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사회 ‘큰 등불’고 김수환 추기경

부디 하늘에서도 ‘큰 사랑’ 펼치소서


일제하 유년시절 ‘난 황국신민이 아님’ 쓰기도
군홧발엔 서릿발로…소외된 이들의 영원한 ‘벗’

한국 가톨릭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자 우리 사회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수환 추기경이 향년 87세로 선종(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 했다. 선종 전까지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며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김 추기경은 한국 사회 격동기를 거쳐 오면서 때론 용기 있는 발언으로, 때론 중용의 침묵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싸워왔다. 또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봉사하고 나누는 데 몸과 마음을 바쳤던 그이기에 종교를 넘어 온 국민이 존경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 봤다.

“그동안 과분하게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도 사랑하면서 사십시오.”
김수환 추기경이 지난 16일 오후 6시12분,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에서 폐렴으로 인한 급성호흡부전으로 선종했다. 지난해 7월 노환으로 입원한 뒤 7개월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김 추기경은 마지막 순간까지 주위사람들에게 “고맙다”라며 ‘화해’와 ‘사랑’의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최연소 추기경 임명

이날 임종을 지켜본 정진석 추기경은 “김수환 추기경께서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을 향해 외치셨던 메시지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평화와 화해였다”며 “평소에 김 추기경이 바라던 대로 이 땅에 평화와 정의가 넘치도록 기도해 달라”고 전했다.

고인이 된 김 추기경은 민주와 정의의 기치를 지켜온 수호자로 평생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 편에 섰다. 또 한국 현대사의 격변기였던 1970~80년대에는 민주화를 위해 군홧발에 맞서 서릿발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가톨릭계는 물론 현대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김 추기경은 1922년 대구 남산동 기독교 집안에서 아버지 김영석(요셉)씨와 어머니 서중하(마르티나)씨의 5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 추기경은 옹기장이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당시 그의 꿈은 장사꾼이었다고 한다. 8살에 부친을 여윈 소년 김수환은 행상을 하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온 어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사제의 길을 권유받았다.

대구 성유스티노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동성종합학교에 진학해 성직자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하지만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꾀병도 부려보고 ‘그만 두겠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김 추기경은 “제가 신학교 들어올 때 들어오고 싶어서 들어오지 않았고 신부되고 싶은 마음도 사실은 없었다. ‘나가야겠다’ 그러니까 그 신부님이 저보고 ‘신부라는 것은 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되기 싫다고 되지 않는 게 아니야. 나가’ 그래서 내가 ‘어디로 나갑니까’라고 물으니 ‘내방에서 나가’라고 했다”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이후 서울의 소신학교인 동성상업학교 을조에 입학한 김 추기경은 졸업반 수신 과목 시험 때 ‘조선반도의 청소년 학도에게 보내는 일본 천황의 칙유를 받은 황국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라는 문제가 나오자 시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릴 무렵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고 한다.

일제치하로 조국이 암울하던 1941년에는 일본 동경 상지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했다. 장학생으로 선발돼 학교를 다니던 학생 김수환은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은 1944년 일제의 강압으로 학병에 징집돼 동경 남쪽의 섬 후시마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아야만 했다. 전쟁터에서 죽을 고비를 몇 차례 넘기고서야 조국 해방을 맞았다.
1945년 전쟁이 끝나면서 상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을 계속하다가 1946년 12월 귀국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곧바로 다음해 초 서울의 성신대학에 편입했다. 그로부터 5년 후 한국전쟁으로 나라가 혼란스럽던 1951년 대구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다. 29살에 사제품을 받은 김 추기경은 안동 목성동성당 주임 신부로 사목의 첫발을 내디뎠다.

김 추기경은 “고해하러 온 주민들에게 몰래 돈을 나누어 줄 정도로 배고프고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2년 반 정도의 짧은 본당 사제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며 그때를 그리워하기도 했다.

이후 대구 대목구장 비서신부와 김천 성의여자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뒤 1956년 독일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시절 그는 뮌스터대 요제프 회프너 교수신부에게서 그리스도 사회학을 배웠다. 마침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있었던 독일에서는 시대에 걸맞은 교회를 만들기 위한 변화와 쇄신의 물결이 요동치고 있었다.


귀국 후 가톨릭시보사(현 가톨릭신문) 사장을 지내며 교회 언론의 초석을 다졌다. 이어 1966년 신설된 마산교구의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으며 이와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2년 뒤엔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항상 약자 편에서
민주·정의 가치 지킨 수호자

서울대교구장에 오른 김수환 추기경은 취임미사 강론을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정신에 따라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의 교회를 만들겠다”며 교회쇄신과 현실 참여 의지를 나타냈다. 이듬해인 1969년  우리나라 최초이자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에 임명됐다. 그의 나이 48세였다.

그러나 추기경이 되었다는 영광도 잠시, 독재와 억압으로 점철된 1970년대 한국교회는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다.
김 추기경은 1971년 성탄미사 때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이라며 3선 개헌을 통해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과 정부·여당을 강력히 비판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내가 보기에도 자꾸만 독재 쪽으로 기울어진단 말이야. 그게 정말 안타까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런 말을 비출 수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당시 미사는 전국에 생중계됐으나 강론 말미에 정권의 지시로 중단됐다.

1972년 8월9일에는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자격으로 7·4남북공동성명발표와 8·3긴급조치, 10월 유신으로 이어지는 정국 혼란 중 박정희 정권의 장기독재체제를 비판하는 ‘현 시국에 부치는 메시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성모병원이 세무사찰을 받는 등 정부와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당시 메시지 발표와 관련해 김 추기경은 “내가 강조한 것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결코 유일사상이라든지 독재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고 밝혔다.

유신 이후에도 불법단체로 지목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을 조종한 배후로 1974년 당시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1993년 별세)가 구속되는 등 1976년 명동 3·1절 기도회, 1978년 전주교구 7·18기도회 등에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됐다.

정부의 교회 탄압이 자행되자 김 추기경은 각종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그럴수록 김 추기경에 대한 정권의 감시와 도청은 그 강도를 더해갔다.

김 추기경은 “거기에 드나드는 경찰간부도 있고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사람이 자주 주교관에 드나들고 어떨 때는 죽치고 앉아있기도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의 사회 참여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와중에서 모든 신자들에게 광주를 위한 특별 기도를 요청한 것으로 시작됐다.

김 추기경은 당시의 일을 회고록에서 “광주 시민들의 민주화 열망은 계엄군과 공수부대의 무력진압에 의해 처참하게 짓밟혔다”며 “가장 괴롭고 고통스러운 순간을 꼽으라면 주저하지 않고 ‘광주의 5월’이라고 말한다”고 밝혔다.

이후 1997년 김영삼 정부 들어 5·18특별법이 제정된 후에도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의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는 “진실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에는 무슨 보복이나 원수를 갚는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다. 책임자는 분명히 나타나야 하고 법에 의해 공정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 큰 어른으로서
희망메시지 전달 잊지 않아

1987년 1월14일 발생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에 불을 댕겼다. 당시 경찰은 심문도중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김 추기경은 ‘박종철 군 추모 및 고문 추방을 위한 미사’ 강론에서 정권의 야만성을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이라면서 잡아떼고 있다. 위정자도 국민도 여당도 야당도 부모도 교사도 종교인도 모두 이 한 젊은이의 참혹한 죽음 앞에 무릎을 꿇고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반성해야 한다. 그가 못다 이룬 일을 뒤에 남은 우리가 이룬다면 그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한다”고 강변했다.

이를 계기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학생·시민들의 분노가 정점에 이르러 6월 민주항쟁으로 타올랐다. 김 추기경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던 시위대가 명동성당에 진입하자 이들을 강제연행하려는 정부에 단호히 맞서 시위대의 안전을 지켰다. 또 6·29선언을 이끌어내는 데 일조했다. 김 추기경은 “여기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맨 앞에 당신들이 만날 사람은 나다. 내 뒤에 신부들이 있고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은 나를 밟고 우리 신부들도 밟고 수녀들을 밟고 넘어서야 학생들을 만난다”며 시위대를 뒤로 물렸다.

1990년대 들어 그는 외국인 노동자와 철거민, 조선족 사기 피해자 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이들의 곁에 항상 함께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외국인이라고 해서 그들을 착취한다든지 비인도적으로 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얘기다. 그런데 아직도 그런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며칠 전에도 외국인 노동자를 만나서 얘기를 들어봤는데 인도주의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자행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또한 그는 IMF 경제 위기와 북한 식량난 등 나라와 민족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항상 시대의 가장 앞자리에 있었다.
김 추기경은 “교회는 힘을 다해서 사랑의 손길을 펴야 된다. 그렇게 볼 때 북한동포가 제외될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은 우리 동포이기 때문에 그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듣고서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고 뭔가를 해야 된다”고 역설했다.


1998년 그는 76세의 나이로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났다. 교황청에 사임 의사를 표한 지 6년 만에 내려진 결정이었다.

김 추기경은 교구장 은퇴 후에도 낙태와 자살 등 생명이 경시되는 풍조를 개탄하며 그야말로 생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사형제도 폐지와 낙태 반대 등 생명 운동에 적극 헌신했다.

또한 2002년 북방 선교에 투신할 사제를 양성하기 위한 옹기장학회를 공동 설립하는 등 북한 선교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우리 사회의 큰 어른으로서 사회 곳곳에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과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1989년 서울강남성모병원에서 안구기증 서약을 한 데 이어 2006년 7월에는 국립장기이식관리센터에 장기기증 서약서를 제출하면서 ‘뇌사 시 장기기증’과 ‘사망 시 장기기증’을 약속했다. 지난 16일 선종 당시 각막은 적출돼 기증됐다.

“한국 사회를 바꾸는 힘은 우리 자신, 아니 나부터 먼저 생각과 마음과 삶을 바꾸는 데서 나온다”고 강조했던 김 추기경. 한국 사회에 던지고 있는 그의 메시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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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단독] ‘2조 물먹은’ 한양 수상한 계열사와 의문의 돈거래

[일요시사 취재1팀] 장지선 기자 = 광주 노른자위 땅을 개발하는 사업이 건설사 간의 갈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총사업비 2조여원의 초대형 프로젝트가 양측이 제기한 고소·고발로 표류하는 모양새다. 갈등의 본질은 사업을 좌지우지하는 특수목적법인(SPC)의 최대주주 지위가 누구에게 있는지다. 최근 지분확보를 위한 소송 과정서 의문의 돈거래가 포착됐다. 2020년 7월1일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도시계획시설서 도시공원으로 지정해놓은 개인 소유의 땅에 20년간 공원 조성을 하지 않을 경우 땅 주민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 도시공원서 해제하는 제도인 ‘도시공원 일몰제’가 시행됐다. 도시공원 일몰제의 도입으로 민간공원 특례사업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민관 합작 윈윈 사업 민간공원 특례사업은 민간에 사업시행권을 주고 공원을 조성해 지자체에 기부채납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간 사업시행자는 공원부지 30% 범위서 아파트 건설 등 비공원사업을 진행해 수익을 챙길 수 있다. 정부나 지자체는 민간 자본으로 공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민간 사업시행자는 주택 공급 사업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서로 이득 볼 수 있는 구조다. 현재 전국 각지서 진행하고 있는 민간공원 특례사업 중 ‘중앙공원 1지구 민간공원 특례사업’의 규모가 가장 크다. 광주시 서구 금호동과 화정동, 풍암동 일대 243만5027㎡에 공원시설과 비공원시설을 건축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비공원시설 부지에는 지하 3층~지상 28층, 39개동 총 2772세대 규모의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총사업비가 2조2000억원에 달한다. 2020년 1월 사업시행사인 특수목적법인(SPC) 빛고을중앙공원개발(이하 빛고을)이 설립되면서 추진되기 시작한 사업은 최근 시행사 지위와 시공권 등을 두고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있다. SPC 설립 시점부터 컨소시엄에 참여한 한양과 이후 시공자로 들어온 롯데건설, 지분 다툼을 벌이고 있는 우빈산업, 케이앤지스틸 등이 갈등의 주체다. SPC 빛고을 설립 초기 한양이 30%로 최대주주, 우빈산업(25%), 케이앤지스틸(24%), 파크엠(21%) 등이 주주로 참여했다. 한양이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의 SPC 빛고을 참여를 위한 초기자본 49억원을 댔다. 한양이 우빈산업에 49억원을 빌려주고 우빈산업이 다시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대여해 지분을 분배했다. 이때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콜옵션’ 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콜옵션은 특정한 기초자산을 만기일이나 만기일 이전에 미리 정한 행사가격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빈산업은 언제든지 원할 때 케이앤지스틸의 지분을 회수할 수 있는 조건을 걸어둔 것이다. ‘초대형’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이면 한양-케이앤지스틸 모종의 관계 의혹 SPC 빛고을 주주구성에 변화가 생긴 시점은 컨소시엄 구성 당시 한양이 맡기로 한 시공권이 롯데건설로 넘어가면서부터다.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의 지분 24%를 위임받아 주주권을 행사해 롯데건설과 중앙공원 1지구 아파트 신축 도급 약정을 체결했다. 이 과정서 30% 지분의 한양은 배제됐다. 롯데건설을 시공자로 선정할 당시 우빈산업에 지분을 위임했던 케이앤지스틸의 태도가 변한 시기는 2022년 5월경으로 추정된다. SPC 빛고을 관계자에 따르면, 당시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25억3000만원(대여금 24억원+이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빌린 돈을 갚았으니 24% 지분만큼 주주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우빈산업은 케이앤지스틸에 24억원을 빌려주면서 맺었던 콜옵션을 행사하고 49%의 지분을 확보해 SPC 빛고을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우빈산업 내부 사정이 변하면서 한 차례 더 지분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우빈산업은 대출금 100억원에 대해 채무불이행을 선언하고 부도 처리됐다. 지급보증을 섰던 롯데건설은 우빈산업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넘겨 받으면서 49%를 확보했다. 지분양도는 롯데건설이 근질권(담보물에 대한 권리)을 행사해 채무를 대신 갚아주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우빈산업이 빠진 자리에 롯데건설이 들어오면서 현재 기준 빛고을 SPC 지분구조는 한양 30%, 롯데건설 29.5%, ㈜파크엠 21%, 허브자산운용 19.5%로 재편된 상태다. 허브자산운용이 보유한 19.5%는 롯데건설로부터 양도받은 것이다. SPC 빛고을 내에서 롯데건설의 발언권이 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뉜 지분 콜옵션으로? 사업시행권과 시공권을 두고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이 궤를 같이 하면서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쟁점은 우빈산업과 케이앤지스틸이 가진 지분이 최종적으로 누구의 소유냐는 것이다. 두 회사의 지분이 어느 쪽으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바뀔 수 있다. 케이앤지스틸은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을 갚았으니 24%에 대한 주주권이 자사에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양은 SPC 빛고을 설립 과정서 우빈산업에 49억원의 출자금을 대여하면서 맺은 특별약정을 내세웠다. 해당 약정에 한양이 중앙공원 1지구 사업의 비공원시설 시공권을 전부 갖는데 우빈산업이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항목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우빈산업이 주도해 롯데건설로 시공사를 바꾼 것은 특별약정에 어긋난다는 설명이다. 광주지방법원은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이 각각 우빈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서 모두 원고의 손을 들어줬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주주권 확인 소송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우리가 SPC 주식을 실제로 소유한 주주라는 뜻”이라고 강조했다. 한양 관계자도 “1심 법원은 우빈산업이 한양에게 49억원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고 보유 주식 25% 전량을 양도하라는 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반면 롯데건설은 소송 판결 한 달 전, 우빈산업의 지분을 인수했다고 설명했다. 우빈산업이 한양에 양도할 주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과정서 한양은 우빈산업의 ‘고의 부도’를 의심하고 있다. 한양은 1심 법원 판결을 근거로 자사가 지분 55%(한양 30%+우빈산업 25%)의 SPC 빛고을 최대주주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대법원서 한양에 ‘시공권이 없다’는 취지의 판결을 내놓으면서 시공자 지위는 잃게 됐다. 소송 이겨도 지위 잃었다 최근 SPC 빛고을 지분 갈등서 케이앤지스틸의 역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케이앤지스틸은 상하수도 설비공사 업체로 2003년에 설립됐다. SPC 빛고을에 우빈산업과 함께 참여했다가 현재는 빠진 상태다.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전 대표가 우빈산업과 친분이 있어서 (SPC 빛고을에)참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현 사태서 롯데건설과 우빈산업은 이른바 ‘비한양파’로 묶여있다. 두 업체의 지분 이동도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 있는 상황이다. 반면 케이앤지스틸과 한양은 두 업체 모두 우빈산업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도 서로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적(우빈산업)이 같을 뿐 특별히 관계가 있는 업체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한양의 모기업인 보성그룹 계열사에 속한 ‘앤유’라는 업체가 케이앤지스틸에 2022년 4월, 2억원을 빌려줬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앤유는 이기승 보성그룹 회장의 동생인 이점식씨가 지분 83.6%를 가지고 있는 친족회사다. 전기 조명장치 제조업체로 2007년에 설립됐다. 2022년 기준 매출은 28억2900만원, 영업이익은 3억300만원으로 확인된다. 한양과의 거래를 통해 27억7900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앤유는 케이지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주는 과정서 1주일짜리 주식근질권을 설정했다.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이 2억원을 갚지 못하면서 케이앤지스틸의 주식이 전부 앤유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또 1주일 뒤 케이앤지스틸의 대표이사를 비롯해 사내이사 3명 등 4명이 등기이사로 이름을 올렸다. 이 가운데 1명은 앤유 대표인 정모씨의 아내로 추정된다. 케이앤지스틸 수뇌부가 물갈이된 것이다. 당시 케이앤지스틸의 채무가 수십억원에 이를 정도로 적자가 누적된 상태였다고 해도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배권을 넘겨준 것을 두고 석연찮은 의문이 일었다. 1주일이라는 짧은 주식 근질권 설정도 의문으로 떠올랐다. 보성그룹에 기생하는 ‘앤유’ 푼돈 주고 1주 만 회사 꿀꺽? 더 흥미로운 대목은 같은 해 5월 케이앤지스틸이 우빈산업에 주금 대여금 25억3000만원을 송금한 뒤 주주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는 의혹이 동시에 불거진 점이다. 다시 말해 2억원을 갚지 못해 회사의 지분 100%를 앤유에 넘겨주고 한 달 만에 20억원이 넘는 돈을 융통해 SPC 빛고을 지분을 확보하려 했다는 의혹이다. 여기에 우빈산업을 상대로 한 주주권 확인 소송 등에 김앤장을 변호인으로 선임하면서 수임료에 대한 의혹이 추가로 제기됐다. 일각에서는 케이앤지스틸이 지분확보를 위해 사용한 자금 출처가 한양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한양 입장서 케이앤지스틸이 가지고 있는 지분을 확보하면 54%로 SPC 빛고을의 최대주주가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대법원 판결로 시공자 지위는 상실했지만 롯데건설에 넘어가 있는 시공권을 흔들 수 있는 상황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분 갈등 구조가 롯데건설과 우빈산업, 한양과 케이앤지스틸로 정리되는 셈이다. 하지만 한양과 케이앤지스틸 모두 두 업체 간 모종의 관계 의혹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한양 관계자는 “앤유라는 계열사가 있는지도 잘 몰랐다. 앤유서 케이앤지스틸에 2억원을 빌려줬다거나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은 전혀 사실무근이다. 우빈산업서 (1심)소송에 져서 계속 근거 없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듯하다. 대응 가치를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보다 광주시가 우빈산업과 결탁해 여러 가지로 유리하게 상황을 봐주고 있다고 판단해 광주시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광주시는 사업시행자이자 감독관청으로서 해야 할 일이 참 많은데 그런 일을 하지 않아 공모 제도가 다 무너졌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광주시의 행정행위에 대해 소송을 제기해 재판이 진행 중”이라고 덧붙였다. 석연찮은 자금 출처 케이앤지스틸 관계자는 한양이 주금 대여금을 대줬다는 의혹에 대해 “우빈산업서 하는 얘기”라고 일축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주주가 들어와 투자가 이뤄지면서 주금 대여금을 갚은 것이다. 우빈산업에서는 (우리가)한양의 위장계열사 아니냐, 대표이사 선임 과정이 의심스럽다, 자금 출처가 어디냐 같은 의혹을 제기하는데 그건 주주권 확인 소송서 져서 그러는 것이다. 한양이랑 우리랑은 큰 관계가 없는데 자꾸 엮어서 흠집을 내려 한다”고 주장했다. 2022년 4월 회사가 어려운 시기에 케이앤지스틸 대표로 오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사업이 잘 마무리되면 우리 회사에 300억원 정도의 수익이 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시행이익을 1100억원으로 계산했을 때 우리 회사 지분이 24% 정도니까 그렇게 계산한 것이다. 수익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회사를 맡게 됐고, 새로운 주주들도 그 사업성을 보고 투자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jsjang@ilyosisa.co.kr>