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인물> 어물쩍 앉은 강병규 신임 안전행정부 장관

털어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지만…

[일요시사=사회팀] 박근혜 대통령이 강병규(59)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를 장관에 임명했다. 박 대통령은 유정복 전임 장관이 인천시장에 출마함에 따라 그 빈자리에 안전행정부 제2차관 출신인 강 장관을 후임으로 선임했다. 강 장관은 임명 과정에서 중대한 인사 기준상의 흠결이 밝혀져 여야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그는 과연 건전한 지방자치 발전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을까.

지난 2일 강병규 신임 안전행정부 장관이 취임했다. 강 장관은 취임식에서 “국정운영의 중추부처로서 안전행정부는 그 어느 부처보다 각종 국정과제들을 보다 활력 있게 추진해 국민들이 피부로 느끼는 성과를 만들어 가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과 현장 속으로 더 가까이 더 철저하게 다가가겠다는 다짐을 보였다. 다음날인 3일 강 장관은 국회 본회의장에서 신고식을 치르고 본격적인 행보를 예고했다. 강 장관은 안전행정부가 추진해야 할 역점사안으로 공정한 6·4 전국동시지방선거 관리, 국민안전과 재난·재해 예방 강화, 정부3.0 확산과 성과 창출, 건전한 지방자치 발전 토대 마련을 언급했다.

속전속결 인선
법 위반? 쉿!

박근혜 대통령은 새 안전행정부 장관으로 강병규 전 행정안전부 제2차관을 앉혔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지난달 7일 브리핑에서 6·4 지방선거 인천시장 출마를 위해 지난달 5일 사임한 유정복 전 장관의 후임으로 강 전 제2차관이 내정됐다고 발표했다. 박 대통령이 인선을 위해 장고했던 과거와 달리 이번 후임 인선은 불과 이틀만에 신속히 이뤄졌다. 민 대변인은 “강 내정자는 안행부 업무 전반에 걸쳐 풍부한 식견과 경험이 있으며 부처와 국회 등 대외기관과 협조가 원활할 뿐만 아니라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는 수평적 리더십과 조직관리 능력을 갖췄고, 조직 내 신망이 두텁다는 점이 발탁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달 24일 국회 인사청문회 결과 위장전입 및 농지법 위반 등을 두고 야당이 강 장관에 대한 자질문제를 지적하면서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이 무산된 바 있다. 이에 박 대통령은 지난달 11일 국회에 인사청문을 요청한 이후 인사청문회법에 규정된 20일 내에 보고서가 채택되지 않음에 따라 지난 1일 보고서 채택을 재요청한 뒤 강 장관을 임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4일 안전행정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서 강 장관은 위장전입 문제로 홍역을 치렀다. 위장전입은 고위 공직자의 인사청문회 때마다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사안이기는 하지만, 안전행정부가 주민등록법을 관장하는 주무부처라는 점에서 여야 의원들의 질타가 더욱 거셌다. 강 후보자는 자녀 교육문제와 연관된 위장전입으로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사실을 시인하면서 시종 머리를 숙였다. 강 장관의 배우자와 장남은 1997년과 2000년에 각각 이촌동과 후암동에 있는 지인의 집으로 전입했다. 강 장관은 교육 문제 때문이었다고 해명했다. 그는 “어차피 이사할 것이니 미리 전입신고를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고 말했다. 또 2000년 두 번째 위장전입에 대해서는 “꼭 학군의 이점 때문에 특정 학교를 가야하는 문제가 아니라 아이 사정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그 학교 주변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 했다”고 해명했다.


이 밖에도 강 장관은 미국에서 유학 중이던 87년 2월 구입한 과천 주택에 대해서도 양도세 면제기간을 채우기 위해 발령지인 부산으로의 전입신고를 미뤘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1986년 4월 과천에서 부산으로 발령나 이사했음에도 이듬해 4월에야 부산으로 주민등록을 이전한 것 때문이다. 아파트 양도세를 면제받기 위해 주민등록을 위반한 것이 아니냐는 추궁이 이어졌다. 그는 이 부분에 대해 “유학 후 돌아와서 2개월 만에 부산으로 발령나 2개월밖에 살지 못한 건 사실”이라면서도 “그러나 투기나 세금면탈 목적은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특히 야당 의원들은 예외 없이 위장전입 문제를 파고들었고, 강 후보자는 그때마다 연거푸 사과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은 “다른 부모들이 교육문제로 위장전입을 한다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처벌할 수 있겠느냐”면서 “국민이 그런 처벌에 수긍하겠느냐”고 따졌다. 새정치민주연합 김현 의원은 “주무부처 장관이 주민등록법을 위반한 사실이 드러났는데도 청와대는 ‘문제없다’고 판단한 것 아니냐”면서 “이래놓고 어떻게 비정상의 정상화, 법과 원칙을 얘기할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반면 여당은 강 장관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윤상현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지난달 25일 열린 원내대책회의에 참석해 “강병규 안행부 장관 후보자의 전문성 도덕성에 대해 검증이 이뤄졌다”면서 “주민등록법 위반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또 “불법선거운동 근절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있어 무리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여당은 후보자가 일부 흠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둘러 장관을 임명한 것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행정공백을 최소화하려는 청와대의 의지라며 엄호했다.

행정가 임명 이유
선거 중립 표방

하지만 야당 일부 의원들은 강 후보자에 대해 행정 전문가로서의 업무 역량을 인정하면서도 위장전입에 대해서는 해명을 요구했다.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은 “몇 가지 문제점들이 지적됐는데 그때 시점으로 봐서는 불가피했을지 모르나 지금 눈으로 보면 잘못이니 솔직하게 인정하라”고 꼬집었다. 새누리당 송광호 의원은 강 장관의 각종 도덕성 논란과 관련해 “청와대 인사 담당 참모들은 뭐하는 양반들이냐”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그러면서 “안전행정부 장관할 사람이 법 위반한 사람 말고는 없느냐”며 “군대 안 다녀온 사람, 농지법 위반한 사람은 공직에 앉아선 안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주무부처 장관의 위법 사실을 두고 여러 의원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청문회서 위장전입·농지법 위반 뭇매
보고서 채택 무산…박 대통령 임명 강행

일부 의원들은 강 후보자의 자진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강 장관은 변명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는 “제 불찰이고 죄송하다”며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없다”고 위장전입을 수차례 사과했다. 그러나 사퇴 요구에는 “후보자로서 진퇴 문제를 말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고 선을 그었다.


위장전입 문제로 홍역을 치른 역대 행정부 장관 후보자는 강 장관 외에도 2010년 취임한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이 있다. 당시 맹 전 장관은 언론사 기자 시절 배우자와 딸이 실제 거주지인 서울 방배동이 아닌 인천 주안동에 주민등록을 이전했다 복귀한 기록이 드러나 주민등록 주무 장관으로서 부적합하다는 야당의 공세에 부딪혔다. 당시 특파원 출국을 앞두고 딸이 호적에 아들로 잘못 기재돼 있어 이를 정정하기 위해 사무처리가 빠른 인천으로 일시적으로 주민등록을 옮긴 것이라고 해명했었다.

그러나 강 장관은 위장전입과 함께 농지관리법을 위반한 기록도 갖고 있었다. 강 장관의 배우자인 김모씨는 2012년 8월 부친으로부터 논밭을 증여받은 후, 실제 경영을 하지도 않으면서 농업 경영계획서를 제출했다.

현행 농지법상 농지는 자신이 농업 경영에 이용하지 않으면 소유할 수 없다. 해당 논지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소재의 논 4필지와 밭 1필지 등 총 5필지(7246㎡)로, 공시지가로 4억490여만원에 달한다.

강 장관은 “장인으로부터 30년간 위탁경작한 분의 권리를 지켜달라는 부탁이 있었다”며 “법에 저촉된 부분이 없게 했어야 하는데 법무사에게 일임하다보니 챙기지 못했다”고 해명했다.

또 토지 처분 여부에 대해 “아직 용인 백안면으로부터 해당 농지를 처분하라는 공문은 받지 못했으나 민간 매각이나 농어촌공사에 위탁매매 의뢰, 혹은 위탁 경장을 의뢰하는 등 위반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바로 잡겠다”고 말했다.

청와대는 강 장관의 이러한 불법·탈법 사실을 미리 알고서도 내정한 것으로 드러나 뒷말이 무성하다. 강 장관은 청와대의 사전 질문서에 ‘위장전입 여부’ ‘농지 불법 취득 여부’ ‘자녀 이중국적 취득 여부’ 등을 물었고 여기에 모두 ‘그렇다’고 답변했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 김민기 의원은 청문회에서 “청와대가 사전에 검증하기 위해 사전 질문서를 주는 것인데, 사실상 액세서리 아니냐”며 “사전질문서에 후보자가 거짓으로 썼으면 몰라도, 제대로 썼는데도 이렇다면 제대로 인사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비판했다.

중앙·지방 잇는
내무행정전문가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다. 강 장관이 한국지방세연구원장 재직 시절에 업무추진비를 개인적 용도로 지출했을 수 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새정치민주연합 진선미 의원실에 따르면 강 장관은 지방세연구원장으로 재직한 2011년 2월부터 지난 2월까지 경조사비 용도로 업무추진비 3230만원(321건)을 지출했다.

이는 강 장관이 지난 3년간 쓴 전체 업무추진비 내역 694건 1억5700만원과 비교할 때 집행 횟수 기준으로 46.1%, 집행 금액 기준 30%에 해당한다. 강 장관은 재직기간 경조사비에 연평균 107건 1000만원을 업무추진비로 집행했다. 과도한 경조사비 지출을 두고 개인적 용도로 업무추진비를 집행했을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에 진 의원실은 지방세연구원에 경조사비가 지출된 대상에 관한 상세 자료를 요구했으나 지방세연구원은 이에 불응했다.

강 장관의 재산은 17억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2010년 9월24일 공직자 퇴직 재산신고에서 강 내정자는 본인 소유의 서울 용산구 이촌동의 아파트 7억2000만원 상당과 제주도의 과수원 3306㎡ 2324만원 상당을 신고했다.
 

강 내정자는 또 본인 소유의 2003년식 SM5 743만원 상당과 배우자 소유의 2004년식 뉴EF소나타 932만원 상당 등 자동차 2대를 보유했다고 신고했다. 퇴직 당시 강 내정자 예금은 외환은행 3614만원, 국민은행 2631만원, 배우자 예금은 삼성생명 3577만원 등이다. 강 내정자의 재산은 퇴직 때 그 전년 말 기준 재산신고액과 비교할 때 1401만원 늘어났었다.


청와대 인사시스템은 그동안 공직후보자를 내정할 때마다 논란을 샀다. 박근혜정부 들어서는 이러한 부분을 묵인하는 경향이 짙다는 평가다. 현 정권의 인사 철학과 청와대 인사 시스템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지난해 말에도 청와대는 부실한 인사시스템이 드러나면서 거센 비난을 산 바 있다.

지난해 11월 청와대는 법인카드를 개인적으로 사용한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도덕성 논란이 일자 “검증할 때 충분히 확인하지 못했다”고 해명하기도 했다. 즉 기존 공직후보자에 대한 사전 검증 때는 ‘불법’에 대해 인지하지 못했다는 게 청와대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번 강 후보자의 경우, 사전에 해당 탈법에 대해 알고서도 임명을 강행한 것이어서 논란이 쉽게 사그라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정권, 사람이 그렇게 없나”
‘먹통’청와대 인사시스템 또 도마

강 장관은 내무부 시절부터 잔뼈가 굵은 행정 전문가로 알려진다. 1977년 행정고시 21회 합격 이후 78년 5월 사무관 시보로 임용됐다. 이어 79년 6월 이등병으로 입대 후 전두환 보안사령관 당시 보안사에서 근무하다 81년 9월28일 육군 병장으로 제대했다.

그는 제대와 동시에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 수행비서로 발령받았다. 공직에 입문한 강 장관은 91년 내무부 행정관리담당관을 시작으로 장관 비서관, 행정자치부 감사관, 정책홍보관리실장, 지방행정본부장, 행정안전부 소청심사위원장을 거쳐 2009년부터 1년간 제2차관을 역임했다. 차관 재직 시절 지방자치단체 재정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국세 일부를 지방세로 돌리는 지방소비세와 지방소득세를 신설했다.

구사일생 일화
독특한 이력도


그는 부산시를 거쳐 경산시 부시장, 대구시 행정부시장을 지내는 등 현장 지방행정 경험도 풍부하다. 5공과 김대중정부 등 두 차례에 걸쳐 청와대에서 근무하기도 했다. 이때 ‘아웅산 테러’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넘긴 일화도 있다. 대통령비서실장실에서 일하던 83년 10월9일 전두환 전 대통령의 미얀마 방문 때 북한의 폭탄테러가 일어난 아웅산 묘지 현장에서 수행 중이었으나 화를 면했다. 당시 사고로 강 내정자의 상관이던 함병춘 비서실장 등 1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명박정부 시절 행정안전부 2차관을 지낸 뒤에는 한국지방세연구원 초대 원장에 취임, 신생 조직의 초석을 다지는 중이었다. 경북 의성 출신에 고려대를 졸업, 대표적인 TK 행정관료로 분류되지만 경기중·고를 거치는 등 학창시절부터 주로 서울에서 생활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에 평소 격이 없고 소탈한 성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가족으로는 부인 김수미씨와 두 아들을 뒀다. 첫째 아들은 2010년 병장으로 군 복무를 마쳤고 둘째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입시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광호 기자 <khlee@ilyosisa.co.kr>

 

[강병규 장관은?]

▲경북 의성 출생
▲경기고 졸업
▲고려대 법학과 학사, 성균관대 대학원 박사
▲행정고시 21회
▲내무부
▲경산시 부시장
▲행정안전부 감사관
▲행정안전부 자치행정국 국장
▲대구광역시 행정부시장
▲소청심사위원회 위원장
▲행정안전부 제2차관
▲한국지방세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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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관세 협상’ 일본과 비교해보니⋯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트럼프발’ 통상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다. 앞서 못 박은 시한은 끝났다. 우리나라는 유예 기간이 끝나기 전날 타결했다. 이제 협상 결과를 두고 계산기를 두드려야 할 때다. 일본과 유럽연합(EU), 그리고 한국. <일요시사>가 세부 내용을 들여다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각국에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미국을 상대로 돈을 번, 즉 대미 무역 흑자를 거둔 나라들이 표적이 됐다. 지난해 11월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부터 전 세계는 ‘트럼프발’ 통상 전쟁에 휘말렸다. 트럼프 대통령이 숫자를 외칠 때마다 세계 경제가 요동쳤다. 하루 전 극적 타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다소 늦게 통상 협상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윤석열 전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지난 6월 조기 대선이 치러질 때까지 ‘무정부’ 상태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탄핵심판 등 대형 정치 이슈가 거듭되면서 미국과 협상을 하고 싶어도 테이블에 앉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실제 한덕수 전 국무총리나 최상목 전 경제부총리 등이 협상에 나섰지만 당시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새 정부가 해야 할 일이라고 제동을 걸었다. 또 한 전 총리의 대선 출마 선언, 최 전 부총리 탄핵안 상정 등의 상황이 겹치면서 미국과의 협상은 큰 진전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후 이재명 정부가 출범했다. 우리나라는 좀처럼 미국 실무진과 접점을 찾지 못했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모든 한국산 제품에 대해 산업별 관세와는 별도로 25%의 일반 관세를 부과하겠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시한은 지난 1일로 못 박았다. 우리나라는 미국과 FTA 체결로 사실상 무관세 수준이었기에 관세 부과가 현실화하면 경제 전반에 타격이 불가피했다. 자동차나 반도체 등 핵심 수출 품목에 붙는 관세 외에도 비관세 장벽(관세 이외의 수단으로 무역을 제한하는 조치)을 허물라는 압박도 가해졌다. 쌀이나 소고기 등 농·축산물 시장 개방, 정밀 지도 반출,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증액 등이 협상 테이블에 오를 것으로 예상됐다. 국내 상황과 맞물려 쉽게 내주기 어려운 조건들이었다. 일·EU와 같은 15%로 막아 대미 투자는 3500억달러로 협상도 난항을 겪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2 통상 협상을 하루 앞두고 출국하려다 미국 측의 취소로 불발하는 일이 일어났다. 앞서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방한을 닷새 앞두고 일정을 취소하기도 했다. 미국 고위급 인사들과의 만남이 잇따라 무산되면서 ‘한미 관계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냐’는 우려가 나왔다. 일본과 유럽연합(EU)이 차례로 미국과 협상을 타결하면서 불확실성은 더욱 커졌다. 특히 일본의 협상 결과가 공개되면서 우리나라가 최소한으로 맞춰야 할 기준이 생겨버렸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동차 등 수출 품목이 일부 겹치기에 일본보다 관세가 높아지면 수출 경쟁력이 망가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2일 일본과 무역 협상을 완료했다고 발표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밝힌 일본산 수입품에 부과하는 상호관세는 15%다. 기존 25%에서 10%포인트 줄어들었다. 일본이 미국에 5500억달러(약 759조원)를 투자할 것이고 이 중 90%의 수익을 미국이 받게 된다고도 했다. 동시에 자동차와 농산물을 일부 개방한다는 조건도 달렸다. 지난달 27일에는 미국과 EU가 관세 협상을 타결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EU로부터 수입되는 모든 품목에 대해 일괄적으로 15%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미국산 에너지 7500억달러(약 1030조원) 구매 및 대미 투자 6000억달러(약 820조원) 확대 방안을 담은 ‘무역협정 틀’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일본과 EU의 협상 타결로 미국의 협상 전략이 윤곽을 드러냈다. 관세를 낮추는 조건으로 무엇을, 얼마나 내놓느냐가 관건이 된 것이다. 관심이 집중된 부분은 대미 투자액이었다. 애당초 통상 전쟁 자체가 타국이 얻는 대미 무역 흑자를 줄이겠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터라 트럼프 대통령은 상대국에 대미 투자라는 일종의 ‘청구서’를 요구한 셈이다. 일본이 5500억달러, EU가 6000억달러를 미국에 각각 투자하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우리나라에 날아올 청구액에 관심이 쏠렸다. 협상 시한이 다가오면서 언론보도 등을 통해 3000억달러, 4000억달러 등의 추측이 난무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제멋대로’ 외교에 우리나라 협상팀이 휘둘리고 있다는 말도 나왔다. 쌀 소고기 지켰다는데 우리나라는 협상 시한을 하루 앞둔 지난달 31일 한국산 제품에 대한 상호관세를 25%에서 15%로 낮추는 내용을 골자로 협상을 타결했다. 일단 일본, EU와 동일한 수준으로 관세 인하를 이끌어낸 것이다. 관심을 모았던 자동차 관세율은 15%, 철강·알루미늄·구리는 기존 관세율(50%)을 유지하기로 했다. 또 반도체와 의약품 관세 부과 시 최혜국 대우도 약속받았다.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관세를 적용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부분도 일본, EU와 같은 합의 내용이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민감한 품목으로 분류됐던 쌀과 쇠고기 등의 개방은 하지 않는다. 다만 트럼프 대통령은 농산물 전면 개방을 언급해 향후 변동 가능성을 지켜봐야 한다. 대미 투자액은 3500억달러(약 490조원)로 결정됐고 1000억달러(약 140조원) 상당의 액화천연가스(LNG) 또는 기타 에너지 제품을 수입하기로 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한국과 일본의 대미 무역 상황은 지난해 기준 각각 660억달러 흑자, 685억달러 흑자로 규모가 유사한 상황에서 일본보다 작은 규모인 3500억 달러 펀드를 조성하기로 했다”며 “기업이 주도하는 조선펀드 1500억달러를 제외하면 우리 펀드 규모는 2000억달러로 일본의 36%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 합의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미국과 조선업 분야 협력을 확대하기로 한 것”이라며 “한미 조선협력펀드 1500억달러는 선박 건조, MRO(유지·보수·정비), 조선 기자재 등 조선업 생태계 전반을 포괄한다”고 덧붙였다. 우리나라 협상팀은 조선 협력을 내세운 게 협상 타결의 ‘키’였다고 자평했다. 구윤철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D.C. 주미 한국대사관에서 브리핑을 하며 마스가(MASGA·Make American Shipbuilding Great Again) 프로젝트가 협상 타결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고 밝혔다. ‘미국 조선업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뜻으로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 구호인 ‘매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에서 따온 표현이다. 자동차는 관철 못 해 아쉬운 부분으로는 자동차 관세를 꼽았다. 이전까지 우리나라 자동차는 관세가 0%였다. 2.5%였던 일본과 비교해 근소하게 가격 경쟁력을 가졌다. 하지만 이번 협상 타결로 일본과 똑같은 15% 관세가 결정되면서 자동차 업계는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됐다. 우리나라 협상팀이 끝까지 자동차 관세 12.5%를 요구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모두 15%’라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재명 대통령은 “큰 고비를 하나 넘었다”며 “이번 협상으로 정부는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평했다. 협상 결과를 바라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단 ‘최악은 면했다’는 의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협상 타결이 이뤄지기 전까지 유예 기간을 놓쳐 관세 25%를 맞을 수도 있다고 우려한 것에 비하면 나름 ‘선방했다’는 의견이다. 동시에 미국이 내민 청구서의 구체적인 부분을 더 살펴야 한다는 신중론도 존재한다. 일본 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타결 발표와 실제 합의 내용이 다르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결정된 사항을 즉흥적으로 바꾸는 등 외교 과정에서 ‘오락가락’하는 면모를 보인 적이 여러 차례 있다.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불확실성을 극대화하는 협상 기술을 사용한다는 평이다. 정밀 지도·국방비 등 안보 이슈 백악관서 만나 대통령끼리 담판?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나라와의 협상 타결 내용을 발표하면서 언급한 정상회담이 ‘진짜’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그는 “한국이 투자 목적으로 상당한 금액을 추가 투자하기로 합의했다”면서 2주 내로 이재명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투자액이 발표될 것이라고 했다. 추가 청구서가 나올 수 있다는 뜻이다. 이번 통상 협상에서 논의되지 않은 정밀 지도 반출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라갈 가능성이 있다. 김용범 정책실장은 지도 반출 등 안보 사안은 한미 정상회담에서 별도로 논의할 것으로 예상된다면서 “(지도 반출과 관련해) 우리가 계속 방어해왔다. 추가 양보는 없다”고 말했다. 미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3월 <2025 국가별 무역 장벽 보고서>에서 정밀 지도 반출 제한을 한국과의 디지털 무역 장벽 중 하나로 지목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군사기밀 유출을 우려해 정밀 지도의 국외 반출을 막아왔다. 정밀 지도에 해외 기업이 가진 위성사진을 결합하면 국가 안보와 직결된 지도 정보로 완성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정계와 IT업계는 정밀 지도를 반출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협상에서는 다뤄지지 않았지만 정상회담의 의제로 오를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뜻이다. 주한미군 주둔 방위비 분담금, 국방비 문제도 거론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국들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5% 이상을 국방비 예산으로 잡으라고 압박했다. 우리나라에도 대선 후보 시절부터 방위비 분담금으로 100억달러를 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하는 등 전방위로 요구한 바 있다. 추가 청구 나올까? 한미 정상회담은 이 대통령의 ‘외교 시험대’가 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 나토 회의에는 이 대통령 대신 위성락 안보실장이 참석했다. 이번 정상회담이 ‘안보’ 회담이 될 가능성이 큰 상황에서 이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어떤 딜을 벌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jsjang@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