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특별기획①>파란만장 DJ ‘인동초 삶’ 풀스토리

모진 겨울 이겨내고 평화의 꽃 활짝 피웠다



인생을 바꾼 ‘부산정치파동’, 3전4기 정치 입문기
가택연금, 사형선고, 망명 속에 키운 민주화의 등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지난 18일 서거했다. 1924년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정치인이 됐고, 군사정부의 반대편에서 인고의 시간을 견뎌냈다. 두 번의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꺾지 않았으며 1997년 네 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한민족이 손을 맞잡았던 남북정상회담과 노벨평화상의 영광도 있었지만 이후로도 시련은 그를 따라다녔다. 누구보다도 ‘파란만장’했던 삶 속에서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한국 현대사 그 자체였다. 때문에 그가 남긴 발자취는 거대한 족적으로 남았다.

지난 18일 오후 1시43분 대한민국을 넘어 세계의 큰 별이 졌다.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던 김대중 전 대통령이 건강 악화로 끝내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85년간의 삶은 긴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련 속의 정치 도전
“정치가 바로 서야 한다

DJ의 85년 삶 중 50여 년은 정치인생이었다. 그의 삶 자체가 한국 근현대사를 그대로 투영하고 있으며 굵직한 민주화 사건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의 산증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정치에 뜻을 품은 것은 아니었다. DJ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다. 그의 호 ‘후광’도 고향 마을의 지명과 같다. 일본인 지주 밑에서 소작농을 하던 아버지 김운식과 어머니 장수금 사이에서 4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호적에 기록된 생년월일은 1926년 1월6일이지만 실제 태어난 해는 그보다 2년 앞선 1924년으로 알려져 있다.

DJ는 1944년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목포상선에 취업했다. 뛰어난 사업 수완을 보이며 승승장구했고 해방이 되자 이곳의 재산관리인, 대표가 됐다. 전도유망한 젊은 사업가로 불리는 와중에 목포상고 동기생의 소개로 첫 부인 차용애씨와 결혼했다.


그러나 1954년 ‘부산정치파동’은 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정권 연장을 노린 이승만 대통령이 공산 게릴라를 일소한다는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 대혼란이 벌어진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정치’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DJ는 “6·25를 겪으면서 국민에게 크나큰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가 올바로 서야 한다고 생각했다”면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5년 8월 해방을 맞자 몽양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탈퇴했는데 이 경력은 오랜 세월 그를 색깔론에 시달리게 했다.

정치권으로의 진입은 쉽지 않았다. 1954년 전남 목포에서 3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첫 고배를 마셨고 강원도 인제로 지역구를 옮겨 야당인 민주당 후보로 4, 5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실패했다. 세 번 연속 국회의원 선거 낙선은 첫 부인인 차용애씨와의 사별이라는 또 다른 시련을 낳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정치권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61년 5월 강원도 인제의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면서부터다. 3전4기 끝에 처음으로 금배지를 손에 쥔 것. 하지만 당선 3일 만에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의원 선서도 하지 못한 채 의원직을 박탈당했다.

DJ는 다시 도전했고 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1964년 4월20일 국회 본회의에서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 표결을 방해하기 위해 5시간19분의 필리버스터 기록을 세우며 대중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는 8대 국회의원에도 당선되며 정치력을 쌓아갔다.

1970년 9월29일은 DJ에게는 잊을 수 없는 날이다.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역전승을 거두며 당시 제1 야당인 신민당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날이기 때문이다. DJ는 여기서 더 나아가 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과 박빙의 승부를 펼쳤고, 90만여 표 차이로 석패했다. 박정희 정권의 간담을 서늘케 한 매서운 공세였다.

그리고 이후 그의 삶에는 ‘시련’이라는 글자가 깊게 새겨졌다. 1971년 대선 패배 이후 정치 스타가 아닌 민주화의 상징이 되다섯 차례의 죽을 고비와 6년간의 투옥, 10년간 55회 가택연금을 당했으며 상당 기간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대선 다음 해인 1972년 신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던 DJ는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일본 도쿄에서 유신에 반대하는 첫 성명을 발표하고 미국 워싱턴으로 건너가 국민투표 무효 선언을 하는 등 반독재 반유신 투쟁을 이어나갔다. 정권에게는 ‘눈엣가시’였던 셈이다.

중앙정보부가 움직였다. 1973년 8월 DJ를 일본 도쿄의 그랜드 팔레스호텔에서 납치한 후 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키려고 한 것. 미국과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구명운동으로 납치 5일 만에 구사일생으로 생환했다.

석방과 연금이 계속됐고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자 연금해제 및 사면복권 조치를 받았다. 하지만 ‘서울의 봄’은 짧기만 했다. 1980년 5·17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민주세력에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석방과 연금, 사형선고
죽음 문턱서 핀 ‘인동초’

DJ는 조작된 내란음모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유언이기도 했던 “이 땅에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최후진술은 국제사회의 여론을 불렀고 사형에서 무기로, 다시 징역 20년으로 감형됐다.

그는 1982년 12월 석방된 직후 쓸쓸한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미국에 있으면서도 국내에 있던 YS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를 결성하는 등 반독재투쟁을 계속했다. 굴곡진 정치 인생 속 민주화의 향해 나아간 그를 향해 사람들은 ‘인동초’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얇은 잎 몇 장으로 시린 겨울을 견뎌내고 새 봄에 꽃을 피우는 그 모습이 DJ의 삶을 대변했기 때문이다.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DJ는 귀국을 감행했다. 귀국과 함께 잡힐 것이라는 주변의 만류도 뿌리쳤다. DJ는 귀국과 함께 김포공항에서 연행돼 또 다시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그러나 2·12 총선의 ‘신민당 돌풍’을 발판으로 3월에 YS와 나란히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1987년 6월 민주화항쟁을 이끌었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이뤄냈다.

DJ의 대권도전은 3전4기였다. 1971년 첫 대선 도전 이후 1997년 4수 끝에 대통령직에 오르기까지 36년간의 도전은 결국 꽃을 피웠다.

정권교체의 기회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첫 대선인 13대 대선에서 찾아왔다. YS와 후보단일화를 할 경우 민주진영의 정권교체가 유력시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민주진영의 간절한 바람에도 단일화는 실패했고 DJ는 평민당을 창당해 출마, 민주화 동지였던 YS와 척을 지게 됐다. 또한 야권의 분열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승리로 이어졌다.

3전4기 대권도전
평화적 정권교체 이뤄

DJ는 1992년에 다시 대선에 도전했지만 ‘삼당합당’을 앞세운 YS에게 패배했다. DJ는 즉각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영국으로 떠났다. 그의 정치인생에 마침표가 찍히는 듯했지만 1993년 7월 귀국한 DJ는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을 벌이다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 1995년 7월18일 정계복귀를 선언했다. “40년 파란 많았던 정치 생활에 종말을 고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겠다”던 그의 약속은 깨졌고 이는 줄곧 그를 괴롭혔다.

1997년 마지막 대권도전은 ‘대선 필패론’ ‘색깔론’ 등 반DJ 정서로 어지러웠다. 그러나 김종필 자민련 총재와 DJP연합을 이루면서 ‘준비된 대통령’을 원하던 국민들의 선택을 받았다. 헌정사상 처음으로 국민의 선택의 통해 여야 정권교체가 이뤄진 순간이었다.


대통령에 취임하기는 했지만 국민의 정부가 맞은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6·25 전쟁 후 최대 국난이었던 IMF 외환위기는 그에게 숨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하면서 ‘금 모으기 운동’으로 IMF 자금 상황기간을 2년 가까이 단축, 위기를 극복했다.

2000년에는 광복 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됐다. 그는 대북정책인 ‘햇볕정책’을 들고 북한으로 향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 6·15 공동선언문을 채택, 발표했다. 그 공로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집권세력 내부의 갈등과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견제, 대북송금의혹과 측근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불행한 임기 말을 보내야 했다. 두 아들의 권력형 부정부패와 권노갑 전 민주당 최고위원의 ‘옷로비’ 사건은 정권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혔다.

DJ가 “가장 기뻤던 일은 IMF를 1년 반 만에 극복한 것이고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옷로비 사건이었다”고 회고했을 정도다.

퇴임 후엔 참여정부의 시작과 함께 몰아친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의 성과에 흠집이 갔고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줄줄이 잡혀가는 것을 지켜만 봐야 했다. 2005년에는 불법 도·감청 사건 수사로 임동원, 신건 전 국정원장이 구속되기도 했다.

DJ는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두고 국가 원로로서 인권과 통일, 민족 문제 해결에만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발언이 가진 정치적 영향력은 건재했고 ‘현실정치 참여 논란’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최대 관심은 언제나 ‘통일’이었다. 현 정부 들어서 남북관계가 경색되자 특사 파견 등 정부가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설 것을 거듭 강조했으며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조언하기도 했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연설문도 대북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대한 것이었다.

지난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는 그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내 몸의 반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말한 DJ는 휠체어를 탄 채 분향소를 찾아 눈물을 쏟았다. 지난달 13일 폐렴으로 신촌세브란스에 입원해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회복하지 못했다.

현실정치와 거리두기
‘햇볕정책’ 실패론 마음고생

때문에 그가 생전에 남긴 연설문과 발언은 사실상 유언이 되고 말았다. 지난 7월3일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 추천사 중 “나는 비록 몸은 건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민주화를 위해 목숨 바친 사람들이 허무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할 일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하니 하루도 쉬지 말고 뒷일을 잘해주시길 바랍니다. 나와 노무현 대통령이 자랑할 것이 있다면 어떤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를 위해 일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후배 여러분들이 이어서 잘해주길 부탁합니다”라는 말이 긴 울림을 갖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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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단독 입수] 노상원 수사 기록 ②부정선거에 꽂힌 내막

[일요시사 취재1·정치팀] 오혁진·박희영·김철준 기자 =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한 지 6개월이 지났다. 특검이 출범하면서 관련 수사도 발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현재까지 여러 언론을 통해 핵심 인물들의 수사 기록이 일부 보도됐다. 그러나 노상원 전 정보사령관에 대한 내용은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 없다. <일요시사>는 경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단의 ‘노상원 수사 기록’을 단독으로 입수해 공개하기로 했다. “부정선거 증거가 차고 넘치고 나중에는 드러날 것이다.” 노상원 전 국군정보사령관이 수사기관에 진술한 내용이다. 그가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처럼 부정선거 음모론에 꽂혀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노 전 사령관은 윤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주최하는 집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실상 수년 전부터 망상에 빠져있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생각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에 참여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로 추정된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노 전 사령관 수사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정선거 음모론 집회와 전광훈 사랑제일교회 목사의 집회에 여러 차례 참여했다. 노 전 사령관이 전 목사와 개인적으로 알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노 전 사령관은 김 전 장관에게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당시 분위기와 참석자들이 윤 전 대통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텔레그램으로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1년간 ‘극우 집회’를 분석한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그는 “문상호, 정성욱, 김봉규 등과 만날 때 주로 어떤 말을 했느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 “선관위를 얘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선관위가 부정선거의 온상이라고 김용현 전 장관이 많이 말씀하셨다. 나에게도 여러 번 선관위의 부정선거에 대해 알아보라고 지시했고 네이버로 찾아도 봤다”고 말했다. “부정선거를 주로 누구에게서 들었냐”는 경찰 측의 질문에는 “관련 집회에 여러 번 참여하면서 들었고 특정 인물이 누구인지 실명을 거명하긴 그렇다. 나도 김 전 장관에게 보고를 해야 해서 스스로 공부도 많이 했다. 여론조사 조작이나 선거 부정은 합리적인 근거가 있다”고 했다. 전 주도 윤 지지자 극우 집회 직접 참석 김과 텔레그램으로 부정선거 자료 공유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의 근거로 “선관위 산하에 여론조사심의위원회가 있다. 여론조사기관은 여론조사심의위에 등록해야 한다. 여론조사기관의 갑이다. 여론조사심의위원회는 9명으로 위원장 이대영 사무총장과 강성봉 등이고 그 밑에 쭉 있는데 7명이 진보 계열 인물이다. 여론조사기관이 편향되어 있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고 주장했다. 노 전 사령관은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임시선거사무소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네이버에 검색하면 다 나오는데 2021년 국회의원 선거 때 동작구 선거사무소가 있는데 옆을 임대해서 임시선거사무소를 만들었었다. 언론에 나오니까 발뺌했었고 김 전 장관에게 보고하자 김 전 장관이 더 많은 자료를 보내 줬었다”고 했다. 노 전 사령관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며 “결국에는 다 까질 것이다. 전산은 한 번 까지면 되돌릴 수가 없다. 폭파하거나 고물상에 갖다 버리지 않는다면 전산은 결국 까진다. 북한이 쳐들어온 것도 아니고 서울 상공에 포를 쏜 것도 아니지만 윤석열 전 대통령께서는 선관위의 부정선거가 확실하다고 생각하시고 정국이 전시에 준하는 사태라고 민감한 상황이라고 보신 것 같다.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그렇게 행동한 건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2시간짜리 호소였다. 만약 국회 결정을 윤 전 대통령께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유혈사태가 났을 것”이라고 윤 전 대통령을 옹호했다. 노 전 사령관은 지난해 12월 초, 선관위가 서버 교체를 검토했다가 교체하려 했던 것을 두고 “윤 전 대통령께서 어디에선가 확실하고 핵심적인 정보를 들으셨을 것 같다. 서버 조작이 있었기에 그 서버를 우리가 확보하려 할 때 선관위 측이 폭파했을 수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요시사>가 입수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의 군검찰·검찰 피의자 신문조서를 보면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8월 초 ‘정보사 군무원 간첩 사건 수사 결과’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대표였던 이재명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 등 인물들에 대해 “비상대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며 “현재의 사법체계, 형사소송법, 방탄국회 및 재판지연 아래에선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재명 조치’ ‘2시간짜리 계엄’ 겹치는 윤·노 발언 "서버 확보하려 했다면 선관위가 폭파했을 것” 주장 윤 전 대통령이 “비상대권을 사용한 조치”를 언급한 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만큼 이 대통령과 자신의 의견을 거스르는 인물들에 대한 복수심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는 노 전 사령관도 마찬가지다. 노 전 사령관은 경찰에 “김용군(대령)과 구삼회 등에게 ‘이재명은 죄가 7개인데 봐주고 지연시키고 구속도 안 되고 당 대표까지 하는데 더불어민주당이 감사원장, 중앙지검장, 판사 등을 모두 탄핵하려고 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세상이냐’고 한 적이 있다”고 진술했다. 윤 전 대통령과 노 전 사령관이 언급한 말이 일치하는 건 이뿐만이 아니다. 윤 전 대통령은 지난해 12월12일 “국정원 직원이 해커로서 해킹을 시도하자 얼마든지 데이터 조작이 가능했고 비밀번호도 아주 단순해 ‘12345’ 같은 식이었다”고 주장한 바 있다. 노 전 사령관도 “선관위가 헌법기관인데 스스로 깨끗해야 하거나 아무런 문제가 없어야 하는데 황제·세자 채용 등 문제가 나왔다. 각종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은 다 저질렀다. 그리고 전산 해킹이 언급될 때 서버 본체를 보여준 것도 아니고 일부 샘플만 살짝 보여줬는데 얼마든지 전산 조작이 가능하고 해킹에 얼마나 취약하면 비밀번호가 ‘1234’냐. 이미 그런 게 다 나왔다. 그렇게 떳떳하면 왜 본체를 못 열어주나”고 말했다. 그러나 조태용 국정원장은 같은 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선관위 시스템에 보안상 취약점이 발견됐지만, 부정선거에 관한 단서는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는 내용으로 보고했다고 진술했다. 일각에서는 노 전 사령관이 윤 전 대통령과 직접 비화폰으로 연락을 주고받았을 것이라는 보고 있다. 실제 노 전 사령관도 지난해 12월2일 자신의 지인에게 윤 전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노 전 사령관은 당시 “나 같은 경우는 브이(V, 윤 전 대통령 지칭)하고 이렇게 좀 도와드리고 있다. 원래 한 4~5년, 3~4년 전에 알았다뿐이고 그래서 이제 뭐 이렇게 여러 가지로 좀 도와드리고 있다. 비선으로”라고 했다. 친분 과시 노 전 사령관은 안산 ‘롯데리아 회동’에 참석했던 구삼회 전 육군 2기갑여단장에게도 “며칠 전에는 김용현과 함께 대통령도 만났다. 갈 때마다 대통령이 나한테만 거수경례를 하면서 ‘사령관님 오셨습니까’라고 한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대통령과 장관 같이 만난다. 나는 벌써 여러 번 만났다”고 했다. <hounder@ilyosisa.co.kr> <hypak28@ilyosisa.co.kr> <kcj5121@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