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갑작스레 떠난 신해철

이젠 전설로…‘굿바이 마왕’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1990년대 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끈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는 ‘마왕’ 신해철이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향년 46세 일기로 별세했다. 뮤지션, 라디오 디제이, 논객 등 우리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끼쳤기에 각계각층에서 애도의 물결이 이어졌다. 3040세대에게 그의 음악은 신세대의 표상이었다. 마왕의 전설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지난달 27일 가수 신해철이 심장 이상으로 수술을 받던 오후 8시19분 끝내 세상을 떠났다. 향년 46세로 한국 록의 큰 별이 졌다. 이날 소속사 KCA엔터테인먼트에 따르면 신해철은 갑작스러운 심정지로 입원 중이던 송파구 풍납동 서울아산병원 중환자실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생을 마감했다.

동료도 팬들도
애도의 물결
 
KCA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는 “의료진이 사인을 저산소 허혈성 뇌손상으로 밝혔다”며 “신해철씨가 지난 22일 오후 2시 서울아산병원 응급실에 혼수상태로 내원한 뒤 응급 수술을 포함해 최선의 치료를 했으나 끝내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신해철씨의 회복을 바라는 모든 분들의 간절한 염원과 의료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회복하지 못한 점에 대해 가족 분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보낸다”고 덧붙였다.
 
앞서 의료진은 심정지에 이른 원인을 찾기 위해 최근 신해철이 장 협착증으로 수술을 받은 부위를 개복해 응급 수술을 하기도 했다. 당시 KCA 엔터테인먼트는 “의료진이 부어오른 장으로 인한 심장 압박이라는 소견을 냈지만 장 상태가 왜 이런 상황에 이르렀는지 명확한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이후 신해철은 동공 반사가 없는 의식 불명으로 위중한 상태였다. 고인의 빈소는 지난 28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 23호에 마련돼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이날 역대 대학가요제 출신 가수들로 구성된 대학가요제회는 신해철을 애도·추모하는 공식 추모 모임을 가졌다. 신해철은 지난해 대학가요제회 기획팀장으로 활동한 바 있다. 대학가요제회에는 배철수, 심수봉, 김경호, 전람회 김동률, 마그마 조하문, 샌드페블즈, 서울대트리오, 이명우, 임백천, 노사연, 썰물, 김학래, 권인하, 정오차, 이재성, 스물하나, 김한철, 조정희, 우순실, 샤프, 이무송, 에밀레, 조태선, 장철웅, 높은음자리, 원미연, 이정석, 조갑경, 유열, 이규석, 작품하나, 주병선, 전유나, 배기성, 이한철, 이상미, 랄라스윗 등의 가수들이 회원으로 등록돼 있다.
 
 
연예계는 비통함에 젖었다. 서태지는 최근 엠넷 ‘슈퍼스타K6’ 출연 당시 “신해철을 응원해달라”며 울먹였다. 이날 서태지는 KBS 2TV ‘유희열의 스케치북’ 리허설 도중 고민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간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신해철과 서태지는 6촌 관계다. 서태지는 추모사에서 “우리의 젊은 날에 많은 추억과 아름다운 음악을 선물해준 그 멋진 이름을 기억해주실 겁니다”라고 적었다.
 
연예계의 애도가 SNS 등을 통해서도 잇따랐다. 윤도현은 트위터에 “실감은 안 나고 가슴은 멈칫멈칫하고 난 형한테 마음의 빚도 있고, 남은 가족분들은 얼마나 더 허망할까요? 한국 록의 큰 별이 떠나갔습니다. 해철이 형, 미안해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적었다. 듀오 더 클래식 멤버 김광진 역시 “신해철 님이 세상을 떠났군요. 우리 모두 그를 그리워할 것입니다. 그의 노래와 많은 추억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라고 남겼다. 애도의 물결은 끊이지 않았다.
 
일부 동료 연예인들은 의료과실을 주장하기도 했다. 고인과 절친했던 시나위 기타리스트 신대철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너를 떠나보내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만 해철아 복수해줄 게”라고 분노했다. 장협착증 수술을 담당했던 병원 측은 의료과실을 부인하고 있다. 
 
‘시대의 아이콘’한국 록의 큰별 지다 
깨어 있는 지성으로 사회에 독설 일침
 
정치권도 애도의 물결에 동참했다. 박원순 시장은 트위터에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것 같았던 ‘마왕’의 빈자리는 지금보다 살아가며 그 크기가 커져 갈 것입니다. 신해철씨, 당신의 팬이었음에 행복했습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남겼다. 새정치민주연합도 논평을 통해 고인에게 애도를 표했다.
 

신해철은 지난 2011년 7월 한 종합편성채널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내와 아이들에게 영상으로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당시 그는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나도 당신의 남편이 되고 싶고 당신의 아들, 엄마, 오빠, 강아지 그 무엇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라고 말했다. 이 사실이 다시 알려지면서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신해철은 생전 인터뷰에서 “뜨지 않은 곡 ‘민물장어의 꿈’은 내가 죽으면 뜰 거다. 내 장례식장에서 울려퍼질 곡이고 노래 가사는 내 묘비명이 될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각종 온라인 음원 차트에서 ‘민물장어의 꿈’이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다. ‘민물장어의 꿈’은 2001년 8월 발매된 앨범 ‘락 앤 록(樂 and Rock)’의 수록곡으로 신해철이 작사, 작곡, 편곡을 맡은 곡이다. 스스로의 고뇌, 반성, 꿈에 대한 갈망을 담았다. 이 곡은 잔잔하게 시작되지만 후렴구에서는 절규가 돋보이는 곡으로 신해철이 자신의 죽음을 떠올리며 만든 곡으로 유명하다.
 
‘민물장어의 꿈’은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번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없이”라는 비장미 넘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신해철은 1990년대 록 음악의 대중화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는 끊임없는 음악적 도전을 통해 매력적인 음색을 들려주면서 살아 있는 가사로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지는 의식 있는 뮤지션이라는 찬사도 받았다. 그의 음악성과 카리스마를 인정한 팬들은 그를 ‘마왕’ 혹은 ‘천재’라고 부르기도 했다.
 
 
신해철은 서울 보성고등학교 재학 시절 그룹 사운드 활동을 시작한 뒤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이던 1988년, 친구들과 함께 밴드 ‘무한궤도’를 결성했다. 그리고 ‘MBC 대학가요제’에 출전하면서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당시 무한궤도는 그 유명한 ‘그대에게’를 열창했다. ‘그대에게’는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학교 축제나 각종 운동 경기의 단골 응원 레퍼토리로 활용될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무한궤도 해체 이후인 89년에는 정석원까지 합류하며 6인조로 재편된 무한궤도로 첫 앨범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발표하고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 그는 빼어난 외모와 신선한 음악으로 많은 팬을 확보했다. ‘슬픈 표정하지 말아요’ ‘안녕’ 등 히트곡을 쏟아내며 새로운 뮤지션의 등장을 알렸고 이듬해 발표한 ‘마이셀프’ 앨범부터 본격적인 가수의 길을 걸었다.

‘민물장어의 꿈’
음원차트 점령
 
그는 앨범에 수록된 ‘재즈카페’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와 같은 노래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대중가요와는 차별화된 음악을 선보였다. 이렇게 개성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신해철은 솔로 뮤지션으로 상당한 성공을 거둔 뒤 92년 록밴드 ‘넥스트’를 결성했다. 이후 넥스트는 1997년 해체되기까지 1~4집을 발표하면서 1990년대를 대표하는 록그룹으로 로큰롤 음악의 대중화 첨병 역할을 훌륭하게 해냈다.
 
넥스트는 ‘도시인’ ‘날아라 병아리’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먼훗날 언젠가’ ‘해에게서 소년에게’ ‘히어 아이 스탠드 포 유’ 등 숱한 명곡을 쏟아내며 록음악 팬층을 넓혔다. 그가 창작을 주도한 넥스트의 음악은 사회적 이슈에 대한 관심이나 깊은 철학적 사유를 토대에 두면서도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보였다. 새로운 차원의 록밴드가 등장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뤘다.
 
전성기를 달리던 넥스트는 97년 “더 이상 올라갈 자리가 없다”며 밴드 해체를 선언했다. 이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프로듀싱 공부에 전념했다. 유학을 전후해서는 ‘크롬’ ‘모노크롬’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팀 또는 개인 활동을 벌이며 전자 음악 사운드를 접목한 새로운 스타일의 음악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는 대중성 보다는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집중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다시 넥스트를 꾸렸고 솔로 뮤지션으로 앨범을 꾸준히 발표했다. 그리고 2002년 미스코리아 뉴욕 진으로 본선에까지 오르고 뉴욕 스미스대학교를 졸업, 금융회사 골드만삭스 일본지사에서 일한 윤원희씨를 유학길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동거를 시작했을 만큼 열정적인 사랑을 했고,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2년간 연애한 끝에 2002년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신해철은 윤원희가 림프암에 갑상선암으로 투병생활을 할 때 끝까지 아내 곁을 지키고 결혼해 애틋함을 더했다.
 
신해철은 2008년 SBS <야심만만2-예능선수촌> 등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부인 윤원희씨와의 러브스토리를 공개한 바 있다. 당시 그는 “결혼 전 부인이 암으로 아팠다”며 “나는 원래 결혼 자체에 거부감이 있었던 사람인데 그런 일을 겪고 나서 더 빨리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신해철은 “(부인과) 병원에 가면 그냥 ‘남자친구’인 것과 ‘제가 이 사람 남편입니다. 보호자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다르더라”고 털어놓으면서 “빨리 결혼해 든든한 남편으로서 그 사람 곁에 있어주고 싶었다”고 더 덧붙이기도 했다. 부인의 암투병 사실을 알고서 결혼한 사연이 전해지며 감동을 선사했다.
 
마지막 어록 “성공보다 행복이 중요”
팬·동료 등 각계각층 슬픈 작별인사
 
신해철은 활동 기간 동안 탁월한 언변을 보여 줄곧 ‘라디오 스타’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MBC FM 라디오 프로그램 <음악도시>의 초대 디제이로서 진행을 맡았고, 2000년대 초에는 SBS 라디오 <고스트스테이션> 진행을 맡아 팬들과 소통했다. 그는 음악적 자신감을 바탕으로 민감한 사회 이슈에 대한 의견 표명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MBC <100분 토론>에 여러 차례 출연해 간통제 폐지를 찬성하거나 정부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2002년 대선 당시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반면 이라크 파병만큼은 반대했다. 2008년 이명박 당선자의 영어 공교육 정책에 대해서는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스스로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든지, 영국의 영연방에 들어가 스스로 식민지가 되든지…이게 무슨 엿 같은 소리냐?”고 일갈하기도 했다.
 

그는 천민자본주의를 혐오하기도 했다. 돈이나 출세가 성공이나 행복을 결정짓는다고 보지 않았다. 91년 발표한 ‘나에게 쓰는 편지’의 가사를 보면 그가 추구하는 가치를 엿볼 수 있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4년 전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도 출세지향주의에 사로잡힌 한국 사회를 비판했다.
 
“20, 30대가 삶의 패턴을 바꾸지 않으면 희망이 없어요. 이 사회가 대학 1학년부터 겁을 잔뜩 줘서 취직 걱정부터 하게 만드니까 젊어서도 음악에서 뭔가 멋진 일이 일어나길 꿈꾸지 않아요. 영국에서 살면서 영국 노동자들은 상류층으로 살려는 욕망이 없을까 고민했어요.”
 
“그 사람들은 퇴근해서 맥주 마시고 일요일 날 축구하고 노조 나갔다가 공장가면서 이대로 살다 죽을 거라고 말하거든요. 걔네는 상류층이 되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에 대해서 천박하다고 해요. 그런데 우리는 그런 욕망이 없으면 정신이 썩은 놈이라고 하죠. 우리는 지금 천민자본주의 중에서도 가장 쌍스럽고 천박하면서 거기에 겁먹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 하는 거죠.”
 
최근 발언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종합편성채널 JTBC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그는 “흔히 꿈은 이뤄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꿈을 이루는 과정에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네가 무슨 꿈을 이루는지에 대해 신은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지만 행복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엄청난 신경을 쓰고 있다. 성공의 결과보다는 자신의 행복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신해철은 음악적인 측면에서도 삶을 대하는 측면에서도 ‘현실에 순응하는 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라는 자세를 견지했다. 지금 30, 40대들이 신해철의 죽음에 먹먹해진 건 신해철과 함께 젊음을 고뇌했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신해철은 오랜 공백을 깨고 솔로 6집 앨범 ‘리부트 마이셀프(Reboot myself)’를 발표하며 가요계로 돌아왔다. 또 ‘넥스트유나이티드’를 꾸려 공연을 개최하는 등 다양한 형태로 음악 활동을 이어갔다. 또 최근에는 싱어송라이터 윤종신, 진중권 교수 등과 토크쇼 <속사정 쌀롱> 출연을 예정하며 방송 활동에 박차를 가하려던 차였다. <속사정 쌀롱>은 2회분까지 녹화된 상태다. 신해철은 1회 녹화에 참여했고 예고편이 전파를 탄 바 있다. <속사정 쌀롱> 측은 유족과 협의 끝에 신해철이 출연한 1회 방송분을 내보냈다. 

마왕이 남긴
독설과 감동
 
그는 최근 앨범 발매 당시 인터뷰에서 “내 나이가 마흔여섯이다. 아직도 살 빼라는 요구를 받는다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기쁘게 복귀를 발표한 바 있지만, 건강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1990∼2000년대를 그와 함께 보낸 팬들은 저마다 슬픈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
 
 
<khlee@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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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거여발 사법 전쟁 ‘끝까지 간다’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회 문턱을 넘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이 사법부를 강타했다. 검찰은 1999년 특별검사제 도입 이후 권한을 조금씩 잃다가 올해 해체가 결정됐다. 검찰이 26년 전 느끼다가 현실이 된 불안을 이젠 사법부가 느낄 차례일지도 모른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범여권이 지난 24일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내란 사건만 맡는 전담재판부를 만들어 운영한다”는 취지의 예규 제정 방침을 밝혔다. 특별재판부 영장전담 법관 하지만 민주당 박수현 수석대변인은 같은 날 논평을 통해 ‘24일 처리 방침’을 밝혔다. 이날 법안 처리는 이미 예고된 결과였다. 박 대변인은 지난 21일 오전 기자 간담회에서도 “민주당은 국회 본회의에서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법을 예정대로 처리할 것”이라고 밝혔다. 민주당이 원래 처리하려던 법안은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법’이었다. 이 법안이 통과됐다면, 12·3 비상계엄 관련 재판을 맡을 특별재판부가 설치되고, 영장 심사를 맡을 특별영장 전담 법관이 따로 배정됐을 것이다. 이들은 국회·판사회의·대한변호사협회가 3명씩 추천한 위원으로 구성되는 9인 규모의 추천위원회의 2배수 추천과 대법원장의 임명을 거칠 예정이었다. 아울러 상고심에선 윤석열 전 대통령이 임명했던 대법관은 모두 제척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에 대해선 각계에서 위헌 논란을 제기했다. 그러자 민주당은 지난 16일 내용을 대폭 수정했다. 명칭도 특별재판부에서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 전담재판부 후보추천위원회는 법무부 장관·헌법재판소 사무처장 등 외부 인사를 제외한 후 법관으로만 구성될 예정이다. 추천위원회에 들어갈 법관 중엔 각급 판사회의·전국법관대표자회의가 포함된다. 전담재판부에 소속될 법관은 추천위원회·대법관회의를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한다. 윤석열 전 대통령 등 12·3 비상계엄 주요 연루자들은 이미 형사재판 제1심을 받고 있다. 전담재판부는 항소심부터 맡을 예정이다. 대법원은 민주당의 공세에 맞서 반격에 나섰다. 대법원은 지난 18일 대법관 행정회의를 열어 ‘국가적 중요 사건에 대한 전담재판부 설치 및 심리 절차에 관한 예규’를 제정하기로 했다. 여기엔 “형법상 내란·외환죄와 군형법상 반란죄 사건을 전담해 집중 심리하는 전담재판부를 설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다. 대법원이 규정하는 전담재판부는 무작위 배당을 거쳐 사건을 배당받을 재판부가 지정되는 방식이다. 전담재판부로 지정된 재판부가 원래 맡던 재판은 다른 재판부로 재배당된다. 예규엔 “해당 재판부는 이후 내란·외환과 관련 없는 새로운 사건은 맡지 않는다”는 규정이 포함됐다. 하지만 민주당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박 대변인은 “사법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을 왜 이렇게 늦게 했느냐”며 “왜 그동안 국민을 불안과 혼란에 빠뜨렸느냐”고 비판했다. 이어 “국회의 입법권을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맞춰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내란 전담재판부 신설이 갖는 ‘진짜 함의’ 대법원 예규 제정…반격 혹은 타협안 제시 민주당 정청래 대표도 같은 날 최고위원회의 중 “대법원이 헐레벌떡 자체 안이라고 내놨다”며 “더 일찍 해야 하지 않았느냐. ‘조희대 사법부’답다는 생각이 든다”고 비판했다. 국내 헌정사에서 특별재판부는 단 2회만 설치됐다. 제헌헌법 부칙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단기 4278년 8월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국회는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했다. 반민특위엔 특별검찰부와 특별재판부가 설치됐다. 특별검찰부는 검찰총장 등 9명으로 구성됐고, 특별재판부는 ▲국회의원 5명 ▲법조인 6명 ▲사회 저명 인사 5명 등 총 16명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국회가 선출했다. 두 번째 특별재판부는 1960년 4·19 혁명 이후 개정된 제4차 개정 헌법을 근거로 설치됐다. 당시 개정 헌법엔 “3·15 부정선거 및 4·19 혁명 관련자들과 관련된 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특별재판소와 특별검찰부를 둘 수 있다”는 취지의 부칙이 포함돼있었다. 이후 설치된 특별재판부는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제정을 거쳐 설치됐다. 민주당조차 ‘특별재판부’를 ‘전담재판부’로 수위를 낮춰 처리했다는 이유로 내란 특별재판부에 대해 불거진 위헌 시비를 거론한다. 법원은 ‘무작위 전산 재판 배당’ 원칙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특정 재판부에 특정 재판을 배당한다”는 취지의 특별재판부에 대해선 기본적으로 위헌 시비가 불거질 가능성이 높다. 아직 헌법재판소가 관련 합헌·위헌 여부를 가린 적도 없다. 하지만 헌법 제27조는 “모든 국민은 헌법·법률이 정한 법관에 의해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제103조는 “법관은 헌법·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해 재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재판 배당의 무작위성은 재판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영향력으로부터 법관을 보호해 재판의 공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세운 원칙이다. 이는 위헌 시비가 불거진 핵심 이유였다. 그래서 과거엔 특별재판부를 설치하기 전에 개헌 과정 중 헌법 부칙에 그 근거를 규정했다. 헌법 부칙은 헌법 본문과 똑같은 효력을 가진다. 그래서 위헌 시비가 불거질 일은 없었다. 피해 가는 위헌 시비 하지만 위헌 시비를 피하려고 제시한 ‘내란 전담재판부’에 대해서도 논란이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기존 재판부 배당과 큰 차이가 없다”는 취지의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사법부는 이미 무작위 배당의 예외를 운용하고 있다. ▲특허법원 ▲서울행정법원 ▲지역별 가정법원 등 특정 분야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법원이 따로 설치돼있는 것도 무작위 배당의 예외다. 또 각급 법원은 이미 지식 재산·환경·의료 등 특정 전문 분야를 전담할 재판부를 분류한다. 법원장 재량에 따라, 재판장들과의 협의를 거쳐 특정 사건은 ‘적시 처리 필요 중요 사건’으로 분류해 특정 재판부에 배당해서 신속한 재판 진행을 추진한다. 기소된 사건이 이미 진행 중인 재판과 사실 관계·쟁점·피고인이 같으면, 이미 진행 중인 재판을 담당하는 재판에 배당한다. 물론 민주당이 거둘 수 있는 실익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정 대표는 민주당이 ‘특별’을 ‘전담’으로 바꿔가면서도 서둘러 개정안을 추진하는 이유를 분명히 짚었다. 그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사법부와 지귀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의 재판부는 내란·외환 사건의 심리를 의도적으로 침대 축구하듯 질질 끌었다”며 “조 대법원장은 경고·조치를 해야 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보다 못한 입법부가 나서기 전에 사법부가 진작 내란 전담재판부를 설치했다면, 지난 1년 동안 허송세월하는 것을 보면서 국민이 분통 터지는 상황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 대표의 주장 중 핵심 단어는 ‘조희대’와 ‘지귀연’이다. 민주당이 내란 특별재판부 설치를 추진할 당시 민주당 전현희 최고위원은 지난 9월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지 부장판사를 지칭해 “재판의 공정성에 의구심을 갖도록 하는 인사들을 전보·징계한다면, 굳이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들기 위한 입법 조치를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주장했다. 정 대표는 지난 15일 최고위원회의 도중 “조희대 사법부는 특검 수사 훼방꾼이 됐다”며 “조 대법원장이 지휘하는 대법원이 지난해 12월3일 내란에 동조한 건 아닌지 강한 의구심을 갖는다”고 지적했다. 사법행정사무를 총괄하는 조 대법원장의 권한 일부를 사실상 박탈하고, 지 부장판사를 내란 관련 재판에서 손 떼게 할 수 있다면, 민주당은 상당한 실익을 거둘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재판부 배당에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개입시키는 것이다. 힘 실어준 진짜 이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이후인 지난 2018년 4월 “권한이 집중된 제왕적 대법원장을 견제하고, 법관의 독립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취지를 갖고 설치됐다. 보수 진영 일각에선 이를 일컬어 “지나치게 민주당에 친화적”이라고 비판한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 설치 직후 첫 의장으로 선출됐던 최기상 당시 서울북부지법 부장판사는 현재 민주당 의원이다. 전국법관대표자회의는 지난 9월 민주당이 주장한 의제 ‘대법관 증원론’을 포함한 상고심 제도 개선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어 “사법부는 대법관 증원안을 경청하고 자성해야 한다”는 취지로 보고서를 작성·공개했다. 이 때문에 일각에선 전국법관대표자회의를 일컬어 “민주당에 힘을 설어주기 위해 토론회를 개최한 게 아니냐”는 비판 목소리도 제기됐다. 대법원의 이재명 대통령에 대판 파기환송 판결에 대해서도, 정 대표는 지난 9월 전국법관대표자회의에 “조 대법원장 사퇴 권고 등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 회복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일각에선 “대법원의 예규 제정은 반격”이라고 해석한다. 그 근거로는 “내란 전담재판부를 줄곧 반대하다가 갑자기 예규 제정을 밝힌 의도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는 점을 들었다. 민주당은 내란 전담재판부 설치 외에도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꿀 만한 사법개혁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대법원의 예규 제정에 대해선 “민주당의 공세를 적절한 선에서 수용해 더 큰 공세에 대비하려는 의도”라고 보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특별재판부’가 ‘전담재판부’로 바뀌었다고 해서 다른 사법개혁안 통과 시도가 중단되는 것은 아니다. 법원으로선 기존 사법 체계를 모두 바꾸려는 민주당의 시도를 보면서 검찰이 해체되는 과정을 되새길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이미 민주당이 주도하는 사법개혁안 자체가 사실상 ‘기존 법원 해체’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조금씩 권한 잃다 해체 결정 검 종착역은 헌재 최고법원 등극? 민주당 등 범여권이 검찰을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으로 분리해 완수했던 검찰 해체에 대해선 “헌법은 검찰 조직의 존재를 전제로 검찰총장의 존재를 규정했다”면서 위헌 논란을 제기하는 반대 측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범여권은 이를 강행했다. 큰 틀에서 보면, 검찰은 ▲특별검사제도 도입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설치 ▲중대범죄수사청·공소청 분리 등 과정을 거쳐 해체됐다. 최초의 특별검사(이하 특검)는 지난 1999년 김태정 전 검찰총장 부인에 대한 옷 로비 의혹과 한국조폐공사 노조 파업 유도 사건에 대해 진행됐던 최병모 특검이었다. 특검이 성립됐던 배경은 “검찰이 검찰총장의 부인이 연루된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인 시선이었다. 아울러 당시 국회 구도는 여소야대였다. 한나라당은 “사건을 축소·은폐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흐름을 타고 강하게 밀어붙여 특검법 제정을 주도했다. 이후 현재까지 개별 특검법은 총 16개가 통과됐고, 상설 특검은 6회 추진됐다. 검찰로서는 1999년 최병모 특검 설치가 수사권·기소권 독점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총 22회의 특검이 성립됐다는 것은 검찰에 대한 각계의 불신을 상징하는 중요 사실관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검찰을 노리는 다음 단계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최초의 검경 수사권 조정은 지난 2011년 진행됐다.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사법경찰관이 검사의 수사 지휘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지휘 건의 제도 신설 등의 내용이 담긴 안을 대통령령으로 제정해 의결했다. 지난 2016년엔 ▲진경준 게이트 ▲정운호 게이트 ▲김형준 전 부장검사의 스폰서 의혹 ▲최순실 게이트 등이 연이어 발생해 검찰의 신뢰도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이는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장기간 논의된 검경 수사권 논의로 연결된다. 공수처도 설치됐다. 민주당 집권 후 노무현 전 대통령 사망 사건을 강하게 기억하는 지지자들의 비원을 외면하긴 어려웠던 측면도 있었다. 그렇게 검찰은 서서히 권한을 빼앗겼다. 그러다가 지난 9월에 이르러 검찰은 내년부터 중대범죄수사청과 공소청으로 갈라질 운명에 처했다. 특히 중대범죄수사청은 행정안전부로 옮겨진다. 서서히 권한을 빼앗기다가 끝내 해체를 앞둔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민주당 등 범여권은 ▲법원행정처 폐지 ▲법 왜곡죄 도입 ▲대법관 증원 ▲재판소원 도입 등 사법개혁안을 시도하고 있다. 범여권이 사법개혁안을 모두 통과시킨다면, 사법부로서는 “검찰에 이어 사법부도 한순간에 와해된다”고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순간에 와해된다 법원행정처가 없어지면 대법원장의 권한이 줄어든다. 법 왜곡죄가 도입되면, 판사의 재판도 법적 처벌 범위 안에 포함될 위험에 노출된다. 대법관이 늘어나 대법관의 권위·희소 가치가 줄어든 후 재판은 헌법소원 제기 범위 안에 포함된다. 최종 종착지는 헌법재판소가 대법원을 제친 후 최상위 사법기관으로 규정될 순간임을 배제하기 어렵다. 지난 24일은 사법부가 느낄 법한 공포가 처음 피부에 와닿은 날이었을 수도 있다. 새해엔 민주당과 사법부의 전쟁이 더욱 거칠게 진행될지도 모른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