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은퇴 앞둔 박태환

마린보이 국민들에 ‘마지막 선물’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마린보이’박태환이 아쉽게도 자신의 이름이 걸린 인천 문학박태환경기장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했기에 실망이 컸던 게 사실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박태환의 400m 기록은 시즌 세계 1위에 해당되는 기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은퇴설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2년 후 브라질 리우올림픽까지 도전을 계속 이어갈 각오다.

 
“아시안게임을 세 번 뛰다 보니 메달도 많이 나왔나 보네요.” 
 
지난 25일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100m에서 48초75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 타이기록을 세운 것이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4개를 포함해 아시안게임 통산 총 19개(금6·은4·동9)의 메달을 획득했다.

금 놓쳤지만…
최선 다했다
 
박태환은 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열린 대회 남자 자유형 100m 결승에서 48초75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쳐 8명이 겨룬 결승에서 3등 밖으로 밀렸으나, 막판 스퍼트를 올려 은메달을 따냈다. 주종목인 200m와 400m에서 뒷심 부족으로 동메달을 따낼 때와는 달랐다. 박태환은 되살아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은메달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금메달은 아시아 신기록인 47초70을 기록한 닝쩌타오(중국)가 차지했다. 동메달은 48초85를 기록한 시오우라 신리(일본)에게 돌아갔다. 박태환은 예선에서 49초76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치며 전체 1위로 결승에 올랐다.
 

경기 후 박태환은 “정말 잘해도 후회는 남으니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그래도 이번 대회 처음으로 경기하면서 몸이 괜찮았고, 시즌 최고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예선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동메달리스트 시오우라(일본)는 “박태환과 함께 뛸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훈련장에서도 박태환과 가까이서 훈련하다 보니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박태환이 다시금 성적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400m 계영 예선을 치른 뒤 아버지 박인호씨가 경영하는 팀 GMP의 매형 김대근 실장이 박태환의 3일간의 레이스를 모두 지켜본 뒤 “태환아, 내려놓자. 편안하게 하자”고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200m를 마치고는 부담이 될까 봐 말을 하지 못했지만 400m 후에는 충격이 클까 봐 어쩔 수 없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박태환 수영’을 못하고 있다고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가족들의 돌직구가 통했는지 이후 100m 결선에서는 힘찬 움직임으로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자유형 100m는 박태환이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3관왕을 달성할 때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종목이다. 박태환이 하기노 교스케(일본), 쑨양(중국)에 밀려 이번 대회 자유형 200m, 400m 금메달을 놓쳤을 때에도 초반 페이스는 좋았던 만큼 100m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기대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실종된 막판 스퍼트를 이날도 발휘하지 못하면서 아쉽게도 금메달을 놓쳤다.
 
박태환은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당시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걸었을 때 첫 50m를 24초02에 통과하며 당시 자신과 우승경쟁을 벌였던 중국의 루지우에 뒤졌다. 그러나 박태환은 막판 스퍼트로 50m를 24초68 기록으로 통과하며 25초27에 그친 루지우를 따돌리고 가장 먼저 터치 패드를 찍었다.

총 메달 19개
‘최다 타이’
 
반면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은 첫 50m를 23초76에 통과하며 광저우아시안게임보다 빠른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50m에서 24초99를 기록한 박태환은 첫 50m와 마지막 50m 기록 차이가 크지 않았던 광저우대회와는 달리 1초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역전에 실패했다. 이날 금메달을 목에 건 닝쩌타오(중국)은 첫 50m와 마지막 50m를 각각 23초02, 24초68에 통과했다.
 

닝쩌타오 역시 막판 스퍼트가 뛰어나지 않았던 만큼 박태환이 전성기 시절의 막판스퍼트를 보여줬다면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박태환은 “닝쩌타오가 몸이 말라서 노력하면 옆에서 붙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힘이 넘쳤다”며 “막판 스퍼트를 할 때 몇십m만 더 있었으면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박태환은 이날 통산 19번째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안게임 개인 메달 타이기록을 세웠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부터 아시안게임 무대를 밟은 박태환은 3개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9개를 차지하며,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부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아시안게임만 여섯 차례 출전한 박병택은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6개를 차지한 한국 사격의 산증인 박병택의 19개를 따라잡았다. 박태환은 한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이 됐다.
 
경기 후, 한 외신기자가 박태환을 향해 연맹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안현수의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묻기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외신기자는 박태환에게 “수영연맹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를 예로 들며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해 박태환은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선발전도 한국에서 뛰었다. 연맹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선발전에서도 좋은 기록이 나왔다”며 연맹과의 불화설을 일축했다.
 
금만큼 값진 은메달과 동메달 획득
통산메달 19개 목에…‘전설의 기록’
 
그런데 이 외신기자는 갑자기 왜 뜬금없이 대한수영연맹을 거론했을까. 사실 박태환과 수영연맹과의 갈등은 지난해까지도 계속돼 왔다. 감독 선임, 훈련 방식, 관리와 지원 문제 등을 놓고 선수 측과 소속 단체와의 주도권 다툼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괘씸죄 적용’이라는 의혹과 함께 런던 올림픽 포상금 5000만원도 뒤늦게 지급됐다. 이런 사실은 당시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이 외신기자는 “박태환은 아직까지도 스폰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이 대회를 마친 뒤에도 호주에서 또 개인 비용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냐”고 물은 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 한 선수를 향해 스폰서는 물론, 팬들과 정부가 온힘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쑨양 같은 선수가 대표적”이라며 박태환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 수영의 침몰이다. 박태환 의존증의 여파가 심각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메달을 땄다. 최윤희, 정다래 등 금메달리스트도 있었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만 해도 최유웅, 장규철, 서연정, 최혜리가 개인 메달을 획득했고, 4개의 단체전에서 은 1개, 동 3개를 따냈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박태환과 관련이 없는 메달은 50m 접영에서 동메달을 딴 양정두가 유일하다. 제2의 박태환이 나오지 않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싸운 영웅
 
박태환은 5살 때 천식을 치료하던 중 의사의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대청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수영신동으로 불리며 한국 선수단 중 최연소 국가대표로 주목을 받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다. 하지만 자유형 400m에서 준비 신호를 출발 신호로 착각하고 입수해 실격 처리됐다. 그러나 2005년 한 해 동안 무려 여섯 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2005년 11월, 마카오 동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자유형 400m에서 3분48초71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생에 첫 출전한 자유형 1500m에서 15분00초32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에는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시안게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태릉선수촌을 나와 개인 훈련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코치 교체 등 잡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7년 1월부터는 괌과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맬버른에서 2개월여 동안 전지훈련을 실시했고 같은 해 3월25일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자유형 400m 경기에서는 예선 2위의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그는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드 해켓을 제치고 3분44초30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기록과 아시아 기록을 동시에 1초42 앞당긴 것이다. 같은 해 8월21일에는 일본 국제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44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008년에는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입학해 석사과정까지 진학했다. 대학입학 시 단국대뿐만 아니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한체대 등 대학들로부터 입학제의를 받았으나 박태환과 가족의 결정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었다.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의 수영지도자로 활동하길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태환은 경기를 펼칠 때마다 한국 수영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수영 영웅으로 발돋움 했다. 23번의 한국 신기록과 12번의 아시아 신기록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박태환 인생의 정점은 올림픽 첫 금메달을 거머쥔 2008년이다.  아시아선수 최초로 자유형 400m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후 각종 광고모델 요청을 20건 넘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한 육체미와 친숙한 외모가 인기 상승 비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최선 다한 한국수영 영웅에 박수를
수영 특성상 은퇴 시기 훌쩍 넘겨
 
로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최악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자유형 200m, 400m, 1500m 전종목에서 예선탈락하면서 부진에 빠졌다. 전신수영복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그는 2010년 1월1일부터 전신수영복 금지 규정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큰 충격을 받고 다시 맹훈련에 돌입해 지구력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8월19일, 2010팬퍼시픽 수영선수권대회에서 200m 은메달을 거머쥐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하지만 하루에 두 경기를 소화한 박태환은 주종목인 1500m에서는 8위의 성적을 보이면서 다시 주춤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21일에 열린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중국의 장린을 따돌리고 전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절치부심 끝에 제16회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수영 영웅의 자존심을 다시금 입증했다. 하지만 수영 영웅도 세월을 역으로 헤엄치진 못했다. 2010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자유형 400m 아시아 신기록을 끝으로 박태환의 기록 깨기는 막을 내렸다. 중국의 신예 쑨양의 등장으로 최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박태환은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실격 후 번복이라는 해프닝을 겪고서도 은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였다. 2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이미 세계 수영계의 조명은 쑨양에게 향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5년간 박태환을 후원해오던 기업과의 재계약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인용 보도한 <뉴시스>에 따르면 “박태환이 최근 홈쇼핑TV에 나와 건강보조식품 광고에 출연한 이후 네티즌들이 대한수영연맹 홈페이지 게시판에 수영스타에 대한 홀대를 비난하는 글”이 폭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SK그룹이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박태환과의 후원 계약을 포기한 것이다. 대한수영연맹도 박태환에 대한 지원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제2의 박태환
어디에 있나
 
이후 박태환은 훈련에 드는 수억원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급기야 홈쇼핑에까지 출연해 세계 수영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서까지 해외 전지훈련에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일부 팬들과 유명학원 강사 등이 힘을 모아 박태환을 도왔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박태환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특히 레이스가 치러진 경기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태환수영장이다. 세계 스포츠사를 뒤져봐도 은퇴하지 않은 현역선수에게 경기장 이름을 헌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가 느꼈을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중압감이 경기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아시아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경쟁자들의 선전은 박태환에게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신성 하기노 고스케(일본)는 자유형 200m와 개인혼영 200m, 계영 800m, 개인혼영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하기노는 개인혼영에서 1분55초34의 아시아신기록을 달성했다. 마린보이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본다. 
 
<khlee@ilyosisa.co.kr>

 
[박태환 수상경력]
 
[2005년]
-제4회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대회 수영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2006년]
-제10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동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은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최우수선수상
 
[2007년]
-일본국제수영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동메달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10년]
-제11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은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금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우수선수상
 
[2011년]
-제14회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2012년]
-제30회 런던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은메달
 
[2014년]
-제17회 인천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x200 계영 동메달, 400m 자유형 동메달, 4x100m 계영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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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채 상병 특검’ 공수처 불편한 속내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채 상병 특검’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야권의 4·10 총선 압승으로 더불어민주당의 움직임에도 속도가 붙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는 난감하기만 하다. 부족한 인력으로 인해 수사의 첫 단추도 끼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발 빠른 수사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공수처 안팎에서는 정치권의 책임 떠넘기기에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조직이 와해되기 직전인데 수사에 속도가 어떻게 나겠느냐?”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이하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의 말이다. 요즘 공수처의 분위기는 참혹하다. 해병대 ‘채 상병 사건’으로 반전을 꾀하고 싶어도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특별검사(이하 특검) 목소리가 거세지면서 ‘비교 대상’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대통령실 압수수색? 채 상병 사건 특검법 추진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공수처의 분위기는 암흑 상태다. 검찰 제도를 보완해 ‘상설특검’ 명목으로 출범했음에도 ‘늑장·부실’ 수사 논란 속에 결국 사건 기록을 특검에 넘겨줘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은 오는 5월2일, 임시국회를 열어 법안을 표결하자는 분위기다. 법안 통과를 위해서는 국회의장과 여당의 협조가 필요한데, 총선 이후 여당 일각서도 채 상병 특검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표출되고 있다. 채 상병 특검 법안은 지난해 10월 신속처리안건(패스트트랙)으로 지정된 뒤 180일의 숙려 기간을 거쳐 본회의 표결만 하면 언제든 통과할 수 있는 상황이다. 채 상병 사건 수사 갈래는 크게 두 가지다. 무리한 수색 지시 등 책임자를 가리는 본안 수사가 경북지방경찰청서 진행 중이고, 해병대 수사단의 초동 조사에 국방부와 대통령실 관계자가 개입했다는 외압 의혹은 공수처가 맡고 있다. 외압 핵심 피의자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달 주호주대사로 임명돼 부임 후 사퇴하는 과정서 대통령과 법무·외교부 장관의 직권남용 의혹도 공수처에 추가로 고발됐다. 야권이 특검을 통해 밝히려는 사안의 실체는 수사 외압에 집중돼있다. 특검이 통과되면 공수처가 내려던 실적이 특검으로 넘어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민주당은 이 대사 임명 과정서의 추가 의혹도 특검법안을 수정 발의해 포함할 계획이다. 공수처는 수사의 무게를 일부 덜겠지만, 6개월 넘게 진행해온 사건 기록을 외부에 넘긴다는 건 또 다른 비판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특검 추진 본격화…수사팀 의욕 잃어 “이럴 거면 왜 강조하나” 불만 증폭 공수처 출신 한 변호사는 “인력난 때문에 고전하는 상황이다. 내부 얘기를 들어보면 ‘죽을 맛’이란다. 채 상병 사건 수사는 최선을 다하려 했는데 특검이 언급되면서 수사팀의 의욕이 상실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수처법상 수사 범위와 인원 범위가 지나치게 제한돼있어 실질적인 수사 기능을 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는 설명이다. 공수처법은 공수처의 수사 범위를 현직 공직자와 그 가족, 퇴임 3년 이내 전직 고위공직자로 한정하고 있다. 공수처 검사와 수사관의 인원을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현재 공수처법이 규정하고 있는 검사와 수사관의 규모는 처·차장 포함 검사 25명, 수사관 40명이다. 공수처법을 추진할 당시 규모는 검사 30~50인, 수사관 50~70인이 제안됐지만 법무부와 국회의 논의를 거치면서 현재 정원으로 대폭 감소했다. 공수처 관계자는 “총선과 무관하게 지속적으로 인원 확대와 관련해 국회와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며 “검사의 신분보장을 위한 임기에 대해서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앞서 공수처는 최소한의 행정인력이라도 확보할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 달라고 호소한 바 있다. 현행법상 행정인원 정원은 20명인데 지난 2022년 공수처는 행정직원 중 국·과장과 직제 파견자 등 7명을 제외하면 실제 가용인원이 13명에 불과해 수사관을 행정인력에 투입해야 할 상황에 놓인 바 있다. 공수처가 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법 개정이 필수적이라는 분석에 무게가 실리는 이유다. 특히 공수처의 수사권과 기소권을 일치시켜 수사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공수처는 ‘공수처법상 기소권 없는 사건에 대한 구속영장 청구 연구용역’을 발주하는 등 수사 대상과 기소 대상의 불일치로 발생하는 구속영장 논란을 정리하기 위한 연구에 착수하기도 했다. 인력난 가중화 지금까지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한 상황을 보면 초기 단계에 불과하다. 지난해 12월 이 전 장관 등을 출국금지했고, 한 달 후인 지난 1월 압수수색에 착수했다. 이후 포렌식과 참고인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을 비롯한 국방부 지휘부와 해병대 수뇌부 등에 대한 조사는 특검의 몫이 될 가능성도 있다. 경우에 따라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등으로 특검 수사가 확대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공수처와 경찰은 특검법 처리 여부를 주시하며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총선 국면서 논란의 중심에 선 공수처는 수사를 신속하게 진행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겠다는 입장이다. 공수처 지휘부 공백 상태가 영향을 줄 여지도 있다. 주요 피의자 소환 및 신병처리 등 주요 의사결정을 처장 대행인 부장검사가 결정하기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다. 만약 국회서 여야가 특검법 처리에 합의하는 수순을 밟으면 공수처도 새로 출범할 특검에 기록을 인계하기 위한 작업에 중점을 둘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본회의에 회부된 안은 민주당이 지난해 9월 발의한 법안이다. 민주당이 지난 3월, 이 전 장관이 주호주대사로 임명된 경위를 수사해야 한다는 별도의 특검안도 국회에 제출했기 때문에 이 두 법안이 병합되는 안도 거론된다. 본회의 회부 안건은 수사기간을 최장 100일로 정하고 있는데, 잔여 수사를 검찰에 이첩하도록 명시됐다. 경찰과 공수처가 시작한 수사가 특검을 거쳐 검찰 손에 넘어가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말도 나온다. 민주당이 3월 발의한 안은 잔여수사 이첩 대상을 검찰과 공수처로 정했다. 단추도 못 끼워 민주당이 특검법 조항 일부를 양보하고 국민의힘이 수사 대상 확대에 동의하는 시나리오도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온다. 이런 과정서 본회의 회부 안이 조정될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이 전 장관은 최근 변호인을 통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전 장관 측이 공수처에 소환조사를 요청한 것은 이번이 네 번째다. 이 전 장관 측 김재훈 변호사는 최근 공수처에 소환 촉구 의견서를 내고 “이 전 장관은 호주 대사직서도 물러났으나 공수처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다”며 “공수처의 이런 수사 방기 탓인지 정치권에서는 특검 필요성까지 제기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에 보낸 의견서에서 “이첩 보류 지시는 직권남용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국방부 장관은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사건 이첩에 대한 최종 승인권자이므로 인사권자가 인사안 결재 후 이를 취소·변경할 수 있듯이 그 승인을 변경할 수 있다”며 “해병대 수사단장에게 수사 권한이 있다느니, 수사단장에게 민간 수사기관으로의 이첩 권한이 있다느니 하는 것은 법 규정의 몰이해로부터 비롯된 억지”라고 주장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장관이 보고서를 회수하라고 지시하기 전에 대통령실 내선번호로 전화를 받았다’는 의혹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이 전 장관 측은 “이 전 장관은 대통령으로부터 (사단장을 빼라는)지시를 받은 사실이 없다”며 “당시 장관이 군사보좌관과 논의하는 과정서 ‘(초급 간부들까지 처벌 대상에 포함한다면)초급 간부들이 힘들어할 것 같다’는 의견을 나눴고 법무관리관실의 법리 검토를 거쳐야 한다고 판단해 이첩 보류를 지시했다”고 강조했다. 수사 인원 범위 제한적 법 개정 안되면 도루묵 이어 “재검토한 결과 8월24일 직접적인 혐의가 있는 2명을 경찰에 이첩했고, 해병대수사단 조사기록 원안도 그대로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전 장관 측은 민주당이 추진하는 ‘채 상병 특검’도 비판했다. 이 전 장관 측은 “공수처의 1차 수사 결과도 나오지 않은 상황인데 무엇이 미흡하고 국민적 의혹이 남아 해소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냐”며 “특검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은 공수처의 신속한 수사와 결정”이라고 주장했다. 공수처 수장이 석 달째 공석인 점은 제도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더한다. 윤석열 대통령은 최종 후보자 지명을 두 달 가까이 미루고 있다. 앞서 국회 공수처장후보추천위원회는 지난 2월29일 판사 출신 오동운(사법연수원 27기) 변호사와 검사 출신 이명순(연수원 22기) 변호사를 후보로 추천했다. 김진욱 전 처장과 여운국 전 차장이 임기 만료로 퇴임해 공수처가 ‘대행 체제’에 들어간 건 지난 1월 말부터다. 김선규 수사1부장이 처장 대행을 맡고 있지만, 지난달 제출한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 임시로 대행직을 수행 중이다. 최근 인사위원회서 연임이 불발된 수사1부 소속 김송경 검사(사법연수원 40기) 임기도 만료됐다. 김 대행이 이끄는 수사1부는 공기광 검사만 남게 된다. 별도 조직개편 계획도 없어 수사 부서 1개가 사실상 사라질 위기다. 윤 대통령이 공수처장 후보자를 지명해도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해야 임명이 가능하다. 21대 국회 임기는 내달 29일까지다. 22대 국회가 개원해도 원구성에 시일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신속한 공수처장 공백 해소를 위해선 이달 안으로 후보 지명을 마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수장 공백 장기화 우려 법조계에서는 특검 수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공수처법에 따르면, 공수처는 이 전 장관에 대한 수사권은 있지만 기소 권한이 없다. 수사를 마친 뒤 검찰에 사건을 넘기고 검찰이 기소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구조다. 공수처 출범 당시 수사·기소권을 모두 줄 경우 일각에선 ‘무소불위 공수처’가 될 거란 우려가 제기되면서 공수처는 법관, 검사, 고위 경찰공무원에 대해서만 제한적 기소권을 갖게 됐다. 문제는 검찰이 채 상병 사건 기소에 적극적으로 나설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검찰을 관할하는 법무부는 지난달 8일, 공수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전 장관의 출국금지를 해제했다. 사건 처리의 중립성 논란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특검을 통해 채 상병 사건을 수사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