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18주년 특집대담> 한국정치사 산증인 이만섭 전 국회의장 '그가 말하는 정치는?'

"정치인들이여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라!"

[일요시사=정치팀] 허주렬 기자 = '혼돈', 최근의 대한민국 정치권을 한 단어로 표현하는 말이다. 세월호 참사로 인한 애도정국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지방선거, 여야 내부 권력재편기 등 중요한 정치적 이슈들까지 겹치며 정기권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비교적 짧은 시기 민주화를 달성한 우리 정치사를 되돌아보면 과거에도 지금과 같은 '혼돈의 시기'는 여러 차례 있어왔다. 그렇다면 과거에서 지금의 혼돈을 끝낼 교훈을 얻을 수는 없을까? 창간 18주년을 맞이한 <일요시사>가 한국정치사의 산증인 이만섭(82) 전 국회의장을 만나 한국정치사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이승만정부~박정희정부 초기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로 정치현장에서 활약했다. 이후 인터뷰를 위해 만난 박정희 대통령의 개혁 의지에 공감해 의기투합하며 공화당 전국구 17번이라는 특혜를 받아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역대 대통령 공과
언론인터뷰 사상 '첫 평가'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중구에 출마해 당선되며 재선에 성공한 그는 박 대통령이 장기집권 야욕을 드러낸 3선 개헌, 유신헌법 선포를 전후한 시기 강하게 반발하다 8년간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1979년 10대 총선에서 다시 당선돼 원내에 복귀한 그는 이후 다섯 차례 더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8선 의원을 지냈다. 그 사이 제14·16대 국회에서는 정권을 달리해 국회의장을 두 번 지냈다.

국회의장 재임 시절 국회의장의 독립성 확보와 국회의원 개개인의 독자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 국회법을 여러 차례 개정한 그는 직권상정, 날치기를 한 번도 하지 않으며 '소신 의장'의 본보기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이 전 의장과의 일문일답.


- 최근 어떻게 지내시고 계신지요?
▲ 나라가 어려운 때인 만큼 나라의 장래를 위해 언론계에서 인터뷰 요청이 오면 몸을 아끼지 않고 나가서 조언, 쓴 소리를 해주고 있습니다. 남은 인생도 나라를 위해 바른 소리를 하다가 당당히 떠나려 합니다.

- 세월호 참사로 대한민국 전체가 비통에 빠져 있습니다. 이번 사고를 어떻게 보셨는지요?
▲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 학생들이 희생됐으니 어른의 한 사람으로 부끄럽기 그지없습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이 꽃도 피우기 전에 이렇게 저세상으로 가, 저 같은 늙은이가 살아있다는 게 미안하다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그리고 이번 사고는 우리 어른들 모두가 학생들을 두고 대피한 선장의 입장으로 돌아가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일반국민들도 선장만큼의 책임을 통감해야 한다는 말씀인지요?
▲ 그렇습니다. 우리 기성세대 어른들 모두가 (세월호 사고에 대한) 책임의식과 도덕의식, 사명감을 가져야 합니다.

- 세월호 침몰 이후 정부의 구조 과정에서 미흡했던 대처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정부의 대처에 대해서 어떻게 보셨는지요?
▲ 정부가 구조과정에 있어 컨트롤타워도 없이 갈팡질팡함으로써 유족은 물론 국민들께 많은 실망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앞으로는 국가적 안전시스템을 완전히 확립해 다시는 이런 우왕좌왕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국가안전처를 신설한다고 하는데, 기구의 설립만으로 안전은 보장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사명감,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월호 참사, 기성세대 어른 모두가 책임 통감해야"
"기구 설립만으로 안전보장 못해…사명·책임감 필요"

- 실제로 비슷한 사고가 반복해서 일어나며 관료의 경직성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합니다.
▲ 서해페리호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등 비슷한 사고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당시 정부는 그 당시만 반짝 대책을 세웠다고 떠들다가 시간이 지나면 그냥 넘어가곤 했습니다. 이번에는 확고한 대책을 수립하고 관련기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공무원들이 국민에 대한 사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총리가 사표를 냈으니 대폭 개각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계기로 정부가 다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새출발 해야 합니다.

-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정치권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 여야는 세월호 참사를 정쟁에 이용하면 안 됩니다. 이를 정치싸움에 이용하면 국민들로부터 더 불신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일례로 야당은 책임론을 물어 정홍원 국무총리의 사퇴를 요구하다가, 막상 그만 둔다고 하니 '왜 그만 두냐'고 말을 바꿨습니다. 국민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세월호 사고는 여야 모두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초당적으로 협력해야 할 사안입니다.


- 박근혜정부에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지요?
▲ 지금 국내·외적으로 나라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북한의 도발이 이어지고 있고, 한반도 정세도 굉장히 미묘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완급을 가려 당면한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안전에 대해 정부를 믿고 일상생활에 복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6·4지방선거를 목전에 두고 일어난 이번 세월호 참사 여파로 여권이 지방선거에서 불리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습니다. 의장님께서는 세월호 참사가 지방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치리라 보시는지요?
▲ 흔히들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다고 이번 사건으로 꼭 야당이 유리해졌는지는 의문입니다. 여야 모두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그런 것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특히 여야는 자숙이 필요한 시기 모두 지방선거 공천문제로 추태를 부렸는데 안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투표율이 역대 선거 중 가장 저조할 것으로 보여 걱정입니다.

-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도 국회가 민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많았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이러한 기류는 더욱 강해지고 있는데, 의장님께서 후배 의원들에게 한마디 조언을 해주신다면?
▲ 이 사건이 나자 부랴부랴 국회에서 국가안전시스템 마련을 위한 법안, 민생법안 등을 급히 처리하는 것을 보고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래야 합니다. '여'든 '야'든 자신이 속한 정당보다 나라와 국민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 당 지도부는 강경파에 끌려 다녀선 안 됩니다. 강경파에 휘둘리면 당과 정권은 망하게 되어있습니다.

- 당론을 존중하되 꼭 따르지는 않아도 된다는 말씀인지요?
▲ 헌법에는 국회의원이 양심에 따라 의정활동을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의원총회에서 당론을 결정할 때 의원들이 소신을 정확히 밝히고 자유 투표를 하도록 먼저 나서서 따져야 합니다.

"세월호 참사 정쟁 이용은 국민적 불신만 키우는 것"
"정당·정권, 강경파에 휘둘리면 망할 가능성 높아"

- 기나긴 정치사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무엇입니까?
▲ 1964년에 남북가족면회소 설치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했는데, 그것이 결국 성사가 돼서 지금 이산가족들이 만나고 있습니다. 또 같은 해 주한미군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한미행정협정(SOFA)촉구결의안을 국회에 제안해 만장일치로 통과가 됐고, 이것을 기초로 SOFA협정이 체결됐습니다. 덧붙이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 3선 개헌, 유신 등 장기집권 음모에 끝까지 반대했던 일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 본인의 정치사에 대해선 어떻게 자평하시겠습니까?
▲ 국회의장을 2번 하는 동안 청와대의 무리한 요구를 끝까지 거절하며 국회의 권위를 지켰습니다. 구체적으로 YS(김영삼 전 대통령),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통과시켜 달라는 법안들에 대한 직권상정, 날치기를 거절해 국회의 권위를 지켰습니다. 또 여야 치우치지 않고 국회를 공정하게 운영했다고 자부합니다.

- 국회선진화법이 마련돼 지금은 국회의장의 직권상정이 아예 제한됐습니다.
▲ 선진화법을 재정할 당시 정의화 국회 부의장을 통해 여야 대표들에게 "선진화법은 하는 게 아니다"라는 저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었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역시 선진화법은 '후진화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국회가 식물국회가 된 것이지요. 국회의 정상적인 운영은 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국회의장의 리더십으로 되는 것입니다.

- 의장님께서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역대 대통령들을 모두 제도정치권 현장에서 지켜보셨습니다. 현대정치사의 산증인으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의장님의 평가가 궁금합니다.
▲ 대통령을 못 해본 제가 전직 대통령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주제 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간략한 소감 정도를 말씀드리자면, 우선 이승만 전 대통령은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을 통해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 망명하는 신세가 됐지만, 그 분이 건국의 공로자라는 것은 우리가 인정을 해야 합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마지막에 3선 개헌, 유신 등 장기집권을 한 것은 잘못이지만, 이 나라의 경제를 살리고 민족의 가능성을 개발한 조국 근대화의 업적은 모두가 인정해야 합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비민주적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고, 말년에 국가에 대한 미납추징금 문제를 깨끗하게 처리하지 못해 국민의 미움을 받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다만 학원안정법을 보류하고 6·29선언을 수용한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 민주화 이후 집권한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도 내려주시지요.
▲ 노태우 전 대통령은 내치에 있어서는 큰 업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외교에 있어서는 많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통해서 남북 화해·협력을 모색한 것과 북방정책 추진으로 러시아·중국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헝가리 등 동구권 국가와도 국교를 맺은 것은 잘한 일입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군사문화를 청산하고 문민정치를 위해 애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외환위기를 사전에 막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6·15남북공동선언 등을 통해서 남북 간 화해·협력을 시도한 것은 분명 역사에 남을 일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 돈이 개입됐다는 점은 옥에 티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돈 안 드는 선거, 깨끗한 정치를 하기 위해 애쓴 것이 사실입니다. 다만 10·4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에 NLL을 양보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함으로써 국민의 비판을 받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가족들의 비행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역사적으로도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미동맹강화외교에 치우친 나머지 대중외교를 소홀히 했습니다. 퇴임을 앞두고 내곡동 사저 구입 과정에서 아들의 명의로 경호실과 공동으로 땅을 구입한 것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다만 국가원로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민심의 동향을 알려고 했던 것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 경황이 없으실 텐데 기꺼이 <일요시사> 창간 18주년 특집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으로 덧붙이실 말씀은 없으신지요?
▲ 무엇보다 뜻있는 젊은 기자들이 모여 정론직필에 힘쓰고 계시는 <일요시사>의 창간 18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날로 발전하는 정론지가 되시길 바랍니다. 또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하고, 공명정대한 선거가 이뤄져야 합니다. 이 부분에 후배 정치인들이 유념한다면 한층 진일보한 정치가 이뤄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carpediem@ilyosisa.co.kr>

 


<이만섭 전 국회의장 프로필>

▲ 제14·16대 국회의장
▲ 8선 국회의원(6·7·10·11·12·14·15·16대)
▲ 새정치국민회의 상임고문
▲ 신한국당 대표서리
▲ 한국국민당 총재
▲ 민주공화당 원내총무
▲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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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