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은퇴 앞둔 박태환

마린보이 국민들에 ‘마지막 선물’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마린보이’박태환이 아쉽게도 자신의 이름이 걸린 인천 문학박태환경기장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지 못했다. 모두가 무의식적으로 그에게 금메달을 기대했기에 실망이 컸던 게 사실이다.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박태환의 400m 기록은 시즌 세계 1위에 해당되는 기록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은퇴설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2년 후 브라질 리우올림픽까지 도전을 계속 이어갈 각오다.

 
“아시안게임을 세 번 뛰다 보니 메달도 많이 나왔나 보네요.” 
 
지난 25일 마린보이 박태환(25·인천시청)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남자 자유형 100m에서 48초75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한국 선수 최초로 아시안게임 최다 메달 타이기록을 세운 것이다. 박태환은 이번 대회에서 은메달 1개와 동메달 4개를 포함해 아시안게임 통산 총 19개(금6·은4·동9)의 메달을 획득했다.

금 놓쳤지만…
최선 다했다
 
박태환은 인천 문학박태환수영장에서 열린 대회 남자 자유형 100m 결승에서 48초75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쳐 8명이 겨룬 결승에서 3등 밖으로 밀렸으나, 막판 스퍼트를 올려 은메달을 따냈다. 주종목인 200m와 400m에서 뒷심 부족으로 동메달을 따낼 때와는 달랐다. 박태환은 되살아났고, 홀가분한 표정으로 자신의 은메달을 소중히 받아 들었다. 금메달은 아시아 신기록인 47초70을 기록한 닝쩌타오(중국)가 차지했다. 동메달은 48초85를 기록한 시오우라 신리(일본)에게 돌아갔다. 박태환은 예선에서 49초76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치며 전체 1위로 결승에 올랐다.
 

경기 후 박태환은 “정말 잘해도 후회는 남으니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라며 “그래도 이번 대회 처음으로 경기하면서 몸이 괜찮았고, 시즌 최고 기록에는 못 미치지만 예선보다 좋은 성적을 거둔 것에 만족한다”고 말했다. 동메달리스트 시오우라(일본)는 “박태환과 함께 뛸 수 있어 영광이었다”며 “훈련장에서도 박태환과 가까이서 훈련하다 보니 친구가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고 기뻐했다.
 
박태환이 다시금 성적을 끌어 올릴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24일 400m 계영 예선을 치른 뒤 아버지 박인호씨가 경영하는 팀 GMP의 매형 김대근 실장이 박태환의 3일간의 레이스를 모두 지켜본 뒤 “태환아, 내려놓자. 편안하게 하자”고 수영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꺼냈다. 200m를 마치고는 부담이 될까 봐 말을 하지 못했지만 400m 후에는 충격이 클까 봐 어쩔 수 없이 말을 했다는 것이다. ‘박태환 수영’을 못하고 있다고 돌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가족들의 돌직구가 통했는지 이후 100m 결선에서는 힘찬 움직임으로 은메달을 거머쥔 것이다.
 
자유형 100m는 박태환이 2006 도하아시안게임 당시 3관왕을 달성할 때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종목이다. 박태환이 하기노 교스케(일본), 쑨양(중국)에 밀려 이번 대회 자유형 200m, 400m 금메달을 놓쳤을 때에도 초반 페이스는 좋았던 만큼 100m에서 첫 번째 금메달을 기대했지만 이번 대회에서 실종된 막판 스퍼트를 이날도 발휘하지 못하면서 아쉽게도 금메달을 놓쳤다.
 
박태환은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 당시 이 종목에서 금메달을 걸었을 때 첫 50m를 24초02에 통과하며 당시 자신과 우승경쟁을 벌였던 중국의 루지우에 뒤졌다. 그러나 박태환은 막판 스퍼트로 50m를 24초68 기록으로 통과하며 25초27에 그친 루지우를 따돌리고 가장 먼저 터치 패드를 찍었다.

총 메달 19개
‘최다 타이’
 
반면 이번 대회에서 박태환은 첫 50m를 23초76에 통과하며 광저우아시안게임보다 빠른 속도를 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50m에서 24초99를 기록한 박태환은 첫 50m와 마지막 50m 기록 차이가 크지 않았던 광저우대회와는 달리 1초 이상의 격차를 보이며 역전에 실패했다. 이날 금메달을 목에 건 닝쩌타오(중국)은 첫 50m와 마지막 50m를 각각 23초02, 24초68에 통과했다.
 

닝쩌타오 역시 막판 스퍼트가 뛰어나지 않았던 만큼 박태환이 전성기 시절의 막판스퍼트를 보여줬다면 금메달을 차지할 수 있었던 셈이다. 박태환은 “닝쩌타오가 몸이 말라서 노력하면 옆에서 붙어서 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기와는 달리 힘이 넘쳤다”며 “막판 스퍼트를 할 때 몇십m만 더 있었으면 역전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박태환은 이날 통산 19번째 아시안게임 메달을 목에 걸며 아시안게임 개인 메달 타이기록을 세웠다. 2006 도하아시안게임부터 아시안게임 무대를 밟은 박태환은 3개 대회에서 금메달 6개, 은메달 4개, 동메달 9개를 차지하며, 1990 베이징아시안게임부터 2010 광저우아시안게임까지 아시안게임만 여섯 차례 출전한 박병택은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6개를 차지한 한국 사격의 산증인 박병택의 19개를 따라잡았다. 박태환은 한국 스포츠 역사를 새로 쓴 주인공이 됐다.
 
경기 후, 한 외신기자가 박태환을 향해 연맹과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안현수의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묻기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외신기자는 박태환에게 “수영연맹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쇼트트랙 안현수 선수를 예로 들며 귀화에 대한 생각을 물었다. 이에 대해 박태환은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었다. 아무 문제가 없다. 아시안게임을 준비하면서 선발전도 한국에서 뛰었다. 연맹과의 관계가 좋기 때문에 선발전에서도 좋은 기록이 나왔다”며 연맹과의 불화설을 일축했다.
 
금만큼 값진 은메달과 동메달 획득
통산메달 19개 목에…‘전설의 기록’
 
그런데 이 외신기자는 갑자기 왜 뜬금없이 대한수영연맹을 거론했을까. 사실 박태환과 수영연맹과의 갈등은 지난해까지도 계속돼 왔다. 감독 선임, 훈련 방식, 관리와 지원 문제 등을 놓고 선수 측과 소속 단체와의 주도권 다툼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괘씸죄 적용’이라는 의혹과 함께 런던 올림픽 포상금 5000만원도 뒤늦게 지급됐다. 이런 사실은 당시 외신을 통해 전 세계에 보도됐다.
 
이 외신기자는 “박태환은 아직까지도 스폰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럼 이 대회를 마친 뒤에도 호주에서 또 개인 비용으로 훈련을 하는 것이냐”고 물은 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중국의 경우 한 선수를 향해 스폰서는 물론, 팬들과 정부가 온힘을 다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쑨양 같은 선수가 대표적”이라며 박태환을 향한 안쓰러운 마음을 내비쳤다.
 
이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한국 수영의 침몰이다. 박태환 의존증의 여파가 심각했던 것이다. 과거에는 아시안게임에서 박태환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메달을 땄다. 최윤희, 정다래 등 금메달리스트도 있었다. 지난 광저우 아시안게임만 해도 최유웅, 장규철, 서연정, 최혜리가 개인 메달을 획득했고, 4개의 단체전에서 은 1개, 동 3개를 따냈다. 그런데 인천에서는 박태환과 관련이 없는 메달은 50m 접영에서 동메달을 딴 양정두가 유일하다. 제2의 박태환이 나오지 않고 있다.

외부 지원 없이
홀로 싸운 영웅
 
박태환은 5살 때 천식을 치료하던 중 의사의 추천으로 수영을 시작했다고 알려진다. 그는 대청중학교 3학년 때인 2004년, 수영신동으로 불리며 한국 선수단 중 최연소 국가대표로 주목을 받으며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다. 하지만 자유형 400m에서 준비 신호를 출발 신호로 착각하고 입수해 실격 처리됐다. 그러나 2005년 한 해 동안 무려 여섯 개의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존재감을 분명히 했다.
 
2005년 11월, 마카오 동아시아 경기대회에서 자유형 400m에서 3분48초71로 한국 신기록을 세우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생에 첫 출전한 자유형 1500m에서 15분00초32로 아시아 신기록을 세우며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6년에는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3개, 은메달 1개, 동메달 3개를 획득하는 기염을 토하며 아시안게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이후 그는 태릉선수촌을 나와 개인 훈련에 돌입했고, 이 과정에서 코치 교체 등 잡음에 시달리기도 했다.
 

2007년 1월부터는 괌과 세계선수권 대회가 열리는 오스트레일리아 맬버른에서 2개월여 동안 전지훈련을 실시했고 같은 해 3월25일에 열린 세계 선수권 대회 자유형 400m 경기에서는 예선 2위의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그는 튀니지의 오우사마 멜로리와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랜드 해켓을 제치고 3분44초30으로 금메달을 획득했다. 당시 자신이 갖고 있던 한국 기록과 아시아 기록을 동시에 1초42 앞당긴 것이다. 같은 해 8월21일에는 일본 국제수영대회 400m 자유형에서 3분44초77의 기록으로 금메달을 거머쥐었다.
 
2008년에는 단국대학교 사범대학 체육교육과에 입학해 석사과정까지 진학했다. 대학입학 시 단국대뿐만 아니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한체대 등 대학들로부터 입학제의를 받았으나 박태환과 가족의 결정은 미래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었다. 현역 선수 생활을 마친 뒤 교수가 되어 후진양성의 수영지도자로 활동하길 원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박태환은 경기를 펼칠 때마다 한국 수영의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수영 영웅으로 발돋움 했다. 23번의 한국 신기록과 12번의 아시아 신기록은 그냥 나온 게 아니었다.
 
박태환 인생의 정점은 올림픽 첫 금메달을 거머쥔 2008년이다.  아시아선수 최초로 자유형 400m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국가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이후 각종 광고모델 요청을 20건 넘게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건강한 육체미와 친숙한 외모가 인기 상승 비결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러나 1년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최선 다한 한국수영 영웅에 박수를
수영 특성상 은퇴 시기 훌쩍 넘겨
 
로마에서 열린 세계선수권에서 최악의 성적을 남긴 것이다. 자유형 200m, 400m, 1500m 전종목에서 예선탈락하면서 부진에 빠졌다. 전신수영복에 적응을 하지 못하던 그는 2010년 1월1일부터 전신수영복 금지 규정이 생기면서 다시 한 번 재기의 기회를 노렸다. 큰 충격을 받고 다시 맹훈련에 돌입해 지구력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8월19일, 2010팬퍼시픽 수영선수권대회에서 200m 은메달을 거머쥐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올렸다. 하지만 하루에 두 경기를 소화한 박태환은 주종목인 1500m에서는 8위의 성적을 보이면서 다시 주춤했다. 그러나 같은 해 8월21일에 열린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중국의 장린을 따돌리고 전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다.
 
절치부심 끝에 제16회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3관왕이라는 대기록을 세웠다. 수영 영웅의 자존심을 다시금 입증했다. 하지만 수영 영웅도 세월을 역으로 헤엄치진 못했다. 2010년 아시안게임에서의 자유형 400m 아시아 신기록을 끝으로 박태환의 기록 깨기는 막을 내렸다. 중국의 신예 쑨양의 등장으로 최고의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박태환은 지난 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실격 후 번복이라는 해프닝을 겪고서도 은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였다. 200m에서도 은메달을 획득했지만 이미 세계 수영계의 조명은 쑨양에게 향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올림픽이 끝나자마자 5년간 박태환을 후원해오던 기업과의 재계약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사를 인용 보도한 <뉴시스>에 따르면 “박태환이 최근 홈쇼핑TV에 나와 건강보조식품 광고에 출연한 이후 네티즌들이 대한수영연맹 홈페이지 게시판에 수영스타에 대한 홀대를 비난하는 글”이 폭주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SK그룹이 2012년 런던올림픽 이후, 박태환과의 후원 계약을 포기한 것이다. 대한수영연맹도 박태환에 대한 지원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제2의 박태환
어디에 있나
 
이후 박태환은 훈련에 드는 수억원의 비용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급기야 홈쇼핑에까지 출연해 세계 수영계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자비를 들여서까지 해외 전지훈련에 나섰던 것이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일부 팬들과 유명학원 강사 등이 힘을 모아 박태환을 도왔다. 
 
이번 아시안게임은 박태환에게 중요한 의미였다. 특히 레이스가 치러진 경기장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박태환수영장이다. 세계 스포츠사를 뒤져봐도 은퇴하지 않은 현역선수에게 경기장 이름을 헌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가 느꼈을 중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중압감이 경기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럼에도 박태환은 미소를 잃지 않고 경기에 임했다.
 
아시아신기록을 세우고 있는 경쟁자들의 선전은 박태환에게 또 다른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신성 하기노 고스케(일본)는 자유형 200m와 개인혼영 200m, 계영 800m, 개인혼영 400m에서 금메달을 따며 4관왕을 차지했다. 특히 하기노는 개인혼영에서 1분55초34의 아시아신기록을 달성했다. 마린보이의 새로운 도전을 기대해본다. 
 
<khlee@ilyosisa.co.kr>

 
[박태환 수상경력]
 
[2005년]
-제4회 마카오 동아시아경기대회 수영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2006년]
-제10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동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은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5회 도하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최우수선수상
 
[2007년]
-일본국제수영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동메달
-제12회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2010년]
-제11회 팬퍼시픽수영선수권대회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400m 혼계영 은메달, 800m 계영 동메달, 400m 계영 동메달, 100m 자유형 금메달, 200m 자유형 금메달, 400m 자유형 금메달, 1500m 자유형 은메달
-제16회 광저우 아시안게임 삼성 MVP 어워드 우수선수상
 
[2011년]
-제14회 FINA 세계수영선수권대회 남자 400m 자유형 금메달
 
[2012년]
-제30회 런던 올림픽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은메달, 400m 자유형 은메달
 
[2014년]
-제17회 인천아시안게임 수영 남자 200m 자유형 동메달, 4x200 계영 동메달, 400m 자유형 동메달, 4x100m 계영 동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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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투아웃’ 김병기 수난 시대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지난 6월 김병기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후보가 서영교 의원을 누르고 22대 더불어민주당 2기 원내대표로 당선됐다. 김 원내대표는 내란 종식과 헌정 질서 회복, 권력기관 개혁을 외쳤다. 이로부터 두 달 뒤인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정청래 신임 당 대표가 선출됐다. 이재명정부 첫 여당 지도부가 제모습을 갖추면서 안정 궤도에 접어드는 듯했다. 약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김병기 원내대표와 정청래 대표의 첫 갈등이 불거졌다. 정 대표가 지난 9월11일 여야 원내 지도부가 합의한 3대 특검법 합의안에 대해 “협상안을 수용할 수 없고, 지도부 뜻과 달라 재협상을 지시했다”고 밝히면서다. 불안불안 이인삼각 특검법 개정안의 핵심인 기간 연장을 제외한 채 합의해 특검법의 취지와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게 정 대표의 입장이다. 김 원내대표는 곧바로 반박했다. 원내 지도부와의 긴급회의를 거듭하던 그는 밖에서 기다리던 취재진을 향해 “정청래한테 공개 사과하라고 그래!”라며 소리쳤다. 이후 당 안팎에서 원성이 쏟아지자 김 원내대표는 오히려 취재진을 향해 “왜 자꾸 합의라고 그러느냐”고 물었다. 그는 “(합의가 아니라) 1차로 논의한 것이고, 무엇보다도 의원총회에서 추인을 받아야 한다”며 “수사 기간과 규모에 다른 의견에 있으면 그 의견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제 총론만 (발표)하고 나갔는데 원내수석들이 각론에서 너무 많이 나갔다. 마치 합의가 된 것처럼 보도됐다”며 합의문이 아니라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두 사람 간의 갈등은 사흘 만인 13일 봉합됐다. 김 원내대표는 자신의 SNS에 “심려 끼쳐서 죄송하다. 심기일전해 내란 종식과 이재명정부의 성공을 위해 분골쇄신하겠다”고 게시글을 작성했다. 이렇게 냉전은 끝났지만 지지층의 비난은 거셌다. 김 원내대표를 향해 ‘수박’ ‘변절자’ 등 원색적인 비판을 쏟아내며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문재인정부 당시 민주당 대표를 지냈지만 지난 대선에서 국민의힘 김문수 후보의 손을 들어준 이낙연 전 국무총리의 행보와 비교하는가 하면 ‘역시 서영교 의원을 뽑아야 했다’는 자조 섞인 목소리도 나왔다. 지지층의 미묘한 기류가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에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이하 법사위) 검사 징계안을 놓고 두 번째 갈등이 터졌다. 법사위 소속 범여권 의원들이 대장동 항소 포기에 반발한 검사장 18명을 고발한다고 밝힌 데 대해 “협의가 없었다”고 선을 그으면서 개혁 의지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나온 것이다. 지난달 19일 법사위 소속 민주당·조국혁신당·무소속 등 범여권 의원들은 검찰의 대장동 사건 항소 포기에 이의를 제기한 검사장 18명을 국가공무원법 위반으로 경찰에 고발했다. 여당 간사인 민주당 김용민 의원은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 조직 기강과 헌정 질서를 무너뜨린 검사장 18명의 집단 항명 행위에 대해서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고발한다”고 밝혔다. ‘당심’이 뽑은 정, ‘의심’이 뽑은 김 연일 삐거덕…벌써 이재명 리더십 부재? 김 원내대표는 고발 소식이 알려진 뒤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금 봤다”며 “그렇게 민감한 것은 정교하고 일사불란하게 해야 한다. 협의를 좀 해야 했다”고 당혹한 기색을 보였다. 이어 “뒷감당은 거기서 해야 할 것”이라며 고발장을 제출한 법사위 쪽에 책임을 물었다. 법사위의 검사장 고발은 원내 지도부뿐 아니라 당 지도부와도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게 김 원내대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용민 의원은 검사장 고발 문제에 대해 “당의 기조와 흐름이 잡혀 있는 상태에서 저희가 고발장을 그날 제출하는 기자회견을 한 것뿐, (원내 지도부와) 소통이 없지 않았다”고 반박했다. 김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원내(지도부)와 소통할 때 이 문제를 법사위는 고발할 예정이라는 걸 얘기했다”며 “원내가 많은 사안을 다루다 보니까 (고발 문제를) 진지하게 듣거나 기억하지 못하셨을 가능성은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저희가 더 적극적으로 설명을 해야 했지 않았느냐는 지적을 한다면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면서도 “소통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당시 한 여권 관계자는 “당 대표가 당 전체를 이끄는 일이라면 원내대표는 말 그대로 원내 상황을 조율하고 총괄하는 위치인데, 오히려 갈등을 키우고 있으니 (민주당) 의원들도 혼란스러운 것”이라며 “이런 상황이 조금씩 노출되면서 지지층까지 불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고 진단했다. 당과 원내,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뉜 민주당의 배경에는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의 선출 방식이 거론된다. 강경 지지층이 밀어 올린 정 대표와 달리 김 원내대표는 당내 의원 선거를 통해 당선됐다. 당시 원내에 친명(친 이재명)계가 다수 포진했던 만큼 김 원내대표 의중은 ‘명심(이재명 대통령의 의중)’에 가깝다. 더 강하고 더 빠르게 개혁을 외치는 정 대표의 지지층과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런 강성 지지층에게 김 원내대표는 이미 ‘투아웃’이다. 여기에 정 대표의 공약이었던 대의원과 권리당원 간 표 반영 비율을 ‘1대 1’로 변경하는 당헌·당규 개정이 부결되면서 지지층의 반발이 거세질 것으로 전망된다. 밑서 치솟고 위서 누르고 그동안 민주당은 당 대표나 최고위원 등 선출 시 대의원과 권리당원 투표 반영 비율을 20:1 미만으로 규정해 왔다. ‘동등한 1인1표제’는 정 대표가 당 대표 경선 당시 공약으로 내건 정책 중 하나로 “나라의 선거에서 국민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하듯 당의 선거에서도 누구나 1인1표를 행사해야 한다”고 추진 배경을 설명했다. 일부 의원들 사이에서조차 ‘졸속 추진’이라는 비판이 나오면서 정 대표와 김 원내대표 두 사람 모두 시험대에 올랐다. 정 대표 쪽에선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는 ‘이재명 대통령이 당 대표였던 때부터 추진됐던 개혁의 실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일각에서 ‘시기’와 ‘방법’을 문제 삼는 등 반대 의견에 부딪혔다. 권리당원의 힘으로 대표직에 오른 지 3개월이 조금 지난 상황에서 1인1표제를 추진하자 친명계 조직인 ‘더민주혁신회의’와 일부 당원 등을 중심으로 비판이 제기된 것이다.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1인1표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이 최고위원은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논란이 커지고 있는데 이는 찬반의 문제라기보다 절차의 정당성·민주성 확보, 그리고 취약 지역(영남 등)에 대한 전략적 규제와 과소 대표성이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친명계인 윤종군 의원도 SNS를 통해 “당원주권 강화 방향에 동의한다”면서도 “전 지역 권리당원 표를 1인1표로 하는 것에는 이견이 있다. TK(대구·경북) 등 영남지역 당원 자긍심 저하, 당세 확장 장애 조성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현 상황과 관련해서 한 정치권 관계자는 “당 대표는 당 컨트롤이 안 되고, 원내대표는 의원들 컨트롤이 안 되는 상황”이라며 “지난 지도부(이재명 당 대표, 박찬대 원내대표)가 워낙 합이 좋았고 당 대표 리더십도 강했기 때문에 더욱 비교된다. 중심축이 없으니 엎치락뒤치락하면서 반 발자국만 앞서도 자기 정치라는 뒷말이 나오는 것”이라고 봤다. 결국 정 대표의 1인1표제는 중앙위원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5일 치러진 투표 결과 중앙위원 총 593명 중 373명이 투표에 참여해 찬성 277표, 반대 102표로 과반이 찬성하지 않아 부결된 것이다. 남은 고비 얼마나? 원내 일각에서는 무리하게 밀어붙인 ‘정청래발 개혁’에 우려를 표하고 있다. 김 원내대표의 고충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는 해석이 나온다. 대통령실에서조차 몇 차례 속도 조절을 주문했지만, 지지층을 등에 업은 정 대표는 ‘개혁 골든 타임’을 필두로 숨 가쁘게 달리고 있다. 그런 김 원내대표가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을 못 박으면서 ‘쓰리아웃’은 겨우 면했다는 분석이다. 그는 지난달 24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내란전담재판부는 국민의 명령이기 때문에 당연히 설치한다”며 “여기에 대해 더는 설왕설래하지 않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 제한’ 조치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 원내대표는 “시간이 지나면 내란 사범이 사면돼 거리를 활보하지 못하도록 내란 사범에 대한 사면권을 제한하는 법안도 적극 관철하겠다”며 “내란 사범을 사면하려면 국회 동의를 받도록 하겠다”고 설명했다. 만일 윤석열 전 대통령 등 내란 주요 피의자에 대한 내란죄가 확정될 경우 사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이로부터 약 일주일 뒤인 지난 4일 범여권의 주도로 ‘내란전담재판부(내란특별재판부)’ 설치법이 법사위 전체회의를 통과했다. 법사위는 해당 법안을 이달 중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며 속도를 냈다. 해당 재판부는 12·3 내란 사태와 관련해 윤 전 대통령 등이 연루된 내란 사건 전담을 골자로 한다. 내란전담재판부 판사 및 영장전담법관 추천위원회는 헌법재판소장을 비롯한 법무부 장관과 판사회의에서 추천한 총 9명으로 구성된다. 내란전담재판부로 성난 지지층 달래도… 위헌 폭탄 껴안고 걸어가는 ‘불’꽃길 구성을 마친 추천위원회는 2주 안에 영장전담법관과 전담재판부를 맡을 판사 후보자를 각각 정원의 2배수로 추천해야 하며 최종 임명은 대법원장의 몫이다. 또 형사소송법상 피고인의 구속기간은 최대 6개월이지만 특별법에서는 내란·외환 관련 범죄에 대해 구속기간을 1년까지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국민의힘은 위헌 소지가 있다며 반발했다. 국민의힘 나경원 의원은 “한마디로 판사가 마음에 안 든다고 골라 쓰겠다는 ‘지귀연 판사 바꾸자는 법’”이라며 “사법부의 무작위 배당 원칙을 위반하는 것일 뿐 아니라 이미 재판하는 사건도 뺏어서 다른 판사한테 맡기겠다는 삼권분립의 침해”라고 지적했다. 이날 법사위에 출석한 천대엽 법원행정처장 역시 “1987년 헌법 아래 누렸던 삼권분립, 사법부 독립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질 수 있다”며 “내란특별재판부법에 여러 가지 위헌 요소가 있다”고 반대했다. 천 처장은 “헌법재판소가 결국 이 법안에 대해 위헌 심판을 맡게 될 텐데 헌재소장이 추천권에 관여한다면 심판이 선수 역할을 하게 돼 룰에 근본적으로 모순이 생긴다”며 “헌법재판소장과 직·간접적 관계에 있는 헌법재판관들이 재판(위헌심판)을 맡을 수 없게 된다면 ‘내란특별헌법재판부’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 법이 예정하고 있는 바”라고 설명했다. 내란전담재판부 추진으로 개혁 동력을 얻었지만 후폭풍까지 감당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위헌 가능성을 지닌 사법개혁을 진행하는 건 위험요소가 다분할뿐더러 원내대표로서 지방선거를 6개월 앞두고 중도층 민심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에서다. 한 민주당 출신 의원은 <일요시사>와의 전화 통화에서 “지금 민주당은 집단 의존 증상이 있다. 지난 총선에서 이재명 당시 대표에게 충성하는 정치인만 대거 유입되다 보니 여당이 된 지금 제대로 갈피를 못 잡는 것”이라며 “2차 종합 특검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지, 내란전담재판부를 어떻게 꾸릴 것인지, 조희대 대법원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등에서 국민의 피로도를 높이지 않으면서도 종합적인 전략을 짤 사람이 없다”고 지적했다. 175석 버거웠나 그러면서 “내란전담재판부가 설치되면 국민의힘이 위헌을 걸 것이고, 법원에서 위헌 소지가 있다고 보는 만큼 위험성도 크다. 하지만 헌재에서 위헌 판결을 내리지 못하게 하려면 민심을 우리 편으로 끌고 와야 하는, 법률 싸움이 아닌 고도의 민심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hypak28@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원팀’ 원내대표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단에 때아닌 ‘내 편 봐주기’ 논란이 일었다. 민주당 문진석 당 원내운영 수석 부대표가 인사청탁 의혹에 휩싸였지만 ‘엄중 경고’에 그치면서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앞서 지난 2일 문 수석이 본회의장에서 김남국 대통령실 디지털소통비서관에게 문자로 특정 인물을 거론하며 “내가 추천하면 강훈식 실장이 반대할 거니까 아우가 추천해줘”라고 보냈고, 이에 김 비서관이 “제가 (강)훈식이 형이랑 (김)현지 누나한테 추천할게요”라고 답한 것이 언론에 포착됐다. 인사 청탁 논란이 불거지자 문 수석은 “부적절한 처신에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였지만 국민의힘은 ‘김현지 실세’ 프레임을 다시 띄우며 이재명정부를 압박했다. 김 원내대표의 엄중 경고로 논란을 수습하려는 분위기가 이어지자 강성 지지층은 “과감히 내쳐야 한다”며 더 강한 징계를 요구하고 있다. <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