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세월에 묻힌 도시풍경 '천태만상'

급변하는 시대…사람냄새가 지워진다

[일요시사=사회팀] 이광호 기자 = 시대가 변하면서 생활 속 풍경도 새롭게 바뀌고 있다. 구시대 유물로 느껴졌던 것들이 새 옷을 갈아입고 진화하면서 ‘신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라질 것 같았지만, 다양한 생존전략으로 다시 재탄생한 우리 주변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결혼정보회사의 시초는 결혼상담소였다. 1970년대부터 성행한 중매결혼은 대부분 결혼상담소를 통해 이루어졌다. 결혼상담소 간판을 내건 초기에는 “오죽 못났으면 스스로 결혼 상대자를 구하지 못하고 결혼상담소에 의뢰하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서서히 인식이 바뀌어 결혼상담소를 찾는 발길이 급격히 잦아졌다.

[결혼상담소-결혼정보회사]
 
결혼상담소 신청자들의 남녀비율은 약 1대2 정도로 여자가 많은 편이었다. 상담소에 따라서는 여자가 남자보다 4배나 많아 남자기근 현상을 빚기도 했다. 지금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당시 신청자들의 연령은 여자 22세부터 55세, 남자 25세부터 60세까지로 폭이 넓은 편이었지만, 여자 23세부터 26세, 남자 27세부터 33세까지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했다. 결혼상담소를 찾는 이들 대부분은 미혼이었다. 초기에는 본인보다는 부모가 상담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결혼상담소에 대한 인식이 변하면서 당사자가 직접 신청하는 경우가 늘었다. 
 
이후 ‘보따리 중매장’이란 묘한 직업이 생겼고, 이들은 유수 기업체의 젊은 엘리트 사원의 명단이 든 두툼한 수첩보따리를 들고 다방을 누비며 10명 정도씩 그룹을 지어 수시로 각종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이처럼 중매장이들이 몰려다니는 풍경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았다. 과거 성행했던 결혼상담소와 지금의 결혼정보회사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 다만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 현재 성행하고 있는 결혼정보회사 또한 중매를 목적으로 운영된다.
 
결혼정보회사는 1990년 중반, PC통신의 발달로 본격 등장했다. 2000년 8월부터는 결혼정보업이 자유업으로 바뀌어 사업자등록증만 제시하면 즉시 영업이 가능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회원으로 가입한 사람들에게 만남을 주선하고 일정액의 수수료를 받는 결혼정보업체는 500여 곳이 넘는다.
 
이 중에서도 특히 듀오, 선우, 에코러스, 피어리, 듀비스 등 몇몇 업체는 수천에서 수만명씩의 회원을 거느리고 ‘중매’ 시장을 이끌고 있다. 시장규모도 날로 커지고 있다. 이처럼 결혼정보업체가 호황을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사회경제적 변화다. 경쟁주의 속 개인주의 심화는 친분적 소개 문화의 쇠퇴를 불렀고, 결국 그 부분의 역할을 결혼정보 업체가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는 일종의 진입장벽을 만들고 있다. 누구나 가입할 수 있지만, 등급에 따라 자신의 점수가 결정되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배우자 선택 시 성격, 외모, 학벌, 직업, 가정환경 등 여러 가지 조건도 중요하지만, 결혼 전 충분한 시간과 대화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세탁소-무인세탁소]
 
세탁소의 트렌드도 서서히 변하고 있다. 세탁소 간판을 걸고 있지만 직원 자체가 없는 ‘무인세탁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셀프빨래방과 세탁편의점의 장점만을 결합시킨 무인세탁소는 고객들이 무인 락커에 세탁할 옷을 맡기면 전문 세탁 업소에서 이를 수거해 말끔히 세탁한 후 다시 락커로 가져다주는 시스템이다. 이런 무인세탁소의 가장 큰 장점은 고객들이 원하는 시간에 언제나 사용할 수 있다는 점. 일반 세탁소는 영업시간이 한정돼 있어 맞벌이 가정에서 시간대를 맞추기 힘들 때가 있기 때문에 바쁜 현대인들이 무인세탁소를 자주 애용한다.   

[전당포-인터넷캐싱]
 
흔히 전당포는 급전이 필요할 때 찾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귀중품을 담보로 손쉽게 금전을 확보할 수 있어 많은 이들이 애용해왔다. 사실 전당포는 사채업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캐싱’이라는 용어를 상호에 쓰기도 한다. 전당포의 시초는 1894년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이 한국에 들어와 전당포 형태의 사채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이후 모방과 조합의 형태로 전당포가 곳곳에 생겨났고 서민들 사이에서 필요할 때 돈을 빌려 쓸 수 있는 유용한 수단으로 자리매김했다. 
 
한국의 전당포는 일본과 달리 부동산도 담보로 취급했다. 1970년대에는 트랜지스터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인기였고 80년대에는 비디오플레이어, 컴퓨터 등이 주요 품목이었다. 귀금속 등은 여전히 인기 품목으로 분류되며 최근에는 명품 패션이 주종을 이룬다. 
 
전당포는 현재도 진화 중이다. 쇠창살과 골방, 음침한 복도는 이제 더 이상 전당포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아니다. 요즘 전당포는 건물 외관은 물론 내부도 깔끔한 편이다.
 
최신식 인테리어로 이용자들의 거부감을 줄이고 있다. 카페처럼 음료를 제공하는 건 기본이다. 전당포의 기본인 보안시스템도 날이 갈수록 튼튼해지고 있고, 다루는 품목도 진화했다. 요즘엔 명품 전당포가 대세지만 각종 IT 기기를 전문으로 취급하는 곳도 증가하는 추세다. 
 
과거엔 전당포를 찾기 위해 구석구석을 돌아다녔지만 이제는 도심 한복판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신촌, 강남, 압구정, 건대입구 등 서울 도심 주요 상권엔 최소 1∼2개씩 현대식 전당포가 자리 잡고 있다. 또한 가맹점 형태로 지점을 늘리며 기업화하는 현상도 보인다.
 
금융감독원과 저축은행중앙회, 한국대부금융협회 등에 따르면, 저신용자용 전당포는 전국에 1000여개로 10년 전 대비 80% 가량 줄었다. 대신 명품 전당포나 IT 전당포와 같은 현대식 전당포는 전국적으로 300개 이상 운영되고 있다고 추정된다. 전당포에 들어오는 물건은 달라지고 있지만 전당포의 개념 자체는 변함이 없다.
 
헌책방, 미니콘서트장으로…전당포는 인터넷 거래
이발소, 카페 미용실로…세탁소, 무인빨래방 변신

[꽃집-데이트카페]
 
꽃집도 시대 변화에 카멜레온처럼 변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꽃카페’인데, 요즘 꽃집은 꽃을 판매하며 더불어 커피, 건강음료, 칵테일 등을 내놓고 있다. 꽃을 사러 온 고객들은 꽃을 사러 온 건지, 커피를 마시러 온 건지 헷갈릴 정도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궁합마케팅’ 덕분에 꽃집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아름다운 정원에서 데이트를 즐길 수 있어 특히 커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헌책방-카페방]
 
헌책을 사고파는 헌책방은 1960∼70년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몇 달 일하면 일 년 정도 쉬어도 될 정도로 당시엔 헌책방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헌책방들이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그렇다고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변신을 꾀해 새로운 전략으로 손님을 끌어들이는 헌책방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 헌책방들은 온라인을 적극 활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인터넷 거래가 일반화되면서 헌책방을 직접 찾아오는 손님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판매 방식을 바꾸니 매출이 꾸준히 증가한다고 전해진다. 또한 단순히 책만 사고파는 게 아닌, 다양한 문화공간으로 변모한 헌책방도 있다.
 
무려 51년 간 자리를 지켜온 한 서점은 분위기 있는 카페로 재탄생했다. 이곳을 찾는 손님들은 커피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추억의 책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커피 한 잔의 여유와 함께 독서를 만끽한다. 휴일에는 작은 콘서트를 열기도 해 마니아층을 확보한 상태다. 이처럼 추억의 헌책방들이 신선한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나면서, 도시 속 유물에서 도시 속 보석으로 빛나고 있다.

[이발소-이색미용실]
 
이용원, 이발관, 이용소라고 부르기도 했던 이발소는 많은 남성들이 머리를 짧게 깎기 위해 찾던 장소였다. 이발소가 남성 전용이라면 미용실은 여성전용으로 인식됐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남성들의 머리가 길어지면서 짧게 깎기보다는 긴 머리를 다듬게 되면서 남성들의 미용실 출입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어색했지만 지금의 미용실은 남녀구분이 없어졌고, 미용실 이름도 여러 가지 브랜드 명칭으로 쓰고 있다. 전통적인 이발소는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이발소는 그 자체로 존재 의미가 컸다. 동네 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해왔던 것이다. 휴식이 필요할 땐 의자를 뒤로 젖히고 누워서 책이나 신문을 읽거나 잠을 청하기도 했다. 이발할 때는 기계 보단 사각사각 소리가 나는 이발 가위를 썼다. 또한 이발소는 개운한 면도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이발소는 추억 속으로 사라지고 있고, 대신 미용실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다.
 
최근에는 다양한 콘셉의 미용실이 속속 등장하고 있어 소비자의 눈길을 끈다. 미용실 내부에 작은 카페를 마련한 곳, 와인바로 단골 손님을 끄는 곳, 다양한 음료 및 과자, 떡볶이 등의 간식을 제공하는 곳, 손님의 머리털로 그림을 그려주는 곳 등 이색적인 서비스로 손님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이처럼 요즘 미용실은 단순히 머리 손질에만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도로 단골 확보에 애쓰고 있다.
 
신세대 입맛에 맞게 탈바꿈  
다양한 생존전략으로 재탄생
 
[사진관-포토존]
 
증명사진이나 가족사진을 찍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동네 사진관. 이제는 가족 전문, 아기 전문, 취업 전문사진관 등으로 세분화 되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다. 최근 사진관은 단순히 사진만 찍는 데 그치지 않고 잡지 화보 같은 가족사진, 흑백 필름만 사용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찍는 사진, 톡톡 튀는 팝 아트 초상화 등 진화된 사진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자신의 취향에 맞게 사진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특히 어린자녀를 둔 30∼40대 부부들 중에서는 연예인 화보 같은 가족사진을 선호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야외 공간에서 가족끼리 서로 마주보며 카메라를 향해 포즈를 취하며 자연스러운 순간을 담는다. 그리고 항공촬영(헬리캠)까지 아우르는 스튜디오도 등장했다. 또한 내부 인테리어를 카페처럼 꾸미고 실제로 카페와 같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진관이 늘고 있다. 사진관을 찾는 손님들의 대기 시간까지 사로잡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특색 있는 사진관은 일부다. 요즘 사진관들은 대부분 ‘디지털 인화’ ‘이미지 백화점’으로 진화해 생존하고 있다. 사진 촬영, 현상, 인화는 물론 액자, 캘린더, 디지털 카메라, 주변기기 등 사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취급하는 곳으로 바뀌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따른 극적인 변화다. 

[복덕방-중개소]
 
집을 잘 골라야 ‘복’과 ‘덕’이 들어온다는 의미로 흔히 쓰인 ‘복덕방’은 1900년대 초 ‘가괘(집 흥정을 붙이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무실을 차린 것이 시초다. 서구문물이 들어오고 상업이 성행하게 되자 주거지 이동이 빈번해지면서, 풍수지리와 택일의 관습 때문에 이사를 할 때에는 가괘의 도움이 필요하게 됐다.
 
초기 복덕방은 밑을 여러 갈래로 가른 누런 삼베를 간판으로 사용했다. 누런 삼베는 수수해서 복이 잘 붙고 감이 질겨 오래 갈 수 있다는 뜻이며, 밑을 여러 갈래로 갈라놓은 것은 출입하기 편하다는 뜻에서 한 것이다. 복덕방은 대체로 노령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모여 소일로 했다. 손님이 찾아오면 거간노릇을 해주고 보답으로 작은 선물을 받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매도금액에 약간의 웃돈을 붙여 매매를 성립시킨 뒤 그 차액을 수수료로 얻었다.
 
 
60년대 초 경제개발계획이 강력히 추진되면서 각종 도시개발계획에 의해 다양한 용도의 택지와 주택 수요가 늘어남으로써 복덕방의 역할이 커지기 시작했다. 점차 복덕방 간판은 ‘○○개발’ ‘○○개발공사’ 등 다양하게 바뀌기 시작했고, 중개 대상도 주택과 아파트뿐 아니라 전국의 상가·공장·빌딩·임야·레저시설 등으로 확대됐다.
 
이같은 복덕방의 확대·발전은 투기조장, 가격조작, 과다경쟁 및 불건전한 거래 유발과 선의의 피해자 발생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지속적으로 유발했고, 결국 규제의 필요성이 부각돼 1983년 ‘부동산중개업법’이 제정됐다. 이후 복덕방이라는 말 대신 ‘○○부동산중개회사’ ‘공인중개사 ○○사무소’ ‘○○부동산중개인영업소’ 등으로 표기하도록 규정됐다.
 
그리고 부동산 유통시장 개방에 따라 부동산업계는 법인화, 종합대형화 추세로 부동산거래정보망과 함께 전국적인 체인 형성이 나타났고, 이제는 온라인을 통한 중개·거래도 이루어지고 있다. 과거 복덕방은 부동산 중개를 주로 했지만, 현재의 공인중개사무소, 부동산 컨설팅업체는 중개뿐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분양, 관리, 개발, 신탁 등 전문적인 재산 상담 기능까지 하고 있다.

[당구장-이색레포츠]
 
볼링장, 당구장 등 마니아들의 스포츠가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새로운 레포츠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볼링장에서 단순히 볼링만 치는 것에서 벗어나 맥주를 마시며 서로 어울리는 소통의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각광을 받고 있다.
 
볼링 실력을 떠나서 누구나 함께 웃고 떠들며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칙칙한 내부 인테리어를 벗고 야광으로 도배해 클럽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 곳도 늘어나고 있다. 신나는 음악과 다양한 이벤트가 진행돼 특히 커플들 사이에서 인기다.
 
당구장도 새롭게 진화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페식 당구장이 눈길을 끈다. 카페 같은 당구장에서 수제버거와 커피를 들고 당구를 즐기는 곳이 있어 반응이 좋다. 또한 과거와 달리 금연 당구장이 늘어나 여성고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또한 근래 들어서는 미녀 직원을 당구장에 다수 고용해 젊은 남성 고객을 유치하는 업소가 크게 늘고 있다. 이러한 ‘미인 당구장’ 등장에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동종업종 간 극심한 경쟁 탓에 탈선할 개연성은 언제든 있는 것이 현실이다. 
 
 
<khlee@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진화한 사랑의 메신저
편지 → PC → 스마트폰 → 이모티콘…
 
사랑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메시지의 방식도 점차 바뀌고 있다. 과거에는 집 전화나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아날로그 감성이 주 연애 방식이었지만, 통신이 발달되면서 PC가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문화에 큰 혁명을 불러왔다.
 
이후 스마튼의 등장은 또한번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 스마트폰으로 SNS를 사용하는 것은 일상화 된 지 오래, 낯선 사람과 소통하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문자’ 보단 ‘이모티콘’을 주로 사용하며 신속한 메시지 전달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
 
디지털 기기의 발달이 가속화되는 만큼 스마트 세대의 연애법도 새로운 모습으로 진화할 전망이다.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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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경찰 압수 비트코인 ‘1400억’ 털린 내막

[단독] 경찰 압수 비트코인 ‘1400억’ 털린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성민 기자 = 경찰이 압수한 비트코인 1700여개 중 1400개 이상이 사라졌다. 전체 피해액은 최소 1300억원에서 최대 1500억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충격적인 것은 탈취 시점과 방식, 그리고 접속 기기까지 모두 경찰 수사 과정과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단순 해킹으로 보기 어려운 정황이 잇따라 확인되면서 사건의 성격이 ‘내부 연루 의혹’으로 급격히 기울고 있다. 사건의 출발은 2021년 11월 광주경찰청 반부패경제범죄수사대의 불법 도박사이트 수사였다. 광주청 수사과 소속 경사 김모씨 등은 범죄수익은닉 혐의 압수수색영장을 집행하며 불법 도박장 개설 혐의 등을 받은 비트세븐 거래소 대표 이모씨의 블록체인닷컴 지갑에 접속했다. 6분 간격 연결고리 당시 경찰은 피의자 이씨의 블록체인닷컴 지갑 계정에 접속해 비트코인 1798개를 확인했다. 경찰은 같은 날 오전 11시58분부터 약 40분간 27차례에 걸쳐 135개를 이체하며 1차 압수를 진행했다. 이후 접속이 차단됐다고 주장했지만, 불과 몇 시간 뒤인 11월10일 새벽과 오후, 경찰청 사무실에서 추가로 185개를 더 이체했다. 총 320개가 ‘정식 압수’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2021년 11월10일 오후 8시28분. 김 경사는 압수된 계정의 연동 이메일을 자신의 구글 계정으로 변경한다. 그리고 불과 12분 뒤인 8시40분부터, 지갑에 남아 있던 비트코인 1477개가 195차례에 걸쳐 외부 주소로 빠져나갔다. 압수 직후, 그것도 계정 권한이 경찰에게 완전히 넘어간 직후 벌어진 대규모 탈취였다. 블록체인닷컴이 제출한 IP 로그는 더욱 노골적이다. 11월9일부터 10일 오후 8시32분까지 모두 한국 IP를 사용한 수사관 접속 기록이다. 이후 마지막 김 경사의 접속 6분 뒤, 미국·우크라이나·캐나다 IP를 통한 접속이 연속으로 발생한다. VPN을 이용한 김 경사로 의심되는 ‘탈취자’의 접속이다. 수사관 로그인 → 6분 후 탈취 로그인 → 즉시 대량 이체로 이어진 것이다. 외부 해커의 우연한 침입이라 보기에는 타이밍이 지나치게 촘촘하고 정교하다. 결정적인 단서는 디바이스 로그다. 블록체인닷컴 측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해당 계정에는 단 두 종류의 기기만 기록돼있다. 하나는 윈도우 기반 데스크톱, 다른 하나는 안드로이드 모바일이다. 이 중 안드로이드 접속은 단 한 번, 우크라이나 IP를 통해 이뤄졌다. 나머지 탈취 접속은 모두 윈도우 데스크톱이다. 문제는 그 윈도우 기기다. 로그에는 수사관이 사용한 윈도우 기기 외에 다른 데스크톱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탈취자가 사용한 윈도우 PC가 별도 기기였다면 반드시 추가 로그가 남아야 하지만 그마저도 없다. 탈취 접속에 사용된 윈도우 기기가 수사관이 사용한 기기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수사관 접속 후 VPN 유출 시작 경찰이 사용한 기기가 쓰였다? 탈취 당시 상황도 석연치 않다. 계정 연동 이메일이 김 경사의 개인 계정으로 바뀐 직후 탈취가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최소 198건의 출금이 발생했다. 정상이라면 동일 수량의 알림 이메일이 수신돼야 한다. 그러나 김 경사의 이메일에는 단 7건만 남아 있다. 나머지 191건은 흔적조차 없다. 더욱이 김 경사는 당시 사무실에 남아 있었고, 탈취 시간 동안 계정 재접속을 시도했다고 진술했다. 그럼에도 본인 이메일로 전송된 출금 알림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단순 실수로 보기엔 삭제 규모가 과도하다. 선택적 삭제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수사 협조 전문가 박모씨의 분석 자료에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정황이 발견됐다. 박씨는 11월11일 저녁, 탈취 자금 흐름을 분석한 노드 자료를 김 경사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해당 자료에는 그 시점 기준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 트랜잭션이 포함돼있었다. 실제 해당 거래는 다음 날 새벽에야 블록체인에 기록된 것으로 확인된다. 블록체인 구조상 발생하지 않은 거래를 사전에 확인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이 때문에 해당 자료가 사후 수정됐거나, 탈취 경로를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이씨는 사건 발생 한 달 뒤 탈취 사실을 인지하고 검찰에 진정을 제기했다. 이후 추가 진정까지 제출했지만, 수사는 2024년까지 사실상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다 뒤늦게 수사가 이뤄졌고, 결과는 반전이었다. 탈취 의혹은 규명되지 않은 채, 오히려 피해자가 허위 고발을 했다며 무고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국가 수사기관이 압수한 비트코인이 경찰 손을 거친 직후 대량으로 사라졌으나, 코인의 주인은 구속되고 경찰은 의심에서 벗어났다. 단순 해킹이라 보기에는 시점과 방식, 그리고 이후 수사 흐름까지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다. 법원도 이미 “누군가 계정에 접근해 비트코인을 이체했다”고 판단했고, 검찰은 수사 정보 유출 의혹까지 제기하고 경찰을 상대로 압수수색을 벌였다. 정작 탈취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는 무고 혐의로 법정에 서 있는 상황이다. ‘누가 훔쳤는가’라는 본질적 질문은 여전히 답을 얻지 못한 채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알림 191건 흔적 없이… 경찰은 1일 전송 한도 때문에 압수가 며칠에 걸쳐 이뤄지는 사이, 이씨 측이 이를 빼돌렸다고 판단했다. 반면 이씨 측은 정반대 주장을 펼쳤다. 계정 접근권한을 사실상 장악한 수사기관 내부에서 탈취가 이뤄졌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사건은 단순 범죄수익 환수 문제를 넘어 ‘압수된 국가 관리 자산이 어떻게 사라졌는가’라는 근본적 의문으로 확장됐다. 광주지법 항소심은 도박공간 개설과 범죄수익은닉 혐의 자체는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사라진 1476개 비트코인에 대해서는 이씨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누군가 이씨의 블록체인 계정에 접근해 당시까지 남아있던 비트코인 대부분을 다른 지갑으로 이체해 갔다”고 판시했다. 이는 곧 해당 비트코인의 이동 주체가 이씨로 특정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 결과 1심에서 600억원대에 달했던 불법 도박장 개설 혐의 등에 대한 추징금은 항소심에서 15억원 수준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이 판결은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법원이 최소한 “외부 혹은 제3자의 개입 가능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다. 즉, 단순히 피고인이 숨기거나 빼돌린 사건이 아니라, 압수된 계정에 대한 추가 접근이 있었고 실제 자산 이동이 발생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되지 않았다. 검찰 역시 이 사건을 단순히 피고인 책임으로만 보지 않았다. 2023년 11월 검찰은 광주경찰청과 서부경찰서를 상대로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수사 정보가 외부로 유출됐을 가능성과 압수 과정의 적법성을 확인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과정에서 사건 브로커와 거액 자금 흐름까지 거론되며 사건은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번졌다. 단순한 도박사이트 수사가 아니라 수사 기밀, 로비, 가상자산 이동이 뒤엉킨 구조적 사건으로 확장된 것이다. 최근 공판에서는 또 다른 쟁점이 드러났다. 증인으로 출석한 전문가 박씨 측 인물은 사라진 비트코인의 이동 경로를 분석한 결과 특정 거래소 계열 지갑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확인된다며, 도박사이트 운영 세력이 직접 자금을 이동시켰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의심받는 수사관 반면 이씨 측은 사건 직후 오히려 검찰에 진정을 제기하며 탈취 의혹을 먼저 제기한 점을 강조하며, 스스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고 반박했다. 또 블록체인닷컴 측 자료에 따르면 ‘탈취자’는 VPN을 이용해 해외 IP로 접속했으며, 일부 접속은 데스크톱 환경에서 이뤄진 것으로 분석됐다. 만약 이 분석이 사실이라면, 압수 과정에서 사용된 기기와 탈취에 사용된 기기가 동일하거나 밀접하게 연관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다만 이 같은 기술적 분석은 현재까지 법원에서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는 점에서 추가적인 검증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메일 기록 역시 의문을 키운다. 탈취 과정에서 수백건에 달하는 출금이 발생했다면 이에 상응하는 알림 메일이 존재해야 정상이다. 그러나 일부 기록만 남아 있고 상당수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온다. 만약 실제로 알림이 발송됐음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면, 이는 단순 오류가 아니라 의도적 삭제 가능성까지 의심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이 사건은 세 가지 축으로 압축된다. 첫째, 경찰이 압수한 가상자산이 왜 완전히 확보되지 못했는가. 둘째, 압수 이후 누가 해당 계정에 접근해 자산을 이동시켰는가. 셋째, 그 과정에서 수사기관 내부 혹은 외부 세력의 개입이 있었는가다. 상식적으로 국가가 압수한 자산은 그 어떤 개인소유보다도 안전하게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정반대 결과가 나타났다. 압수 직후 대규모 자산이 사라졌고, 책임 소재는 규명되지 않았으며, 의혹을 제기한 당사자는 오히려 피고인 신분이 됐다. 계정 변경 직후 사라져 이메일 변경 직후 작업 이 사건이 단순한 형사사건을 넘어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만약 압수된 자산조차 안전하게 관리되지 못한다면, 국가 형사사법 시스템에 대한 신뢰 자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특히 가상자산과 같이 추적과 관리가 기술적으로 가능한 자산에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점은 더욱 심각하다. 현재까지 드러난 정황만 놓고 보면, 이 사건은 ‘탈취’가 아니라 ‘내부 유출’ 가능성을 강하게 의심케 한다. 한편, 지난달 15일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한 인물은 범행 주체가 경찰이 아니라 탈취범으로 지목된 이씨와 그의 아버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광주지방법원 형사10단독 유형웅 판사는 범죄수익은닉의 규제 및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등을 받고 있는 이씨 부녀에 대한 속행 공판기일 재판을 열었다. 이씨 부녀는 2021년 11월 경찰 압수수색이 진행되던 중 자신의 블록체인 지갑에 있던 비트코인 1476개를 빼돌린 혐의로 기소됐다. 검사는 이날 A씨를 증인으로 신청해 신문했다. A씨는 과거 이씨 측 부탁을 받고 비트코인 환전에 도움 준 인물이다. 현재는 코인 관련 별도 사기 혐의로 보석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다. A씨는 이날 검사의 질문을 받고 “이씨 지갑에서 사라진 비트코인 1400여개의 행방을 쫓기 위해 거래 내역을 분석한 결과, 비트세븐 거래소와 연결된 지갑이 다수 등장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경찰은 일일 전송 제한량이 걸려 있어 이씨 지갑에 있던 비트코인을 여러 날에 걸쳐 경찰 지갑으로 옮겨 압수했는데, 같은 시기 탈취범은 순식간에 이씨 지갑에 있던 비트코인 1400여개를 빼간 것으로 나타났다”고 증언했다. 그러면서 “경찰과 달리 이씨 지갑에서 순식간에 다량의 비트코인을 탈취해 간 점, 탈취된 비트코인 이동 경로에 비트세븐 거래소 지갑이 활용된 점을 고려할 때 탈취범은 비트세븐 거래소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며 사실상 이씨 부녀를 겨냥했다. 구속된 코인 주인 A씨가 언급한 비트세븐 거래소는 정상적인 가상자산 거래소가 아니라, 이씨 부녀가 해외에 서버를 두고 운영했던 도박사이트라는 주장이다. 비트세븐 거래소와 관련해 이씨는 도박공간 개설 혐의 등으로 대법원에서 유죄 판결을 확정받았다. 다만 해당 재판에서 사라진 비트코인 1476개에 관한 추징(현 시세 기준 약 1620억원) 책임은 인정되지 않아, 검찰은 범죄수익은닉 혐의를 적용해 이씨를 부친과 함께 추가 기소했다. A씨의 증언에 대해 이씨 부녀 측은 즉각 반박하는 대신 별도 의견서를 재판부에 제출하겠다고 밝혔다. <smk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