이다. 재계는 ‘곳간’을 쉽게 열지 않을 태세다. 각 기업들의 현금 확보를 위한 눈물(?)겨운 사투를 조명해 봤다.

‘보릿고개 초비상’ 곳간 걸어 잠그기

재계는 폭풍전야다. 유동성 악화설, 부도설, 사정설 등의 ‘칼바람’이 언제 어디로 몰아칠지 모르는 상황이다. ‘살생부’에 사명이 오르내리는 기업은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자체 정보망을 확대하는 등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하다. 여기에 증권가를 중심으로 나도는 근거 없는 루머까지 겹치면서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되고 있다.

기업 자금사정 심각“부채비율 등 부담”
더구나 기업들은 고유가, 환율하락 등 대내외적인 경영환경의 악화에서 비롯된 ‘9월 위기설’로 몸살을 앓고 있다. 그중에서도 금호아시아나그룹, 두산그룹, STX그룹, 유진그룹, 코오롱그룹 등 최근 몇년 사이 대형 M&A를 성공시킨 대기업들은 더 그렇다.
실제 대기업의 자금사정이 심각하다는 통계가 이를 뒷받침한다. 최근 한국은행이 2천1백63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작성한 ‘8월 기업경기 조사결과’에 따르면 대기업(종업원 3백인 이상)의 자금사정 실사지수(BSI)는 지난 8월 85로 전월의 89에 비해 4포인트 떨어졌다.
이는 BSI 통계가 시작된 2003년 1월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대기업 BSI는 지난 5월 96에서 6·7월 89, 8월 85 등으로 하락 추세다. 8월 기준으로만 보면 2003년 91, 2004년 93, 2005·2006년 96, 2007년 103 등이었다.
여기에 현금을 창출하는 능력인 영업현금흐름도 좋지 않다. 최근 LG경제연구원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비금융기업 중 12월 결산법인 6백1개사의 영업현금흐름이 올해 상반기 1.1%로 지난해 상반기(4.0%)에 비해 크게 하락했다고 밝혔다. 연간 기준으론 2002년 8.1%, 2003년 6.2%, 2005년 5.8%, 2006년 5.4%, 2007년 4.5%로 역시 하락세가 뚜렷하다. 이중 영업현금흐름이 전혀 없는 기업도 41.1%에 달했다.
한 애널리스트는 “각종 위기설이 지나치게 과장된 측면이 있으나 대기업들이 부채비율 상승 등 자금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해당 그룹들은 설명회 등을 통해 일단 급한 불을 끄고 있지만, 한번 고개를 든 위기론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으면서 기업마다 자금 확보가 최우선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진단했다.
결국 대기업들은 금융 불안이 단기간에 개선되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 철저한 유동성 관리에 나서고 있다. 불확실한 경제상황과 혹시 모를 경기부진 장기화를 미리 대비해 현금 확보에 혈안인 것. MB정부와 여당이 “기업이 돈을 쌓아놓고도 투자를 늘리지 않고 있다”며 재계를 몰아세우는 동시에 공격적인 투자를 주문하고 있지만 요지부동이다.
이같이 투자를 기피하고 현금을 쌓아두는 현상은 대기업일수록 두드러진다. 증권선물거래소와 한국상장사협의회에 따르면 유가증권시장의 지난해 12월 결산법인 중 비교 가능한 5백67개사의 현금성 자산은 올 상반기 64조3천5백15억원으로, 지난해 말보다 1조9천9백3억원(3.19%) 늘어났다.
이 가운데 10대 그룹은 38조1천8백34억원으로 13.85%나 증가했다. 이에 비해 10대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상장사들의 현금성자산은 지난해 28조8천2백20억원에서 26조1천6백81억원으로 9.21% 줄었다.
반면 투자는 제자리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상반기 설비·건설·무형 고정투자를 합한 총고정자본의 전년 동기 대비 실질증가율은 0.5%에 그쳤다. 2001년 -3.6%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은행권 관계자는 “재계의 투자와 고용 등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보다 감소하고 있다”며 “기업이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몇 십조 원씩 쌓아놓고도 투자를 안 한다”고 말했다.
이도 모자라 대기업들은 ‘돈될 만한’부동산과 계열사 등 자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금호아시아나그룹이다. 대우건설 M&A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는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지난 7월 자산 매각 등으로 4조5천억원을 확보하는 그룹 자산 감축을 통한 유동성 확보 방안을 발표했다. 대우건설, 금호산업, 아시아나항공 등 주요 계열사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손에 쥐겠다는 복안이다.
대우건설은 내년 말까지 부동산과 사회간접자본(SOC) 지분 매각을 통해 2조원 이상 마련할 계획. 대우건설이 보유한 부동산 자산은 부산 밀리오레와 대구 대우빌딩 등 비유형자산 1조8천억원, 유가증권 등 유동자산이 3조7천억원에 이른다. 여기에 금호산업은 내년 상반기까지 금호생명 등 계열사 지분 매각 등으로 1조원을, 아시아나항공도 내년 상반기까지 대한통운 유상감자 등으로 1조4천억원을 확보키로 했다.
 
‘돈될 만한’재산 팔기“과연 제값에 팔릴까”
유동성 악화설에 휩싸인 유진그룹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지난해 하이마트를 인수하면서 부채비율이 93%에서 1백95%까지 치솟아 이자 등의 부담이 커진 유진그룹은 유가증권, 부동산 등 보유자산 매각을 결심했다. 이를 통해 3천억원의 현금을 확보한다는 것이다. 최근 유진그룹은 지난해 3월 인수한 유진투자증권의 재매각을 검토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무리한 신규 투자로 자금난에 몰린 C&그룹도 불끄기에 진땀을 빼고 있다. 계열사 CEO가 “돌아오는 자금을 막느라 매일 전쟁을 치른다”고 말할 정도로 코너에 몰린 C&그룹은 C&우방랜드, 진도F&, C&우방ENC, C&중공업 철강사업부, C&컨리 컨테이너 부분 등 비주력 계열사의 매각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같은 자산 매각에 대해 시장의 반응은 싸늘하다. M&A업계 관계자는 “유동성 위기설에 휩싸인 기업들이 이를 진화하기 위해 부동산과 계열사 등 자산을 내놓고 있지만, 부동산 등 시장 침체 상황에서 매입할 기업이 있을지, 제값을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고개를 저었다.
대출을 통해 현금 잡기에 나선 경우도 있다. 대기업의 ‘은행 노크’가 늘고 있는 것.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7월 대기업은 은행권에서 3조1천원을 조달했다. 지난달 2조1천억원으로 줄었지만, 1월 3조8천억원과 4월 3조5천억원 등 3조원 이상 ‘대출 달’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다. 대기업이 3조원을 대출한 것은 2000년 7월(3조8천억원) 이후 처음이다.
한은 측은 “은행들의 기업대출 증가액을 보면 대부분이 시설투자자금이 아닌 운전자금”이라며 “운전자금을 쌓아두는 것은 어두운 경제 사정 때문에 투자를 미룬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설명했다.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 움직임도 곳곳에서 일고 있다. 원자재·에너지 절약, 비용절감, 임금동결 등의 비상경영체제를 항시 유지하고 있는 것.
삼성전자는 올해 주력 사업인 반도체의 가격 급락에 따른 수익률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원가절감을 통한 생산성 향상을 최우선 과제로 내걸었다. 하이닉스도 경비절감 차원에서 ‘제품당 1센트 원가 줄이기’운동을 전개 중이다. LG전자 역시 대대적인 경비 절감 운동을 벌이고 있다. LG전자, 현대중공업, 대한항공, ㈜코오롱, 쌍용자동차, 르노삼성, 동국제강 등은 무분규로 임금을 동결했다.
그러나 기업들의 무분별한 ‘곳간 잠그기’에 따른 어두운 단면도 드러나고 있다. 기부금이 줄어든 것이다. 일부 대기업의 경우 연간 수천억원대의 이익을 남기면서 1백만원 수준의 미미한 액수를 사회에 기부하는 사례도 많다.
재계 전문사이트인 재벌닷컴이 2007년 매출 1조원 이상인 1백10개 상장기업의 순수 사회 기부금 지출 내역(사원 복지 부분 제외)을 집계한 결과 기부금 총액은 2006년 1조1천2백67억원에서 2007년 9천948억원으로 11.7% 감소했다.
같은 기간 기업들의 순이익은 32조2천8백90억원에서 38조1천8백96억원으로 18.3%나 늘었다. 따라서 기업 이익의 사회환원 정도를 측정하는 ‘순이익 대비 기부금 비율’도 2006년 3.5%에서 2007년 2.6%로 낮아졌다.

기부금까지 잠그나 사회환원 감소 추세
재계 관계자는 “내년 경기가 올해보다 더 나쁠 것이란 우려 속에서 꼭 필요한 비용 외에는 지출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아껴야 잘 산다’는 말이 사훈처럼 굳어지고 있다”며 “이에 따라 국내 대기업의 순이익은 크게 늘었지만 기부금은 오히려 줄어드는 기형적인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중소기업 위기 탈출법
자산매각·대출 ‘그림의 떡’
중소기업에겐 자산 매각, 대출 등이 ‘그림의 떡’이다. 계열사 등 내다 팔 자산이 없고, 대출 또한 여의치 않은 형편이다. 시중은행들이 리스크 관리를 강화하고 있는 이유에서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위기에 처한 중소기업들이 은행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시중은행들은 내실경영을 표방하며 대출한도를 줄이는 등 리스크 관리에 나선 상태”라며 “신용등급이 낮거나 담보가 부족한 중소기업들은 신규 대출을 사실상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중소기업들은 결국 인력 구조조정을 선택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 국내 중소기업 절반가량이 올 하반기 중에 인력 구조조정 계획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채용전문기업 코리아리크루트가 중소기업 인사담당자 2백59명을 대상으로 ‘하반기 인력 구조조정 계획’이란 주제로 설문조사 한 결과 53.3%(1백38개사)가 “하반기 인력 구조조정 계획이 있다”고 답했다. 전체 응답자의 78.0%가 “기업의 발전을 위해서 인력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답했다.
‘인력 구조조정 시행 방법’에 대해선 “부서간 통합”(26.1%)이 가장 많았으며, “정리해고”(23.9%), “신규채용 중단·축소”(16.7%), “일부사업 정리·철수”(13.8%), “명예퇴직 권고”(8.7%) 등의 순이었다.
‘인력 구조조정 시행 시기’는 “시기 미정”(34.1%)이란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9월(28.3%), 12월(22.4%), 11월(9.4%), 10월(5.8%) 순이었다.
규모는 ‘5% 미만’과 ‘5∼10% 미만’이 각각 26.8%, 23.2%를 차지했으며 ‘미정’이라는 응답도 21.0%에 달했다. 노동부 관계자는 “큰 불황을 겪을 때마다 중소기업들은 인력 조정을 선택한다”며 “이도 안 되면 결국 폐업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한편, 주요 대기업들은 올해 하반기 전반적인 경기 하락 전망 속에서도 신규채용 규모를 대폭 확대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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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