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탕웨이·김태용 러브스토리

감독과 배우 “영화 찍다 눈 맞았다”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중국 여배우 탕웨이(34)와 영화 <만추>의 김태용(44) 감독이 공식적으로 결혼을 발표했다. 갑작스런 소식에 양국의 팬들은 놀란 모습이다. 두 사람은 2009년 영화를 찍으며 처음 만났다. 그리고 2012년 11월 열애설을 부인했지만 결국 지난 2일 “가을에 결혼식을 올린다”고 알려왔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국경을 넘은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진 걸까.


지난 2일 영화 <만추>의 김태용 감독의 소속사인 (주)영화사 봄은 “중국 여배우 탕웨이와 김태용 감독이 결혼한다”고 공식 입장을 밝혔다. 영화 <만추>에서 함께 작업한 김 감독과 탕웨이는 그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오다가 지난해 탕웨이가 <만추> 촬영 이후 작년에 광고 촬영을 위해 내한했을 때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깜짝 발표
폭발적 반응
 
탕웨이와 김 감독은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랑을 키웠고 올 가을 결혼식을 올린다. 이들은 가족과 친지 등 가까운 지인들의 축복 속에 비공개로 결혼식을 치를 예정이다.
 
영화사 봄은 “영화 <만추>에서 함께 작업한 두 사람은, 영화 작업 이후에도 좋은 친구로 지내왔다. 2013년 10월,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내한했을 때 두 사람은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하게 됐다. 이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랑을 키워온 두 사람은 이제 부부로 인연을 맺는다”고 밝혔다.
 
김 감독과 탕웨이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며 사랑을 싹 틔운 것으로 전해졌다. 두 사람은 지난 2010년부터 매년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다. 탕웨이는 외국인 배우로는 최초로 지난 2012년 10월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사회를 맡기도 했다.
 
영화 관계자들에 따르면 탕웨이와 김 감독은 지난 2012년 해운대의 명물 포장마차 촌에서 함께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다정한 시간을 보냈다. 모자를 눌러쓰고 캐주얼 차림으로 포장마차에 나타난 탕웨이는 일행과 그곳을 찾은 많은 국내 배우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두 사람은 캐주얼한 복장에 모자를 눌러쓰고 편안하게 거리를 활보한 것으로 알려져 눈길을 끌었다. 또한 두 사람은 지난 2012년 11월 탕웨이의 경기도 분당 자택 매입설이 돌며 열애설에 휩싸였으나 양측 모두 이를 부인한 바 있다. 탕웨이는 2012년 7월 경기도 분당에 13억원 상당의 토지 150평을 매입해 7월 자신의 명의로 등기등록을 마쳤다. 탕웨이는 이를 위해 ‘6’으로 시작하는 외국인 주민번호까지 발급받았다.
 
탕웨이가 사들인 분당 구미동 땅은 김 감독의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탕웨이는 “김태용 감독과 나는 좋은 친구일 뿐”이라며 “영화 <만추>를 찍으며 나를 잘 이끌어주고 지도해줘 그에게 고마워하고 있다. 나는 요즘 새 영화 준비로 바쁘다”고 밝혔으며, 김 감독 측 역시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영화사 봄에 따르면 열애설이 보도된 당시 두 사람은 작품으로 이어진 ‘친구’ 관계였다. 봄 측은 2013년 10월 광고 촬영을 위해 탕웨이가 내한했을 당시 김 감독과 친구에서 연인으로 발전했으며, 이후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사랑을 키워오다 부부로 인연을 맺게 됐다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영화를 통해 우리는 알게 되었고 서로를 이해하게 됐다. 친구가 되었고 연인이 됐다. 이제 남편과 아내가 되려고 한다. 물론 그 어려운 서로의 모국어를 배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어려움은 또한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될 것이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그 과정에서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리라 믿는다. 무엇보다 영화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증인이 될 것이다. 우리를 격려해주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리며, 세상의 모든 소중한 인연이 다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김 감독의 측근에 따르면 김 감독은 이날 오전 지인들에게 결혼 소식을 알린 뒤 중국으로 곧장 출국했다. 김 감독은 중국에 도착해 탕웨이 가족과 정식으로 인사를 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리에서 구체적인 결혼 날짜를 확정할 것으로 보인다.

감독과 배우

오작교 <만추>
 
탕웨이와 김 감독의 결혼 소식이 알려지면서 한국 언론뿐 아니라 중국 언론들도 앞다퉈 속보로 이 소식을 내보냈다. 중국 관영 매체 <신화망>은 “2012년에는 좋은 친구사이라고 하더니 이제 결혼한다”며 “한국의 영화 관계자들은 지난해 부산 영화제에서도 김 감독과 탕웨이를 자주 목격했다고 한다. 또 탕웨이가 한국 경기도 분당에 토지를 매입한 것도 이들의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김 감독도 베이징에 올해 자주 들렀다”며 이들 결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중국 최대 포털사이트인 ‘시나닷컴’에는 탕웨이와 김 감독의 결혼 기사에 20만개 이상의 댓글이 달려 중국 내의 뜨거운 관심을 입증했다. 탕웨이와 김 감독 결혼에 대한 설문조사가 진행되기도 했다. 설문에 참여한 이들 중 30.8%는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에 놀랐다’고 반응했다. ‘김태용 감독이 누구냐’가 30.1%로 2위에 올랐으며 3위는 25.7%가 응답한 ‘여신의 결혼을 축복한다’ 등으로 나타났다.
 
조만간…깜짝 결혼 발표에 한중 ‘발칵’
설마 했는데…이미 감지된 핑크빛 기류
 
탕웨이의 전 남자친구였던 텐위의 반응에도 시선이 집중됐다. 또한 ‘시나닷컴’은 “탕웨이의 전 남자친구인 텐위와 연락했다”며 “텐위는 탕웨이의 결혼 소식에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라고 반응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텐위는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영화배우로, 탕웨이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첫 연인으로 알려져 있다. 두 사람은 2007년 9월 탕웨이가 영화 <섹, 계>를 찍은 후 헤어졌다. 당시 텐위가 탕웨이의 농도짙은 베드신 연기를 탐탁지 않게 여긴 것이 결별 이유로 알려진다. 
 
대만 출신 가수 겸 배우 왕리홍은 중국 SNS 웨이보에 “축하해요 탕웨이”라는 글을 게재했다. <황금시대>에 함께 출연한 펑샤오펑 역시 “축복! 행복!”이라며 탕웨이 결혼소식에 축하를 전했다. 영화 <건당위업>을 연출한 허핑감독은 탕웨이와 함께 작업했던 때를 회상하며 “10여년 전 컬럼비아 영화사 중국지사를 담당할 때 동료가 여학생을 데려왔다. 입시 준비 중이라고 했다. 그가 오늘 결혼한다고 발표했다. 진심으로 축하한다”며 어느덧 결혼을 앞두고 있을 만큼 자란 탕웨이에 감회를 전했다.
 
국내 영화계도 중국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영화 <화차> <발레교습소> 등을 연출한 변영주 감독은 “제수씨가 탕웨이가 될 줄 몰랐다”며 “현빈을 내버려두고 김태용이라니, 여신과 결혼했으니 ‘노팅힐’인가”라며 부러움 섞인 축하인사를 건넸다. 영화 노팅힐은 평범한 남성과 세계적인 여배우의 사랑을 다룬 영화로 이 둘을 연상시킨다.
 
영화 <방가방가> <강철대오:구국의 철가방> 등을 연출한 육상효 감독은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집에 들어오니 아내가 탕웨이가 아니라 미안하다며 닭백숙을 내왔다. 나도 김태용이 아니니 괜찮다며 열심히 닭백숙을 먹었다. 우리의 눈물로 소금 간은 필요치 않았다”라고 말해 폭소를 자아냈다.
 
탕웨이는 김 감독과 한국영화 작업을 또 하려 했었다고 전해진다. 웹툰 원작을 바탕으로 한 <신과 함께>에 출연하려 했었다. 김 감독뿐 아니다. 많은 한국영화 감독들이 탕웨이와 작업을 하고 싶어 했다. 그 만큼 탕웨이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다. 

그를 바라보는
부러운 시선들
 

탕웨이의 연예계 활동은 꽤 오래됐다. 10대 시절 모델로 활동했던 그녀는 베이징중앙희극학원에서 착실히 수업을 들었고, 2004년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미스 월드 베이징 대회에 출전해 5위에 입상했다. 이후 TV드라마나 연극 등에 출연하던 중 드디어 2006년 CCTV 영화채널에서 수여하는 최고 여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에게 리안 감독의 <색, 계> 오디션은 놓칠 수 없는 절호의 기회였다. 베이징과 홍콩을 오가며 모두 5번의 오디션을 봤다. 그러다 마음을 비우고 지방에 내려가 있던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탕웨이는 “아버지와 함께 산을 오르고 있는데 빨리 다시 홍콩으로 오라고 하더라. 난 또 6번째 오디션 연락으로 생각하고 ‘이미 5번이나 봤는데 뭐 한번 더 못하겠어, 라는 생각으로 홍콩으로 갔다. 그런데 한참 시키는 대로 하다보니 오디션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안 감독이 조용히 카메라 앞에 서라고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탕웨이는 약 1만명의 오디션 참가자 중에서 주연으로 캐스팅 됐다. 그녀는 친일파 핵심인 정보부 대장 ‘이(양조위)’를 암살하려는 여자 스파이 ‘왕치아즈’ 역을 연기하면서 파격적인 성 묘사를 보여줘 큰 화제가 됐다. 양조위와 비교해도 당당히 ‘주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표정과 몸짓은 살아 있었다.
 
<색, 계>가 제64회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면서 탕웨이는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할 수 있었다. 이후 대만의 아카데미상이라 불리는 제44회 대만 금마상에서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8년 3월, 탕웨이가 출연한 TV광고가 중국의 국가 방송 영화 텔레비전 총국의 지시로 방영이 금지됐다. 이유는 당시 중국에서 <색, 계>를 둘러싸고 농도 짙은 정사신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것.
 
또한 <색, 계>는 1939년부터 1940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들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탕웨이의 친일논란은 중국 문화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중국 영화계는 탕웨이의 영화출연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중국 영화 팬들은 ‘반일’ 보다는 ‘여신’을 선택할 정도로 이미 그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같은 해, 탕웨이는 홍콩 정부의 우수 인재 영입계획에 따라 홍콩 영주권을 받았다.
 
영화 <만추> 인연으로

국경·나이 넘은 사랑
 
이후 2009년 11월, 김 감독의 영화 <만추>의 리메이크판에서 수감된 지 7년 만에 특별 휴가를 나온 여자 ‘애나’ 역으로 캐스팅 되어, 상대 배우 현빈과 미국 시애틀을 배경으로 촬영에 임했다. 영화 개봉 이후에는 한국 광고 출연과 2012년 제17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안성기와 개막식 사회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에서 사랑 받는 대표적인 중화권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2015년 개봉 예정인 마이클 만 감독의 <사이버>에서는 크리스 헴스위스의 연인 역을 맡아 헐리우드에 진출했다.

영화 <노팅힐>
현실판으로…
 
김 감독은 올해로 마흔 여섯 살이다. 불혹의 나이에도 탕웨이와의 나이차가 무색할 만큼 동안외모를 자랑한다. 평소 시사회나 영화제에서 포착된 김 감독은 큰 키, 작은 얼굴, 깔끔한 인상이다. 또 남다른 패션 센스를 발휘하며 ‘훈남’ 이미지를 갖고 있다. 
 
김 감독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3년 간 취업을 하지 않았다. 그가 경제활동을 하지 않고 3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비교적 넉넉한 집안 배경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성격은 내성적인 편이었다.
 
그런 그가 우리나라 유명 영화감독들을 배출해낸 한국영화아카데미에서 13기로 졸업하고 호주로 떠나 국립영화학교에서 공부했다. 영국에서 유학했던 탕웨이와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것도 김 감독이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김 감독은 조근 조근한 말솜씨로도 유명하다. 
 
김 감독은 1999년 영화 <여고괴담2>로 데뷔했다. 흥행까지는 아니었지만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하며 한국 영화계의 유망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가족의 탄생>이 현대사회의 새로운 가족의 정의를 제시하면서,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 대종상영화제에서 시나리오상을 수상하며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다.
 
탕웨이와의 인연이 시작된 영화 <만추>는 한국남자와 중국여자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김 감독은 탕웨이 사진을 벽에 붙여 놓고 시나리오를 썼다. <만추>가 호평을 받으면서 김 감독은 입지를 굳혔다. 지난 5월에는 옴니버스 3D영화 <신촌좀비만화>의 세 번째 이야기 <피크닉>을 연출했다. 가벼우면서도 재기발랄한 연출 능력도 보여준 것이다. 
 
 
<khlee@ilyosisa.co.kr>
 

[탕웨이는?]
 
▲베이징중앙희극학원 
▲중국 백화상 우수 여배우상
▲제12회 시네아시아 어워즈 올해의 아시아여자스타상
▲제44회 대만 금마장 최우수신인상
▲제47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
▲제11회 중화권영화미디어대상 여우주연상
▲제31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연기상
▲제12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자우수연기상
▲제3회 올해의 영화상 여우주연상
▲제5회 중국 영화감독협회 올해의 여배우상
▲제21회 베이징대학생영화제 여우주연상
-출연작
2006 <여인부곡> <생우육십년대>, 2007 <색, 계>, 2010 <크로싱 헤네시> <만추>, 2011 <동려군> <건당위업> <무협>

[김태용은?]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사
▲단국대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 교수
▲배리어프리영화제 홍보대사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여고괴담2)
▲제27회 청룡영화상 감독상(가족의 탄생)
▲제44회 대종상영화제 감독상(가족의 탄생)
▲문화관광부 오늘의 젊은예술가상
▲제45회 영화의 날 유망감독상
▲제20회 부일영화상 최우수 감독상(<만추>)
▲그린산타상
▲제31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영화부문
-대표작
2006 <가족의 탄생>, 2010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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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①군 정보사는 왜 개입했나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오혁진 기자 = 윤석열 전 대통령이 지난해 12월3일 선포했던 비상계엄을 포함해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총 17번의 계엄령이 선포됐다. 야당의 무분별한 탄핵 남발과 정부 예산 삭감 등이 이유였다. ‘충격요법’ 차원의 계엄령이라는 주장과 달리, 백병전에 특화된 북파공작대(HID) 요원을 투입한 것도 이례적이다.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은 비상계엄과 경비계엄으로 나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이 선포한 비상계엄은 적과 교전 상태에 있거나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됐을 경우 발령할 수 있다. 경비계엄은 그보다 낮은 수위로 경찰 등 일반 행정기관만으로는 치안을 확보할 수 없을 때 선포할 수 있다. 사실상 실패한 계엄 이후 2차 계엄 의혹마저 제기되면서 윤 전 대통령은 파면됐다. 국민 향한 특수부대 계엄은 대통령이 전시·사변 등의 국가 위기 상황에 군사력을 동원해 공공질서를 유지하게 하는 비상조치로 대한민국 헌법 제 77조에 규정돼있다.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경우, 대통령이 임명한 계엄사령관은 계엄 지역의 행정권과 사법권을 모두 갖게 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도 제한되며 작전상 부득이한 경우라고 판단하면 국민 재산을 파괴하거나 소각하는 권리도 갖게 된다. 불법 계엄 사태 당시 국군방첩사령부와 함께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에 병력을 투입한 계엄군 핵심은 국군정보사령부(정보사)였다. 정보사 예하 HID 요원 일부가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의 사조직인 ‘정보사령부 수사2단’에 동원된 것이다. 대북 공작에 특화된 ‘살인 병기’로 불리는 HID 요원들은 노 전 사령관 등 수뇌부의 정치적 일탈행위로 인해 불명예를 안게 됐다. 노 전 사령관은 육군사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꾸린 내란 사조직의 수장 노릇을 했다. 이렇게 조성된 ‘육사 카르텔’은 12·3 비상계엄 선포 석 달 전부터 진급을 미끼로 조직원 포섭을 시작했다. 지난해 말 김 전 장관은 문상호 전 정보사령관 등 수뇌부에 ‘노 전 사령관이 하는 일을 잘 도와주라’는 취지로 지시했다. 이들은 문 전 사령관과 노 전 사령관 지시가 곧 김 전 장관의 지시인 것으로 받아들여 계엄을 준비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노 전 사령관은 문 전 사령관과 정성욱·김봉규 정보사령부 대령에게 수사2단에 편성할 정보사 소속 요원을 선발하라고 상세히 지시했다. 김 대령은 2016년 노 전 사령관의 현역 시절 과장 신분으로 함께 근무했다. 취재진이 입수한 검찰 수사기록에 따르면,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0월경 김 대령에게 전화를 걸어 “특수요원 중에 사격 잘하고, 폭파 잘하는 그런 인원 중에 한 7~8명을 나에게 추천 좀 해달라”고 했다. 당시 김 대령은 “특수 요원들이 전역하게 되면 대통령경호처, 국정원 특임 조직 등으로 재취업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도와주려고 하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었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이 문 전 사령관보다 먼저 김 대령에게 특수부대, 공작요원 등으로 인원을 선발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문 전 사령관은 김 대령에게 재차 ‘노 전 사령관이 말한 것을 잘 이행하라, 잘 도와라’라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부대를 모집한 이유에 관해 김 대령은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면 우리가 원점을 타격해야 하기에 필요하다고 노 전 사령관이 말했다’고 한다. ‘충격 요법’ 차원 출동? HID 요원 투입 ‘백병전 고수들’ 모아 선관위 장악 플랜 계엄 두 달여 전인 지난해 10월 말까지만 해도 평소처럼 북한이 오물풍선을 보내는 상황이었고, 이밖에 특수한 상황은 없었다. 문 전 사령관이 본격적으로 HID 인원 선발에 착수하라고 지시하자, 김 대령은 지난해 10월30일 모 주임원사에게 연락을 취해 ‘5명 정도 특수무술 잘하는 인원을 추천해달라고 했다’고 진술했다. 김 대령은 특수부대 5명과 우회요원 10명을 포함한 총 15명의 선발 명단을 만들어 노 전 사령관에게 텔레그램으로 전달했다. 이어 지난해 11월9일 오후 4시경 노 전 사령관과 김 대령, 문 전 사령관은 안산 상록수역서 만났다. 노 전 사령관이 특수요원 선발,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하자, 문 전 사령관은 “오물풍선이 날아오는 대북 상황에 우리 정보사가 들어갈 필요가 있겠냐” 물었다. 그러자 노 전 사령관이 ‘언론에 평상시에 나지 않는 특별한 보도가 날 거야’라고 답했다고 한다.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특별한 보도는 부정선거 의혹이었다. 그러면서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중앙선관위로 가서 관련된 사람들을 잡아와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노 전 사령관이 이들에게 건넨 A4용지 10장 분량의 부정선거 관련 자료에는 선관위 부서와 직원 30여명을 체포하라는 지시와 함께 ‘계엄 선포 시 할 일’이라고 기재돼있었다고 한다. 자료에 계엄 선포 날짜는 없었으나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조만간 상황(계엄 선포)이 생길 것”이라며 “출장이나 장거리 출타를 가지 말라”고 지시했다. 김 대령이 이해한 노 전 사령관의 지시는 계엄이 선포되면 선관위에 가서 부정선거 관련 잘못한 사람들을 잡아들여야 한다는 정도였다. 그는 ‘사실 처음 듣고는 황당했다. (노 전 사령관이) 대북상황이라고 주장하지만, 계엄을 선포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국내 정세로도 계엄을 선포할 상황이 아니니까. 그리고 부정선거를 이유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진술했다. 노 전 사령관은 이들에게 계엄 시 ▲소집된 인원과 차량이 수방사에 출입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수방사 시설 확인 인원을 제외한 전 인원은 계엄 후 6시30분까지 선관위로 가서 선관위 직원 명부를 파악하고, 부정선거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공간 확보 ▲선관위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곳에서 ‘부정선거 관련, 아는 사항이 있거나 선거 조작에 대해 아는 사항이 있으면 양심고백을 하라’는 내용의 문구를 올리고, 사령부 내에 일반전화 및 콜센터 설치 ▲선관위 방송실에 가서 선관위 내부 방송을 통해 계엄 상황을 고지하고, 계엄 상황이니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체포 등의 조치가 있음을 경고하라는 총 4개의 임무를 부여했다. 또 30여명의 선관위 직원은 정 대령 팀에게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속초 정보사 교관 A씨는 비상계엄 선포 직전 판교에 있는 본부에 소집됐다고 진술했다. 실제로 A씨는 문 전 사령관 등의 지시를 받고 판교에 HID 요원 5명을 투입했다. 진급에 목매다 A씨는 검찰 조사에서 “속초서 온 인원 중 3명이 김 대령 팀에 속해 있는데, 그 중 2명에 대해 김 대령은 ‘너희들은 내가 취조할 때 내 뒤에서 취조 대상자들이 나를 해하려고 하면, 나를 보호해라. 그리고 내가 취조할 때 상대방이 겁 먹을 수 있도록 옆에서 책상을 치거나 욕을 하거나 노려보는 등으로 취조 분위기를 조성해라’고도 했다”고 진술했다. 국방부 아래 가장 비밀스럽고 강력한 정보사가 한낱 민간인 지휘 아래 계엄에 투입된 웃지 못할 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체포된 윤 전 대통령의 자필 편지처럼 ‘계엄의 형식을 빌린 대국민 호소’였다면 HID가 왜 필요했는지 의문이다. <일요시사>가 만난 정보사 출신 군 고위 관계자는 “상명하복이 원칙이니 HID 요원들도 따를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번 사태는 문 전 정보사령관의 투입 명령에 충분히 불복할 수 있었다고 본다”며 “국방부에 책잡힌 몇몇 사건의 영향도 있고, 문 사령관이 진급이라는 미끼를 물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국군정보사령부(이하 정보사)는 가장 진급이 어려운 곳이다. 현재까지도 소장 직급인 정보사의 경우 사령관 직무 배제 및 전직 정보사 여단장 전출 등 각종 이슈로 인해 ‘원스타’ 계급장을 단 장군조차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사의 사령관은 소장이지만 지휘부는 군단 편제와 같다. 이유는 김영삼 전 대통령 취임 직후 정보사령관의 계급을 소장으로 낮췄기 때문이다. 단, 기무사는 1년 뒤 중장으로 다시 사령관 계급을 올렸다. 실제로 HID 팀원들도 자신의 계급을 보안상 알 수 없으며, 사실상 최종 계급은 원스타다. 노 전 사령관이 계엄 선포 계획에 동참한 군 장성들의 진급을 도운 정황은 정 대령의 진술서도 나왔다. 지난해 12월1일 안산시 롯데리아서 노 전 사령관, 문 전 사령관, 김 대령의 회의 당시, 수차례 ‘내가 도와줄게’라며 정 대령에게 일을 시켰다. 실제로 정 대령은 “노상원의 군내 인맥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아서, 솔직히 진급 욕심이 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진술했다. 또 그는 노 전 사령관으로부터 “계엄이 선포되면 정 대령과 김 대령이 팀을 나눠 중앙선관위 직원 30명을 체포해 중앙선관위 회의실 등에 가둔 뒤 이들을 수방사 B1벙커 내 수감시켜두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주장했다. 이후 노태악 선관위원장을 처리하는 일은 노 전 사령관이 직접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덧붙였다. 노 전 사령관의 지시로 12·3 계엄령 작전에 배치된 HID 요원들은 근접 전투 능력이 뛰어난 이들로 선발됐다. 윤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날 HID 요원 5명은 서울 외곽인 판교에 배치됐고, 나머지 35명은 서울 시내 곳곳에 배치됐다. 사령관과 육군 카르텔 12·3 내란의 우두머리는 체포된 윤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으로 드러났다. 특히 김 전 장관은 계엄 이틀 전인 12월1일부터 곽종근 특전사령관 등에게 전화를 걸어 전체적으로 지시를 점검했다고 한다. 정보사가 국방부에 장악된 배경도 의아하다. 정보사는 애초 국방부가 아닌 합동참모본부 정보본부장의 지휘·통제를 받는 조직이다. 그러나 문 사령관은 “장관 지시의 보안 유지 차원서 본부장에게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공식 지휘를 건너뛰고 국방부 장관과 직접 소통했다는 의미다. 계엄 수개월 전 정보사를 곤란하게 만든 두 사건 때문에 국방부가 틀어쥘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7월 정보사 군무원이 블랙요원 수십명의 신상을 중국으로 유출한 사건과 정보사 수뇌부끼리 감정싸움이 벌어져 고소전으로 번진 사건이다. 김 전 장관은 두 사건을 핑계 삼아 정보사를 장악하려 했다. 같은 해 8월, 국방부 장관 부임 직후 정보사를 ‘해체’ 수준으로 개편한다고 예고하더니, 정보사를 국방부 직속 부서인 ‘국방정보실’로 옮기는 안을 검토했다. 다만 그해 10월 언론보도로 계획이 유출되자 실행에 옮기진 않았다. 이후 김 전 장관은 OB(퇴직자) 활용으로 방향을 튼 것으로 추정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 경호차장 근무 경험이 있는 노 전 사령관을 연결고리로 활용한 것이다. 같은 해 12월1일 노 전 사령관은 정모 대령 등에게 ‘진급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인맥을 과시하며 협조를 요구했다고 한다. 실제로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현역 군인들의 진급, 인사에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노 전 사령관은 입버릇처럼 김 대령에 ‘오늘도 용산에 다녀왔다’는 식으로 김 전 장관과의 인맥을 자랑했다. 특히, 진급 발표 시기에 노 전 사령관은 하루에 3~4번씩 김 대령 등에게 연락해 현역 장성들의 근황을 묻곤 했다고 한다. 한편, 윤 전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령을 포함해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서 계엄령은 총 17번 선포됐다. 이 중 비상계엄은 12번에 달한다. 헌정사상 첫 계엄령은 이승만정부 시절 1948년 10월 여수·순천 사건을 계기로 발동됐다. 앞서 국군 제14연대가 이승만정부가 내린 ‘제주 4·3사건 진압 명령’을 거부하면서 무력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여수·순천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두 번째 계엄은 같은 해 11월 ‘4·3 사건’ 당시 제주지역에 선포됐다. 당시는 아직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이었으므로 일제강점기의 계엄법에 해당하는 ‘합위지경’을 적용했다. 정작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24일이다. 김봉현과 한 배 탄 민간인 노상원 “까라면 까야지” 어이없는 수하들 이후 6·25 전쟁으로 인한 첫 전국 단위 계엄령이 선포된다. ‘4·19 혁명’ 당시에는 학생 시위를 막는 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는 다음 정부로 이어져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듬해 12월6일 이를 해제했다. 비상계엄 12일에 경비계엄 558일로 한국 역사상 지속 기간이 가장 길었던 계엄으로 기록됐다. 이후 박 전 대통령은 한일 협정에 반대하는 ‘6·3 항쟁’에 대응한다며 계엄령과 휴교령을 발령했다. 대통령 간선제를 골자로 하는 10월 유신, 부마항쟁 때도 계엄령을 발동했다. 마지막 비상계엄은 1979년 10월26일 박 전 대통령이 시해된 다음 날 발령됐다. 이 계엄령은 1979년 ‘12·12 쿠데타’로 사실상 권력을 장악한 전두환·노태우 등 신군부에 의해 1980년 5월17일을 기해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로 인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부마항쟁으로 인해 1979년 10월18일 부산지역에 선포된 계엄령은 이후 계속 확대되면서 1981년 1월24일 해제될 때까지 456일 동안 유지됐다. 이에 저항하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전두환정권이 계엄군을 투입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국민적 공분을 사기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뒤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으나 계엄령을 검토한 증거도 남아있다. 1987년 1월 고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촉발된 ‘6·10 민주항쟁’ 당시 전두환정권은 계엄령을 통한 무력 진압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국민적 저항과 더불어 미국의 계엄 조치가 적절치 않다고 압박하자, 전두환정권은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수용했다. 이후 40년이 넘도록 대한민국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 적은 없었다. 다만, 박근혜정부 당시에도 계엄령 검토설이 불거졌다. 처음에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취급을 받았으나 실제 국군기무사령부(방첩사령부)의 세부 문건이 공개되면서 사실로 확인됐다. 윤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으로 합동참모의장이 아닌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던 것을 두고 해당 문건을 참조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해당 문건에는 “계엄사령관은 군사 대비 태세 유지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며, 현행 작전 임무가 없는 각 군을 지휘하는 지휘관으로 임명해야 한다”며 “육군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건의한다”고 적시했다. 계엄령이 선포되면 통상 합참의장이 계엄사령관을 맡을 것으로 여겨졌다. 합참이 계엄과 관련된 업무를 관장하고 합참 조직에 계엄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 전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에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을 임명했다. 이빨 빠진 살인 병기 군 내부엔 김명수 합참의장이 해군 출신으로 지상 병력인 계엄군 지휘에 한계가 있고, 김 전 장관이 같은 육군 출신인 박 총장과 더 편하게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이란 분석도 있다. 윤 전 대통령의 심야 비상계엄 선포는 대통령실 여러 참모도 발표 직전까지 그 내용을 모를 정도로 기습적으로 이뤄진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실 안팎의 상황은 지난 12월3일 오후 9시를 넘으며 급변했다. 대통령실 참모들은 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할 것이라는 사실을 애초 모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smk1@ilyosisa.co.kr>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