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기획> 3대 여름 가전 '대해부'

습기 잡고 더 시원하게 ‘뜨거운 전쟁’

[일요시사 = 경제2팀] 박효선 기자 = 일찍 찾아온 무더위로 여름 가전제품 시장이 벌써부터 후끈하다. 특히 제습기 업계 조짐이 심상치 않다. 지난해에는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에어컨과 선풍기 업계도 무더위의 영향으로 수요가 급증했다. 여름을 앞두고 가전업체들의 뜨거운 전쟁이 예고된다.

“비만 오면 집안 공기 ‘안습’. 매년 장마철이 ‘기습’. 내 얼굴은 언제나 보습보단 ‘우습’. 우리집 습기는 연습 없는 ‘실습’. 축축하게 살지 말고 ‘제습’”

한 제습기 업체의 광고 CM송이다. 올 여름 시장을 뜨겁게 달굴 제품은 제습기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이상 기후 영향으로 제습기 시장이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제습기 시장
1조 규모 예감

가전업계에 따르면 국내 제습기 판매량은 2009년 4만대, 2010년 8만대, 2011년 25만대, 2012년 40만대, 2013년 130만대로 4년만에 약 33배나 치솟았다.

2012년 1200억원(약 40만대 판매규모) 규모였던 국내 제습기 시장은 지난해 4000억원까지 올라섰고 올해에는 2배 수준인 8000억원까지 예상된다. 업계에서는 올해 최소 250만대가 팔릴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판매 금액으로 보면 연 1조원 규모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내년에는 냉장고, 김치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TV와 함께 1조원 가전제품 시장에 제습기가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제습기도 필수가전이 된다.


지난해 여름 고온 다습한 날씨로 제습기 시장이 주목받으면서 국내 제습기의 가구당 보급률은 12%까지 올라섰다. 업계에서는 올해 제습기 보급률이 23%까지 올라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제습기는 출시 당시만 해도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았다. 2000년대 초반 제습기는 전국적으로 연간 1만∼2만대가량만 팔리는 상품에 불과했다. 그런데 2010년 이후 판매량이 급증했다. 기후변화의 결과물이다. 한반도가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지난해 여름부터 제습기 시장이 본격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이후 온난화 현상이 심해지면서 한반도 기온은 최근 10년간 연평균 0.18도씩 오르고, 강수량은 매년 21mm씩 늘어나고 있다.

제습기, 고온다습 기후에 필수가전
40개 업체 각축…위닉스 아성 도전

또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시장이 어느 날 갑자기 매년 2∼3배씩 성장하는 이유는 주부들 입소문의 힘이 크다. 위니아만도가 최초로 출시했던 김치냉장고 ‘딤채’와 비슷한 경우다. 위니아가 딤채를 출시했던 때만해도 소비자들에게 김치냉장고는 사치품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주부들의 입소문을 타고 점차 사랑받게 됐다. 제습기도 주부들의 입소문에 의해 급성장한 제품이다.

가전업계 한 관계자는 “아열대 기후로 인해 제습기 자체가 필수 가전이 되면서 지난해 폭발적인 수요를 보였다”며 “지난해에는 판매량 예측에 실패했지만 올해에는 물량 확보에 힘쓰고 있다”고 전했다. 업계는 올해도 제습기 시장이 지난해에 비해 두 배 가량 성장할 것으로 보고 있다. 벌써 지역에 따라 최고 기온이 30도를 웃도는 등 때 이른 더위로 고온 다습한 날씨가 지속되면서 제습기 구매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춘추전국시대
40개 업체 경쟁


여름철이 다가오면서 전자업체들은 본격적으로 습기 잡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제습기 업체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는 대기업뿐 아니라 쿠쿠전자, 리홈쿠첸, 롯데 기공, 파세코 등 중견업체까지 제습기 시장에 가세했다. 약 40개 업체가 제품을 내놓으면서 제습기 시장 파이는 쪼개질 것으로 보인다. 파이가 커지면서 제습기 시장을 독점해왔던 위닉스와 LG전자는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국내 제습기 시장 점유율 1위(지난해 점유율 33%)를 차지하고 있는 위닉스는 2014년 제습기 ‘위닉스뽀송’을 출시하면서 톱스타 조인성을 모델로 내세워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다.

위닉스는 2014년 제습기 전 제품의 전력소비등급을 1등급에 맞췄다. 전력소모와 소음 등을 최소화한 인버터 제습기를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가격은 지난해 수준에 맞췄다.

이에 질세라 LG전자도 공격적인 마케팅을 펼쳤다. LG전자는 위닉스와 시장 점유율 1위를 다투고 있다. 1986년 제습기 사업을 최초로 시작한 LG전자가 28년 만에 처음으로 TV광고를 시작한 것이다. 점유율 1위를 선점하겠다는 의도다.

LG전자는 TV광고에서 ‘인버터 컴프레서’ 기술을 전면에 내세웠다. ‘인버터 컨프레서’ 기술로 기존 제습기보다 제습 속도가 빨라졌고, 소음도 낮아졌다고 LG전자는 강조했다.

삼성전자도 LG전자와 함께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되기도 전 지난 3월부터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치열한 경쟁을 펼쳤다. 삼성전자는 인버터 제습기를 내놓았다. ‘피겨여왕’ 김연아 선수를 모델로 내세워 광고하고 있다.

중견 가전업체들의 쟁탈전도 치열하다. 위니아만도는 작년 대비 생산 물량을 늘릴 계획이다. 위니아만도는 신형 제습기를 16종이나 새로 내놨다. 올해 제습기 판매량 증가가 확실한 만큼, 다양한 제품군 공급으로 시장 수요에 대비한다는 판단이다.

최근에는 밥솥 시장에서 점유율 1, 2위를 다투고 있는 쿠쿠전자와 리홈쿠첸까지 제습기 전쟁에 뛰어들었다. 국내 포화상태인 밥솥 시장에서 벗어나 제습기를 통해 성장 모델을 찾겠다는 의도다.

작년 제습기를 출시한 쿠쿠전자는 4월부터 5월까지 판매량이 지난해보다 5배 증가했다. 제습과 공기청정 기능이 함께 들어있는 ‘하이브리드 365’ 제품을 내세워 렌탈 서비스도 제공하고 있다. 렌탈 서비스 이용 고객은 전체 실적 중 60%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습기도 정수기처럼 필터와 내부 청소 등 정기적인 관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앞으로 제습기 렌탈 이용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쿠쿠전자는 예상하고 있다.

리홈쿠첸도 최근 2014년형 제습기 2종을 새롭게 출시했다. 신제품 ‘CCD-CD10 시리즈’와 ‘CCD-CD15 시리즈’는 각각 일일 제습량 10ℓ, 15ℓ의 넉넉한 양으로 오랜 시간동안 습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리홈쿠첸은 자부했다. 지난달에는 롯데기공이 제습기를 출시하며 소비자 가전시장에 재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렇게 되면서 약 40개의 전자업체가 제습기 시장에 뛰어든 셈이다. 업체들이 시장 파이를 나누면서 위닉스와 LG전자의 아성은 조만간 깨질 것으로 보인다. 제습기 업체가 급증한 이유에 대해 업계 한 관계자는 “아무래도 제습기를 만드는 기술이 어렵지 않다보니 시장에 도전하는 업체들이 많이 생겨났다”며 “제습기는 6∼7월에 가장 많이 팔리기 때문에 다들 물량 확보에 신경 쓰고 있다”고 전했다.

다재다능 에어컨
삼성 vs LG


에어컨은 최근 제습기의 놀라운 성장에 묻혀 부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여름 필수 가전제품이다. 재작년 시장의 불황으로 주춤한 때도 있었지만 지난해부터 반사이익을 보고 있다. 사실상 에어컨 경쟁의 승자가 진정한 여름가전 1위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

최근 에어컨 시장의 주요 테마는 ‘힐링’이다. 기본적인 기능을 넘어 소리와 향을 부각시키면서 업체들이 ‘힐링’ 마케팅으로 시장몰이에 나서고 있다.

에어컨 시장의 강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벌써부터 기싸움을 벌이고 있다. 예약판매를 진행하면서 지난달부터 ‘힐링’을 내세워 점유율 1위를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마케팅 전쟁을 벌이고 있다.

에어컨 시장의 키워드 ‘힐링’
삼성 vs LG…자존심 건 승부

삼성전자는 ‘휴(休)바람’, LG전자는 ‘내추럴 아로마향’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삼성전자에 따르면 2014년형 삼성 스마트에어컨 Q9000에 채택된 휴바람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쾌하게 느낀다는 한계령 기류패턴을 분석해 적용했다. 특징은 새·파도 등 자연 음향을 함께 들려준다. 한계령의 바람과 소리로 힐링할 수 있게 한다는 취지다.

LG전자는 업계 최초로 천연 아로마향을 전달하는 ‘내추럴 아로마’ 기능을 2014년형 휘센 에어컨에 담았다. 올 신제품 30종에 적용하며 LG전자는 ‘스마트에 힐링을 더한 휘센 에어컨’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웠다. 에어컨 하단부 토출구 안쪽에 레몬·라벤더향 키트를 내장해 원하는 향을 선택할 수 있다. 숲·정원·언덕 3가지 모드로 제공하며 아로마향과 함께 감성적 음악, 은은한 조명까지 설정해 청각·후각·시각적으로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도록 했다.


캐리어에어컨과 위니아만도, 동부대우전자 등은 가격경쟁력을 앞세워 점유율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들 업체는 에어컨 본연의 기능인 냉방성능에 충실하면서도 가격을 낮춘 ‘실속형’ 제품을 선보였다. 캐리어에어컨과 위니아만도의 2014년형 에어컨은 살균 및 공기청정 기능을 강화한 것이 돋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지난해 에어컨 판매량이 사상 최대치를 기록하면서 올해에는 작년만큼의 호황을 누리지 못할 것이라는 평가도 있다. 실제 에어컨 시장은 2011년 좋았고 2012년에 부진했다. 에어컨 시장은 통상 한 해 호황을 누리면 이듬해 불황을 겪는다. 무엇보다 전세 계약이 2년 단위로 이뤄져 이사할 때 새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이 늘기 때문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날개 없는 선풍기
조용한 전쟁

그동안 잠잠했던 선풍기 시장도 은근히 치열하다. 정부가 2010년부터 전력난을 덜기 위해 전국 2만여 개 공공기관의 여름철 실내온도를 28도 이상으로 유지하도록 지도하면서부터다. 더운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 직원들은 전력소비를 줄이기 위해 선풍기를 애용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선뜻 에어컨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무턱대고 에어컨을 켰다가는 전기료 폭탄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뜰한 주부에게는 선풍기가 단연 인기 제품이다. 롯데하이마트에 따르면 무더위 관련 제품의 판매 현황을 집계한 결과 선풍기 판매량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0% 증가했다. 전기료 부담이 적고 여름철을 맞아 성능이 대폭 개선된 중소업체들의 선풍기가 눈길을 끌고 있다.

선풍기 시장 강자로 불리는 한일전기, 신일산업은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유통망 확대에 나서고 있다.

특히 한일전기의 ‘초초미풍 아기바람’ 선풍기는 아기를 위한 '약한 바람'을 내세운 역발상으로 엄마들의 큰 지지를 얻고 있다. 4월 이후 1개월여의 기간에만 5만대를 판매했다.

최근 가전제품업체 파세코는 공업용 선풍기 신제품을 출시했다. 파세코는 주력사업인 석유난로 사업의 안전성을 바탕으로 여름 가전제품 라인업을 강화해 이를 개선해 나갈 방침이다.

선풍기, 전력난에 되찾은 인기
날개 없는 제품들 선풍적 반응

최근 선풍기 시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제품은 '날개 없는 선풍기'다. 지난 2010년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혁신적인 선풍기’라고 소개하면서 화제가 됐다.

날개 없는 선풍기의 원리는 이렇다. 공기가 고리모양의 링을 따라 흐르면 이동속도가 빨라진다. 속도가 높아진 공기의 흐름이 에어포일 모양의 경사를 따라 이동하며 공기를 한 방향으로 보내면서 제트 기류를 형성한다. 이때 주변 공기가 제트 기류에 빨려 들어가면서 바람이 만들어진다.

날개 없는 선풍기는 2009년 영국의 생활가전 기업 다이슨이 최초로 개발했다. 다이슨은 이달 더 조용해진 날개 없는 선풍기 ‘다이슨 쿨’ 3종을 국내에 출시했다. 이번에 새롭게 선보이는 다이슨 쿨은 이전 모델보다 소음을 최대 75% 줄여 음향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날개 없는 선풍기는 시장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아 저질 제품이 범람하고 있다. 특히 중국산 불량 모조품이 쏟아지고 있어 주의가 요구된다.

 

<dklo217@ilyosis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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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벼랑 끝 국민의힘 뒤집기와 자충수

[일요시사 정치팀] 박형준 기자 =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비상계엄 1주년을 맞아 페이스북에 사과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 원내 지도부도 기자회견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짧았지만,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비난은 길었다. 사과 의견을 통해 확인되는 국면 전환 노림수는 ‘한동훈을 제외한 빅텐트’인 걸까? 국민의힘 공보실은 지난 2일 오후 10시54분 출입기자들에게 지난 3일 지도부 일정을 공지했다. 공보실에 따르면, 지도부의 일정은 ‘통상 일정’이었다.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의미다. 지난 3일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1주년이었다. 통상의 의미는? 지도부의 공개 외부 일정이 없단 것은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의 비상계엄 관련 공개 사과 및 기자회견 일정이 없었단 의미로 해석될 수 있었다. 장 대표는 지난 3일 오전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과 의견을 밝혔다. 장 대표는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은 의회 폭거에 맞서기 위한 계엄이었다”는 등 “정당화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을 받을 소지가 있는 주장부터 제시했다. 윤 전 대통령 파면에 대해서도 “한국 정치의 연속된 비극을 낳았고, 국민과 당원들께 실망과 혼란을 드렸다”는 등 ‘탄핵 반대’ 의견을 유지했다. 장 대표에 따르면, 국민의힘의 잘못은 하나로 뭉쳐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는 부분이었다. 자신에 대해서도 “당 대표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장 대표가 사과하지 않을 것”이란 예상은 같은 날 오전 4시50분경 이정재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국민의힘 추경호 의원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확실시됐다. 장 대표는 페이스북 게시글에서도 “추 의원 구속영장 기각은 어둠의 1년이 지나고 두터운 장막이 걷히고,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리는 신호탄”이라면서 대정부 투쟁에 의미를 부여했다. 장 대표는 “이재명정권의 대한민국 해체 시도를 국민과 함께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대표가 사과 불가는 지난달 28일 대구에서 진행된 국민의힘 장외집회에서 어느 정도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 그는 “비상계엄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우리가 흩어지고 분열한 결과, 이재명정권이 탄생했단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책임을 무겁게 통감한다”면서도 이재명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연설 대부분을 채웠다. 5일 간격으로 같은 얘기를 반복한 것이었다. 당시 장 대표가 주장한 민주당에 대한 비난의 핵심 내용은 ▲의회 폭거·국정 방해 ▲무모한 적폐 몰이에 따른 공무원 사찰 위협 ▲폭거로 인한 민생 파탄·국가 시스템 붕괴 ▲내란 몰이 등이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국민의힘의 비상계엄 관련 사과는 ▲송언석 원내대표 ▲유상범·김은혜 원내부대표 ▲최수진·최은석 원내대변인 등 원내 지도부 차원에서 나왔다. 송 원내대표 등은 지난 3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국민께 큰 충격을 드린 비상계엄 발생을 막지 못한 데 대해 국민의힘 국회의원 모두는 무거운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며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어 군인·공직자·의료인·자영업자 등 비상계엄 선포 피해자들에게 “깊은 위로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고개 숙였다. 하지만 이후의 메시지는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 등 장 대표의 주장과 크게 차이가 없는 내용이었다. 송 원내대표는 “국민의힘 의원들은 패배의 아픔을 딛고 분열과 혼란의 과거를 넘어서 다시 거듭나겠다”며 “소수당이지만 처절하게 다수 여당과 정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강조했다. 이전까지 국민의힘에서 장 대표에게 공개적으로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정치인은 오세훈 서울시장과 김용태·김재섭·권영진·엄태영·이성권·조은희 의원 등이었다. 국민의힘 양향자 최고위원은 지난달 29일 대전에서 진행된 장외집회 중 “국민의힘은 불법 계엄을 방치했으니,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일부 지지자들의 강한 항의를 받았다. 김재섭 의원은 지난달 28일 YTN 라디오 <더 인터뷰>에 출연해 “당 지도부의 사과가 없으면 제 나름의 사과를 해야 할 것 같다”며 “같이 메시지를 낼 국민의힘 의원들이 약 20명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곧 “연판장을 돌리거나 기자회견을 할 수도 있다”는 압박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었다. 오 시장도 같은 날 채널A <김진의 돌직구 쇼>에 출연해 “중도층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도 당 차원의 사과가 필요하다”며 “공당이라면 반성문을 쓰는 게 도리”라고 주장했다. 결국 이들은 당과 무관하게 대국민 사과를 했다. 오 시장은 지난 3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국민의힘 소속 중진 정치인이자, 서울시민의 일상을 책임지는 시장으로서 그 책임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그날의 충격과 실망을 기억하는 모든 국민께 거듭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국민의힘 의원 25명은 지난 3일 국회에서 “비상계엄 선포 당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서 비상계엄을 미리 막지 못하고 국민께 커다란 고통과 혼란을 드린 점에 대해 거듭 국민 앞에 고개 숙여 사죄드린다”면서 ▲헌법재판소의 윤 전 대통령 파면 결정 존중 ▲윤 전 대통령과의 정치적 단절 ▲국민의힘 체질 개선·재창당 수준의 혁신 등을 약속했다. 이어지는 각자 플레이 장 대표에게 대국민 사과를 요구한 후 자체적으로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한 국민의힘 정치인들은 대체로 수도권에 기반을 둔 소장파다. 이들 중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면 가장 큰 손해를 볼 정치인으로는 오 시장과 김재섭·김용태 의원이 거론된다. 오 시장은 높은 개인 인기를 바탕으로 민주당의 서울시장 탈환 공세에 맞서고 있다. 김재섭 의원의 지역구 서울 도봉갑은 원래 민주당 텃밭이었다. 김 의원은 지난해 총선 당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안귀령 대통령실 부대변인을 1094표 앞서 어렵게 이겼다. 지난해 12월7일 국민의힘의 윤 전 대통령 탄핵소추 표결 집단 이탈에 동참했을 때도 지역구에서 규탄 집회가 개최되는 등 홍역을 치렀다. 김용태 의원도 경기 가평·포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한 박윤국 한국도자재단 이사장에 2774표 앞서 어렵게 금배지를 다는 데 성공했다. 국민의힘에 대해선 “강경 보수화가 진행된다”는 지적이 각계에서 이어지고 있다. 이 우려는 장 대표가 지난달 16일 유튜브 채널 ‘이영풍 TV’에 출연해 ▲자유통일당 ▲우리공화당 ▲자유민주당 ▲자유와혁신 등 원외 강경 보수 4당과의 지방선거 연대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깊어졌다. 장 대표는 지난달 28일 개혁신당과의 연대 가능성에 대해선 “지금은 연대를 논의할 때가 아니”라면서 선을 그었다. 최근 국민의힘에선 “한동훈 전 대표를 축출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만한 밑그림을 계속 그리고 있다. 국민의힘 여상원 윤리위원장은 지난달 17일 사의를 표명했다. 여 위원장은 “당에서 ‘물러나면 좋겠다’는 연락이 왔다”며 “굳이 능욕당하면서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돼 원하는 대로 하겠다고 답했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윤리위원회가 ‘계파 갈등 조장’을 이유로 윤리위에 넘겨진 국민의힘 김종혁 전 최고위원에 대해 주의 조치만 내린 것 때문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다. 국민의힘 우재준 청년 최고위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원하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고 윤리위원장을 사퇴시키는 게 정당한 일이냐”며 “내란 특별재판부를 만드는 민주당과 뭐가 다르냐”고 정면 비판했다. 이어 국민의힘 당무감사위원회는 지난달 28일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한 조사 절차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당원 게시판 의혹은 “국민의힘 당원 게시판에 올라온 윤 전 대통령 부부 비방글 작성에 한 전 대표 가족이 연루된 게 아니냐”는 의혹이다. 장 대표는 취임 직후 “사실관계를 명확하게 밝혀 당원에게 알릴 것”이라는 방침을 밝혔던 바 있다. 윤 전 대통령 부부는 정치적으로 몰락해 서울구치소에 갇혔고, 형사재판을 받고 있다. 국민의힘이 당원 게시판 의혹을 밝혀낸 후 거둘 수 있는 실익으로는 “한 전 대표를 국민의힘에서 쫓아내고, 친한(친 한동훈)계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 거론된다. 구 친윤(친 윤석열)계가 거둘 수 있는 이익이다. 한 전 대표에 대해선 보수 성향 유권자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명확하게 나뉜다. 하지만 한 전 대표는 윤 전 대통령과 정치적으로 갈등하면서 비상계엄 해제에 동참했던 이력이 있다. 이 때문에 한 전 대표는 “국민의힘이 강경 보수 일색이 되는 걸 막는 방파제·상징”이란 분석이 오랫동안 있어왔다. 친한계로 거론되는 국민의힘 의원 중 상당수는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소장파라는 분석이 나온다. 윤리위원장 쫓아낸 이유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에 대해선 “윤 전 대통령이 정치에서 폭력을 동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몰랐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정치의 본질은 대화·토론·협상이다. 영국 하원에선 20세기 초까지 의원이 총칼을 이용해 결투·난투를 했다. 물리적 폭력이 아닌 ‘언어폭력’ 선에서 공방을 이어가는 정치 문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정착됐다. 윤 전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전 세계에 줬던 충격은 민주주의가 충분히 성숙했다고 믿었던 대한민국에서 군을 동원해 정적을 제거하려던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는 사과 메시지를 먼저 짧게 발표하면서 이재명정부·민주당 비판은 길게 이어가는 형식의 사과 의견을 밝혔다. 사과엔 ▲직접적인 반성 ▲분명한 잘못 인정 ▲재발 방지 약속 ▲보상 약속 등 4개의 원칙이 제기됐는데 “상대방 비판에 더 중점을 둔 사과는 역설적으로 ‘반성을 하는 게 맞느냐’는 비판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지난 2008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대국민 사과를 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은 지난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불거진 후 대국민 사과를 했다. 이 전 대통령은 “모든 것이 제 불찰이고, 국민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후속 조치 중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미흡했고, 우려를 덜어드리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박 전 대통령은 “국정을 꼼꼼하게 챙겨보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으로 한 일”이라며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놀라고 마음 아프게 해드린 점에 대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 “국민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당시 크게 불거졌던 각종 우려를 ‘괴담’으로 규정지었다. 이 때문에 촛불 시위 세력이 제시한 재협상 시한과 맞물린 시점에서 사과가 나온 점을 감안할 때 국면 전환을 위한 명분 쌓기 아니냐는 비판을 받았다. 박 전 대통령은 이미 각종 의혹이 광범위하게 제기돼 근거 자료들까지 제시되는 시점에서 “취임 후 일정 기간 일부 자료들에 대해 최순실씨의 의견을 들은 적은 있지만, 청와대 보좌 체계가 완비된 이후에는 그만뒀다”고 주장했다. 이로써 박 전 대통령의 해명은 신뢰를 잃었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두 전직 대통령의 사과처럼 자신의 주장을 뒤에 배치한 후 더 큰 비중을 부여하는 형식을 유지했다. 비상계엄 1주년에 강조된 “민주당 폭거” 국면 전환·결집 노리는 선 사과·후 비난? 이런 사과 형식은 국면 전환·지지층 결집 목적을 가진 이들이 활용한 사례가 많다. 대표적인 예로, 고대 로마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있었던 마르쿠스 브루투스·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연설이 꼽힌다. 카이사르 살해를 주동한 브루투스는 “카이사르에 대한 내 사랑은 카이사르를 사랑하는 다른 분보다 절대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고 선언한 후 “로마를 더 사랑해서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어 “나라를 위해 눈물을 머금고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죽였다”고 강조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한 사람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라고 선언한 후 카이사르를 찬양하면서 그의 유언장을 공개했다. 유언의 핵심 내용은 “내 재산을 로마 시민에게 기증한다”는 것이었다. 또 카이사르가 살해당할 당시 입었던 칼자국과 피로 얼룩진 옷도 공개했다. 흥분한 로마 시민은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토니우스·아우구스투스는 로마 정국을 장악했다. 불리한 내용을 먼저 짧게 거론한 후 유리한 내용을 장황하게 거론하는 형식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즐겨 이용된다. 장 대표·송 원내대표가 짧은 사과 의견을 밝힌 후 이재명정부·민주당을 비중 있게 비판한 것도 강경 보수 세력에겐 강한 인상을 줄 가능성이 있다. 특히 장 대표는 비상계엄의 원인을 ‘의회 폭거’라고 규정했다. 이에 따르면, 윤 전 대통령은 카이사르가 된다. 비상계엄 해제에 찬성해 사실상 윤 전 대통령 몰락에 가담한 한 전 대표와 친한계는 브루투스 일당이 되는 구도가 그려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강경 보수 세력은 당원 게시판 의혹에 대해 어떤 의견을 제시할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공나형 전남대 학술연구교수는 지난 2022년 발표한 논문 <대통령의 공적 사과 담화에서 드러나는 ‘개입’ 양상>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지난 1993년 쌀 시장 개방을 수용하면서 밝힌 대국민 사과와 박 전 대통령의 최순실 게이트 관련 대국민 사과를 분석했다. 공 교수는 김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선의로 행한 행위가 어쩔 수 없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강조하면서 결과의 부정성에 관여하는 자신의 의도의 비중을 제거했다”고 분석했다. 박 전 대통령의 사과문에 대해선 “자기 고백이 많은 분량을 차지하지만, 그 고백의 원인이 되는 행위에 대해선 소극적”이라고 분석했다. 12월3일 조용히 장 대표·송 원내대표의 사과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과 상대방 비판을 내용으로 채웠다. 그러면서 민주당 심판·보수 재건·대여 투쟁을 강조했다. 결국 두 사람의 답은 ‘한 전 대표를 제외한 빅텐트’ 방침 재확인으로 보인다. 국민의힘의 12월3일은 이렇게 조용히 지나갔다. <ctzxp@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