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망해도 잘사는 부자들 ⑦정태수의 한보그룹

  • 한종해 han1028@ilyosisa.co.kr
  • 등록 2013.04.03 14:0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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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비로 일어나고 로비로 쓰러졌다

[일요시사=경제1팀]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산다.'
잘 나가던 기업이 망했다는 소식은 심심찮게 들려온다. 그런데 망한 재벌이 '깡통'을 찼다는 소식은 들어본 적이 없다. IMF 이후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줄줄이 공중분해 됐지만 해당 기업에서 중책을 맡았던 경영진과 그 가족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다. 미리 '주머니'를 채워놔서일까. <일요시사>가 연속기획으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망한 기업' 수뇌부들의 현주소를 조명해봤다.



"수단은 목적을 합리화한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다. 한보그룹은 '로비'로 성장해 '로비'로 무너졌다.

한보그룹은 정 전 회장과 성장·추락을 함께했다. 1923년 경남 진주에서 빈농인 부친 정용석씨와 모친 황맹옥씨의 1남1녀 자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난 정 전 회장은 26세가 되던 49년 첫 번째 부인인 김순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현대판 거품 대명사
대치동 은마아파트

결혼 후 세무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부산경남지역 일선 세무서에서 하위직인 주사보로 일하다가 김씨 사망 후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 이때 만난 사람이 한보그룹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한보상사를 설립하는 데 큰 도움을 준 둘째 부인 이수정씨다. 이씨와 결혼을 한 정 전 회장은 70년대 초 일제시절 폐광이 된 강원도의 몰리브덴광산을 사들여 74년 이를 수출하는 한보상사를 설립했다.

몰리브덴수출이 성과를 이루자 정 전 회장은 주택사업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다. 75년 정 전 회장은 한보주택의 모태가 된 서울 구로동 영화아파트 172가구를 건립하면서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이후 정 전 회장은 강남구 대치동의 쓸모없는 유수부지 7만여평을 매입해 당시 단일 물량으로 최대 규모였던 2200세대를 은마타운이라는 이름으로 분양했고 2400세대를 추가 분양하면서 큰 돈을 만지게 됐다.

당시 이씨는 건설현장에서 일꾼들의 새참을 나르고 자금을 구하려고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다닐 정도로 남편 이상으로 사업에 열의를 보였다.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회사 일을 챙겼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 전 회장은 83년 이씨가 암으로 타계하자 경기도 김포의 부인 묘소를 6개월에 걸쳐 화려하게 치장하기도 했다.


정 전 회장은 은마타운 성공분양의 여세를 몰아 79년 초석건설을 인수해 한보종합건설로 상호를 변경하고 해외건설에 뛰어들었다. 이후 주택, 상사, 종합건설, 목재, 탄광, 상가 등으로 계열기업을 화장했고 골프장뿐만 아니라 은행관리업체였던 태화방직을 인수했다.

이씨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84년 정 전 회장은 금호철강을 인수, IMF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한보철강을 설립하게 됐다. 한보그룹의 재계 랭킹은 30위권으로까지 치솟았다.

86년을 기점으로 한보그룹은 무너지기 시작했다.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업종에서 적자를 기록했고 재무구조는 걷잡을 수 없이 취약해져 갔다. 정 전 회장은 감량경영과 계열사 처분 및 합병이라는 극약처방을 통해 돈을 마련했다. 이 돈으로 강남구 수서-대치 지역 개발제한구역 땅을 사들인 정 전 회장은 '통큰' 로비를 벌이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예상하는 액수에 '0'을 하나 더 붙여 정관계 인사들에게 전달했고 해당 땅을 택지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정권 바뀌고 수서비리·한보사태 등 줄줄이 터져
6년 전 재판 중 해외도피…유유자적 호화로운 생활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정 전 회장의 무차별적 로비가 91년 수서비리 사건으로 불거진 것. 사건이 표면화되면서 서울시, 건설부, 정치권에 있던 수많은 공직자들이 옷을 벗었고 정 전 회장도 뇌물공여죄로 구속됐다. 당시 서울시장이던 고건 전 총리가 청와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특정 업자에게 특혜분양을 할 수 없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경질됐을 정도로 정 전 회장의 로비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다.

3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난 정 전 회장은 한보철강을 통해 엄청난 추가금융지원을 받으며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한보철강은 아산만에 새 공장을 건설하는 등 철강 호황기를 만나 급성장했다. 95년 기준 한보그룹 재계 순위는 24위였다. 하지만 당진 제철소가 문제였다. 초기 2조2800억원을 염두해 두고 시작한 제철소 건립 투자금은 2년 만에 5조7000억원으로 불어났다. 정부와 채권은행단이 한보 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한보그룹은 18개의 회사를 설립 또는 인수하는 일을 벌였다. 95년 11월 기준 한보그룹 계열사 수는 26개였다.

결국 외부차입금이 약 5조원에 이를 정도로 취약한 재무구조 때문에 제철소 완공 이후에도 적자경영이 불가피할 것으로 뒤늦게 판단한 금융기관이 기존 대출금의 회수에 나섬으로써 97년 1월 한보는 최종 부도 처리됐다. 이는 대한민국 IMF 관리체계를 향한 첫발로 기록됐다. 97년 4월 삼미그룹, 진로그룹이 부도유예에 들어갔고 5월에는 대동주택이, 7월에는 기아그룹 등 연쇄부도가 발생했다.


한보그룹 부도 후 대한민국 건국 이래 최대의 금융부정 사건으로 꼽히는 한보사태가 터졌다. 정 전 회장과 정관계,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한 이 사건은 전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다.

한보사태의 핵심은 당진제철소 프로젝트에 있다. 한보그룹이 당진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할 당시 건설부는 부지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고 통상산업부(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 정부 차원의 견제는 없었다.

그룹 부도 불러온
무리한 제철소 사업

97년 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 전 회장은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5∼20년을 선고받았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됐고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돼 조사를 받았다. 당시 여당인 황병태 의원, 홍인길 청와대 총무수석 뿐만아니라 야당인 정대철, 권노갑 의원을 비롯 김우석 내무부장관, 문정수 부산시장 등이 대출 관련 청탁 또는 국정감사 선처 청탁 등으로 뇌물 수수에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그에 따라 대거 철창신세를 졌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현철씨가 구속되기도 했다.

이후 정 전 회장에게는 '비리백화점' '로비의 귀재'라는 대명사가 따라 붙었다. 정 전 회장은 5년5개월을 복역하다가 고혈압·협심증의 병세로 석방됐다. 그러나 2005년 강릉영동대학 교비 72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 도중인 2007년 신병 치료를 이유로 일본으로 건너 간 뒤 현재까지 해외 도피 중이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

정 전 회장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았다. 끊임없는 부정 행위로 법정에 섰다. 먼저 장남 종근씨는 대성목재 회장으로 있던 96년 8월부터 이듬해 1월 자금난에 시달리던 한보그룹 계열사 3곳에 우량 어음을 넘겨주고 계열사 어음을 받는 방법으로 모두 224억원을 불법 지원하다 2002년 불구속 기소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차남 원근씨는 한보그룹이 자금난에 시달리던 96년 6월 경 미국 라스베이거스 카지노에서 거액의 도박을 벌인 혐의로 기소됐다가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 및 벌금 500만원과 함께 사회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

삼남 보근씨와 그의 아내 김모씨는 정 전 회장이 1980년대 설립한 학교법인 정수학원이 운영하는 강릉영동대학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누려왔다. 지난 3월5일 대법원 3부는 업무상 횡령과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정 전 회장의 셋째 며느리 김씨에 대한 상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밝혔다. 함께 기소된 보근씨는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이 확정됐다.

검찰 조사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은 해외 도피를 하면서 간호사 4명을 고용했으나 급여를 주지 못하게 되자 며느리가 학장으로 재직하던 강원영동대학의 교비로 이를 지급하도록 지시했다.

그룹 부도 후 삼미·진로·기아 연쇄부도
고액체납자 부동의 1위…아들은 3위 굴욕

김씨는 이들 4명을 학교교직원으로 허위 채용해 4000여만원의 급여를 지급했다. 또 대학의 해외학생유치센터를 이용해 정 전 회장에게 도피자금을 빼돌렸다. 카자흐스탄 등지에 해외학생유치지사를 만들어 운영비 명목으로 빼돌린 돈 1억3000여만원을 정 전 회장에게 전달했다.


2007년 감사에서 교육부는 교비 2억여원이 정 전 회장의 해외도피자금으로 빠져나간 사실을 적발했다. 이에 김씨는 다시 학교법인 소유 2억여원짜리 양도성 예금증서를 은행에 맡기고 대출받은 돈을 횡령해 교비를 반환했다. 횡령금으로 횡령금을 막은 것이다.

보근씨는 아내와 함께 학교 운영비를 횡령하고 자신의 개인 사무를 수행하던 2명을 교직원인양 위장해 교비로 임금 2200만원을 횡령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됐다.

오너의 그릇된 생각
그룹 실패 예고됐다

보근씨는 정 전 회장과 함께 고액·상습 체납자 상위 명단에 매해 오르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말 국세청이 공개한 체납 명단을 보면 정 전 회장이 누적 체납액 2225억원으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가운데 보근씨는 644억원의 체납액을 기록, 1073억원의 세금을 체납한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의 뒤를 이어 3위를 차지하고 있다.

사남 한근씨는 1997년 동아시아가스를 세운 뒤 회삿 돈 320억원을 스위스의 한 은행 계좌로 빼돌린 혐의로 검찰의 추적을 받자 1998년부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다.

한보그룹의 한 전직 임원에 따르면 정 전 회장은 아직도 재기를 꿈꾸고 있다. 9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건강은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밑천은 동아시아가스와 보광특수산업이다. 숨겨놓은 '땅'도 많다. 정 전 회장이 보유한 땅은 용인, 인천, 안산 등 수도권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었다. 국세청이 적발한 땅만 해도 시가 1500억원을 넘는다.


서울 송파구 장지동 357 일대 땅이 대표적이다. 시가 1000억원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 땅은 국세청이 즉각 압류했다. 국세청은 정 전 회장이 30년 동안 미등기 상태로 숨겨놓은 180억원 상당의 부동산도 찾아 등기 촉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에는 서울 강남에 300억원대의 땅을 숨겨둔 사실이 추가로 드러나기도 했다. 또 다른 은닉 재산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머슴이 뭘 알겠는가." 정 전 회장이 청문회장에서 한 이 말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대한민국의 모든 직장인들을 한순간에 머슴으로 격하시켰다. 한보그룹에서 일하던 자신을 제외한 모든 직원들은 머슴이라는 오너의 생각. 어쩌면 이미 한보그룹의 실패가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종해 기자<han1028@ilyosisa.co.kr>

 

<한보그룹은?>

1974년 한보상사 설립
1979년 은마아파트 분양, 초석건설(한보종합건설) 인수
1984년 금호철강(한보철강) 인수
1991년 수서비리 사태
1995년 당진 제철소 건립 추진
1997년 그룹 부도, 한보사태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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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범여권 3각 권력 재편 시나리오

[일요시사 정치팀] 박희영 기자 = 정청래·조국·김민석 세 사람이 삼각관계로 얽혔다.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대표는 연임을, 조국혁신당 조국 대표는 자당의 생존을, 김민석 국무총리는 청와대의 명을 받아 권력 싸움에 참전했다는 해석에 힘이 실린다. 세 사람이 만든 새로운 소용돌이가 여의도를 향하고 있다. 이들이 범여권 지형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이목이 쏠린다. 여당 대표인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정청래 대표의 그립감이 강해졌다. 지난 3일 대의원·권리당원 1인1표제 도입을 담은 당헌 개정안이 재적 위원 과반의 찬성으로 문턱을 넘은 것이다. 이로써 오는 8월 민주당 전당대회에서부터 대의원과 권리당원이 동일한 한 표를 행사하게 된다. 존재감 굳히기 민주당에 따르면 중앙위원 총 590명 중 87.29%인 515명이 투표에 참석했다. 이 중 찬성 312명(60.58%), 반대 203명(39.42%)으로 의결 요건을 충족했다. 이후 정 대표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핵심 공약이자 1호 공약이라고 할 수 있는 1인1표제를, 임기 안에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돼 보람 있게 생각한다”며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고 모든 법의 으뜸은 헌법이다. 헌법에서 명령하고 있는 보통·평등·비밀투표, 1인 1표제는 진작에 민주당에서 시행돼야 마땅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1인1표 시행으로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당내 계파가 해체되는 것이라고 예상한다”며 “10년이 넘게 1인1표제, 당원이 주인이 되는 정당, 당원 주권 시대를 부르짖었는데, 드디어 마침표를 찍게 돼 개인적으로도 무한한 기쁨”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1인1표제가 통과되자 권리당원 사이 지지도가 높은 정 대표의 연임 가능성이 탄력을 받았다는 해석이 제기된다. 지난해 8월 치러진 전당대회서 정 대표는 전국 대의원 투표에선 46.91%로 박찬대 의원(53.09%)에게 열세를 보였으나 권리당원 투표서 66.48%의 득표율을 기록해 박 의원(33.52%)을 앞질렀다. 다만 6대 4라는 투표 결과를 놓고 정치권의 분석이 엇갈렸다. 정족수보다 16명 많은 ‘턱걸이 통과’로 리더십을 굳히기엔 명분이 약하다는 점에서다. 1인1표제 재추진에 제동을 걸던 집단의 반대표가 늘어난 것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치러진 첫 투표 당시 투표율이 62.58%로 두 달 만에 20%p 올랐지만, 반대표 역시 102표에서 203표로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이에 민주당 권칠승 의원은 한 라디오를 통해 “1인1표가 갖는 대의엔 다 동의하지만 현재 민주당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당이 갖고 있는 당원 구조의 취약성 때문에 1인1표제하는 게 맞느냐는 것에 대한 회의는 좀 있는 것 같다”며 “후속 정비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저는 대의엔 찬성하지만 지금 상태에서 그냥 (1인 1표제를) 적용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 대표의 두 번째 승부수였던 조국혁신당(이하 혁신당)과의 합당도 여전히 불투명하다. 합당에 반대하는 최고위원들이 정 대표를 정면으로 들이 받으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독주하는 정청래, 승부수는 던졌는데… “합당 못해” 마주하기도 전 무산 위기 민주당 이언주 최고위원은 “혁신당과의 합당 논란이 벌써부터 차기 대권을 의식한 논의로 번져 걱정”이라며 “‘큰 배를 띄우려면 본류를 타야 한다’면서 마치 민주당을 조국 대표의 대통령 만들기 수단으로 여기는 발언까지 나오는 실정”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지금은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이지 차기 대권주자를 밀어줄 시간이 아니”라며 “야당도 아니고 여소야대도 아니고 과반 의석을 차지한 강력한 집권여당에서 대통령 지지율이 60%에 육박하는데 왜 벌써부터 이런 얘기가 나오는지 괴이하기까지 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강득구 최고위원 역시 “어제(3일)부터 지방선거 예비후보 등록이 시작됐고 중앙당과 시도당은 후보자 공모를 진행하고 있는데 이런 시점에서 합당을 밀어붙이면 혼란만 커진다. 공천 기준, 경선 룰이 흔들린다”며 “합당 논의를 당장 멈춰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전체 당원 여론조사와 토론 등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겠다며 의견을 굽히지 않고 있다. 일련의 과정에 대해 한 정치권 관계자는 “공천권만 손에 넣으면 세력은 알아서 따라붙게 돼있다. 정 대표는 ‘축구 경기에서 1대 3이나 3대 0이나 같다’고 말하면서까지 1인1표제를 밀어붙였다. 당 대표 연임에 선을 긋고 있지만 연임을 통한 공천권 확보를 포석에 뒀다고 해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며 “조 대표를 끌어들여 본격적으로 자기 세를 넓히려는 것 아니겠느냐”라고 해석했다. 정 대표가 띄운 합당론에 혁신당이 휘말리는 듯한 그림이 됐다. 그동안 혁신당 조국 대표는 민주당과의 합당에 선을 그어왔지만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혔고, 이번 합당 논의 역시 자당을 살리기 위해 민주당의 손을 잡은 것으로 전해진다. 결국 세를 불려야 하는 정 대표와 대권주자로서 도움닫기 공간이 필요한 조 대표의 니즈가 맞아 떨어졌다는 해석이 나온다. 합당 테이블이 마련되기도 전 민주당 내 집안싸움이 불거지면서 혁신당과의 논의조차 시작하지 못했다. 합당 논의에 촉각을 세우는 사이 이번에는 혁신당이 추진하는 토지공개념을 놓고 이견이 갈렸다. 이언주 최고위원이 토지공개념에 반대 의사를 표하자 조 대표가 “헌법재판소가 합헌이라고 판시한 것. 어이없다”고 맞받아치면서 새로운 갈등의 씨앗이 뿌리를 내린 것이다. 꼿꼿한 자존심 토지공개념이 난타전으로 번진 이유는 최근 집값 등 부동산을 저격하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행보와도 맞물려 있다는 분석이다. 이 최고위원은 “토지공개념은 과거 공산주의 몰락 이전 토론의 대상이 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AI 대전환과 글로벌 자본 유치, 기술 경쟁이 국가의 생존 과제가 된 지금의 시대 현실과는 분명한 괴리가 있고,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이어 “대통령이 강력한 부동산 공급 대책을 내놓고 있는데 토지공개념 입법화를 주장하는 조국혁신당과의 합당 주장이 대두되면 대통령의 건강한 개혁 의지마저 희석되고 곡해돼 공격받을 여지가 크다”고 강조했다. 혁신당이 주장하는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그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을 골자로 한다. 지난 2일 열린 ‘신토지공개념 입법추진단 출범식 및 토론회’서 혁신당 차규근 의원은 입법을 비판한 여당을 향해서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틀린 주장”이라고 지적했다. 차 의원은 “토지공개념은 토지의 사유재산권을 전면 인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해 필요한 경우, 이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원칙”이라며 “헌법재판소도 1989년 토지거래허가제 사건 판결에서 모든 사람의 생존권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권리가 될 수 없으며, 공공복리 증진을 위해 의무와 제약을 수반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왔다고 판시했다”고 설명했다. 이 최고위원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차 의원은 민주당 강령을 언급하며 “토지 재산권 행사의 합리성을 담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 지대 수익으로 인한 경제 왜곡과 불평등을 방지한다고 명시돼있다”며 “현재 시행 중인 토지거래허가제와 개발이익환수제 역시 모두 토지공개념에 기반한 제도”라고 꼬집었다. 혁신당과의 합당 논의가 진행 중인 민주당 일각에서는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토지공개념을 포기하지 않는 한 합당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그럼에도 혁신당이 이를 추진하는 이유는 혁신당이 민주당에 흡수 합당되는 것만은 피해야 한다는 분위기 때문인 것으로 전해진다. 민주당에 혁신당 DNA가 섞이는 게 아닌, 혁신당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민주당과 함께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점에서다. 논의를 띄운 이상 합당을 하든 약속을 파기하든 결과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주판알을 굴렸을 때 합당 가능성이 낮다”는 게 한 여의도 관계자의 전언이다. 로망을 현실로? 이 관계자는 “어떤 방법으로든 조 대표가 민주당과 함께한다면, 차기 당권을 놓고 정 대표와 경쟁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봤다. 이어 “두 사람(정 대표, 조 대표) 모두 대권주자로서 욕심이 있다. 시기가 언제가 됐든 다음 대선을 위해 경쟁하는 사이가 될 것”이라며 “종래에 서로를 집어삼키려는 계파 싸움으로까지 번질 우려가 있다”고 전했다. 조 대표를 등에 업고 빠른 보폭으로 걷는 정 대표의 시선 끝에는 김민석 국무총리가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김 총리가 “당 대표에 로망이 있다”고 말하면서 8월 전당대회 출마설에 스스로 불을 지핀 것이 화근이다. 여기에 청와대에서까지 김 총리를 차기 당 대표로 세우려 한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정 대표의 셈법이 더욱 빨라졌다는 해석이다. 그동안 김 총리의 대표 도전설은 꾸준히 회자했다. 지난달 23일 국무총리실은 공지를 통해 서울시장 선거 여론조사에서 김 총리 이름을 빼달라고 요청했고, 이에 정치권 일각에서는 김 총리가 서울시장이 아닌 민주당 당 대표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봤다. 여기에 김 총리가 한 유튜브를 통해 정 대표와 차기 대표 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다는 관측에 대해선 “민주당의 당 대표는 굉장히 자랑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당연히 로망은 있다”고 말하면서 본격적으로 불씨를 댕겼다. 다만 김 총리는 “세상(일)이 욕심을 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안다. 욕망의 정치로 뭔가를 풀려고 하지 않는 편”이라며 조심스럽게 입장을 전했다. 그러던 중 민주당-혁신당 합당 논쟁에 김 총리가 뛰어들면서 당권을 둘러싼 경쟁이 시작됐다는 관측이 다시 나왔다. 김 총리는 지난 2일 서울 종로구 총리공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시점, 이런 방식으로 진행될 줄은 몰랐다”며 정 대표의 합당 방식을 꼬집었다. 그러면서 “민주당은 뿌리 깊은 정당이기에 당원들의 뜻을 묻는 민주적 절차를 반드시 거쳐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통합 자체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김 총리는 당 대표 선출 전당대회 출마설과 관련해 “(앞서 대표직에 대해 언급한) 로망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은 말들을 불러올지는 몰랐다”며 “(당시 대표 출마 여부는 직접적으로 묻지 않기에) 국정에 전념한다고 했고, 오늘 기자간담회 내용을 주의 깊게 보면 굉장히 강력한 국정 전념 의지가 담겨있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앞으로는 서울시장 선거로 본인(김민석)이 할 생각 없는데 서울시장 선거와 관련돼 거론되는 것이 국정 운영에 도움도 안 돼 거론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당과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도 제가 대표라는 평소 로망을 이야기한 것이고 또 합당 등 모든 문제들은 당의 질서 속에서 충분히 논의될 것으로 보고 제가 더 이상 현재 당내 문제와 연관돼서 소환되거나 호출되거나 이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민석 카드’ 청와대가 띄웠다? “당 대표 로망” 한마디에 ‘술렁’ 이후 김 총리는 3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전날 신년 기자간담회를 언급하며 “기자간담회의 핵심은 한층 높은 ‘책임감’으로 국정에 ‘전념’한다는 것이다. 정책 관련한 질문에는 훨씬 적극적으로 답하겠다”며 출마 의지가 없음을 강조했다. 김 총리가 거듭해서 출마설에 선을 긋지만 계속해서 이름이 오르내리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를 정 대표의 대항마로 김 총리를 띄우기 위한 청와대의 물밑작업으로 봤다. 김 총리는 지난 총선 상황실장을 맡아 합을 맞춰오는 등 이 대통령과 연이 깊은 인물로 이 대통령의 의중인 ‘명심’을 등에 업어 민주당 수석최고위원 자리까지 오르기도 했다. 지난 2024년 민주당 전당대회서 김민석 의원의 최고위원 후보로 출마했지만, 사전 득표율이 저조했다. 이에 이재명 대표 후보는 첫 지역 순회 이후 김 후보와 함께 차 안에서 유튜브 라이브를 진행하면서 “(김 후보) 왜 이렇게 표가 안 나오느냐”며 “제 선거를 도와주느라 본인 선거(운동)를 못 해 결과가 잘못되면 어쩌나 부담된다”고 언급했다. 이후 민주당 커뮤니티 등에서는 “이재명이 김민석을 낙점했다”는 글이 퍼졌고, 빠르게 순위가 뒤집혀 단숨에 수석최고위원으로 올라섰다. 이처럼 청와대에서 정청래 체제의 힘을 빼기 위해 다시 한번 ‘김민석 카드’를 띄우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청와대가 정 대표를 견제하는 것은 정 대표가 ‘당원 주권 정당’ 등을 명분으로 당을 강하게 쥘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점에서다. 한 여권 관계자는 “정 대표의 행보가 모두 이해는 간다. 명분도 좋다. 문제는 시기가 너무 빨랐던 것”이라며 “이재명정부 출범 극초기부터 갈등이 불거졌다. 청와대 입장에서는 대놓고 발톱을 드러내는 정 대표가 장기간 민주당을 주무르는 게 달갑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민주당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집안싸움이 격화하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혁신당 역시 합당 논의가 잘 풀리지 않을 경우 조 대표의 탓으로 돌리는 것을 우려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방선거가 끝나는 대로 정치권의 시선은 8월 민주당 전당대회로 쏠리는 만큼 6월 전 합당 논의가 매듭을 지을지가 최대 관건이다. 숨길 수 없는 불편한 심기 혁신당 황현선 인재영입위원회 부위원장(전 사무총장)은 자신의 SNS를 통해 이 대통령과 김 총리, 정 대표를 모조리 언급하며 현 상황을 직격했다. 황 위원장은 “이 싸움(합당)의 최대 피해자는 이 대통령이다. 언젠가 후계 전쟁이 벌어질 것을 예상했겠지만 집권 1년도 안 돼 심각한 내분에 직면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친K(김민석 국무총리) 세력이 선공을 하고, 선방 맞은 친J(정청래 대표)의 반격도 시작될 것”이라며 “지금은 대통령 눈치보며 권력투쟁을 벌이겠지만 총선에 다다를수록 눈치 보지 않는 싸움이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hypak28@ilyosis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