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제2의 히딩크’ 기대되는 울리 슈틸리케 축구대표팀 감독

벼랑 끝 몰린 한국축구를 부탁해~

[일요시사 사회팀] 이광호 기자 =  독일 출신 슈틸리케 감독이 위기의 한국축구를 구원할 외국인 사령탑으로 선임됐다. 선수 시절에 비해 지도자로서의 커리어가 떨어진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지만 한국축구에 대한 각별한 애정만큼은 알아줘야 한다. 열린 자세로 ‘이기는 축구’를 하겠다고 공언한 그의 다짐이 현실이 될 지는 앞으로 남은 평가전과 아시안컵의 결과가 증명할 것이다.
 
지난 5일 대한축구협회는 축구국가대표팀의 새 사령탑으로 독일 출신 울리 슈틸리케(60) 감독을 선임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2018년 러시아월드컵까지 지휘봉을 잡을 예정이다. 2007년 핌 베어벡 감독 이후 7년 만에 찾아온 외국인 감독이다. 독일 출신 한국 축구 대표팀 감독은 1991년 1월 데트마르 그라머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 총감독을 맡은 이후 23년 만이다.

7년 만에 찾아온
외국인 감독
 
지난 8일 경기도 고양시 엠블 호텔 킨텍스에서 슈틸리케 신임 축구대표팀 감독의 취임 기자회견이 열렸다. 슈틸리케 감독의 한국에서의 첫 공식 활동이었다. 다소 밝은 표정으로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어 통역의 부재로 스페인어로 30여분 간 취재진의 질문에 성실히 답했다.
 
이날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이 다시 강국이 될 거라 믿지 않았으면 감독직을 수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한국축구의 잠재력에 대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그는 “외국인 감독이 새로 오면 편견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나쁜 예로 어떤 지도자는 돈이나 명예 때문에 한국에 올 수도 있다. 나는 매 경기 이긴다는 약속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매 경기 열심히 일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 오겠다고 약속하겠다”라며 솔직 담백한 각오를 밝혔다.
 

대한축구협회는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에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언급될 정도”라며 “독일 국가대표 선수로 활약하면서 1982년 월드컵 준우승에 올라가는 등 화려한 선수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고 발탁 배경을 설명했다.
 
앞서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전 감독이 사퇴한 뒤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감독을 유력한 후보로 손꼽고 협상을 벌였지만 세부 조건에 대한 견해 차이로 무산된 바 있다. 이후 비공개 협상을 통해 차순위 후보자들과 접촉한 것으로 알려진다.
 
슈틸리케 감독은 당초 유력한 후보였던 네덜란드 출신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 감독에 비해 명성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지만 한국 축구를 일으키고자 하는 태도만큼은 남다르다는 평가다. 그간 외국인 감독이 보여주지 못했던 차별화된 모습으로 한국 축구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신임 축구국가대표 감독으로 선임된 슈틸리케는 앞서 지난 6일(한국시간) 독일 <DPA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는 위대한 축구 열정이 있다”며 “내가 일을 시작하는 데 좋은 발판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독일 축구 전설적 존재 베켄바워 후계자
최강군단 DNA로 멈춘 한국축구 움직일까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축구협회 관계자의 자격으로 2002 한일월드컵 당시 본선을 현장에서 직접 지켜본 기억을 꺼내기도 했다. 그는 “한국처럼 열정이 뜨거운 곳에서는 어떤 성과가 반드시 산출되기 마련”이라며 한국축구 팬들의 열정을 높게 평가했다.
 

브라질월드컵에서 부진했던 한국축구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멀리서 판단하기에는 섣부른 면이 있다”며 “한국에 건너가 가까이서 상황을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브라질월드컵에 출전했던 한국선수들의 경험부족에 대해서는 언급했다. 그는 특히 공격수 손흥민(레버쿠젠)과 구자철(마인츠)을 한국 축구에 중요한 역할을 할 분데스리가 선수들로 거명했다.

기존 코치진과 호흡
빠른 적응이 관건
 
슈틸리케 감독은 계약기간인 2018년까지 아내와 함께 한국에서 지낼 계획을 갖고 있다. 현장에 진득하게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라고 알려진다. 진정 감독직을 수행하기 위해선 선수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슈틸리케의 이러한 마음가짐이 다른 후보를 제치고 지휘봉을 잡게 된 결정적인 이유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슈틸리케 감독과 함께할 코치진 구성도 마무리됐다. 기존에 있던 신태용(44) 코치 외에도 홍명보호에서 코칭스태프로 활약했던 박건하(43) 코치와 김봉수(45) 골키퍼 코치가 신임 사령탑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 슈틸리케 감독은 그동안 자신과 함께 해왔던 아르헨티나 출신의 카를로스 아르무아(65) 수석코치를 대동할 예정이다. 그의 사령탑으로서 공식 일정은 내달 1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예정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8일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한 뒤 경기도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우루과이 대표팀과의 친선경기를 관전했다. 그는 태극전사들과의 첫 만남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특히 차두리, 손흥민, 기성용 선수의 활약이 눈부셨다. 차두리는 마르틴 카세레스(유벤투스)가 버틴 우루과이의 왼쪽을 쉼 없이 괴롭히면서 ‘차미네이터’의 존재감을 여실히 입증했다. 스피드와 몸싸움 등에서 우외를 보이며 완벽에 가까운 철통 수비를 선보였던 것이다.
 
손흥민은 특유의 드리블로 우루과이의 수비진을 흔들며 빠른 스피드와 정확도 높은 슈팅으로 경기의 흐름을 리드했다. 기성용은 공격과 수비를 넘나들며 공격수 에딘손 카바니(파리 생제르맹)를 전담마크하며 근성의 땀을 흘렸다. 슈틸리케 감독의 눈도장을 찍은 것이다. 한국 선수들의 활약을 지켜본 슈틸리케 감독은 다음 날인 9일 국내에서 머물 숙소 후보지 3∼4군데를 돌아봤다.
 
그리고 10일에는 수원월드컵경기장을 찾아 프로축구 K리그 클래식 수원 삼성-울산 현대전을 직접 관전했다. 국내축구 분위기를 살피면서 숨은 보석을 찾기 위해서였다. 슈틸리케 감독은 해외파와 K-리거들의 시너지 효과를 위해서는 K-리그의 좋은 재목 발굴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개혁의 바람의 불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선수들의 활약을 차례로 지켜본 슈틸리케 감독은 “중요한 건 한 가지 스타일만을 고집하지는 않을 것”이라며 “어떤 날엔 짧은 패스로 경기를 이끄는 것이 승리의 요인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날엔 공중 볼이 중요할 수도 있다. 이기는 경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슈틸리케 감독은 3박4일의 방한일정을 마치고 11일 스페인으로 출국했다. 오는 24일 재입국해 인천아시안게임을 관전하고 10월 A매치 준비에 들어간다. A매치에 나설 멤버를 구성하는 데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기복 없는 안정적 플레이
좋은 결과 ‘실리축구’ 추구
 
슈틸리케 감독은 앞으로 다가올 수차례 평가전을 통해 국내파와 해외파 선수들의 윤곽을 잡아나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시작부터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우선 10월10일 파라과이전, 10월14일 코스라티카전을 거쳐야 하고 11월14일 요르단전, 11월 18일 이란전을 치러야 한다. 특히 내년 1월4일부터 26일까지(한국시간) 호주에서 열리는 2015 AFC 아시안컵은 슈틸리케 감독의 본격적인 첫 시험 무대가 될 전망이다.
 

한국은 이번 아시안컵에서 호주·오만·쿠웨이트와 함께 A조에 편성됐다. 내년 1월10일 호주 캔버라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오만과의 조별리그 첫 번째 경기를 시작으로 쿠웨이트·호주와 차례로 맞붙는다. 다가올 아시안컵이 2018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눈팅
앞으론 슈팅
 
올 여름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토니 크로스가 자국 명문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스페인 무대로 진출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한국대표팀 사령탑이 된 슈틸리케 감독을 언급하기도 했다. 크로스는 독일 축구협회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레알의 하얀 옷을 입고 내 아이돌들이 한때 뛰었던 팀의 미래가 되고 싶다”면서 “특히 레알에는 내가 롤모델로 여기는 독일 출신 선수들이 발자취를 남겼다. 바로 울리 슈틸리케, 권터 네처, 그리고 폴 브라이트너가 그들이다. 그들이 남긴 레알의 영광을 드높이겠다”고 밝혔다.
 
이어 크로스는 “레알은 신화적인 구단이며 영광스러운 과거와 나를 흥분케 하는 미래를 동시에 보유했다”며 “현재 팀 또한 개개인 기량은 물론 팀으로 뭉쳤을 때 대단한 투지와 정신력을 발휘할 수 있다”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크로스가 슈틸리케에게 존경심을 나타낸 이유는 간단하다. 슈틸리케가 과거 레알 시절 오늘날 크로스와 마찬가지로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 역할을 하며 지능적인 경기 운영 능력으로 팀을 이끄는 ‘플레이메이커’였기 때문이다.
 

슈틸리케 감독은 지난 8일 입국 후 가진 공식 인터뷰에서 독일 출신이면서도 스페인 마드리드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르헨티나 출신 수석 코치를 데려올 예정이라고 밝혀 많은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독일 축구계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했다. 다양한 리그의 팀을 지도했지만 자국 클럽은 츠바이트리가(2부리그) 발트호프 만하임을 1년 이끈 게 전부라는 점도 의혹의 대상이었다.
 
슈틸리케 감독은 9일 독일 스포츠 전문매체 <스포르트아인츠>와의 인터뷰를 통해 입을 열었다. 
 
“지난 1977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독일)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스페인)에 입단하면서 독일에선 ‘탈영병’으로 간주됐다. 당시 나는 스물 둘이었다. 그렇게 스페인에서 8년을 뛰었고 이후엔 스위스에서 9년간 선수와 감독을 경험했다.” 
 
해외생활이 길어지면서 배신자 꼬리표를 떼기가 힘들었다는 설명이다. 1970년대의 묀헨글라트바흐는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로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는 등 유럽 최강자로 군림했다. 이 기간 묀헨글라트바흐는 리그 우승 5회(70·71·75·76·77년), 준우승도 2회(74·78년)를 기록했다. 독일을 대표하는 유망주가 떠나자 독일인들은 그에게 ‘탈영’의 꼬리표를 붙이며 비난의 화살을 쏟았다. 그가 마드리드에 거주하며 아르헨티나 코치를 선택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풀이된다.
 
그랬던 그가 독일로 돌아가 8년간 각급 유소년 대표팀(U-19·20·21)을 맡을 수 있었던 계기는 직속 선배 베르티 포그츠(68·현 아제르바이잔 감독) 덕분이었다. 1990 이탈리아월드컵에서 독일을 우승으로 이끈 명장 포그츠와 슈틸리케는 묀헨글라트바흐와 대표팀에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다. 슈틸리케 감독은 2002년 전임자였던 포그츠 감독이 불러줘 독일 21세 이하(U-21) 대표팀과 인연을 맺었다.

위기의 한국축구
기사회생 가능할까
 
현역 시절 슈틸리케 감독은 화려했다. 그는 1977년~85년까지 스페인 프로축구의 명문구단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프라메라리가에서 외국인 선수상을 네 차례나 수상했다.
 
독일 축구의 전설적인 존재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주목받았고, 10년간 독일 대표선수로 A매치 42경기 출전 기록을 갖고 있다. 88년 은퇴한 그는 스위스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돼 이후 스위스와 독일 등에서 클럽 감독으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독일대표팀 수석 코치와 코트디부아르 감독도 역임했다. 2008년부터 최근까지는 카타르리그의 알 사일리아와 알 아라비 감독을 지냈다.
 
슈틸리케 감독은 낮은 자세로 거창한 목표를 남발하지 않았지만 지휘 철학은 분명했다. 그는 “모든 감독들이 여러 문제들을 갖고 있다. 한 경기만 패배하고도 대가를 치를 수 있다. 어려운 결과를 어떻게 극복할지를 잘 준비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볼점유율이 몇 %인지 패스를 몇 번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승리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팀에서 어떤 전술과 스타일을 구사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하지만 그가 ‘이기는 축구’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철저한 실리주의자임은 확실해 보인다.
 
<khlee@ilyosisa.co.kr>

 
[슈틸리케 감독은?] 
▲독일 출생
▲1972∼1977 보루시아 뮌헨글라트바흐(독일)
-리그우승 3회(1975, 1976, 1977), UEFA컵 우승 1회(1973)
▲1977∼1985 레알 마드리드(스페인)
-리그우승 3회(1978, 1979, 1980), UEFA컵 우승 1회(1985)
▲1985∼1988 뇌샤텔 그자막스(스위스)
-리그우승 2회(1987, 1988)
▲1975∼1984 독일 국가대표팀(42경기 출전, 3득점)
-1980 UEFA 유럽 챔피언십 우승, 1982 FIFA 월드컵 준우승
▲1989∼1991 스위스 국가대표팀 감독
▲1992∼1994 뇌샤텔 그자막스(스위스) 감독
▲1994∼1996 SV 발트호프 만하임(독일) 감독
▲1996 UD 알메리아(스페인) 감독
▲1998∼2000 독일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2000∼2006 독일 유소년대표팀 감독
▲2006∼2008 코트디부아르 국가대표팀 감독
▲2008 FC 시옹(스위스) 감독
▲2008∼2010 알아라비 SC(카타르) 감독
▲2010∼2012 알사일리아 SC(카타르) 감독
▲2013∼2014 알아라비 SC(카타르)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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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혼자 꾸는’ 장동혁 용꿈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이재명 대통령의 임기 초반 난맥상이 이어지지만,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용꿈을 꾸지만, 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 채 강경 보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장 대표에게 그와 용꿈을 함께 꿀 수 있는 창조적 소수가 없는 이유는 뭘까? 국민의힘은 지난달 장외투쟁에 집중했다. 지난달 21일엔 대구에서, 지난달 28일엔 서울에서 각각 개최했다.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난 2일 기자간담회에서 “장외투쟁을 통해 정부·여당의 잘못을 국민에게 알렸다”며 “그 과정에서 정부·여당의 지지율이 하락했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지지층 결집으로 싸울 동력도 확보했다”고 주장했다. 벌어지는 지지율 격차 하지만 외부의 평가는 다르다. 보수 신문 <조선일보>는 지난달 23일 사설에서 “스마트폰과 각종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서 국민은 정치권 소식을 실시간으로 보고 듣는다”며 “장외투쟁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느낌을 준다”고 비판했다. 추석 연휴 직전인 지난 2일 오후엔 이진숙 전 방송통신위원장이 체포됐다가 지난 4일 체포적부심이 인용돼 석방됐다. 김건희 여사의 경기 양평군 공흥지구 개발사업 개입 의혹과 관련해 김건희 특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았던 고 정희철 단월면장도 “특검이 강압 수사를 했다”는 취지의 자필 메모를 남긴 채 같은 날 사망했다. 이후 국민의힘은 국회에 정 면장의 분향소를 차렸고, 의원들이 돌아가면서 빈소를 지키고 있다. 지난달 6일 방송된 JTBC 예능 프로그램 <냉장고를 부탁해>엔 이재명 대통령 부부가 출연했다. 이 방영분은 지난달 26일 발생한 국가정보자원관리원 화재 사건 이후인 지난달 28일 촬영됐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주진우 의원은 “국가적 재난 때문에 지금도 국민은 피해를 보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능 촬영하고 있었다면, 이 대통령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추석 연휴 내내 쟁점화를 주도했다. 하지만 국민의힘의 대여 투쟁엔 힘이 붙지 않는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신문> 의뢰로 지난 1일부터 2일까지 전국 18세 이상 유권자 100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국민의힘 지지율은 전주 대비 2.4% 하락한 35.9%로 확인됐다. 47.2%의 지지를 얻은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보다 11.3% 뒤처지는 수치였다. 이는 장 대표의 자화자찬과는 다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이 대통령과 민주당엔 ▲검찰 해체 시도 ▲조희대 대법원장과의 갈등 ▲이 대통령의 예능프로 출연 논란 ▲김현지 제1부속실장 관련 논란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런데도 지지율 격차가 10% 이상 벌어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정의화 전 국회의장은 지난 13일 장 대표와 상임고문단의 오찬 회동에 참석해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정 전 의장은 장 대표에게 “과거 안하무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보수 정당의 잘못이 크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 깊은 반성과 성찰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어 “국민의힘 한동훈 전 대표·개혁신당 이준석 대표·국민의힘 유승민 전 의원 등과 함께 못할 이유가 없다. 새 지도부는 용광로 같은 화합의 정치를 만들어내길 바란다”며 “부정선거론이나 ‘윤 어게인’ 같은 낡은 의제와 결별하고, 민생을 살피면서 국가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데 온 힘을 다해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답 없는 장외투쟁에 멀어지는 대권 ‘밖에서’ 집착… 본질 “사람 없어서” 정 전 의장의 발언 중 핵심은 한 전 대표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장 대표는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와 관련해 의견이 엇갈려 한 전 대표와 결별했다. 장 대표는 지난달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전 대표를 지지하는 분들이 무차별적으로 저를 비난·모욕·배척하는데 어떻게 정치 행보를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엔 자신의 당 대표 당선을 도운 강경 보수 성향 유튜버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당내 중도 성향으로 평가받는 김도읍 의원을 정책위의장으로 발탁하는 등 중도 공략을 고려하는 것으로 보였다. 유튜버 고성국씨는 이에 크게 반발하면서 “많은 분이 ‘김도읍이 웬 말이냐’고 비판하는데, 김 의원은 그런 비판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했다. 고씨는 “국민의힘은 자유통일당 등 원외 보수 정당에 지방자치단체장 30석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장 대표는 이들의 요구를 일체 무시하면서 이들의 영향력 감소를 시도하는 것으로 보였다. 한때는 “공천 청탁을 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등 “보수의 김어준 반열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들었던 전한길씨도 최근엔 전당대회 당시의 기세는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장 대표는 추석 연휴이던 지난 7일, 서울의 한 극장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전쟁 2>를 관람했다. <건국전쟁 2>는 1947년부터 군·경찰·서북청년단 등과 남조선노동당이 제주도에서 번갈아 이어간 학살 사건인 4·3 사건을 다뤘다. 이를 연출한 김덕영 감독은 주로 남조선노동당의 학살 위주로 내용을 구성했다. 김 감독은 평소 이승만 전 대통령을 지지하면서 부정선거론을 주장해 왔던 인물이다. 4·3 사건은 국가 폭력을 상징하는 전형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전히 민감하다. 하지만 국민의힘과 보수 진영 일각에선 잊을 만하면 양민 학살을 부정하거나 군경의 대응을 찬양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장 대표의 <건국전쟁 2> 관람은 보수 정당 수장이 4·3 사건에 대한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를 남긴다. 아울러 국가 책임을 부정하는 주장을 수시로 제시하는 세력은 강경 보수 세력이다. 이런 대응은 이재명 대통령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국민의힘이 대안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는 국민의힘 지지율 추세로 확인할 수 있다. 추석 연휴 전까지 집중했던 장외투쟁도 장 대표 스스로 직접 전면에 나서 여론을 움직이려 한다는 취지로 해석됐다. 하지만 장 대표가 강경 보수 진영의 지원을 토대로 당선됐던 것 자체가 강경 보수 외 유권자에겐 큰 호감을 주지 못하는 족쇄가 되고 있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민의힘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내 쇄신이었다. 기행은 멈췄지만… 특검 3개(김건희·내란·채 상병)가 국민의힘을 동시에 겨냥하는 현 상황은 모두 윤 전 대통령의 그림자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따라서 국민의힘엔 ▲부정선거론 근절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 제거 ▲중도 공략 등 산적한 숙제가 있었다. 장 대표가 무시 전술로써 강경 보수 세력의 영향력을 서서히 줄이고 있지만, 유권자로선 만족을 느끼기 어렵다. 정권을 맡을 수 있는 정당으로 다시 도약하기 위해선 확실한 절연이 필요했다. 하지만 장 대표 스스로 <건국전쟁2>를 관람하면서 그동안 구사했던 무시 전술도 그 진의를 의심받을 가능성이 열렸다. “당내 쇄신이 아닌 자신의 영향력 확대만을 위한 무시였느냐”는 의심이다. 특정 세력의 지원을 받은 수장이 수성을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대개 토사구팽이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정치력을 높이 평가받는 역사적 인물들은 적절한 토사구팽을 통해 수성기를 열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이 이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장 대표 취임 이전 국민의힘은 권영세 전 비상대책위원장·권성동 전 원내대표가 일명 ‘쌍권 체제’를 구성해 ▲대선후보 심야 교체 시도 ▲자체 개혁안에 대한 특정 계파의 조직적 저항 등 기행을 저지르면서 여론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장 대표 취임 이후의 국민의힘에서 이런 기행은 잘 보이지 않으나, 그 이상으로 나아가질 못하고 있다. 이는 재보궐선거 당선으로 국회에 입성해 재선 의원이 된 지 불과 1년여가 지난 장 대표의 짧은 정치 경험 등 부실한 정치 기반으로부터 비롯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개혁신당 이준석 대표는 장 대표에 대해 꾸준히 “용꿈을 꾸고 있다”고 평가한다. 장 대표도 이를 직접 부인하진 않는다. 그런데 용꿈은 특정 정치인 1명이 특출나다는 이유만으로 꿀 수 있는 꿈이 아니다. 장 대표는 아직 “용꿈을 꿀 만큼 특출난 정치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용꿈을 현실로 구현하기 위해선 ▲시대적 사명 구현 ▲강한 개혁 의지 ▲구체적 개혁 대안 제시 ▲강도 높은 자체 혁신 ▲추상적 비전을 구체화할 수 있는 전문가 집단 구성 등 요소가 필요하다. 용꿈은 용이 되려는 사람과 이를 뒷받침하는 집단의 상호 작용으로 현실이 된다. 전문가 집단은 추상적 비전을 구체적 개혁 대안으로 제시해야 하고, 용꿈을 꾸는 사람은 구체적 개혁 대안을 현실에서 구현해 민심의 호응을 얻어야 한다. 부실한 정치 기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저서 <역사의 연구>를 통해 ‘창조적 소수’라는 개념으로 용꿈을 현실화하는 과정을 이론화했다. 토인비는 문명의 순환을 통해 역사의 변혁 과정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문명이 쇠퇴하거나 낯선 도전에 직면했을 때 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발전을 꿈꾸는 집단이 나타난다. 토인비는 이들에게 ‘창조적 소수’라는 이름을 붙였다. 장 대표가 강경 보수와의 관계에 명확하게 선 긋지 못한 채 장외투쟁에 집중하는 것에 대한 해답도 있다. 토인비는 창조적 소수가 새로운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비결로 혁신적인 구상을 제시했다. 혁신적인 구상을 통해 세상에 충격을 주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진골 귀족들 간 왕위 쟁탈전이 장기간 이어져 중앙정부가 지방 통제 능력을 잃었던 통일신라 말기엔 후삼국시대가 이어졌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미 멸망한 고구려·백제가 통치했던 지역에선 유민 의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을 물리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 비전이었다. 왕건은 ‘삼한일통’이란 구호를 내걸면서 신라에 우호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이는 신라를 무력으로 함락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신라의 각종 기술자를 후백제로 압송했던 견훤의 대응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었다. 견훤의 대응에 분노했던 신라 호족은 고려로 기울었고, 이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게 된 결정적 밑거름이 됐다. 훗날 고려는 원나라의 간접 지배와 권문세족의 수탈로 인해 저물었다. 권문세족이 산과 강을 경계로 대농장을 소유하면서, 조세·부역을 직접 감당하는 평민의 경제 기반이 무너졌다. 조선 태조 이성계는 2000명 규모의 사병 집단 가별초를 거느린 대부호였다. 그는 경제력과 군사력을 기반으로 왜구와의 전쟁에서 대활약해 실력자로 부상했다. 그의 막료로 가담한 정도전·조준·남은·윤소종은 당시 새로운 흐름이었던 성리학을 배운 신진사대부였다. 이들 중 조준은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을 막을 수 있는 방편으로 과전법을 제시했다. 과전법은 권문세족의 토지를 모두 몰수해 국유화한 후 전·현직 관료에게 경기도에 한정해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였다. 과전법은 이성계의 막강한 권력·군사력을 기반으로 실현됐고, 그가 새 왕조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과전법이 시행돼 백성들이 춤을 추면서 기뻐할 때, 국왕 즉위 이전부터 대토지를 보유했던 고려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아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고려가 왜 멸망했고, 조선이 왜 개창될 수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한 장면이다. “싸울 동력 확보” 자화자찬 “이미 한계만 노출” 평가도 이성계의 등장 이전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을 가졌던 사람은 최씨 무신정권을 열었던 최충헌이었다. 그런데 최충헌은 정치개혁과 체질 개심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정예 병력을 자신의 사병 조직에 포함할 뿐, 거란 유민의 고려 침공을 방치했다. 거란 유민은 당시 떠오르던 몽골과의 협력을 통해 물리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는 늑대를 몰아내고 호랑이를 불러들였을 뿐이었다. 최충헌 사후 닥친 국난은 여몽 전쟁이었다. 최우 등 최충헌의 후계자들은 임시 수도 강화도에서 오로지 정권 보위에만 집중했다. 그들은 몽골군이 쳐들어오면 항복한 후 몽골군이 철군하면 항복 조건을 어기는 행태를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백성들은 각자도생해야 했다. 최씨 정권이 몰락한 후 집권했던 무신 집권자들도 이 행태를 반복했다. 그들이 국난 극복을 등한시한 결과, 고려는 몽골이 중국을 접수한 후 세운 원나라의 간섭을 장기간 받아야 했다. 이는 현대 정치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역대 정권은 모두 새로움을 강조하는 슬로건을 제시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정 종식을, 김대중 전 대통령은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노무현 전 대통령은 사람 사는 세상을, 이명박 전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을, 문재인 전 대통령은 적폐 청산을, 이 대통령은 내란 종식을 제시했다. 토인비가 문명의 순환을 강조했던 이유는 성공하거나 많은 것을 누리면 나태해지는 인간의 속성과 관련돼있다. 토인비는 “성공한 창조자는 다음 단계에서 다시 창조자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는 “성공 자체가 큰 흠결이 되기 때문”이라며 “이미 성공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손을 쉬고 있어서 사회 발전에 쓸모를 다했다”고 설명했다. 국민의힘에선 김용태 전 비대위원장과 윤희숙 전 혁신위원장이 당 체질을 개선할 혁신안을 발표한 후 실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일명 ‘언더 찐윤’으로 통하는 영남권 일부 국민의힘 의원들은 조직적으로 이를 방해했다. 이를 똑똑히 목격한 장 대표는 지방선거 승리를 외치면서도 당내 혁신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 주류와 반목하는 한 전 대표와 친한계(친 한동훈)를 겨냥해 패널 인증제를 언급하는 등 당 주류의 영향력을 고착화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누구나 꿈꿔도 이룰 수 없는… 하지만 여론은 국민의힘의 혁신과 중도 확장을 바라고 있다. 이 때문에 이재명정부의 초반 난맥상에도 불구하고, 민주당과 국민의힘의 지지율 격차는 더욱 커지고 있다. 용꿈을 함께 실현할 창조적 소수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자기 사람은 진득하게 비전을 통해 설득하면서 만들어진다. 장 대표에게 필요한 것은 “국정감사 이후엔 어디서 장외투쟁을 하느냐”가 아니라 “왜 내 주변엔 사람이 없어서 내가 직접 장외투쟁을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용꿈은 누구나 꿀 수 있지만, 아무나 이룰 수는 없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