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개조 번호판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첨단장비로 무장된 이들 번호판은 장거리 운전자나 고급승용차 운전자들 사이에 인기다. 물론 ‘단속장비 무력화기술’로 교통법규 위반이나 속도위반 과태료를 피하기 위한 목적이다. 사실 이를 목적으로 한 자동차 번호판의 변신은 계속되어 왔다.
반사필름은 옛말이다. 일명 ‘일지매’ 번호판에서 단속 시 속도를 ‘0’으로 만드는 번호판, 스스로 꺾고 돌리는 번호판, 단추만 누르면 검은 천이 덮이는 번호판, 방해전파를 쏘는 번호판 등 각양각색이다. 경찰조차 놀랄 정도다. 과태료 몇 만원을 내지 않기 위해 거리낌 없이 불법 행위를 저지르며 놀라운 수준의 진화를 보여주고 있는 불법번호판의 현장을 좇았다.
최신 첨단장비 부착, 단속 무력화시키며 도로 질주
자동차정비소, 인터넷 카페, 휴게소 등 버젓이 유통
서울 강남 한 대기업에 다니는 서모(40)씨는 고민에 빠져 있다. 업무상 운전을 많이 하는 그는 여의도에 가기 위해 노들길을 이용하다가 단속카메라에 적발됐다. 확 트인 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단속카메라를 찍고 있던 경찰과 눈이 마주친 것이다. 불안감이 엄습하며 불법번호판을 부착할까 말까 고민했다.
“번호판 인식 못 한다”
고민 끝에 서씨는 구입을 결정했다. 딱지도 안 끊을 수 있다는 말에 솔깃해 최근 유행하고 있는 ‘LED 번호판(일명 일지매)’을 인터넷 카페를 통해 30만원을 주고 구매했다. 일명 일지매는 발광다이오드(LED) 불빛을 이용해 차량 번호를 인식하지 못하게 만드는 장치다. 번호판 주위에 부착하면 야간 주행 시 단속 카메라가 번호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서씨는 “화려한 빛 자체가 시각적인 효과를 내기 때문에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통해 일지매 번호판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면서 “실제 광고 글에는 ‘일지매 번호판을 장착하면 야간 100%, 주간 70~80% 정도 단속 카메라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적혀 있어 구매하게 됐다”고 전언했다. 지난 9일, 불법 번호판의 실태를 알아보기 위해 서울 한 중고자동차매매상가를 찾았다.
이곳에서 암암리 불법번호판을 유통시키고 있다는 제보 탓이다. 하지만 확인 결과 이 상가에선 직접적인 유통을 하지는 않았다. 다만 중고차 구매자들에게 그 방법을 귀띔해 주고 있었다. 중고차 딜러 A(28)씨는 “현재 최첨단 번호판으로는 LED 번호판을 비롯해 잼머, 위저드, 멀티가드(일명 자동스크린가드), 꺾기식 번호판, 전동회전 번호판 등 다양하다”면서 “고속버스 택배로 제품을 전달받기 때문에 거래도 안전하다”고 귀띔했다.
A씨에 따르면 ‘잼머’는 이동식 카메라가 쏘는 레이저를 인식해 자동으로 전파를 교란시키는 전자장치다. 주로 타이완이나 대만에서 밀수입되는데 단속을 할 때 속도가 ‘0’으로 표시된다. 단속 카메라가 레이저를 쏘면 이에 대응하는 레이저를 발사하는데 이 장치는 30만원에 거래된다. 또 ‘위저드’는 카메라의 자동초점을 흐리게 만들어 이동카메라 촬영을 무력화하는 기능을 갖췄다.
자동차 번호판 부분만 CCTV 촬영이 불가능하다는 것. A씨를 통해 또 다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인터넷 자동차 동호회 카페를 통해 특허까지 받은 불법개조 번호판을 손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카페와 자동차전문지에 ‘사생활 보호 번호판 멀티가드’란 이름으로 광고된 제품이 그것. 확인 결과 일명 ‘자동스크린가드’로 불리는 이 제품은 개당 20만∼30만원에 불티나게 팔렸다.
성능도 놀라울 정도. 차량 안에 설치한 단추를 누르면 번호판 위에서 검은 천이 내려와 숫자를 덮어준다. 특허도 취득했다. 연예인 등 차량 이동 시 사생활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제품이라며 특허출원에 인가를 받은 것. 뿐만 아니다. ‘꺾기식 번호판’과 ‘전동회전 번호판’ 구입도 가능하다. ‘꺾기식 번호판’은 바람의 힘을 이용해 빨리 달리면 번호판이 범퍼 밑으로 꺾이며 ‘전동회전 번호판’을 달고 차량 안 작동단추를 누르면 번호판 자체가 180도 회전한다.
이곳에서 만난 딜러 B(31)씨는 “이런 번호판은 3만원에서 최대 40만원이면 종류를 골라 부착할 수 있다”면서 “구입하고 싶으면 자동차 정비소나 고속도로 휴게소, 인터넷 카페 등을 찾아보라”고 귀띔했다. 이처럼 ‘단속 무력화 장비’들이 활개를 치자 경찰이 칼을 빼들었다. 지난 10일 서울경찰청은 불법 장치를 구입해 과속·주차 단속을 피해온 운전자 등 118명을 자동차관리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다.
장비를 판매한 권모(38)씨 등 12명 역시 같은 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 권씨 등이 판매한 제품들은 그동안 인기를 누렸던 신호교란기, LED 번호판, 꺾기식 번호판, 전동회전 번호판, 자동 스크린 번호판 등 다수였다. 이들은 지난 2007년 12월부터 최근까지 인천 부평구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불법 번호판을 만들어 개당 20만~30만원에 팔았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 제품은 외제차를 갖고 있는 부유층과 장거리 운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폭주를 즐기고 불법 주정차 단속을 피하기 위한 용도로 이들 제품이 불티나게 팔렸다는 게 경찰 관계자의 전언이다. 실제 이번에 적발된 차량들은 제한속도보다 무려 평균 32㎞ 이상 과속운전을 했다. 권씨 등의 판매방식도 치밀했다. 이들은 인터넷 카페 광고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운전자들과의 일대일 접촉을 통해 구입자를 모았다. 주문은 공중전화나 대포폰을 사용해 받고 고속버스 택배만 이용함으로써 경찰의 추적을 피했다.
평균 32㎞ 이상 과속
경찰 한 관계자는 “번호판 조작에 대한 강력한 처벌 규정이 없어 인터넷상에서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는 게 현실”이라면서 “불법장비 부착 과속 차량의 경우에도 현재 100만원 이하 벌금만 부과하도록 되어 있어 엄중한 책임을 묻는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변했다. 관계자는 이어 “불법 장비로 과태료 3만~9만원을 면제받으려다 100만원 상당의 형사처벌을 받을 수 있다”며 “번호판이 단속 CCTV에 아예 찍히지 않는 불법 장비가 일본에서 밀수돼 사용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