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출신들의 ‘기업 러시’가 두드러지고 있다. 국정원 전직 고위인사들이 재계에 잇달아 영입되고 있는 것. 기업의 러브콜을 받고 말을 갈아탄 이들의 임무는 십중팔구 대관업무다. 각 회사 요직에 배치된 이들의 영입이나 이동은 극비리에 진행된다. 몇몇 핵심 인사만 알고 있을 정도다. 과연 국정원 출신 인사 영입에 열을 올리는 기업의 속내가 뭘까.
‘철벽수비 임무완수’ 비밀요원 떴다!
국정원 전직 고위인사들이 재계에 잇달아 진출하고 있다.
재계에 따르면 지난 7월 P그룹은 국정원 경제국장을 지낸 박모씨를 부사장으로 영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달 H그룹도 국정원 경기지부장을 지낸 김모씨를 역시 부사장으로 선임했다. 이 그룹은 지난해 국정원 충북지부장을 지낸 유모씨를 고문으로 영입한 바 있다.
지난 3월 K그룹도 사장단과 임원 인사를 단행하면서 국정원 대전지부장을 역임한 차모씨를 감사로 선임했다. 국정원 지역 지부장(1∼2급)은 간부급으로 상당한 위치다. 앞서 S그룹, G그룹 등도 국정원 간부 출신들을 임원급으로 채용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재계가 국정원 출신 인사 영입에 열을 올리는 속내가 뭘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이 보유한 ‘정보력’을 활용할 심산이다. 정권이 바뀌면서 대관업무(GR)에 전력투구하고 있는 대기업의 경우 간부급으로 영입한 국정원 출신 인사에게 하나같이 대외업무를 ‘임무’로 맡기고 있다.
검찰·경찰·국세청 등의 국가 수사·정보 전문가도 대기업 사이에서 영입 1순위로 꼽히지만, 그중 국정원 출신을 가장 선호하고 있다는 게 재계 관계자의 전언. 덩달아 국정원 ‘정보통’들의 주가도 많이 오른 게 사실이다. 이런 움직임은 수년 전부터 계속됐지만, 새 정권이 들어선 이후 더욱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각 그룹 경영전략 담당자들도 ‘정보가 힘’이라고 입을 모은다.
대기업, 전직 국정원 고위인사 극비리 영입 박차
‘정보통’에 러브콜 잇따라…대부분 대관업무 담당
재계 관계자는 “‘정보가 모이는 곳에 국정원이 있다’는 말처럼 국정원은 국내의 정치·경제·사회 분야, 나아가 개인정보와 해외 정보까지 쥐고 있다”며 “새 정권에 코드를 맞추기 위해 ‘정보 안테나’를 풀가동하는 대기업 입장에선 국정원 정보부서를 두루 거친 정보통만한 스카우트 타깃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재계는 요즘 비자금 의혹 등 사정설로 뒤숭숭하다. 언제 어디로 ‘칼바람’이 몰아칠지 모르는 상황. ‘살생부’에 사명이 오르내리는 기업은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자체 정보망을 확대하는 등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느라 분주한 형국이다. 따라서 일부 기업에선 사전 위기관리 차원에서 극비리로 국정원 출신을 껴안은 눈치도 엿보인다.
또 대형 인수전(M&A)에 뛰어든 그룹이 국정원 출신 인사에 러브콜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그중에서도 뜨거운 각축전이 벌어지는 M&A는 더욱 그렇다. 실례로 ‘M&A 최대어’대우조선해양 인수전은 출사표를 던진 각 그룹이 자금조달 능력과 컨소시엄 구성원 등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어 결국 승부가 ‘정보전’에서 갈릴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실제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참여한 그룹들은 정부와 라이벌 동향 파악에 촉각을 세우는 등 정보전에서 치열한 물밑 경쟁을 펼치고 있다. 일부 기업은 이를 위해 정보기관 출신 인사를 영입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기업에 영입된 국정원 출신 인사들은 주로 정보수집을 통한 대외업무를 한다”며 “특히 사정설에 휩싸이거나 중요한 사안을 앞두고 정보동향에 더욱 신경을 쓰기 위해 국정원 출신을 영입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당연히 이를 지켜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불과 얼마 전까지 국가의 녹을 먹던 국정원 인사들이 기업의 ‘보험용’내지 ‘로비용’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는 이유에서다. 일각에선 대기업이 ‘힘 있는’국정원 인사들을 앞세워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동시에 ‘전관예우’효과를 볼 요량이라고 지적한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전직 고위급 관료들이 대기업 고문, 이사 등 간부직으로 재취업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며 “이들은 사실상 대정부 창구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국정원 출신 인사를 영입한 기업들은 이런 의혹의 눈초리를 부인하고 있다. 모 그룹 관계자는 “특별한 사안이 있어서가 아니라 회사 업무와 관련한 대외적인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국정원 인사를 영입한 것”이라며 “기존에도 그룹 내 정보 업무팀이 운영되고 있었기 때문에 특정 사안과 인사를 연관 짓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일축했다.
항상 다양한 정보에 목말라하는 기업. 이들에게 전직 관료들은 갈증을 해소해 주는 오아시스와 같은 존재다. 재계에 불고 있는 국정원 인사 영입 바람이 단순히 기업경영에 도움이 되기 위한 ‘실무용’인지 아니면 현직에서 쌓은 직위와 인맥을 노린 ‘간판용’인지, 그 용도가 자못 궁금하다.
국정원 인사 벤처행 사연
‘음메! 기살어∼’
국정원 전직 고위인사들의 벤처행도 잇따르고 있다. 대기업의 경우 러브콜을 받고 자리를 옮기지만, 벤처로 진출하는 경우 대부분 직접 투자자로 나서 지휘봉을 잡는다.
벤처업계에 따르면 최근 C사는 주주총회를 열고 국정원 출신의 윤모씨를 사내이사에 선임했다. 앞서 지난달 D사는 최대주주가 국정원 출신 최모씨로 변경됐다. 최씨는 D사의 대표이사도 맡고 있다.
지난해 Y사를 인수했다가 지난 4월 재매각한 이모씨도 국정원 차장급 출신이다. 이씨는 최초 인수가보다 2배 이상 비싼 가격으로 회사를 매각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선 이를 두고 이씨가 또 다른 사업을 벌일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국정원 경제단장을 지낸 김모씨는 Q사 경영에 참여하기도 했다.
보통 국정원 출신 인사들의 영입이나 이동은 극비리에 진행된다. 하지만 벤처는 다르다. 아예 대놓고 ‘국정원 출신’이란 명함을 들이대기 일쑤다. 따라서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벤처행을 지켜보는 시선은 곱지 않다.
업계 관계자는 “막강한 정보력을 갖춘 인사가 특정 업체에 영입되면 상대적으로 다른 업체들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며 “문제는 이 과정에서 국정원 출신 경력을 부각시켜 투자자를 모집하거나 주가를 띄우는 등 다른 목적으로 이용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