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소망교회 발길 끊은 이유

  • 김명일 mi737@ilyosisa.co.kr
  • 등록 2013.08.26 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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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목사 간 알력 다툼에 30년 인연 뚝?

[일요시사=정치팀]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소망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이 전 대통령과 소망교회의 인연은 특별하다. 이 전 대통령은 소망교회의 설립 초기 멤버이며, 교회 장로가 되기 위해 수년간 직접 주차봉사활동을 했을 정도로 교회 내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통령 취임 이후엔 고소영 인사(고려대·소망교회·영남)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소망교회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기도 했다. 이렇듯 소망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소망교회를 찾지 않고 있는 진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퇴임 이후 소망교회에 나오지 않고 있다. 이 전 대통령 내외는 퇴임 후 첫 일요일이었던 지난 3월3일 소망교회를 찾아 예배에 참석했지만 이후로는 단 한 번도 소망교회에 나오지 않았다고 소망교회 관계자는 전했다. 벌써 6개월째다.

유별난 교회사랑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소망교회는 신도 수만 7만여 명에 달하는 국내 5대 대형교회 중 하나다. 이미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교회였지만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져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이 전 대통령이 다니는 교회로 알려지면서부터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1978년부터 소망교회를 다녔다. 소망교회가 설립된 바로 다음해다.

소망교회는 1981년 현재의 부지에 자리 잡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가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자 당시 현대건설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 전 대통령이 교회에 지원을 해 줄 정도로 그의 소망교회 사랑은 각별했다. 또 소망교회에서 장로가 되기 위해서는 봉사활동이 중요한데, 이 전 대통령은 장로가 되기 위해 수년간 직접 주차 봉사활동을 했을 정도로 교회 내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전 대통령은 지난 1995년 비로소 장로가 됐다.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엔 이른바 고소영 인사라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 소망교회 출신 인사들을 대거 기용하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중 임명한 고위공직자 총 3300여명 가운데 소망교회 출신은 이경숙 제17대 대통령직인수위원장과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장관을 포함해 모두 4명에 불과했다며 고소영 인사가 아니라고 적극 항변했지만 특정 교회에서 한 정권의 고위공직자가 4명이나 배출된 사실도 무척 드문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이렇듯 소망교회에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던 이 전 대통령이 퇴임 후 소망교회를 찾지 않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전 대통령 측은 현재 소망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밝히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추측만이 나돌 뿐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소망교회 내 벌어지고 있는 전임 목사와 현 목사 간의 갈등 때문이라는 설이다. 소망교회는 설립자인 곽선희 전 목사가 물러나고 2003년 김지철 현 목사가 담임을 맡으면서 신도들 사이에 파벌이 조성되는 등 극심한 갈등을 빚어왔다. 곽 전 목사는 지난 2003년 만 70세가 되면서 교회법상 정년퇴임했다. 그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 김 목사다.

곽 전 목사 측 교인들은 김 목사가 부임한 후 곽 전 목사 측 사람들을 주요 자리에서 밀어냈다고 주장한다. 지난 2011년엔 김 목사가 곽 전 목사의 비서팀에 있었던 부목사들로부터 폭행을 당하는 불미스러운 일도 있었다. 이들은 김 목사가 자신들을 갑작스럽게 해임한 것에 대해 항의하기 위해 김 목사를 찾아왔다가 감정이 격해지자 폭행까지 저지른 것이었다. 김 목사를 폭행한 최 모 부목사는 사건 발생 석 달 전 김 목사로부터 일방적인 부목사 계약 해지 통보를 받고 교회를 상대로 소송 중이었다.

이권 다툼에 교인끼리 비방하고 난투극까지
경호 어렵고 복잡한 정치상황, 개인사정 때문?

또 곽 전 목사 측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은 김 목사의 비리 의혹도 꾸준히 제기해왔다. 이들은 "김 목사는 '상담 목사' 자리를 자신의 부인에게 넘기기 위해 부인의 경력증명서를 허위로 꾸며 목사 안수를 받도록 했다"며 또 "제2교육관을 짓겠다며 땅 구입을 독단적으로 결정해놓고 44억원짜리 땅을 70억원에 산 것처럼 위장했다"고 주장하며 김 목사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목사 측은 "곽 전 목사 측이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기 위해 김 목사를 근거 없이 비방하고 있다"며 의혹을 부인했다. 실제로 곽 전 목사는 담임목사 은퇴를 앞두고 분당에 200억 원대 교회를 지으면서 소망교회 재정으로 130억이나 지원해 변칙 세습논란에 휩싸였었다. 이 교회는 곽 목사의 아들인 곽요셉 목사가 시무할 교회였기 때문이다. 곽 전 목사는 현재 아들이 담임목사로 있는 분당 예수소망교회에서 일요일마다 설교하고 있다.

이처럼 전임 목사와 후임 목사 간의 알력 다툼이 계속 되면서 2003년부터 현재까지 양측이 연루된 크고 작은 소송만 40여건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소망교회 내분은 지난 3월 김 목사의 무혐의 처분 이후 진정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때문에 소망교회에서 만난 한 신도는 "소망교회 내 갈등은 벌써 10년이 넘은 이야기다. 게다가 최근에는 진정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교회 내 갈등을 이유로 이 전 대통령 내외가 교회를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곽 전 목사와 소망교회의 성장을 함께 이뤄냈던 이 전 대통령인 만큼 전임목사와 현 목사 간 내분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현재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에 다니는 것을 불편해 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일각에선 다른 가능성도 제기된다. 현재 정치권에서는 전 정권에 대한 비판 여론이 점차 커지고 있다. 특히 4대강 사업이나 국정원 사건 등은 이 전 대통령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러한 가운데 잦은 외부활동이 언론에 노출될 경우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어 이 전 대통령이 외부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것뿐이라는 분석이다.

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역대 대통령 중 처음으로 개인사무실을 마련하고 활발한 외부활동을 펼칠 것을 예고했으나 현재까지 별다른 공식일정 없이 두문불출하고 있다. 소망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것도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닌, 이러한 이유 때문이 아니겠냐는 분석이다.

숨겨진 이유는?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소망교회는 너무 교인이 많아 이 전 대통령을 제대로 경호하기가 어려워 좀더 한적한 교회를 물색 중인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다. 게다가 이 전 대통령이 교회를 방문할 때마다 몰려드는 인파와 경호인력으로 인해 주위가 마비되다시피 해 이 전 대통령이 주민들과 교인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한적한 교회를 찾고 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고소영 내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던 이 전 대통령과 소망교회의 특별한 인연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것일까? 귀추가 주목된다.


김명일 기자 <mi737@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소망교회도 정권 교체 중?  
박근혜 대통령 남동생 부부에 스포트라이트

 
소망교회가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에도 여전히 화제의 중심에 서있다. 소망교회에는 이 전 대통령뿐만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의 남동생 부부인 박지만 EG 회장과 서향희 변호사(전 법무법인 새빛 대표)도 신자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2004년 12월, 박 회장이 서 변호사와 결혼식을 올릴 때 소망교회 설립자인 곽선희 원로목사가 주례를 맡았었다. 서 변호사는 원래 불교신자였으나 결혼 후 기독교로 개종해 남편을 따라 소망교회에 출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 회장을 소망교회로 이끈 사람은 고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회장은 소망교회의 집사였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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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단독 공개] 검찰 수사기록으로 본 12·3 내란 사태 전말 ⑥좌파 14명 체포 실패 내막

[일요시사 취재1팀] 김철준 기자 = 12·3 계엄 당일 내란 주동자들은 정치인과 판사 등 자신들이 반국가 세력으로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위해 서둘렀다. 하지만 준비가 된 것은 각 군의 사령관들뿐이었다. 계엄사령부와 합동수사본부의 설치는 훈련 상황서도 24시간가량 걸리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미리 계엄을 준비했다는 증거가 계속해서 나오는 상황에 실무진에게 준비시키지 않은 점이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윤석열 전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등 내란 주도자들이 정치인과 판사 등 ‘좌파세력’이라고 지칭한 14명의 체포를 시도했지만 무산됐다. 그 내막에는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이하 합수본)의 미설치가 있다. 진술 나오자 다른 전략 <일요시사>가 검찰 진술 조서를 입수해 분석한 결과, 계엄이 시작된 계기와 14명의 체포 미수 및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 불법 점거의 실패 이유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를 꼽았다. 12·3 내란 사태가 발생하기 이전 국회와 윤석열 전 대통령의 대립은 심각했다. 과반 의석을 차지한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등 야당은 자기들끼리 뭉쳐서 법안을 통과시켰고 윤 전 대통령은 재의요구권을 사용했다. 또 야당은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민주당 이재명 전 대표를 수사한 검찰들에 대한 탄핵을 시도하고 김건희씨와 관련한 특검법을 계속 발의했다.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의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지난해 11월27일경, 윤 전 대통령이 관저 식사 자리서 “수사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검사를 탄핵하고, 재판받다가 마음에 안 든다고 판사를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마음에 안 들면 정족수를 자르고, 이게 나라냐.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반국가 세력의 준동에 관해 청주간첩단 및 창원간첩단 사건과 관련해 수사 과정서 잡은 인원들을 판사 기피 신청이 들어오면 단기간에 결정하는 것이 상식인데 6개월이나 결정을 하지 않아 간첩들의 구속 기간이 끝나 다 풀려나 돌아다니는데도 이런 것을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니 나라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미래 세대에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비상계엄)이 필요하겠다”고 강조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윤 전 대통령은 김 전 장관에게 “야당의 패악질로 나라의 미래가 없다. 국가 비상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들은 비상계엄 관련 논의를 했다. 이때 체포 명단인 이른바 ‘좌파 세력’ 14명의 명단과 군대를 어떻게 투입할지 등을 확정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들은 체포 명단의 사람들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게다가 내란 주동자들은 검찰 진술과 형사 법정 등에서도 체포하려 하지 않았다고 진술하고 있다. “합수부 미설치로 체포 불가” “합수부 없어 시작부터 위법” 김 전 장관은 검찰에 “주요 정치인 등에 대한 검거를 시도한 바 없다. 혐의가 있어야 검거를 시도하지 않겠냐”며 “언론에 나오는 위치 추적 등은 포고령에 따라 정치활동이 금지되고 있는 상황이니 주요 정치인 몇 분과 부정선거 등과 관련해 사회서 의혹이 제기되는 사람들의 위치를 미리 파악하라고 이야기한 것일 뿐”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과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의 진술로 체포 명단이 실제로 존재했으며 체포를 지시하고 시도했다는 것마저 모두 드러났다. 체포 시도가 있었다는 진술이 계속해서 나오자 내란 주동자들은 다른 전략을 세우게 된다. 바로 ‘합동수사본부 미설치’다. 김 전 장관은 검찰 진술서 합수본이 미설치돼 체포가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그는 “계엄사령부와 합수본이 설치되는 과정이라 검거가 불가능하다”며 “합수본이 설치되려면 검찰과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데 아무런 대비도 없이 체포부터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진술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은 계엄 직후 선관위에 국군 정보사령부 부대원들을 보내 선거인 명부 관리 서버를 장악하고 선관위 당직자들에 대한 통신 제한(휴대전화 압수)과 감금이 위법한 수사 활동임을 나타내고 있다. 계엄이 터지면 통상적으로 합수본 역할을 맡는 국군 방첩사령부 관계자도 검찰 진술 당시 선관위 투입은 잘못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영희 방첩사 비서실 1과장은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이 방첩사 소속 군인들로 하여금 중앙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도록 지시하거나 계엄 해제 이후 관련 증거를 제거하도록 시킨 것은 자신들의 정당한 권한 범위를 넘어선 것”이라고 말했다. 불법성 미리 알고? 박성하 방첩사 기획조정실장은 “현장에 나가 있던 소위 체포조에 대해서 당시에는 알지 못했다”면서도 “하지만 전시에도 방첩사가 일부 범죄에만 수사권이 있기 때문에 전시나 계엄 상황이라도 관할권이 없는 선관위나 정치인 등 체포나 점거는 경찰의 협조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게다가 합수본(방첩사)은 직접 수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합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해야 하는데 지역 합수단서 해야 할 일을 방첩사 인원으로 진행한 것도 문제”라고 말했다. 한 군검찰 출신 변호사는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임명하는 군사경찰 관리, 경찰공무원, 국가정보원 직원 중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 그 밖에 사법경찰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는 자로 구성된다”며 “또 합수본은 계엄사령관이 지정한 사건의 수사와 정보기관 및 수사기관의 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선관위로 투입된 인원들은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지도, 임무를 하달받지도 않았다”며 “게다가 합수본까지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시작부터 위법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정보사와 방첩사 모두 계엄사령군(군사경찰)이 아니기에 정당한 절차가 없었다면 반란군이라고 볼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여기서 의문이 드는 점은 계엄 업무를 해본 김 전 장관이 왜 무리수를 뒀는지다. 김 전 장관은 대한민국 합동참모부서 작전본부장을 역임한 바 있다. 합참 작전본부에는 계엄과가 편제돼있기 때문에 김 전 장관이 계엄군과 합수본 지정 및 운용 등을 몰랐다고 보기 힘들다. 합참 계엄과서 편찬하는 계엄실무편람에도 잘 나와있기 때문이다. 김 전 장관은 논란을 줄이기 위해 계엄이 선포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화상으로 개최하면서 박안수 전 육국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여인형 전 방첩사령관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일부 사령관 등에게만 공유됐던 12·3 계엄 작전은 계엄사령부가 설치되기도 전에, 합수본이 설치되기도 전에 끝났다. 사령부만 알았다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 조서에 따르면, 김 전 장관은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이진우 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곽종근 전 육군 특수전사령부 사령관에게 국회와 선관위 출동을 하면서 방첩사에 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서 임무 수행을 하라고 지시했다. 김 전 장관이 방첩사에 지시한 임무는 경찰과 국방부 조사본부에 100명씩 인원을 요청하고 선관위로 먼저 투입된 국군 정보사령부가 접수한 선관위 서버를 꺼내오라는 지시였다. 국방부 조사본부와 경찰에 인원 요청을 한 것은 정치인, 판사, 등 민간인 체포를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조사본부는 방첩사가 요청한 수사관 지원 요청을 4차례 거절했다. 조사본부 한 관계자는 검찰 조사 당시 “지난 3일 계엄령 선포 이후 방첩사로부터 수사관 100명 지원을 네 차례 요청받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판단해 응하지 않았다”며 “이후 합수본 실무자 요청에 따라 시행 계획상 편성돼있는 수사관 10명을 지난해 12월4일 오전1시8분 출발시켰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의 수사관 파견 요청에는 불응했고, 계엄 시행 이후 방첩사를 중심으로 꾸려지는 합수본 요청에는 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수사관이 파견된 시간은 이미 계엄 해제 의결이 이뤄진 뒤였다. 합수본이 계엄 해제와 비슷한 시기에 모양새라도 갖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전 장관이 계엄 직후 전군주요지휘관회의서 여 전 사령관에게 합수본 설치를 지시했지만 설치가 늦어진 이유가 있다. 방첩사에 내려진 지시는 좌파세력 체포와 합수본 설치, 검찰과 경찰 및 국방부 조사본부 등에 협조 요청 등으로 내란 주동자들에게는 어느 것 하나 미룰 수 없는 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 기획조정실장은 “부대에 도착해보니 OOO회의실에 여 전 사령관이 이경민 참모장, 이창엽 비서실장과 같이 있었다”며 “합수본 설치 지시를 받으려 사령관에 물어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어 “당시 여 전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됐다. 우리 대원들은 다 나가 있다’고 말하며 통화에만 집중했을 뿐 합수본 설치 지시를 내리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계엄 6개월 전부터 준비 실무진만 ‘닭 쫓던 개’ ‘비상계엄이 선포되면 국가적으로 엄중한 상황이 될 텐데 방첩사는 계엄 선포 예정 사실을 알고 준비하지 않았느냐’는 검사의 질문에 “계엄이 선포되면 합수본을 설치해야 하는 사람이 나다. 하지만 나는 해당 사실을 알지 못했다”며 “체포조를 운영한 수사단장도 해당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답했다. 그는 “방첩사 비상소집이 완료된 시간이 지난해 12월4일 오전 1시4분”이라며 “합수본은 기본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서 계엄이 해제됐다”고 말했다. 방첩사 인원들이 전원 소집되는 시간에 이미 계엄은 해제된 것이다. 방첩사의 작전 계획상에는 상황실 설치에 8시간, 합수본 설치에 24시간을 예정하고 있는데 비상계엄이 3시간 만에 해제됐다. 본부 설치에만 24시간이 걸리며 계엄사령관으로부터 임명을 받아 합수본을 완전히 구성하려면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한 군사학과 교수는 “계엄 선포에 대해 사령관과 참모진 외에 실무자에게도 공유가 됐다면 미리 합수본 설치를 준비하고 있다가 계엄이 선포된 후 바로 체포를 진행했을 것”이라며 “이번 계엄의 패착은 이전 계엄과 달리 빠르게 대처한 국회를 막지 못한 것과 계엄사령부부터 합수본까지의 실무자들이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방첩사 사령부에서는 미리 계엄 준비를 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방첩사 소속 간부 A씨는 검찰 조사에서 “방첩사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가 체결한 MOU에 언급된 ‘합동수사본부’는 계엄 시 설치되는 합수부가 맞다”고 진술했다. 방첩사와 국수본은 지난해 6월28일 ‘안보범죄 수사 협력에 관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면서 “합동수사본부 설치 시 편성에 부합하는 수사관 등을 지원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검찰은 이를 근거로 방첩사가 계엄을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으로 보고 있다. A씨는 “지휘부에서 최초에는 지난해 5월 초순경 3주안에 체결하라는 지시를 했다”며 “보통 미국 국방정보국(DIA) 등 해외정보수사기관과 이런 MOU를 맺고, 국내 기관은 관련 법령이 있어 MOU를 맺지는 않는다. 국내 기관과 MOU를 맺은 건 이번이 처음이고, 굳이 이런 MOU를 맺는 게 의아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다만 조지호 경찰청장은 해당 MOU에도 불구하고 계엄 당일 수사관 지원 요청을 이행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조 청장은 지난 5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긴급 현안 질의에 나와 “방첩사 주관으로 수사본부가 꾸려질 수 있으니 경찰서 필요한 인력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준비하겠다고 했다”고 밝혔으며 계엄 당일 수사관 81명이 방첩사 요청으로 대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두환과 구상 흡사 내란 주동자들은 경찰력을 대거 방첩사로 파견해 합동수사본부를 꾸리고 정치인 체포 작전을 벌일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79년 비상계엄하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피살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만든 합수본과 흡사한 구상이다. 당시 합수본은 정권에 반대하는 정치인에 대한 정보 기능을 도맡아 12·12 군사 반란의 수괴인 전두환씨가 권력을 장악하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됐다. <kcj5121@ilyosisa.co.kr> <기사 속 기사> 계엄 사령부 구성도 완전 실패 <일요시사>가 확보한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계엄사령부는 구성조차 못했다. 권영환 전 대한민국 합동참모본부 계엄과장은 계엄이 선포된 후 김용현 전 국방부장관으로부터 ‘계엄사령부 설치를 도와라’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그는 육군 본부 참모진들이 올라올 때까지 계엄사 상황실 구성 준비를 했다. 계엄이 선포되면 계엄사에는 2실(비서실, 기획조정실) 8처(정보처, 작전처, 치안처, 법무처, 보도처, 동원처, 구호처, 행정처)를 구성하도록 돼있으나. 권 전 과장이 계엄사 상황실을 구성하고 있을 당시 국회에서는 ‘비상계엄해제 요구결의안’이 가결됐다. 당시 권 전 과장이 박안수 전 육군참모총장에게 “(계엄해제 요구안이 가결됐으니) 법률상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하도록 돼있다”고 말하자 박 전 총장은 “그런 것을 조언할 것이 아니라 일이 되게끔 만들어야지 일머리가 없다”며 “올해 연습을 두 번이나 했다고 하면서 구성을 왜 빨리 못하냐”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는 내란 주동자들이 2차 계엄을 생각하고 있었으며 계엄사 구성의 역할이 합참에 있었다는 것을 내포하는 대목이다. <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