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지 않는' 5만원권의 비밀

그 많던 ‘신사임당’ 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일요시사 =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돈의 일생. 한국조폐공사에서 태어난 지폐는 세상에 나와 돈이 되어 국내를 떠돈다. 조폐공사에서 시중은행으로, 은행에서 고객이나 특정 기관 등을 거쳐 비로소 돈이 된다. 제 역할을 다해 너덜너덜해진 돈은 한국은행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돌아온 돈은 재활용되고 끊임없이 환생한다. 그런데 고액권인 5만원이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고 있다. 누군가의 금고 속으로, 장롱 속으로, 땅 속에 묻혀 깊고 어두운 곳에 숨어버렸다. 그 많던 5만원권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을까.

해외에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를 개설한 뒤 수천억원대의 도박판을 운영한 조직이 경찰에 붙잡혔다. 경북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는 지난 22일 해외 불법 도박사이트 운영에 가담한 국내 현금 인출책 양모(76)씨 등 3명을 도박개장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은 양씨의 아파트에서 수익금의 일부인 28억9000만원을 발견해 현장에서 압수했다. 모두 5만원권이었다. 경찰은 5만원권 5만7800매를 공개했다.

많이 풀렸는데…
절반 자취 감춰

5만원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는다. 가장 고액권이라 갖고 다니기 가벼우면서도 수표보다 사용이 편리하다. 명절 때마다 5만원권은 시중에 대량 유통되고 있다. 그런데 찍어내기 무섭게 5만원권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있다. 그래서 5만원 지폐는 유난히 품귀현상을 보이고 있다. 발행을 많이 해도 한국은행으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3년도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은행권 발행잔액은 61조1000억원으로 전년 말 대비 9조원 증가했다. 이 가운데 5만원권만 7조9000억원 증가하면서 전체 은행권 발행잔액 중 66.6%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년 말보다 3.7%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4년여 동안 수요가 늘면서 5만원권 유통량은 40조원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5만원권은 절반도 되지 않는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한국은행으로 돌아오는 돈의 비율)은 전년보다 13.1% 포인트 떨어진 48.6%를 기록했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1년 59.7%, 2012년 61.7%를 기록했지만 지난해를 기점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2장 중 1장은 중간에서 잠적한 셈이다.


40조 넘게 발행…환수율 절반 이하로 ‘뚝’
시중은행선 부족해 쩔쩔…한국은행 팔짱만

환수율이 낮아지면서 국민은행, 하나은행, 외환은행 등 시중은행들은 5만원권이 부족해 쩔쩔매고 있다. 일부 은행에서는 현금 자동지급기에 충전시킬 돈조차 부족한 것으로 파악됐다. 고객들의 5만원 인출 요구에 응하지 못해 창구에서는 만원권 지폐를 섞어 인출해 주는 곳도 있을 정도다.

최소한의 현금지급기용 보유고를 유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마을금고, 신용협동조합,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도 마찬가지다. 고객들의 인출 요구는 많은데 수요를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5만원이 부족한 상황이다.

한국은행과 조폐공사 측은 5만원권 지폐에 대해 평소보다 적게 발행하거나 인위적으로 통화량을 축소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누군가의 손에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1만원권은 평균 100개월(8년4개월), 5000원권은 평균 65개월(5년5개월), 1000원권은 평균 40개월(3년4개월)을 누군가의 소유로 지냈다. 5만원권의 수명은 적어도 100개월을 넘을 것이다. 2009년 6월 탄생한 5만원권은 아직 60개월도 채 안 돼 정확한 수명을 알 수는 없다.

5만원권은 지난 2009년 편익과 화폐 발행비용 절감을 위해 발행됐다. 많은 현금이 필요했던 사람들은 5만원권의 등장을 반겼다. 그러나 서민들은 많은 돈을 들고 다닐 일도, 보관할 일도 없다. 따라서 얻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꼬리표가 없는 5만원은 지하경제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세수 증대라는 현 정부의 정책목표와 달리 지하경제가 확대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깊은 곳 숨어
검은돈으로

5만원권은 지하경제로 흘러 들어갔을 확률이 가장 크다. 고액 자산가와 자영업자의 금고, 사설 카지노 등으로 들어갔을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근로자와 교포 등을 통해 해외로 빠져나갔거나 10만원권 수표 대신 어디선가 비자금으로 돌고 있다는 이야기도 돌고 있다.

5만원권이 악용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11년에는 전북 김제의 한 마늘밭에서 5만원권 22만장의 110억원대 뭉칫돈이 발견됐다. 이 금액은 인터넷 도박으로 벌어들인 범죄수익금이었다. 옷장과 침대 밑에 5만원권 지폐 22만장이 숨어있었다. 

당시 수사당국은 자신의 처남 등이 불법 인터넷 도박 사이트로 벌어들인 돈을 소유하고 있던 마늘밭에 숨긴 이모씨 등을 검거했다. 주범인 그의 처남 이모씨는 수배 중이다.

지난 2012년에는 서울 강남에서 유명 여성전문병원을 운영하는 여의사의 집에서 현금 24억원이 발견됐다. 이 의사의 자택에서는 5만원권이 가득 찬 박스와 가방들이 안방 장롱, 베란다, 책상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모두 탈세를 위해 빼돌린 돈이었다. 지난해에는 원전 비리와 관련돼 한국수력원자력 간부의 집에서 5만원권 6억원어치 뇌물이 발견됐다. 

이렇게 5만원은 보란 듯이 지하경제에서 맹활약을 펼치고 있다. 

5만원권이 깊은 곳으로 숨을수록 지하경제 규모는 더욱 커진다. 지하경제가 커진다는 것은 세금을 걷기 어려워진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세금을 더 올릴 수밖에 없다. 5만원권이 지하경제 깊은 곳으로 숨어들수록 악순환은 되풀이되는 것이다. 유리지갑 월급쟁이들과 성실한 납세자들만 올라간 세금을 모두 떠안게 된다.
 

그런데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한국은행은 ‘5만원권 환수율 하락’이 경제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팔짱만 끼고 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5만원권이)어디에 잠겨있는지 부서마다 조사를 하고 있다”며 “아무래도 고액권이다 보니 지하경제로 들어갔을 확률이 커 추적이 어렵다”고 말했다. 5만원의 행방 추적에 사실상 손놓고 있는 모습이다. 

로비로 빠지고
해외로 빠져나가

5만원은 최고의 로비 수단이다. 부피와 중량의 효율성 때문이다. 무게가 가벼워서 이동이 쉽다.

로비가 많은 것으로 유명한 건설사, 제약회사 등의 업체들은 5만원권 확보에 열을 올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설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5만원권을 많이 확보할 수록, 로비를 잘할수록 능력있는 직원으로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5만원권이 없으면 상품권으로 로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상품권은 5만원권보다 위험하다. 추적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5만원은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고 무게도 가볍다.

1억원은 5만원권 2다발로 무게가 2kg도 되지 않는다. 와인이 2병 들어가는 007가방에 보관해도 5억원은 충분히 들어간다. 그만큼 거액의 돈을 보관하거나 운반하는 게 쉽다. 가정용 금고는 보통 소형 사이즈도 10억원 정도는 들어간다. 자금 추적으로부터도 안전하다.

그래서 5만원권의 행방은 자주 뉴스거리로 등장하곤 한다. 뇌물 혹은 비자금 관련 소식이 주를 이룬다. 

지난 2012년 장진수 전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주무관이 공개한 5만원권 100장 묶음 10개 다발이 대표적이다. 당시 장 전 주무관은 자신이 청와대의 민간인 사찰 은폐 의혹을 폭로하려 하자 류충렬 전 총리실 공직복무관리관이 5000만원을 주며 회유했다고 밝혔다. 김찬경 미래저축은행 전 회장은 5만원권 240장(1200만원)을 브로커에게 내고 중국으로 밀항하려다 경찰에 붙잡혔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5만원권이 정치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선거철을 맞아 5만원권이 뇌물로 빠지고 있다는 뒷말이 오간다.

경북도내에서는 선거법 위반 적발 사례가 4년 전 지방선거 때보다 크게 늘었다. 경북도선관위는 지방선거 91일 전인 5일 현재 도내에서 모두 171건의 선거법 위반 사례를 적발했다. 이는 2010년 지방선거 91일 전의 63건 적발과 비교하면 3배나 늘어난 수치다.


없어질수록 지하경제 확대
도박자금·비자금으로 활용
암암리에 해외로 퍼져 유통

또한 일부 5만원권은 해외로도 빠져 나간 것으로 추정된다. 중국 동포들이 국내에서 번 돈을 중국으로 가져가 위안화로 바꾸고 있다는 것. 옌볜 등 일부 지역의 사설 환전소는 국내보다 더 좋은 환전 조건을 제시한다.

중요한 변수는 환율이다. 옌볜에서는 위안화 대비 원화의 가치가 떨어질 때마다 5만원권이 인기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원화가치가 다시 올라갈 것에 대비해 저렴할 때 원화를 사두려는 교포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 교포들은 환전 조건이 한국보다 좋은 사설환전소에서 휴대가 편리한 5만원권을 바꾸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내국인의 해외여행으로 5만원권이 빠져나가기도 한다. 한류에 의해 동남아 등에서 원화 환전수요가 높아졌다는 분석도 있다. 외국 금융회사 원화 환전이 2006년부터 허용된 데 이어 해외 유출 원화에 대한 규제도 완화돼 이 같은 추세는 계속될 전망이다. 그러나 이를 수치로 확인할 수는 없다.

위조지폐 활개
5만원 딜레마

5만원권 수요가 늘어난 만큼 위조지폐도 시중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지난해 적발된 5만원권 위폐만 100여건으로 시중에 유통되는 규모는 이보다 훨씬 클 것으로 예상된다. 그 규모는 1억원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주로 현금 거래를 하는 전통시장이나 편의점, 택시 등에서 위조지폐가 유통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2월에는 울산과 경남지역에서 위조지폐들이 발견됐다. 울산 남부경찰서에 따르면 울산시 남구 삼산동 현대백화점 앞에서 남자 승객 2명을 내려준 택시기사가 요금으로 받은 5만원권이 위조지폐인 것을 확인했다. 택시기사는 남구 야음동 울산세관 앞에서 태운 승객들이 5만원을 요금으로 내 거스름돈 4만6000원을 줬다.

앞서 같은 날 남구 신정동 수암시장 앞에서도 하차한 남자 승객 2명이 5만원권을 요금으로 냈다가 택시기사가 지폐의 상태를 의심하자 다른 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승객들 말투가 중국동포(조선족)처럼 들렸다”는 택시기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용의자를 쫓고 있다.

경남 남해군에서는 남해읍의 한 마트 직원이 물건값으로 받은 현금을 은행에 입금하는 과정에서 컬러복사기로 위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5만원권 한 장을 발견했다.

남해에서는 지난해 연말부터 5000원권과 5만원권 위조지폐가 4차례나 발견됐다. 경찰은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있으나 아직 범인을 붙잡지 못했다.

적발된 위폐 감별법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불빛에 비춰 지폐 왼쪽 여백에 신사임당이 나타나지 않거나 나타나더라도 일그러지면 위조지폐다. 상하좌우로 움직였을 때 홀로그램 안쪽 태극마크가 움직이지 않아도 위폐다. 또 심하게 낡고 구겨진 5만원권은 위폐를 의심해 봐야 한다.

LG경제연구원 보고서는 캐시 이코노미(Cash Economy)의 증가에 대해 ‘지하경제 확대의 경고등’이라고 지적했다. 캐시 이코노미는 거래가 신용카드, 계좌이체 등이 아니라 주로 화폐, 즉 현금으로 이뤄지는 경제를 뜻한다. 캐시 이코노미는 지하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보고서는 5만원권이 사라지면서 한국 경제에서 캐시 이코노미가 확대되고 있다고 경고했다.

 

<dklo216@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화폐개혁’가능할까 ‘경→조?’, ‘억→만?’

화폐개혁 움직임이 일고 있다. 정부는 이를 구체화한 대북 제안인 ‘드레스덴 구상’까지 발표했다. 이에 따라 한국은행 내부에서 리디노미네이션(화폐액면 단위변경) 검토 중이다. 특히 우리나라 경제규모가 커지면서 조(兆)를 넘어 경(京)단위 화폐통계가 실물경제 부분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금융권에 따르면 자금 흐름을 보여주는 한국은행 자금순환표 상의 금융자산은 작년 말 1경263조원, 금융부채는 1경302조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경 단위 화폐 통계의 확산은 무엇보다 경제 규모 증대에 따른 것이다.

한국은행은 외국인들에게 통계를 설명할 때 1000조원만 돼도 ‘1쿼드릴리언’(quadrillion, 1000조)이라는 생소한 영어 화폐 단위를 사용해야 한다. 외국의 경우 통계 단위의 대부분이 10억(billion) 단위로 해결되고 최대치라도 조(trillion) 단위에 그친다. 이는 과거 5만원권이 나오기 직전 화폐액면 단위 변경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액면 단위변경 검토

또한 화폐개혁은 지하경제 양성화 방안으로도 거론되고 있다. 구권을 신권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탈루된 현금 소득을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하에 묻힌 자금을 끌어내고 세수를 늘리는 데 화폐개혁이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민감한 사항인 만큼 한국은행도 조심스러운 입장이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현 상황에서 리디노미네이션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이 총재는 지난 3월 인사청문회에서 “필요성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시행 시 부작용이 적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며 “지금 상황에서 상당한 논란과 비용이 불가피한 화폐 단위 변경을 추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화폐개혁 움직임이 있었지만 매번 엎어졌다. 화폐개혁은 김영삼 정권 시절 한국경제에 파장을 일으켰던 금융실명제보다 더욱 강력한 수단이다. 화폐를 새로 만들고 물품 가격을 바꿔 표시하는 것은 물론 전국에 있는 은행 현금 지급기, 자판기 등 관련 기계와 각종 시스템을 모두 손봐야 하기 때문이다. <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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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단독] 캄보디아 주범 ‘리광호’ 정보기관 추적, 왜?

[일요시사 취재1팀] 오혁진 기자 = 캄보디아를 향한 정부의 압박이 매섭다. 피해자이자 피의자인 한국인 수십명을 발 빠르게 송환한 데 이어 캄보디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도 옥죌 계획이다. 정보·수사기관은 제일 먼저 대학생 피살 사건 핵심 인물인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일요시사> 취재 결과, 리광호는 이미 캄보디아를 떠나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파악됐다. “리광호는 지난주에 이미 떴어요.” 리광호에게 대포통장을 만들어준 보이스피싱 조직원 A씨가 <일요시사>와의 연락에서 한 말이다. 리광호는 캄보디아 대학생 박모씨 피살 사건 주범으로 지목된 인물이다. 이미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 밀입국했다. 정보·수사기관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이다. “지난주에 이미 떴다” 리광호의 신상은 이미 이달 중순부터 텔레그램과 SNS 등을 통해 공개됐다. 1991년생인 리광호는 중국 길림성 훈춘시 출신이다. 키는 160㎝로 단신이며 각진 턱과 짧은 머리가 특징이다. 최종 학력은 초등학교(소학교) 졸업인 것으로 알려졌다. 캄보디아 수사당국은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중국 국적 조직원 3명을 체포했다. 앞서 박씨는 지난 7월17일 “현지 박람회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캄보디아로 출국한 뒤 연락이 두절됐다가 3주 뒤 깜폿 보코산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캄보디아 캄폿지방검찰청은 지난 10일 박씨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이들을 재판에 넘겼으나 핵심 인물은 따로 있다. 이들 조직원 3명은 박씨의 시신을 옮길 때 현장에 있었을 뿐이었다. A씨는 “캄보디아 경찰이 박씨를 살해한 혐의로 리광호를 잡기 위해 지난 8월 그의 은신처를 급습했었는데 리광호가 몇 시간 전에 미리 알고 도주했다”고 말했다. <일요시사>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인터폴, 경찰, 국정원 등 정보·수사기관도 캄보디아와의 공조를 통해 리광호를 추적 중이다. 그는 이달 초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라오스로 밀입국한 것으로 전해졌다. A씨는 “라오스로 넘어갈 때 캄보디아 국경을 관리하는 공무원들에게 수천만원을 줬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넘어가기 직전에 대포 통장과 핸드폰을 급하게 만들어달라고 한 이후에 연락이 끊겼다. 지금은 미얀마로 넘어갈 준비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주장했다. 수사기관 관계자도 “관련 첩보를 입수하고 추적 중인 건 맞다”며 “현지 경찰과도 공조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확인해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리광호는 5년 전 베트남 하노이에서 보이스피싱 조직의 중간 관리자였다고 한다. 조직 내 수익을 빼돌리려는 계획이 탄로나자 잠시 한국에 들어왔다가 지난해 7월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출국해 자신과 친분을 쌓은 이들을 모아 시아누크빌에 자리 잡았다. 리광호와 친분을 쌓은 인물 대부분은 조선족인 것으로 알려졌다. A씨는 “리광호는 조직에서 간부급은 아니었다. 납치 담당, 고문·협박 담당 등 맡는 일이 다 다른데 리광호는 가리지 않았다. 머리가 좋지 않아서 몸으로 하는 일을 주로 했다”고 설명했다. 라오스 북부 통해 미얀마 밀입국 준비 다른 주범 김, 강남 마약 음료 총책 이어 “조직 간부인 중국인들에게 무시당할 때마다 구금된 여자를 강간하거나 남자들에게 강제로 마약을 먹이고 폭행한다. 이건 리광호만 그런 게 아니다. 그러다가 구금된 이들이 죽으면 시신을 태운다”고 주장했다. 리광호는 현재 영등포경찰서와 인천지검의 수배 대상자다. 인터폴에서도 적색수배 상태로 확인됐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중국에서도 마약 밀수 혐의로 수배에 오른 인물이다. 중국에 다시는 못 들어간다. 들어갔다가 걸리면 사형”이라고 말했다. 국내 정보·수사기관은 리광호 외에 김모씨도 추적 중이다. 김씨는 리광호와 함께 박씨 사건 주범으로 의심되는 인물이다. 특히 리광호와 김씨는 2년 전 강남 대치동에서 발생했던 마약 음료 사건의 유통책으로 확인됐다. 마약 음료 사건은 지난 2023년 이모씨 등이 필로폰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를 강남 대치동 학원가에서 미성년자에게 제공하고 마시게 했던 사건이다. 당시 이씨 일당은 마약 음료 수백병을 만든 뒤 2023년 4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집중력 강화 음료’ 시음 행사라며 미성년자 13명에게 제공하고 실제 9명이 마시게 했다. 이후 음료를 마신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해 “당신 자녀가 마약 음료를 마셨으니,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협박해 금품을 뜯으려고 시도했다. 불특정 다수의 미성년자를 속여 급성 중독성 마약을 투약하고 부모까지 노린 신종 보이스피싱 범죄라는 점에서 사회적 파장을 불렀다. 중국에 있던 주범 이씨는 사건 발생 50여일 만인 2023년 5월 중국 지린성 내 은신처에서 중국 공안에 검거돼 강제로 송환됐다. 대법원은 지난 4월 이씨에게 징역 23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마약 음료 제조자 길모씨는 징역 18년, 마약 공급책 박모씨는 징역 7년이 확정됐다. 진짜 두목 따로 있다 당시 필로폰을 공급한 중국 국적 총책은 검거돼 캄보디아 법원에서 26년형을 선고받았다. 정보기관 관계자는 “리광호와 김씨는 수사를 통해 추적해 왔던 인물이다. 필로폰 4kg 이상을 밀반입하는 걸 주도했고 그걸 이씨와 박씨가 국내에 뿌렸던 사건으로 파악됐다”고 전했다. 리광호가 속한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웹사이트 중 일부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구축한다는 게 <일요시사>와 접촉한 이들의 설명이다. 또 다른 조직원 B씨는 “전부 다 북한 애들이 하진 않는다. 허술한 웹사이트는 북한 전문가들의 작품이 아니다. 한국인 범죄자들은 피싱으로 중국 조직에 1억원의 수익을 안겨주면 수수료로 7~10%의 수고비를 받는다. 북한과 조선족은 더욱 싸다. 3~5% 정도면 굉장히 열심히 한다”며 “중국 조직 입장에서는 한국인들보단 북한이나 조선족을 동원하는 경우를 선호한다”고 했다. 최근 정부는 김진아 외교부 2차관을 단장으로 정부 합동 대응팀을 캄보디아에 파견했는데 여기에는 경찰청, 국정원 등이 참여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캄보디아 스캠 범죄를 매우 심각하게 여기고 국정원에 “발본색원해 완전히 해결될 때까지 조직의 사활을 걸고 확실하게 해결해 국민 걱정을 덜어드려라”는 특별지시를 내렸을 정도로 정보기관 내부에서는 리광호와 김씨와 같은 조직원들 추적에 사활을 건 분위기다. 국정원은 캄보디아 스캠 범죄조직은 중국 등 다국적 범죄조직이 캄보디아로 침투해 만들어진 것으로서 프놈펜, 시아누크빌을 비롯해 총 50여곳에 약 20만명의 조직원이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이들 조직들의 범죄수익은 2023년 기준 125억 달러(약 18조원)로 캄보디아의 국내 총 GDP의 절반 수준에 달했다. 다국적 범죄조직 이들 조직은 과거 카지노 자금 세탁 등을 했던 조직으로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국경이 폐쇄되면서 캄보디아로 침투해 스캠 범죄로 범죄를 변경했다. 이들 조직은 자체적으로 무장경비원까지 배치하고 있다. 비정부 무장단체가 장악한 지역이나 경제특구 등 캄보디아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돼있어서 캄보디아 정부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정원은 한국인들의 현지 방문 인원과 스캠 단지(웬치) 인근 한식당 이용 현황 등을 통해 스캠 단지에 있는 한국인 범죄 가담자를 1000~2000명가량으로 추산했다. 국정원은 이들에 대해 “100%는 아니지만, 피해자라기보다는 범죄에 가담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고 설명했다. 캄보디아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의 자금을 관리하는 배후로는 프린스그룹과 후이원이라는 현지 기업이 언급된다. 이 두 기업은 웬치에서 감금, 사기 행각을 벌이거나 북한 해킹 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는 등 전방위 범죄를 저지르며 천문학적 수익을 벌어들였다. 프린스그룹은 캄보디아 최대 범죄 거점으로 지목된 ‘태자 단지’를 운영하는 등 조직적 인신매매와 불법 감금, 사기 등의 배후로 알려졌다. 중국에서도 불법 도박이나 성매매 등으로 범죄 자금을 벌어들였다. 베트남 국경 지역에 있는 진베이 단지는 중국 9개 성의 법원에서 심리된 83건의 형사사건에 연루된 상황이다. 천즈 프린스그룹 회장이 기업을 성장시킬 수 있었던 배경에는 훈 센 전 총리 등 캄보디아 고위층과 긴밀한 유착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천즈는 수많은 논란에도 훈 센 전 총리 정권에 막대한 자금을 바치며 캄보디아의 최고위층 귀족 칭호인 ‘옥냐’를 캄보디아 국왕으로부터 수여받았다. 국내 은행사가 이들의 범죄 자금을 유통·세탁하는 데 이용됐을 우려도 나온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국민은행·전북은행·우리은행·신한은행·IM뱅크 등 국내 금융사의 캄보디아 현지 법인 5곳은 프린스그룹과 총 52건의 거래를 진행했다. 거래액은 1970억4500만원에 달한다. 아직 9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여전히 현지에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스캠 조직 웹사이트 서버 북한이? 국정원·정보사 해외 파트·대북팀 동원해 추적 후이원은 범죄조직의 자금을 세탁하며 회사의 규모를 키웠다. 후이원은 ‘캄보디아의 알리페이’라고 불리는 후이원페이를 가지고 있는 금융, 결제, 정보기술(IT) 서비스 복합 기업이다. 이들은 자사의 기술력을 활용해 국제 해킹 조직이 사이버 사기, 랜섬웨어 등으로 얻은 범죄수익을 세탁해 왔다. 후이원페이는 훈 센 전 총리의 조카인 훈 토가 주요 주주로 등록된 회사이기도 하다. 정보기관에 따르면 이 기업은 북한 정찰총국 산하 해킹 그룹 ‘라자루스’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후이원은 공개·비공개 텔레그램 등 채팅방을 이용해 사기 조직과 자금 세탁범을 연결하고 범죄수익을 해외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2021년 이후 700억~890억 달러 규모의 가상화폐 거래를 중개했고 일부는 라자루스로 흘러 들어갔다. A씨는 “북한 IT 전문가들이 피싱·스캠 관련 웹사이트를 제작하기 시작한 건 4~5년 전부터”라며 “북한이 제작한 사이트의 경우 퀄리티가 상당하다. 그 대가로 후이원이 스테이블코인을 만들어 북한 쪽에 수익을 전달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해외 파트인 해외정보국과 대북 업무 담당자 상당수는 이미 캄보디아를 포함한 동남아 곳곳에서 관련 첩보를 입수 중이다. 국정원은 1차장이 해외 파트, 2차장이 대북·대공 업무를 담당한다. 2차장은 특히 북한 정보수집·분석 등 국정원의 대북 분야 실무를 총괄하는 자리다. 이외에도 국군정보사령부 동남아팀 휴민트(HUMINT·인간정보)들도 현지서 국정원과 정보를 공유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정보사 출신 한 군 고위 관계자는 “캄보디아 수도권에 대남공작원들이 많긴 하지만 웬치에 북한 대사관 관계자나 공작원들이 있진 않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고, 단지 대가를 받고 캄보디아 범죄조직 사이트를 만들어주거나 불법적으로 벌어들인 자금으로 세탁해 주는 게 북한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배후? 북한 연루설 다른 정보기관 관계자도 “국정원을 비롯한 정보사가 이번 캄보디아 사건에서 할 수 있는 건 보이스피싱·스캠 조직으로 인해 우리 국민이 피해를 본 금액이 얼마나 많은지와 북한에도 그 금액이 흘러 들어갔는지, 북한과 관련된 인물들이 얼마나 있는지 등이다. 캄보디아에서의 대남 관련자들은 절대로 개인적으로 특정 행위를 하지 않는다. 예시로 캄보디아 무역 또는 사업가, 식당을 운영하는 인물 등이 대남공작원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hounder@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